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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23화 (23/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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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격 그만하고, 쓰러진 우리 애들부터 챙겨.”

알튼 남작은 복수심에 불타 도적들을 뒤쫓는 병력을 절제시켰다. 기사들은 불만스런 눈빛으로 남작을 쳐다봤다.

“저 기사는 여전히 적들을 쫓는데요?”

남작은 씩 웃었다.

“저 친구는 내버려두자고. 괴물이잖아. 우린 인간이고.”

아르투르가 추격을 마치고 돌아오자 남작과 그의 병사들이 무기를 들어 올리며 환호했다. 기사들조차 경례하며 그에게 존경의 뜻을 내비친다. 모두가, 그가 아니었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으리란 걸 알고 있었다.

알튼 남작은 말 위에 탄 아르투르를 향해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내 이름은 크레이스 폰 알튼이오! 우리 가문이 그대에게 목숨을 빚졌구려.”

아르투르는 말에서 내려 그의 손을 잡아 악수했고, 피범벅이 된 투구를 벗어 옆구리에 찼다. 알튼 경은 투구 사이로 나타난 호방한 청년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세상에, 몇 살이나 되신 거요?”

“올해로 스물이오. 한 달 전에 기사 작위를 수여받았지.”

“오… 맙소사. 내가 대단한 분을 뵙는군. 나는 그 나이 때 종자 티도 못 벗었는데 말이오.”

아르투르는 흰 이를 드러내며 웃는다.

“훌륭한 마스터 밑에서 배웠던 까닭이지. 바야르 경의 종자였소.”

“세상에, 기사 중의 기사라고 불리는 생귀니엘 드 바야르 경을 일컫는 것이오? 그렇다면 당신은….”

“짐작 하시는 바가 맞소. 나는 페르넬의 사생아 아르투르지. 지금은 아델라이데 백작을 대신해 도적들을 토벌하고 있소.”

알튼 남작은 허리에 손을 얹고 호탕하게 웃었다.

“사자의 아들은 과연 사자군. 그것 아시오? 아르투르 경. 30년 전에 부친께서 내 목숨을 구하신 적이 있소. 북구인들에게 강가에서 포위됐었는데, 부친께서 거대한 망치를 들고 나타나셨지. 그분이 망치를 휘두르실 때마다 그 야만인들이 서넛씩 죽어 나갔소. 방패로 막아도 아무 소용도 없었지.”

알튼 남작은 과거를 회상하듯 웃으며 말했다.

“아버지에 이어 아들이 우리 알튼 가문을 구했군. 진정 감사드리오.”

아르투르도 웃어 보였다.

“우리 왕조에 목숨을 두 번 빚진 셈 칩시다. 사담은 천천히 나눕시다. 남작. 우리가 가야 할 곳이 많소.”

남작은 곤란한 표정으로 답했다.

“하지만… 지금은 병사들이 너무 지쳤고, 부상병들도 많소. 며칠은 쉬어가야 할 것 같은데.”

“병사들은 지쳤지. 그대들은 어떤가?”

아르투르는 남작의 뒤에 있는 기사들에게 눈빛을 빛내며 물었다.

“지금도 도적들이 메뚜기 떼처럼 이 지방을 황폐화시키고 있소. 난 싸우러 갈 겁니다. 혹시 나 혼자 가게 내버려 둘 생각들은 아니시겠지요?”

아르투르에게 자극을 받은 기사들도 군마에 올랐다. 알튼 남작도 함께였다. 아르투르와 남작의 기사들은 곧장 도로를 따라 말을 달렸다. 아르투르와 알튼 남작, 그리고 기사 네 명. 기사들은 각각 성년이 넘은 무장 종자를 거느렸기에 열 명의 중기병 무리였다. 누구도 숫자가 적다는 불평은 하지 않았다.

기사들은 아르투르의 무용을 존경하는 동시에, 동경에 가까운 질투심을 느꼈다. 자신도 저렇게 되고 싶다는 감정과 다른 기사에게 구해졌다는 것이 자존심에 큰 상처를 남긴 것이다.

어떻게든 그에게 목숨을 빚진 것을 갚고, 자신도 그만큼 활약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 전의가 불타올랐다.

무장이 상대적으로 가벼운 종자들이 앞서 나가 정찰을 하고 돌아왔다. 기사들은 그사이 무기를 정비하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종자들이 전해온 정보는, 남작군이 구원하러 가던 마을이 이미 도적들에게 함락되었고, 그들이 잔치를 벌이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그들의 상태는 어떤가?”

“약탈자들이 흔히 하는 짓거리들을 하고 있습니다. 다만, 노략질에 팔려 보초병도 제대로 세우지 않았더군요.”

알튼 남작의 눈가에 살기가 어리고, 냉혹한 미소를 지었다.

