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왕 아르투르-20화 (20/248)

20

크리스티안이 이끄는 본대가 후방에서 등장했다. 이미 전투가 끝났기에 그들은 농사꾼이 이삭을 줍듯, 도망치는 도적들을 쓸어 담았다.

“하하! 이거 아주 쉽잖아!”

크리스티안은 장검을 휘두르며 웃음을 터뜨렸다.

‘아르투르를 영입해두길 잘했어. 도적들 따위는 상대가 안 되는군.’

석양이 떠오르자, 아르투르는 추격을 중지시켰다. 계곡의 중앙엔 화살에 맞아 쓰러진 도적들의 시체가 즐비했다. 아군의 피해는 부상자 단 한 명이었다. 그것도 오인 사격을 받아 다리에 부상을 입은 경우였다.

궁수들은 시체에서 화살을 회수했다. 아르투르의 경우 케이가 대신했다. 나머지 단원들은 값나가는 것이 없나 도적들의 시신을 뒤적이고 다녔다. 특히, 쓰러진 막스의 판금 갑옷의 소유권을 두고 궁수들 간에 다툼이 벌어졌다. 눈을 쏜 게 자신이네, 자신은 목덜미를 쐈네, 실랑이를 벌인다.

아르투르는 전리품 습득을 뒤로 미루고 집합할 것을 명령했다.

“놈들의 본진부터 쳐야 한다. 집결 명령을 내리게.”

카밀은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입을 열었다.

“지금은 명령을 듣지 않을 겁니다. 돌아왔을 때 자기 몫이 그대로 있으리란 보장이 없으니까요.”

아르투르는 표정을 찌푸렸다. 그들의 태도를 이해할 수는 있었으나, 납득하는 건 별개의 문제다. 당장 한시가 급한데 전리품 때문에 추격이 늦어지다니, 싸움이 나눠 가져도 늦지 않는 것을. 그때, 크리스티안이 큰소리로 외쳤다.

“놈들의 산채에 가면 사방에서 긁어모은 재물이 가득할 거다! 늦으면 도적놈들이 가지고 도망갈 걸?”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 병사들은 집합했다. 한편, 크리스티안은 궁수들 사이로 들어가 막스의 판금 흉갑을 거칠게 뺏었다.

“짜식들아, 가장 좋은 건 지휘관 몫이다.”

“억울합니다! 놈을 쏴 맞춘 건 우리 아닙니까!”

크리스티안은 항의하는 궁수의 머리를 딱! 때렸다.

“뭐래 이 새끼가. 딱 봐도 카밀이랑 아르투르가 쐈구만. 너희 화살은 다 튕겨 나갔을 거 아냐. 개소리 하지 말고 얼른 가서 줄이나 서.”

할 말을 잃은 궁수들이 행군 대형을 맞췄다. 빈말로도 정예라고 부르긴 어렵지만, 산적들에 비하면 군대 티는 났다. 아르투르가 앞장서서 출발했고, 해가 완전히 지기 전, 드류 숲의 형제단은 막스의 산채에 도달했다.

300명에 달하는 대인원이 사는 곳이라, 산채는 산간 마을에 가까운 모습을 띠고 있었다. 가장 높은 언덕에 나무로 지은 요새가 위치했고, 그 아래로는 붙잡혀온 지역 주민들이 거주하는 주거지들이 있었다. 모두 풀과 지푸라기를 엮어 만든 형편없는 오두막들이었지만.

주민과 도적들은 갑자기 나타난 형제단의 모습에 시선을 보냈다. 아르투르는 막스의 머리를 할버드에 꽃아, 모두가 볼 수 있게 높이 들어 올렸다.

“나는 드류 숲의 형제단의 지도자, 아르투르다! 너희 대장 막스와 그 부하들은 모두 죽었다. 나는 이 산에 질서를 수복하러 왔다. 감히 내게 맞설 수 있는 자가 있거든, 앞으로 나오라!”

창대에 내걸린 막스의 얼굴을 본 도적들은 경악에 빠졌고, 주민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대비되는 반응을 마주한 채, 아르투르는 병력과 함께 언덕을 올라갔다. 목책을 지키던 도적단 궁수들은 분명 손에 활을 들고 있었지만, 감히 아르투르를 겨냥할 생각을 하지는 못했다. 결국 목책에선 백기를 들어 올려 투항 의사를 내보였다.

