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왕 아르투르-22화 (2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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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작가도 어지간히 급했나 보군요. 방랑 기사에게 토벌 대장을 맡길 정도니 말입니다.”

카밀은 냉소적인 표정을 지었다. 아르투르도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 일이 있던 게 분명하군. 여태 영지를 방치하던 백작 가문이 생각을 고쳐먹을 일이 있던 거야.”

케이가 덧붙였다.

“참 나, 말하는 것 보고 어이가 없었다니까요. 마스터, 귀족들은 다 저런 건가요?”

“아니다. 자신의 의무를 목숨보다 귀중하게 지키는 이들이 훨씬 많다. 적어도 내가 보아온 사람들은 그랬지.”

아르투르의 말을 들은 카밀은 냉소적인 표정을 지었지만, 별다른 말을 하진 않는다.

“이제 어떻게 할 건가?’

크리스티안의 물음에 아르투르가 답했다.

“일단 각지의 웅크린 귀족들을 불러 모아야지. 제대로 된 병력이 필요하네. 장비도 좋고, 훈련을 받아서 제대로 다룰 줄 아는 군대 말이야.”

아르투르는 뒤로 돌아서 동료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역할을 나누지. 크리스티안, 자네는 백작의 임명장을 가지고 귀족들의 장원을 다니며 소집령을 전해주게. 이미 백작가의 권위가 땅에 떨어져 임명장만으론 말을 듣지 않을 테니, 자네가 설득해야 할 거야. 더 이상 귀족들도 안전하지 않으니 살아남고 싶다면 뭉쳐야 한다는 걸 강조하면 될 걸세.”

“귀족들을 대하는 일이라면 자네가 나보다 능숙하지 않겠나?”

“아냐. 지금은 자네가 적임자야. 나는 명예에 호소하지만, 자네는 이익과 생존에 호소하지. 지금은 그게 더 중요하네. 이미 명예를 따질만한 귀족들은 다 죽었을 테니까. 그리고 카밀?”

“하명하십시오.”

카밀이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자네는 형제단을 이끌고 엘베르 마을로 향하게. 그곳을 요새화시키고 훈련에 주력하게. 큰 성과를 기대하진 않아. 창 잡고 앞에 서 있을 정도면 충분하네.

“명령 받들겠습니다.”

케이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아르투르를 바라봤다.

“마스터, 저희는요?”

“너는 카밀을 따라가서 훈련을 받거라. 난 혼자 움직여야 한다.”

케이가 화들짝 놀랐다.

“네?! 그러면 마상창은 누가 챙기고, 갑옷은 누가 닦아줘요? 에쿠잘루스도 돌봐줄 사람이 필요할 거에요.”

아르투르는 씩 웃으면서 케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걱정도 많구나. 나도 얼마 전까진 종자였다. 아직 허드렛일 하는 솜씨는 녹슬지 않았다.”

“대체 뭘 하시길래 혼자 가셔야 하는 거예요?”

케이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아르투르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도적 소탕.”

***

- 붕

철퇴가 허공을 가로 질렀다. 도적의 두개골이 깨지며 즉사했다.

“이놈드으으을!”

장년의 기사는 고함을 내지르며 재차 철퇴를 휘둘렀다. 그가 공격할 때마다 도적들이 속절없이 쓰러진다. 하지만 다른 도적들이 자리를 메우러 들어왔다. 고작 해야 무기 하나에 천을 말아 만든 갑옷이 무장의 전부였다. 그러나 그들은 눈을 빛내며 장년의 기사를 향해 달려들었다.

“저놈, 저놈 죽여!”

“칼은 내 거야!”

“반지는 내 거!”

달려드는 도적들의 눈은 탐욕으로 번득였다. 기사의 발끝부터 머리까지 값진 것이 가득했다. 그들로썬 평생 꿈도 꾸지 못한 값어치의 물건들이다. 번쩍이는 판금 갑옷, 보석 박힌 장검과 인장 반지, 고급스러운 모피코트까지. 단 하나만 가져도 인생을 바꿀 수 있었다.

어차피 망한 인생, 목숨을 걸고 도박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으리란 게 도적들의 생각이었다. 그들은 덩치 큰 기사를 둘러싸고 몽둥이질을 하거나, 망치로 때렸다. 그때마다 기사가 철퇴를 휘둘러 죽이지만, 인파에 휩쓸려 죽을 판국이었다.

그때 도적들 사이로 기사와 중무장한 병사들이 나타났다.

“주군을 구하라!”

잘 단련된 살인 기계인 기사 셋이 길을 뚫고, 그 뒤로 병사들이 엄호하자, 도적들은 순식간에 쓸려나갔다. 그들은 바닥에 쓰러져있던 덩치 큰 기사를 부축해 들어 올린다.

“남작님! 괜찮으십니까!”

“이놈들아! 주군 다 죽고 오려 그랬냐!”

