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왕 아르투르-21화 (2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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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처음, 아르투르는 카밀의 이야기가 이렇게 들렸다.

‘나이도 어린놈이 무엇을 아느냐, 궁정에서 나고 자란 게 전부인 새파란 애송이가 무슨 자격으로 사람들을 심판한다는 것이냐.’

그는 기사이고, 고귀한 혈통이었다. 아무리 카밀이 연장자고 경험이 많다지만 자신에게 이런 식으로 대하는 일은 명백히 관습에 어긋나는 일이다. 카밀이 자신의 형제들 앞에서도 이렇게 행동할 수 있었을지 의아해졌다. 그렇게 생각하자 자신이 사생아라서 무시 받는다는 생각도 들었다.

호통을 쳐서 그를 내쫓거나, 그를 집어 던질 수도 있었다. 조금 심하지만 혀를 뽑거나 결투를 강제할 수도 있었다. 그런 식으로 평민들을 가르치는 귀족들은 얼마든지 있었으니까, 자신이 그런다고 문제 될 건 없겠지.

소위 ”푸른 피”라고 불리는 귀족들은 평민들과 다른 권리를 누린다. 그들은 타고나면서부터 고귀하며, 천한 것들과는 다르다는 것이 자신이 교육받은 바였다. 그렇지만, 영지가 이 모양이 된 건 귀족들의 책임이라는 카밀의 말은 분명히 맞는 말이었다.

푸른 피의 귀족들이 특별한 권리를 누리는 것은, 그들에게 특별한 책임이 부여되기 때문이다. 영지민들을 외적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고 삶을 보살펴주는 것.

아르투르에겐 문득 의문이 들었다. 의무를 이행할 수 없는 자가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합당한가? 자신은 이들에게 무엇을 해주었기에 특별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단 말인가?

아버지의 가르침이 떠올랐다.

‘의무를 다하지 못한 왕은, 신민들을 통치할 자격이 없다.’

의무가 없다면 권리도 없다. 권리가 없다면 그들도 동등한 사람일 뿐이리라. 그는 카밀을 마주 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왕의 아들로서가 아니라, 남자 대 남자로서. 사람 대 사람으로서.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진정됐다. 카밀의 머리통을 향해 언제고 날아갈 듯 떨리던 손도 진정됐다. 차분하게 마음을 정리한 뒤, 그는 입을 열었다.

“-아밋서텐의 말이 합당하다. 피해자들이 재판을 열길 청하니, 재판을 열도록 하겠다.”

아르투르는 뒤로 돌아 탄원인들을 바라본다.

“그대들이 이번 재판의 배심원이 될 것이다. 그대들이 보기에 새로운 기회를 주어야 하는 자가 있다면 살리고, 벌해야 하는 자가 있다면 마땅히 벌하겠다. 이곳이 그대들의 삶의 터전이고, 앞으로 살아가야 할 곳이기 때문이다. 누구를 벌하고 용서할지는 내가 결정할 일이 아니다.”

탄원인들은 고개를 숙여 경의를 표했다.

“경의 자비와 공정함에 깊은 경의를 표합니다.”

아르투르는 시선을 카밀에게 돌렸다. 그는 이전의 공손한 태도로 돌아가 있었다.

“그리고 카밀.”

“말씀하시지요.”

“연륜 있는 조언 고맙네. 앞으로도 계속 같은 역할을 부탁하겠네.”

카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 산간 마을의 광장에서 즉석 재판이 열렸다. 한 명의 도적이 앞으로 나올 때마다, 아르투르가 외쳤다.

“그의 죄, 혹은 벌을 감면해줄 만한 이유를 아는 자는 낱낱이 고하라.”

그러면 도적들에게 괴롭힘 당한 주민들이 나서 그를 고발하거나 변호했다. 가끔 배심원들 사이에 이견이 발생하곤 했지만 대체로는 의견이 맞았다. 외지인 도적들은 거의 사면을 받지 못했지만, 토착 도적들은 정도가 심하지 않으면 사면의 대상이 되었다.

까닭은, 주민들이 암묵적인 합의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만약 중년의 사내가 옆집 청년 출신의 도적에게 받았던 학대를 이야기하면, 청년의 약혼자는 사내의 막내아들이 자신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증언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두 사람 모두 소중한 이를 잃게 될 것이었다.

그들은, 하나의 합의를 이룬 것이다. 과거의 범죄에 대해서 서로 침묵하자고. 그들은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민초들로썬 불가항력의 일이었다. 이미 그들은 너무 많은 것을 잃었기에, 그나마 남은 것이나마 잃고 싶지 않았다.

아르투르는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했지만, 굳이 깊게 물어보지 않았다. 상식적으로 도적단에 있으면서 단 하나의 범죄도 저지르지 않았을 리는 없다. 그들을 모두 징벌한다면, 결국 살아남는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들이 스스로 결정할 문제다.’

결국 배심원들은 절반 정도의 인원은 사면을 청했고, 나머지 절반은 처벌을 원한다는 의향을 밝혀왔다.

“너희의 뜻대로 하마.”