“놈들의 본대가 어떤 꼴이 났는지 알게 되면 기겁을 하겠군. 갑시다. 한 놈도 살려두지 않을 거요.”

아르투르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패잔병들이 마을에 소식을 알리기 전에 쳐야 하오.”

“내 선봉은 기꺼이 양보하리다. 아르투르 경.”

“물론, 선봉은 언제나 나의 것이지. 다들 뒤처지지 않게 잘 따라오시오!”

아르투르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도로 투구를 썼다. 에쿠잘루스가 너무 앞서나가지 않도록 속도를 조절했다. 다른 기사들도 아르투르의 뒤를 따라 돌격하면서, 자연스레 두 줄로 집합한 무리가 만들어졌다.

마을 공터에 캠프파이어를 피워놓고 회포를 풀던 도적들은, 말발굽 소리에 의아해 소리의 진원지를 바라봤다. 그곳에선 온몸이 피범벅이 된, 철갑으로 무장한 덩치 큰 사내들이 군마를 타고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 자체로 엄청난 공포였다. 그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도망쳐어어어어- !”

혼란의 와중, 한 고참 도적은 저들을 상대로 절대 승산이 없다는 걸 눈치 채고 미리 몸을 빼냈다. 그는 유난히 날뛰는 은빛 갑옷의 기사를 바라보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자는 사람이 아니었다. 괴물이지.

‘저놈, 저놈이 엘베르의 괴물이야. 혼자서 백 명을 쓸어버렸다는 놈. 우리 같은 놈들은 천 명이 있어도 못 이길 거야. 도적왕, 도적왕을 부르자. 오직 그만이 저자를 상대할 수 있을 거야.’

그는 어둠 속으로 달아났다.

***

성이 불타오른다. 성의 함락 직후에 펼쳐지는 약탈의 풍경은 지상에 강림한 지옥이다. 성 내의 주민들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갈 곳을 찾지만, 이미 모든 문에서 도적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성벽 안에 있으면 안전할 거라는 그들의 믿음이 산산이 깨어지는 순간이었다.

차라리 싸우다 죽은 이들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살아남은 자들은 소중한 사람들이 끔찍한 고통을 겪다 죽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고, 다음엔 자신의 차례가 될 것이라는 공포를 느꼈다. 이 잔인한 무리는 부유하고 신분 높은 자들을 증오했다. 그들에게, 성안에 사는 이들은 누구보다 좋은 먹잇감이었다.

높은 신분이거나 재산이 많을수록 곱게 죽지 못하고 온갖 수모와 모욕을 받아야 했다. 교회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들은 신성한 제단 위에서 춤을 추며 성직자를 매달아 과녁 연습에 사용했다.

한 사내가 이 광경을 바라보며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체구가 큰 편은 아니었지만, 아주 잘 단련되어 날렵해 보였다. 깊게 파인 눈에는 광기가 넘쳐흘러 마주 보는 것조차 두려웠다. 그는 발밑에 놓인 살찐 귀족을 걷어찼다.

“주군! 표정이 왜 그러십니까?”

“…프레드릭, 부디 깨끗한 죽음을 주게! 제발! 내가 잘못했네.”

그러나 프레드릭은 깔깔 웃으며 남작의 머리를 들어올려 눈앞의 풍경을 강제로 보게 했다. 가학적인 도적들이 그의 일가족에게 만행을 저지르고 있었다. 처자식들이 울부짖고 있건만,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뼈에 사무치는 무력감과 고통에 귀족은 절규했다.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주군?”

프레드릭은 씨익 웃더니, 단검을 꺼내 남작의 입을 찢어 놨다. 섬뜩한 비명이 들린다.

“옳지, 옳지. 이제 보기 좋습니다. 주군. 사람은 웃으면서 살아야죠.”

그는 미친 사람처럼 웃더니, 입이 찢어진 남작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게. 저희 가족에게 이 짓거리를 하실 때는 엄청 웃으셨잖아요. 아, 그땐 영주님이 아니라 남작집 망나니셔서 기억이 안 나시나보죠? 웃으세요. 웃으셔야죠. 달라진 건 누가 당하나밖에 없는데.”

프레드릭은 실실 웃더니 남작과 그의 가족을 한창 학대했다. 그의 부하들은 흥이 가득 돋아 더욱 가학적인 행위들을 했다. 실로 보기 끔찍한 광경이었다. 프레드릭은 옆에 앉아 포도주를 마시며 한참을 관람하다가, 똑같은 일이 반복되자 이내 지루한 표정을 지었다.

“야, 다 꼬챙이에 꽃아.”

부하들은 아쉬운 표정으로 서로 힐끔 바라봤다. 아직 한창 더 데리고 놀 수 있는데. 자신들의 손아귀에 붙잡힌 채 발버둥 치는 귀족들을 바라보는 건 너무 즐거운 일이었다. 이런 재미있는 일을 일찍 끝내야 하는 게 너무 아쉬웠다. 그러나 프레드릭의 말에 작은 토라도 달았다간 이들과 함께 꼬챙이에 꿰이는 신세가 되리라.

