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꼬챙이가 입으로 튀어나온 남작가의 시체. 그들의 일그러진 표정은 얼마나 큰 고통 속에서 그들이 죽음을 맞이했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프레드릭은 그 광경을 관음하며 혀를 날름거렸다.
“두목!”
짜증을 가득 담아 불청객을 바라봤다. 자신이 풍류를 즐기는 동안은 간섭하지 말라고 했는데.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면 죽여 버려야지.’
프레드릭은 고개만 까딱 돌려 그를 바라봤다.
“이번엔 알튼 남작령으로 갔던 부대가 전멸했습니다! 볼프강과 막스도 전멸이 확인됐어요. 이번에도 엘베르의 괴물입니다!”
프레드릭은 정찰병의 보고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알튼 남작을 잡기 위해 보냈던 부대는 공들인 부대였는데. 이렇게 되면 일이 틀어져버린다. 그는 혀를 찼다. 정찰병의 보고는 급박한 이유가 맞았으니 살려둬야지.
“그래서, 엘베르의 괴물이란 놈의 정체는 알아봤어?”
부하는 그의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레 말했다.
“물론입니다. 이름은 아르투르라고 하고, 왕의 사생아라고 하덥니다.”
“그으래?”
부대의 전멸 소식을 듣고 일그러졌던 프레드릭의 얼굴이 다시 광소로 가득 찼다.
“그러면, 왕자가 우릴 잡으러 온 거네?”
“어… 사생아니까 왕자는 아니지 않을까요?”
“아무튼 왕의 아들이잖아! 왕의 아들!”
프레드릭은 양팔을 벌리는 과장된 몸짓을 취했다. 그리고 마치 연극배우처럼, 빙긋 웃으며 이야길 했다.
“모르겠어? 우리가 인정받은 거야. 왕족까지 우리를 찾아올 정도로. 우리가 드디어 인정을 받았다고!”
프레드릭이 진심으로 기뻐하는 것인지,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인지 주변 사람들은 알 수 없었다. 그에게 둘의 차이가 있기는 할까?
“나 말이야! 왕족의 피는 무슨 색깔일지 궁금해졌어. 귀족들은 배를 열어보니까 똑같더라고. 왕가는 신성하다고 하던데, 걔들을 열어보면 뭔가 다르지 않을까?”
그는 허리춤의 쌍검을 뽑아들어, 허공에 마구 휘둘렀다.
“아르투르, 내가 널 만나러 갈게! 기다려!”
***
아르투르는 알 수 없는 섬뜩함을 느끼며 귀를 후볐다. 누가 내 험담을 하나. 그는 알튼 남작과 합류한 이후, 소수의 기사만을 대동하고 움직였다. 수는 적었지만 결과는 효과적이었다.
앞선 전투들처럼, 아르투르가 돌격할 때마다 도적들은 감히 그의 앞을 막지 못했다. 더군다나 알튼 남작과 그의 동료들이 후방을 지켜주기 시작하자, 그는 더는 거칠 것이 없었다. 여명이 수많은 피를 머금었다.
그들은 신출귀몰하게 움직인 터라 단 일주일 사이 다섯 번의 전투를 치렀고, 이내 엘베르의 괴물, 혹은 영웅에 대한 소문이 영지 내로 급속도로 확산됐다. 매 전투마다 승리를 거두고 피범벅이 돼서 돌아오는 모습은 그에 대한 신화들을 하나씩 만들어냈다.
“엘베르의 괴물에 대해 들었어? 북구인의 피가 흐르는데, 전투만 시작되면 살육에 미친 광전사가 된다고 하더군. 그 상태에선 고통도 느끼지 못한데.”
“그 말은 어떻고? 사실 사람 고기를 먹여 키운 난폭한 말이래. 그래서 사람을 짓밟아 죽이는 걸 즐거워한다는군.”
그는 도적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아르투르가 나타나는 곳이면 도적들은 싸워보기도 전에 도망가기 바빴다. 반면, 현지인들은 정반대의 소문을 만들어냈다.
“이보게, 자네 아르투르 경에 대한 이야길 들어봤나? 그분이 왕의 아들이라잖아!”
“모를 리가 있나! 왕께서도 우릴 구원하기 위해 오신 거지. 영주님께서 구원 요청을 하셨을 때, 루이스 대왕이 원군 대신 아르투르 경을 보낸다고 하셨다잖아. 그러면서 내 동생은 백 명의 기사들과도 맞서 싸울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하셨대.”
소문이 퍼지자, 도파뉴 영지민들은 그가 올 때마다 열렬히 환호하며 아낌없이 지원해줬다. 그를 환영하는 것은 소문을 믿는 평민 계급만이 아니었다. 아르투르의 활약에 고무된 기사들은 아르투르에게 합류했다.
“용맹하신 아르투르 경께 경의를! 우리가 겁쟁이처럼 성벽 위에 숨어 지내는 동안, 그대는 진정 남자답게 싸우셨소. 경은 실로 기사의 귀감이오!”