아르투르는 자리에서 일어서 빛나는 검을 들어 보였다. 크리스티안이 아쉬운 표정을 짓는다.

“아르투르, 고참 도적들 가운데선 쓸 만한 전투원들이 많다네. 그들을 사면해주고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어떤가?

“나는 그들에게 내 등 뒤를 맡길 생각이 없네. 병력이 적은 건 극복할 수 있지만, 동료를 믿을 수 없다면 이길 수 없어.”

아르투르의 결정은 단호하고 신속했다. 잇달아 도적들의 목이 달아났다. 살아남은 자들은 과거의 죄를 불문에 부치겠다고 약속했으나, 도적 소탕이 끝날 때까지 형제단에서 종군해야 한다는 단서가 붙었다.

“너희의 죄업을 씻을 수 있는 길을 주겠다. 공을 세우는 자가 있다면 똑같이 포상 받을 것이다.”

재판을 마친 아르투르는 찝찝한 표정으로 뒤로 돌아, 광장을 빠져나갔다. 케이가 묻는다.

“마스터, 표정이 안 좋으신데요. 잘 끝난 것 아닌가요?”

“내가 현명한 결정을 내렸는지 모르겠구나.”

“제가 볼 땐 최선의 길을 택하셨어요. 우리 병사도 늘었고, 주민들의 청도 들어줬고, 나쁜 놈들도 죽었네요. 더 이상 문제 될 게 있나요?”

“쯧, 틀린 말은 아니구나. 하지만 마음 한켠이 대단히 찝찝해. 어쩌면, 진짜 재판을 받아야 하는 건 이런 난장판을 만든 장본인들일지도 몰라.”

“아….”

“아무튼,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여명을 네게 맡길 테니 내일 아침까지 깨끗하게 닦아 놔라. 내일 남은 도적들을 소탕해야 한다.”

그날 밤, 아르투르는 테이블에 지도를 올려둔 채 늦게까지 군사 전략을 세우다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아르투르는 군대를 이끌고 볼프강의 산채로 진격했다. 그곳도 허무할 정도로 쉽게 함락됐다. 아르투르와 카밀이 목책 위의 도적들을 줄줄이 쏘아 맞추자, 도적들은 당하기만 하다, 항복했다. 그 뒤는 막스의 산채를 함락시킨 후 벌어졌던 일과 같은 일을 했다. 주민들은 해방시키고, 재판을 열었으며, 지원자들을 받아 병력을 증강했다.

새로운 병력에게 나눠줄 식량과 무기는 산채에 있던 것으로 충분했다. 전리품은 공적에 따라 분배했다. 두 도적단이 얼마나 주변의 재화를 긁어모았는지, 은화 상자만 네 개가 나왔다. 그 중 두 개를 형제단원들에게 나눠주고, 기사 둘이 하나씩 가졌다. 형제 단원들은 단숨에 많은 돈을 받아 뛸 듯이 기뻐했다.

“역시 우리 대장님이 최고야!”

“전리품 분배도 공정하시고 말야!”

“아르투르 만세, 크리스티안 만세, 형제단 만세!”

그 외의 자잘한 전리품 분배는 크리스티안의 몫이었다. 그는 병사들이 가장 만족하고, 불만을 느낀 이가 적은 방식으로 분배를 할 줄 알았다. 아르투르는 곁에서 그것을 지켜보며 병사들을 다루는 요령을 익혀나갔다. 앞으로 사람들을 이끌려면 반드시 알아야 하는 분야이긴 했다.

‘크리스티안이 이런 분야에선 역시 노련하군.’

어느 사이, 형제단의 병력 수는 130명에 이르고 있었다. 문제는 절반은 전직 도적, 절반은 전직 농민이라는 점이었다. 아르투르는 기존의 형제 단원들이 쓸 만한 병사들로 보이기 시작했다. 이들을 데리고 도적단 본대와 부딪히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아르투르는 크리스티안과 카밀을 불러 회의를 한 후, 산에서 내려가기로 결정했다.

“방투산을 버리고 철수하지. 도적왕의 본대가 전직 용병들로 이뤄졌다면, 이… 오합지졸들을 재훈련시키는 게 우선이야.”

두 산채는 적의 손에 넘어갈 것을 우려해 태워버렸다. 붙잡혀온 주민들도 그들을 따라나섰기에 도합 500명은 될법한 대인원이 방투산을 나섰다. 몇 달간 산적들의 소굴에서 학대받던 이들은 다시 평야를 밟자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다. 살아남았다는 것이 반가운 모양이었다.

아르투르는 엘베르 마을로 행렬을 이끌었다. 이젠 민간인들이 다수 포함되었기에, 행군 속도는 이전처럼 빠르지 못했다. 그렇다고 이들을 버리고 갈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길을 따라 행렬이 전진하던 도중, 기병 세 명이 길을 따라 달려오고 있었다. 그들의 깃발에는 붉은색 바탕에 포효하고 있는 곰이 그려져 있었다. 아르투르는 깃발을 보며 빈정거렸다.

“아, 드디어 행차들 하시는군.”

“저 깃발이 누구건데요?”