부축을 받으며 일어난 남작은 다시금 철퇴를 손에 쥐고, 다가오는 적들을 향해 휘둘렀다. 피보라가 몰아치는 가운데, 고함을 질러 소통한다.

“우리 애들 상황은?!”

“열명이 쓰러졌습니다. 적들의 숫자가 우리 열 배가 넘습니다. 아직까진 잘 버티고 있지만 전열이 무너지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남작님이라도 피하셔야 합니다.”

남작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철퇴에 실어 날리며 말했다.

“이런 씨발! 알튼 가문의 가주인 내가 이 개-새끼들 따위에게 도망가는 일은 없다! 뒈져도 내 새끼들이랑 같이 뒈진다! 한 새끼라도 더 황천길로 데려가!”

고함을 지르며 철퇴를 휘두르는 남작은 흡사 성난 멧돼지를 연상케 했다. 그와 기사들의 주변으로 도적들의 시체가 수북이 쌓여갔다. 겁에 질린 도적들이 물러나려고 하지만, 후방에서 질타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도망치는 새끼는 내 손에 뒈진다! 저 돼지의 멱을 따오는 부대엔 은화 열 닢씩 내리겠다. 다음 부대 전진!”

도적 대장이 깃발을 휘두르자, 근처에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던 다른 도적들이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남작은 다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딴 짓을 계속할 순 없었다. 지금도 팔이 후들거릴 지경이다.

“씨-발. 너 이 새끼 내려와! 남자답게 일대일로 싸우자!”

남작이 도적대장을 향해 소리쳤지만, 그는 언덕에서 팔짱을 낀 채 남작을 조롱할 뿐이었다.

“헹, 조까쇼! 귀족 나리! 그 갑옷이나 벗고 말씀하시던가?’

‘이런 우라질. 마을 따위를 구원하겠다고 나서면 안 되는 거였어.’

알튼 남작의 보호 아래 있던 마을이, 도적들에게 공격받고 있다며 구원을 요청했다. 남작은 용감하게 성을 나서 마을을 구하러 갔지만, 문제는 구원 요청 자체가 함정이었다. 행군로에 매복하고 있던 도적들은 남작의 군대를 포위하고 숫자로 밀어붙여 왔다.

‘그냥 마을 하나 잃은 셈 치고 성이나 지킬걸. 내 대에 가문이 망하는구나.’

세상을 원망하는 것 말곤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이 쓰레기들은 고귀한 이들을 특별히 증오했다.

‘내가 뒈지면 시체를 잘라 개밥으로 줄 거고, 그 뒤엔 성으로 쳐들어가겠지. 그리고 내 아내를 겁탈하면서 아이를 눈앞에서 태워죽이겠지. 그렇게 한창 데리고 놀다가, 질리면 산 채로 개밥 신세로 만들 테지. 씨발, 머튼 남작가도 그렇게 가문이 사라졌는데.’

‘씨발, 그건 안 되지.’

뒤늦게 꾸린 가정을 위해서라도 돌아가야 했다. 그는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퇴로를 찾아봤지만 이미 사방에 도적들이 가득 차 있었다. 한 개의 부대가 격파되면, 새로운 부대가 투입됐다. 전문 군인으로 이뤄진 그의 병사들도 지쳐가게 되자 빈틈이 생겼고, 하나둘 쓰러져갔다.

무너진 전열 사이로 도적들이 뛰어들고 있었다. 난전이 펼쳐지자 훈련의 중요성은 줄어들고, 수가 많은 도적이 우위를 점하기 시작했다.

병사들이 쓰러지면 다음은 자신과 기사들 차례이리라.

“이런 씨발.”

알튼 남작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최후가 다가왔음을 직감했다.

부우우우우우우우웅-

“구원군인가?!”

그때 웅장한 뿔나팔 소리가 들려왔다. 싸우던 모두가 행동을 멈추고 서쪽을 바라봤다. 그곳에서 백마 탄 기사 한 명이 곰이 그려진 위르마넨 백작가의 깃발을 휘날리며 나타났을 때, 모두는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원군, 원군이 왔다!”

“후방을 막아! 백작가의 군대다!”

도적들은 당혹해 하며 도망가야 하는지 심각하게 고민했고, 병사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무기를 굳게 쥐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기사의 뒤로 다른 병사들이 나타나지 않았다. 구원군의 끝이었다.

지금 양측의 병력을 합치면 600명도 넘는 전장에, 기사 하나가 와서 뭘 어쩌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씨발, 전령이 이런 상황에 무슨 상관이야! 튈 거면서 뿔나팔은 왜 불었어! 개새끼!”

알튼 남작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도로 철퇴를 들어 올려 싸울 자세를 취했다. 그때, 그는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전령이 깃발을 땅에 꽂더니, 마상창을 앞세우며 돌격을 개시한 것이다.

“재 뭐하냐?”

남작과 기사들은 잠시 넋 놓고 전령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들은 곧 웃음소리를 냈다.

