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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27화 (27/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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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치권? 황무지만 남은 남작령을 다스릴 생각은 없소만.”

“머튼 남작령을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아르투르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백작님은 열두 살의 소녀에 불과하시고, 보호자인 소피 백작부인 역시 아름답고 귀하신 분이지만, 강인하신 분은 아닙니다. 영지를 지키기 위해선 강력한 남성 군주가 있어야겠지요. 두 분께서 경에게 바라시는 역할이 그것입니다.”

아르투르는 입가를 슬쩍 쓸어 담았다. 아하, 그래서 성 내의 기사들까지 보내서 날 데려오라고 한 거군.

“내 공적에 대한 보상이 그렇게 된 거군. 잘 알겠소. 친척들이 가만있지 않을 거요. 당장 백작에게 숙부가 한 명 있을 텐데, 왜 진즉에 그를 들이지 않았소?”

토비야스는 한숨을 쉬었다.

“아시지 않습니까. 대영주들에게 친척은 가장 가깝지만 가장 경계해야하는 정적입니다.”

아르투르는 쓴 웃음을 지었다.

“이쪽 집안이나 그쪽 집안이나 상태는 비슷한가보군. 뭐, 싸우진 않으니 아직은 위르마넨 집안이 나은 것 같소만. 그럼, 소피 부인께선 이미 결단을 내리신거요?”

“경과 만나보고 최종적인 결정을 하시겠지요. 부디 경께서 그분의 마음에 들길 바랍니다. 저도 아르투르 경에게 충성을 바칠 수 있다면 깊은 영광이 될 겁니다.”

아르투르는 별 다른 대답을 하지 않은 채, 생각에 잠겼다. 이 제의를 받아들이게 된다면 도파뉴 백작령을 다스리게 될 터였다. 그렇다면 고려해야할 게 아주 많았다. 형님들과의 관계 설정, 영지의 부흥, 이웃 영주들과의 정치적 결속….

‘지금부터 고민할 필요는 없지. 나는 공을 세웠고 포상을 받으러 가는 길이다. 어떤 제안을 내놓을지는 저쪽 소관이고.’

에쿠잘루스의 옆에서 조랑말을 모는 케이가 말했다.

“마스터가 백작이 되신다고요? 지금 무슨 이야기가 오가고 있는 건가요? 풀어서 설명해주시겠어요?”

아르투르는 당돌히 물어오는 케이가 싫지 않았다. 귀여운 녀석.

“소피 부인께서 백작의 결혼상대로 날 고려하고 계신다는군.”

케이가 입을 떡 - 벌리며 숨을 깊게 들이마시었다.

***

행렬이 며칠을 달리자 백색 산맥이 모습을 드러냈다. 언제나 단조로운 만년설만을 입는 늙은 산맥은 하늘 아래 우뚝 버티고 서서 땅을 지탱했다. 문명의 어떤 침입도 허용하지 않는 웅장한 자태였다.

“저곳이 백색 산맥이군요!”

“맞다. 데네토르 왕국와 레무리아 반도를 구분하는 자연 국경선이지. 특정한 통로를 제외하면 사람이 지나갈 수 없는 곳이다. 저 산을 넘어가면 옛 레무스 제국의 후예인 여섯 도시들과 교황 성하가 머무르시는 성도가 있지. 저 산을 넘어 온갖 진귀한 물품들이 왕국으로 들어온다.”

“우와! 우리도 산맥을 넘어 가나요!”

아르투르는 고개를 저으며, 산의 초입을 가리켰다. 그의 손가락을 따라 케이가 시선을 옮기자, 산맥 아래편에 놓인 백색 성이 보였다. 협곡을 둘러싸고 건축된 눈의 거성은, 방문객들에게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케이는 두리번거리며 이 풍경을 눈에 담았다.

“바이스부르크다. 위르마넨 가문의 본거지지. 많은 명망 있는 기사들의 고향이기도 하다. 남부 지방 최대의 요새야.”

바이스부르크 주변의 마을과 성채들은 전란의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마을 주민들은 추수를 하다가, 점심시간이 되면 배 터지게 빵을 먹고 낮잠을 잤다. 주변을 순찰하는 병력들에게도 별 다른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다른 지역과는 분위기가 완전히 다른데요.”

아르투르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마을들을 지나쳐 성에 접근 할수록 경사가 높아지며 각종 초소와 관문들이 나타났다. 관문을 지키는 병사들은 토비야스 경의 얼굴과 깃발을 확인하고 그들을 통과시켜주었다. 병사들은 무언가 기대하는 눈빛으로 아르투르를 바라봤다.