“그대 곁에서 말을 달리는 영광을 얻기 위해서 왔소!”
상황이 이렇게 되자 영지의 분위기는 급반전되었다. 희망을 얻은 마을들은 열성적으로 자경단을 조직해 수비에 임했고, 소귀족들도 은거를 끝내고 자신의 영지를 보호하기 시작했다. 아르투르는 토벌대장의 이름으로 그들을 소집하는 한편, 기병만을 이끌고 더욱더 대담한 군사 활동에 들어갔다.
이전에는 공격에 나섰거나 방심하고 있는 집단만을 상대로 삼았지만 서른 명에 달하는 기사들이 모인 이상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들은 정찰 기병들이 도적들의 위치를 보고하자마자, 바람과 같은 속도로 달려가 휩쓸었다.
“도적들을 쓸어버려라!”
아르투르의 믿을 수 없는 용력, 그리고 대담한 행동들은 기사들의 존경을 자연스레 끌어냈다. 전쟁터에서 미쳐 날뛰는 아르투르를 보며, 기사들도 자극을 받아 자신들의 무용을 뽐내기 위해 전력을 다해 싸웠다.
“오오오오! 이번만큼은 아르투르 경 혼자 싸우게 놔두지 않겠다! 여기, 알튼 가문의 가주가 있다!”
“볼린 가문 나가신다!”
매 전투마다 수많은 마상창들이 부러졌고, 군마들이 도적들을 짓밟았다. 결과는 놀라웠다. 채 한 달도 지나기 전에 도파뉴 전역에 들끓고 있던 도적단 절반 이상이 궤멸하였고, 나머지는 숲과 산으로 달아나 웅크렸다.
물론, 도적왕은 이것을 보고만 있던 것은 아니다. 그는 패잔병들을 끌어 모으는 한편, 전직 용병으로 이뤄진 본대를 이끌고 아르투르가 이끄는 기병대를 사냥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아르투르는 허를 찌르는 기동과 놀라운 전술로 교전을 피했다.
그럼에도 두 집단이 전장에서 만나는 때가 있었다.
“아르투르! 널 만나러 왔어! 우리 같이 놀자!”
“일대일 결투라면 언제건 환영이다.”
“그래? 사람들이 그러길 네가 엘베르의 영웅이라던데, 이건 내가 어제 약탈한 마을에서 구한 거야. 이 사람들도 구해주지 그랬어?”
프레드릭은 낄낄 거리며 자신의 손에 들린 양민의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나 아르투르는 냉정하게 상대의 진형을 살폈다. 상대의 숫자는 자신들의 열 배 정도. 스무 배의 적들도 쓸어버린 시점에서 큰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적들은 여태까지 상대한 오합지졸 무리가 아니었다.
“아르투르 경, 당장 돌격합시다! 명령을 내리십시오!”
흥분한 제프리 경이 곧장 마상창을 앞세웠지만, 아르투르는 고개를 저었다.
“케이, 후퇴 깃발을 들어 올려라.”
“옙!”
“젠장! 아르투르 경! 저놈만 죽이면 지긋지긋한 도적들도 끝입니다!”
“상대 병력의 질이 만만치 않소. 무장 상태도 좋고, 훈련도도 높군. 저기 창병들이 펼친 방진이 보이시오? 하루 이틀 훈련한 게 아니오. 일개 도적단으로 봐선 곤란하단 거지. 물러납시다.”
“그래 봐야 전장에선 보병들 따위로 우리 기사들을 당해낼 순 없습니다!”
“저 자도 바보가 아니오. 그래서 언덕에 자리 잡고, 양익에 석궁병을 배치해뒀지. 잘만 싸우면 못 이길 것도 없겠지만, 굳이 무리한 싸움을 벌일 이유는 없소. 지금까지의 전과로 충분하오. 후퇴합시다.”
이렇게 말하는 아르투르도 속으론 아쉬워했다.
‘병법을 아는 놈이야. 전쟁을 바로 끝낼 수 있었는데, 아쉽군.’
아르투르는 프레드릭을 노려보며 말머리를 돌렸고, 프레드릭도 아르투르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그러나 둘은 살기 어린 미소를 지은 채 서로를 노려봤다. 두 사람은 직감했다.
이 녀석은, 만만치 않은 놈이구나.
아르투르가 엘베르 마을로 돌아갔다. 카밀은 신병들의 기초 훈련을 마치고 복귀했고, 귀족들도 아르투르의 소집령에 응해 군대를 이끌고 왔다. 어느덧 병력 숫자는 800에 이르고 있었다. 그 중 기병만 100여 명이었다.
아르투르는 곧장 지휘관들을 불러 모아 회의를 열었다. 막사에 준비해둔 열다섯 개의 의자에 이름 있는 기사들과 귀족들이 하나씩 들어왔다. 많은 귀족이 아르투르를 처음 봤지만, 그의 체격과 자신감 있는 눈빛에 압도되었다.