“좋아, 저승길 동무가 한 명 늘어나겠군. 저 용감한 친구에게 질 순 없지. 싸워라, 싸워! 이 쓰레기 놈들을 한 놈이라도 더 죽이는 거다! 발타리아시여, 저희를 도우소서!”

전투가 재개됐다. 무언가 부러지고 깨지는 소리, 죽어가는 이들의 아우성과 피비린내로 전장이 물들었다. 전투가 점차 격렬해지는 도중, 도적들 사이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급속히 퍼져나갔다.

“백마 탄 괴물이 왔다! 놈이 왔어!”

누군가 외치자, 도적들 사이에 동요가 일었다. 그 괴물이 나타났다면 도망쳐야 한다.

“헛소리야! 그놈은 막스 패거리 쪽으로 갔다고! 이곳에 나타날 수 없어!”

도적대장이 다시 고함을 쳤다.

“공격이나 재개해라! 적의 지원군이라곤 기사 하나뿐이다!”

남작은 소강상태를 틈타 투구의 눈구멍으로 기사를 바라봤다.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돌격해오던 기사는 홀로 수십 명의 도적을 돌파했고, 군마가 언덕을 뚫고 올라갔다. 도적대장은 눈 깜짝할 사이에 참살 당했다. 백마 탄 기사는 마음껏 도적들 사이를 날뛰며, 수십 명의 적들을 쳐 죽여 댔다.

그가 오른손을 휘두를 때마다 칼날이 번득였고, 그때마다 도적들의 목이 줄줄이 떨어져 나갔다.

“놈, 놈이 맞다! 엘베르의 괴물! 백마 탄 괴물이야!”

도적들은 비명에 가까운 괴성을 지르며 동요했다. 그들의 기세가 주춤했다. 알튼 남작은, 전세 역전의 기회가 왔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는 넋 놓고 기사의 활약을 지켜보고 있던 병사들에게 불호령을 내렸다.

“이놈들아, 살고 싶으면 당장 공격해라! 복수의 시간이다!”

“와아아아아아아-!”

영웅의 등장에 새롭게 힘을 얻은 병사들은 온 힘을 다해 공격했다. 그들은 죽음을 불사하고 맹렬하게 싸웠다. 그들이 쓰러지면 자신들의 고향도 이 약탈자들에게 쑥대밭이 되리라는 건 일개 병사들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가족을 지키고 동료의 복수를 하기 위해 앞으로 나아갔다.

전세는 순식간에 바뀌었다. 지휘부를 잃은 도적단은 수적 우세를 전혀 살릴 수 없었고, 그렇게 되자 병사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창병들이 방패를 앞세우며 적들을 밀어붙였고 그 뒤에서 석궁병들이 볼트를 수시로 날렸다.

이따금 도적들이 돌격해오면, 남작이 직접 기사들을 이끌고 나서 적들을 쓸어버렸다. 후방을 보호 받는 완전 무장한 기사들을 빈약한 무장을 갖춘 도적들이 쓰러뜨리는 방법은 없었다.

그 사이, 아르투르는 손쉽게 도적들의 사이를 휩쓸고 다니며 주요 간부들을 죽이고 다녔다. 그를 막으려는 시도들이 있었지만 모두 헛된 것이었다. 가까이 다가서는 순간 난폭한 말과 기사에 의해 눈 깜짝할 사이 죽어버렸고, 투사 병기는 튕겨 내거나 피해버렸다.

한 무리가 낫을 들고 에쿠잘루스를 쓰러뜨리기 위해 접근하자, 아르투르는 그들의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돌진해 전열을 파쇄하고 적들을 조각냈다.

‘이젠 놈들의 행동이 뻔히 보이는군.’

아르투르는 혼자 백인의 도적들을 쓸어버렸던 기적을 되살렸다. 이들을 상대하는 법은 쉬웠다. 지휘관을 죽인 후, 고참병을 죽이면 나머진 알아서 무너진다. 아르투르가 여명을 휘두르는 것이 얼마나 빠른지, 도적들은 그가 여러 개의 팔을 동시에 휘두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르투르가 가는 곳마다 피로 이뤄진 분수가 치솟고 웅덩이가 생겨난다. 그들은 백마 탄 괴물에 대한 소문이 과장이 아니었음을 실감했다. 공포가 엄습하고, 엉성한 군대의 특징이 드러났다.

이길 때는 잘 싸우지만, 분위기가 불리해지면 쉽게 포기한다.

전세가 역전되자 전투는 끝이 났다. 지금껏 치룬 도적들과의 전투에서처럼, 그 뒤는 일방적인 학살극이었다. 열 배의 적들에 포위당하고도, 포기하지 않고 싸운 남작군의 분투가 이뤄낸 기적적인 승리였다.

동시에, 살아남은 도적들은 엘베르의 괴물에 대한 소문을 퍼뜨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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