그들이 마침내 바이스부르크에 도착하자 쇠사슬이 굴러가는 소리를 내며 도개교가 내려왔다. 다리가 내려오자 아르투르는 앞장서서 성 안으로 향했다. 병사들은 모두 성벽에 나와 서로 아르투르를 내다봤다.

“백 명을 베는 자, 아르투르 경께서 오셨다!”

그 중 한명이 외치자 성벽 위에 도열한 병사들이 일제히 무기를 두들기며 아르투르의 이름을 연호했다.

“백 명을 베는 자, 백 명을 베는 자!”

아르투르는 가슴 속에서 벅찬 감정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래, 이거야. 내가 바래왔던 것. 에쿠잘루스도 기분이 좋은지 투레질을 하며 빠르게 나아갔다. 그들이 성문을 지나오자, 정갈한 비단 옷을 걸친 중년의 사내가 다가와 아르투르에게 고개를 숙였다.

“어서 오십시오. 아르투르 경, 저는 바이스부르크의 집사, 모리츠 앵거라고 합니다. 소피 부인과 백작님께서 경을 극진히 모시라 지시하셨습니다.”

아르투르는 말을 멈추고 그를 바라봤다. 상대는 기사도 아니고, 유력 귀족 가문도 아니니 굳이 말에서 내릴 이유는 찾지 못했다. 아르투르는 그를 내려다 본 채 말했다.

“반갑네. 묻고 싶은 게 많군. 소피 부인께선 어디 계신가?”

“차차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일단 식사부터 하시지요.”

“아니, 식사는 부인을 뵙고 하도록 하지. 항상 일을 먼저 하고 친분을 쌓아야하는 법 아니겠나.”

아르투르의 단호한 의사 표현에 모리츠는 복종의 의사를 표하는 것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예. 그렇다면 바로 응접실로 모시겠습니다.”

아르투르는 눈대중으로 성벽을 훑어봤다. 훌륭한 수비진을 갖추고 있었다. 성벽은 빈 틈 없이 매워져있고 잘 무장한 병사들이 적절한 인원수로 성벽에 배치되어 있었고, 각종 병기를 비롯한 정규 공성전을 치룰 준비도 되어있었다.

‘소피 부인이 성의 방어에 만큼은 대단히 신경을 쏟은 모양이군. 아랫사람이 일을 잘 처리했거나.’

성벽을 지나쳐 내부로 들어가자, 이번엔 전혀 다른 광경이 펼쳐졌다. 마을 아낙들은 우물에 물을 길러 가고 아이들이 시장바닥에서 뛰어다니며 공놀이를 했다. 행상인들은 신선한 고기, 과일 등을 팔고 있었고 상점들도 정상적인 영업을 하고 있는 풍경이, 아르투르에겐 이런 일상적인 삶의 풍경이 낯설게 느껴졌다.

“방금 민란을 겪은 것치고는 너무 태평한 것 아니오? 얼마 전에 물자 통제를 끝낸 거요?”

모리츠는 미소를 띠며 답했다.

“바이스부르크에는 수년의 포위를 견뎌낼 규모의 물자가 있습니다. 일찍부터 식량을 배급제로 바꿔 성민들에게 동요를 일으킬 필요가 없었지요. 그래서 그냥 놔두었습니다.”

“식량이 남아돈다면 농토를 잃은 농민들에게 구휼할 생각을 했어야지.”

“그렇지 않아도 이제부터 그렇게 할 참입니다!”

아르투르는 백작가의 행동이 너무 굼뜨다고 판단했다. 소피 백작부인은 우유부단하거나 게으른 사람이 가능성이 높으리라. 아니면 정말 통치자로써 아는 것이 없던가.

다음에 나타난 풍경은 본 아르투르는 눈살을 크게 찌푸렸다. 바이스부르크의 내성 앞에 있는 거대한 연병장엔, 수백 명에 달하는 무장 병사들이 훈련을 하고 있던 까닭이었다. 그들 모두가 전문 군인(Man-at-arms)으로 무장과 훈련도에서 모두 뛰어났다. 과장을 좀 보태자면 왕실 상비군과 비교해도 될 수준이었다. 군마를 탄 기사들이 그들을 지휘하는 모습을 보며, 아르투르는 대단히 황당한 표정으로 모리츠를 바라봤다.

“이 병력은 대체 어디서 난거요?”

“선대 때부터 내려온 직할 병력들입니다. 중계 무역의 성과물이지요.”

“아, 그러니까 당신들은 이런 병력을 놔두고 프레드릭이 그렇게 세를 불릴 때까지 가만히 있었단 말이군. 대단하군. 진심으로 대단해.”

아르투르는 노골적인 경멸의 시선을 보내며, 고개를 획 돌렸다. 아무래도 이 백작가와는 친하게 지내기 어려울 것 같았다.