“위르마넨 가문. 도파뉴의 지배 가문이야. 가문의 역사를 따라 올라가면 300년은 되고, 한때는 왕을 자처하며 우리 가문과 패권을 다투던 유서 깊은 가문이지. 뭐, 지금은 도적들 상대로 백작령 하나 못 지키는 신세가 된 것 같다만.”

전령들은 행렬과 가까워지자 점차 속도를 멈추었다. 그들은 전신을 둘러싸 무장하고 있었다. 그중 깃발을 든 이가 앞으로 나와, 투구의 얼굴 가리개를 올렸다.

“아헨의 아르투르 경이십니까?”

“그렇다만?”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저는 아델라이데 백작 각하를 모시는 토비아스입니다. 백인을 베었다는 아르투르 경을 뵈러 왔습니다.”

토비아스는 반가운 얼굴로 아르투르에게 악수를 청했다. 아르투르는 악수를 받아 적의가 없음을 드러냈다.

“경께서 엘베르에서 단신으로 도적단을 격파했다는 증언들을 들었습니다. 실로 위대한 일을 하셨더군요.”

“고맙소. 하지만 나와 사담이나 나누러 온 것 같진 않은데.”

아르투르의 사무적인 어투에, 토비아스는 주춤했다. 하지만 그는 주눅이 들지 않고 말했다.

“저는 위대하고 영명하신 아델라이데 백작 각하의 명을 받아, 위르마넨 가문을 대신하여….”

아르투르는 얼굴에 짜증을 드러내며, 손을 내저었다.

“의전은 생략하지. 체면이나 차릴 상황이 아니란 걸 모르는 건가?”

토비아스는 무안한 얼굴로, 헛기침하더니 말을 이었다.

“그리하지요. 백작 각하께서 아르투르 경을 토벌대장으로 임명하고자 하십니다. 백작 각하를 대신 해서 봉신들을 소집하고, 징병을 할 권한이 부여될 것입니다. 물론 병력의 유지와 보급은 백작 각하께서 책임지실 겁니다.”

크리스티안이 옆에서 거들었다.

“각하께서 보상에 관한 이야기는 없으셨소?”

“물론 있습니다. 토벌 성과에 따라 다르지만, 아르투르 경은 남작위 이상의 작위를 받으시게 될 겁니다. 그 부하 분들도 계급에 걸맞은 적당한 포상이 있을 것입니다.”

“고작? 남작위는 너무 낮소. 자작위로 합시다.”

토비아스는 기침했다.

“도파뉴 백작령은 다른 영지보다 훨씬 부유한 곳입니다. 남작령만 해도 충분할 것입니다.”

“무슨 소릴 하시는 것인지 모르겠군. 당장 우리 없이 산적들을 무찌를 방법이 있긴 하시오?”

“방법이… 없진 않지요. 다만 훨씬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청을 드리는 겁니다.”

그때 아르투르가 손을 내저었다.

“답답한 인간들아. 남작이건, 자작이건 그건 도적단들을 격퇴하고 나서 이야기될 문제요. 이대로라면 포상 받을 영지조차 남지 않을 판국이오. 중요한 건 다른 부분이지. 그러니까, 백작 각하께서 내게 군사적으로 전권을 위임하시는 게 맞소?”

“그렇습니다. 단, 백작 각하의 직할군만 빼고요.”

“세상에, 영지의 가장 강력한 병력 없이 전권을 위임한다니, 그런 말이 어딨소?”

아르투르는 순간 기가 막혀 토비아스를 바라봤지만, 그의 표정은 단호했다.

“백작 직할군은 백작님의 신변을 지켜야 하기에 출정할 수 없습니다. 양해 부탁드리지요.”

아르투르는 헛웃음 소리를 냈다.

“뭐, 그런 걸로 합시다. 제의는 받아들이겠소. 다른 할 말이 없다면 돌아가 보시오. 딱히 당신네랑 할 이야긴 없으니까.”

토비아스는 아르투르의 냉대에 아랑곳하지 않고, 품에서 두루마리를 꺼내 건넸다. 안에는 가문의 곰 인장이 찍힌 임명장이 있었다. 아르투르를 토벌대장으로 임명하고, 영지의 모든 자원과 인력을 동원할 권리를 임시로 부여한다는 내용이었다. 친절하게도, 백작의 직할령은 제외한다는 단서도 붙어있었다.

“위르마넨 가문의 가신이자, 도파뉴의 기사로서 경에게 깊은 감사를 표합니다. 부디 이 혼란에서 저희를 구해주십시오.”

“토비아스 경, 스스로도 그 말이 얼마나 한심한지 잘 알 거요. 기사와 영주는 남이 자길 구해주길 바래야 하는 사람이 아니오. 내게 표할 감사가 있다면, 당신네들만 믿고 살다가 봉변을 당한 백성들에게 사죄하는 게 먼저일 거요. 당신 주군에게도 그리 전하시오.”

토비아스는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는 아르투르에게 목례한 후, 말머리를 돌려 돌아갔다. 호위 기병들이 뒤따랐다. 아르투르는 떠나가는 기사들을 바라보며, 씁쓸한 감정을 느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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