꼬챙이에 매달린 남작 집안은 세상이 떠나가라 비명을 내질렀다. 그의 부하들은 프레드릭의 새로운 취미를 보고 그에게 공포와 경의를 동시에 느낀다. 프레드릭은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미친 사람처럼 웃었다.

가족의 복수는 물론, 가학적인 취향까지 충족시킨 프레드릭은 진심으로 행복감을 느꼈다.

“어머니, 아버지, 동생들아. 이제 내가 자랑스럽지? 내가 자라서 복수를 했어. 지옥에서 날 기다려줘요!”

끊임없이 깔깔대던 그의 뒤로, 두건을 쓴 사내가 다가왔다. 프레드릭은 인기척을 느끼며 되돌아봤다.

“당신도 같이 구경합시다. 저렇게 꿰어두면 얼마 뒤 복부가 꿰뚫리는데, 그때 내지르는 비명이 정말 아름답소.”

두건을 쓴 사내는 끔찍한 혐오감을 얼굴에 드러냈다. 눈앞의 이 자는 악마인가, 괴물인가. 단순한 악당은 아닌 게 분명했다. 프레드릭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다리를 꼰다.

“재미없는 분이라니까. 이런 재미를 모르나?”

웃음을 거둔 프레드릭은 섬뜩하게 그를 노려봤다. 살기 어린 목소리였다.

“무슨 일이야?”

두건을 쓴 사내도 불쾌감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군은 학살극을 명한 적이 없다. 애초에 이 성은 공격하라고 지시한 적도 없을 텐데. 주군께서 지정한 곳만 약탈하고 기다리라고 했잖나.”

프레드릭은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이라도 명령에 따라라. 도적들을 데리고 물러나 있어. 더 이상의 파괴는 금한다. 작위를 받고 싶다면 반드시 따라야 할 거야.”

프레드릭은 깔깔깔 웃으며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켰다.

“애들아, 이 나리께서 우리가 작위를 위해 움직이는 줄 아신다.”

도적들도 두건을 쓴 사내를 노려보며 비웃음을 흘렸다. 몇몇은 살의에 가까웠다.

“마음~대로 해. 우린 그런 거에 관심 없거들랑. 나으리? 당신네의 호칭 놀이에 아무 관심도 없다고.”

두건을 쓴 사내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계약이 아니었을 텐데. 이대로면 너흰 토벌을 면치 못한다.”

어느새 도적들이 두건을 쓴 사내를 둘러쌌다.

“저놈도 꼬챙이에 꿰어.”

두건의 사내는 그 말을 듣자마자 장검을 빼 들었지만, 프레드릭의 칼날이 번개처럼 날아와 그것을 날려버렸다. 도적들은 그를 제압하고 옷을 벗겨 나신으로 만들더니, 비어있는 꼬챙이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그, 그만둬! 주군께서 가만 계시지 않을 거다!”

공포에 질린 사내가 비명을 지른다.

“알 게 뭔데?”

“살- 살려다오! 돈, 돈을 줄게! 우리 집안은 몸값을 치를 재산이 있다!”

프레드릭은 다시 활짝 웃었다.

“우린 돈도 필요 없어. 이미 많거든.”

두건을 쓴 사내가 꼬챙이에 꿰이기 직전, 프레드릭은 부하들을 향해 손짓했다. 그러자 부하들은 다시 사내를 내렸다. 프레드릭은 기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농담한 거야. 설마 내가 귀족 나으리를 죽이겠니?”

그는 다시 섬뜩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넌 아직 필요하니까 살려줄게. 하지만 다신 명령 같은 거 하지마. 우린 누구 명령도 안 들어. 네 주군이란 놈한테도 전해. 지금처럼 정보와 돈만 대라고. 그럼 그놈은 특별히 우리가 살려줄게.”

“뭐… 뭘 하려는 짓이냐?”

“이 세상의 귀족들을 다 죽일 거야! 도파뉴 지방을 시작으로 중부 왕국, 그 뒤엔 서부대륙 전체로! 우릴 핍박하고 무시한 그놈들에게 무서움을 보여줄 거야.”

두건을 쓴 사내는 머리가 아득해졌다. 주군의 실수였다. 그는 정신이상자, 혹은 악마에 꾀인 미친 자와 거래한 것이다. 백작군을 이길 수 있게 정보를 제공하고, 무기와 병력을 제공해준 것이 문제였다.

“네 주군에게 잘 전해줘. 다른 귀족들을 다 죽인 뒤에는 네 차례라고! 내 손으로 모든 귀족을 죽일거야! 한 명도 남김 없이!”

두건을 쓴 사내는 공포에 질린 채, 약탈당하는 성채에서 황급히 빠져나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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