모리츠는 머뭇거리다가, 나름대로 용기를 내어 답했다.

“저희로써는 백작님의 신변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별 달리 선택지가 없었지요.”

“됐소. 집사인 당신과 이야기해서 무엇 하겠소. 소피 부인께나 빨리 갑시다.”

얼마 뒤, 그들은 영주의 응접실에 도착했다. 영주의 응접실은 왕궁의 알현실과 동일한 기능을 수행했다. 백성들의 탄원을 듣고, 재판을 주재하며, 때로는 가신들을 모아 회의를 여는 장소였다.

벽을 따라 위르마넨 가문의 기사들의 무훈을 기록한 태피스트리들이 가득 걸려있었고, 옛 영주들의 실물 크기 조각상이 방문객들에게 장엄한 압박감을 풍겼지만, 아헨의 왕궁에서 자란 아르투르에겐 별 다른 인상을 주지 못했다.

영주의 옥좌에는 드레스를 차려 입은 예쁘장한 소녀가 앉아있었다. 소녀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표정을 보아하니 긴장한 모양이었다.

소녀의 옆에는 푸른 드레스를 입은 키 큰 여성이 서 있었는데, 나이가 많지도 적지도 않았다. 그녀가 소녀의 귀에 뭐라고 속삭이자, 소녀는 말을 더듬다가 책을 읽듯 또박또박 말했다.

“나, 아델라이데 폰 위르마넨 백작은 도파뉴의 변경백으로써 아헨의 아르투르 경에게 경의를…”

아르투르는 쓸데없을 정도로 많은 수식어를 모두 생략하고, 핵심적인 내용만을 간추렸다. 네 덕에 영지가 살았다. 고맙다. 잘했다. 포상해주겠다. 자세한 내용은 우리 어머니와 이야기해라. 소녀가 긴장한 모습으로 긴 환영 인사를 마쳤다.

‘그래. 나름 열심히 외워서 하는 걸 텐데 응대를 해줘야지.’

아르투르는 소녀의 성의를 봐서 적당한 찬사로 대답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총명하고 아름다우시다. 뭐 그런 내용이었다. 어린 아가씨를 공식적인 자리에서 만날 때 늘어놓는 의례적인 표현이었다.

그런데 소녀 백작은 그것이 제법 마음에 드는지,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얼굴을 붉혔다. 아르투르는 애가 귀엽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은 그렇게 끝났고, 보상에 관한 진짜 내용은 백작의 어머니, 소피 부인과 별실에서 만나 시작되었다. 소피 부인은 주변의 모든 시종을 물린 후, 독대를 했다.

그들은 처음에 길~게 늘인 수식어를 더한 신변잡기적인 대화를 나눴다.

“고맙습니다. 아르투르 경. 과연 선왕의 아들다우시더군요.”

“선대 백작께서 왕가에 보이신 헌신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

아르투르는 제법 짜증이 났지만, 귀부인들과 이야기할 때는 반드시 갖춰야 하는 관례였기에 참았다. 마침내 소피 부인이 이야기를 꺼냈다.

“그럼, 이제 본론으로 들어갈까요?”

아르투르가 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남자들은, 특히 기사들은 성질이 급하지요. 불필요한 언사를 뺀 대화는 환영입니다.”

소피는 찻잔을 들어 올려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았다.

“아델라이데는 마음에 드시는지요.”

“아직 애인데 마음에 들고 아니고가 있겠습니까. 하시려는 말씀을 하시지요.”

그러자 소피는 품에서 양피지 두루마리를 꺼내 아르투르의 앞에 내려놓았다.

“혼인에 관련된 사항을 명백하게 하기 위한 혼인 계약서입니다. 아르투르 경. 한번 읽어보시죠. 중요한 내용들을 많이 담고 있으니까요. 교황 성하께서 공증하실 겁니다.”

그러나 아르투르는 자신에게 내밀어진 두루마리를 멀뚱히 바라볼 뿐, 손을 내어 그것을 잡지 않았다. 오히려 시선을 소피에게 내보냈다. 소피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서류에 사인만 하시면 경은 도파뉴 영지의 주인이 되시는 겁니다. 공식적인 통치권은 딸이 유지하겠지만, 무릇 바깥일은 남자가 하는 법 아니겠습니까? 걱정하지 말고 사인하시지요. 그리고 결혼식 날짜를 잡읍시다.”

그때, 아르투르는 등받이에 등을 기댄 채 말했다.

“전권.”

“예?”

“결혼식이 끝나는 대로 전권을 주셔야합니다. 그런 조건이라면 생각해보겠습니다.”

소피 부인은 아르투르의 황당한 제안을 들으며, 모욕감으로 얼굴이 붉어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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