귀족들에 의해 맨 처음 제기된 질문은, 대체 위르마넨 백작가는 어디서 뭘 하고 있느냐는 것이었다.
“백작 각하가 어리시다지만, 섭정께서 너무 하신 것 아니오? 가신들이 살해당할 때 까지 손을 놓고 있다가, 이젠 병력도 안 보내주시다니. 사실상 아르투르 경에게 모든 것을 위임한 셈이잖소.”
아르투르도 별로 백작가를 옹호해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이게 다 여자가 영지를 다스리고 있는 까닭이오. 과부와 소녀가 다스리는 땅이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잖소.”
귀족들은 앞다투어 그들의 12살 먹은 소녀 주군와 그녀의 어머니를 질타했다. 주된 내용은 그들이 영지를 다스리기에 부적합한 군주가 아니냐는 문제 제기였다. 아르투르는 불필요한 정치적 논쟁으로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화제를 전장으로 돌렸다.
‘위르마넨 가가 알아서 해결할 문제지. 난 도적들을 무찌르는 게 일이고.’
아르투르는 자신이 구상한 향후 전략을 설명해나갔다.
“전략의 요지는 간단하오. 내가 기병들을 이끌고 도적들을 억제하고, 그 사이 알튼 남작이 보병대를 이끌고 거점을 하나씩 탈환할 겁니다. 그렇게 될 수록 놈들이 약탈할 수 있는 범위가 작아지니, 프레드릭은 결국 자신의 소굴에서 나올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때 일거에 덮쳐서 놈을 끝장냅시다.”
그는 자신의 계획을 조리 있고 당당히 설명했고, 계획은 세부적인 부분까지 빈틈없이 가득 세워져 있었다. 덕분에 영주들은 반대 없이 그의 군사 작전에 동의했다.
“동의하오.”
“역시, 선왕의 아들다우시구려. 어린 나이에도 군사적 식견이 대단하시오.”
선왕과 전장을 누볐던 중년 이상의 영주들은 아르투르의 모습에서 그들의 옛 왕의 모습을 보았다. 그때, 영주들의 판단에 변화를 줄 수 있는 새로운 소식이 전해졌다.
“속보요! 루이스 왕께서 원군을 보내주신다고 하오!”
“오오오!”
희소식에 영주들이 일거에 환호성을 내질렀다.
“- 도착 기한은 내년 봄쯤이 될 것이라고 하오.”
이 소식은 그들에게 좋지 않았다. 수도 아헨에서 도파뉴 백작령까지는 도보로 3주면 충분했다. 그런데 내년 봄이라니?
“주력 군대가 모두 서부와 동부로 급파된 터라, 신병들을 훈련시킬 시간이 필요하시다고 합니다. 즉, 우린 이제 내년 봄까지만 버티면 이길 수 있게 된 거지요.”
알튼 남작이 성을 냈다.
“내년 봄? 내년 봄까지 여기서 죽치고 기다리고 있으란 말이오? 놈도 그 소식을 듣겠지. 그럼 백색 산맥을 넘어 도망가 버릴지도 모르오! 복수하려면 반드시 지금 쳐야 하오!”
아르투르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뿐만이 아니오. 지금 도적들은 머튼 남작가의 성을 점유하고 있지. 지금도 그들은 가는 곳마다 신에게 용서받지 못할 만행들을 저지르고 있소. 그들을 반드시 막아야 하오. 내년 봄까지 기다리다간, 얼마나 더 많은 백성이 피해를 입을지 모르는 거요.”
영주들은 여기서 머뭇거리는 눈빛이었다. 구태여 자기 병력과 목숨을 걸고 남의 영지를 구해주고 싶은 사람은 많지 않았으니 말이다. 아르투르는 그들의 눈빛을 보며, 크리스티안이라면 어떻게 설득했을지 고민하고, 입을 열었다.
“- 또한, 겨울이 되면 우리도 군대를 분산 배치하게 될 텐데, 그 사이 여러분의 영지도 위험에 놓이게 될 것이오. 머튼 남작가의 최후에서 알 수 있듯, 프레드릭은 이미 공성 병기도 손에 넣은 겁니다. 성에 있다고 안전할 거라고 생각하지 마시오. 내년 봄에 우리가 모두 무사히 모이려면 지금 놈을 쳐야 하오.”
아르투르의 말에 영주들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미 멸문한 머튼 남작가의 영지는 알 바 아니었지만, 혹시라도 겨울에 자신들의 영지가 공격 대상이 될지 모른다는 건 두려운 일이었다.
아르투르는 단검을 꺼내 지도의 한 지점에 딱 - 하고 내리꽂았다.
“우린 이곳으로 진군해 놈과 싸울 것이고, 승리할 거요.”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꺼내 하늘 높이 들며 소리쳤다.
“도적들에게 죽음을!”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