얼마 뒤, 아르투르는 산채에 있는 고급스러운 의자에 앉아 오랏줄에 묶인 도적들을 내려다봤다. 그들의 수는 오십 명에 달했다. 형제단원의 두 배쯤 되는 숫자기에, 방어의 이점을 믿고 싸웠다면 아군의 피해가 컸을 수도 있다.

‘한심한 놈들. 싸우지도 않고 항복을 하다니.’

아르투르는 그들을 경멸하는 노골적인 시선을 보내며, 입을 열었다.

“너희가 살아남아야 할 이유가 있느냐?”

그의 냉엄한 말에 도적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앞다퉈서 자기들이 살아야 하는 이유를 말했다.

“저는 먹고 살길이 없어서 도적이 됐습니다! 제발! 이놈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한 번도 사람을 해친 적이 없습니다! 나으리! 허드렛일만 하던 게 전부입니다!”

“저는 이놈들과는 아예 다릅니다! 농사꾼이었는데 강제로 끌려온 사람입니다!”

아르투르는 의자의 팔걸이에 팔을 올린 채, 턱을 괴었다.

“나는 도파뉴 영지의 번영하던 모습을 기억한다. 그곳을 이렇게 만들어놓고, 한다는 변명이 고작 그따위냐? 너희가 붙잡아와서 노예처럼 부리던 지역 주민들은 어떻고?’

“오해입니다! 저희도 막스가 무서워서 따를 수밖에 없었다고요! 도적이 되거나, 도적들에게 살해당하거나 둘 중 하나를 강요받았습니다! 결코 저희 본의가 아닙니다!”

그들은 더욱 애절하게 자신의 사연을 담아 이야기하지만, 아르투르의 눈빛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뭐라고 핑계를 댄들, 도적은 도적일 뿐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아르투르는 마침내 결심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서 여명을 뽑아들었다. 칼날의 서늘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때 크리스티안이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잠깐, 잠깐, 진짜로 이들을 다 죽이려는 건가? 그건 지나쳐… 지금 분위기만 유지하자고.”

“무슨 소린가? 그럼 자넨 도적들을 살려두려고 한 건가?”

“검은 누가 쓰느냐에 따라 흉기가 될 수도 있고 사람을 살리는 방패가 될 수도 있는 거지. 이들을 우리 휘하로 받아들여서 세력을 늘리자고. 자네도 그 정도는 염두에 뒀을 것 아닌가?”

아르투르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소린가? 우리가 왜 도적들을 부하로 받아? 용기도 없고 양심도 없는 타락한 자들을?”

“이봐, 아르투르. 결국 도적이나 용병이나 똑같다고.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야. 잘 먹이고 잘 재워주면 충성을 바치지. 그런데 마침 도적들이 꿍쳐둔 식량과 돈을 우리가 얻었잖아. 우리도 이제 규모를 불릴 때가 된 거지.”

아르투르는 크리스티안의 팔을 뿌리치고, 맨 앞에 있는 도적의 목을 치기 위해 성큼성큼 나아갔다. 그때, 목책 입구에서 젊은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깐만요! 위대한 기사님, 그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세요!”

한 여인이 맨 발로 뛰어와서는 질끈 눈을 감은 산적의 앞을 가로막았다. 검을 내리치던 아르투르는 빠르게 검을 거두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르투르의 상식으론 이해가 되지 않은 것이다.

“그는 제 약혼자였다고요. 지금은 도적이 됐지만.. 저희, 저희 마을에 가뭄이 들어서 어쩔 수가 없었어요. 제발, 제발 용서해주세요.”

그때, 억류되어온 다른 마을 주민들도 나타나 그에게 비슷한 청원을 했다. 보통 자신의 친구, 가족, 이웃이라며 그의 목숨을 살려달라는 것이었다. 아르투르는 여전히 오른손에 시퍼런 장검을 든 채, 그들을 향해 되물었다.

“다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이 악당들에 의해 누구보다 고통 받은 게 그대들 아닌가?”

아르투르의 말대로, 그들의 얼굴에는 고생한 모습이 역력했다. 피로가 넘쳐흐르는 것이다. 도적들의 시중을 들고, 때로는 그들의 학대를 맨 정신으로 감수해야 했던 것이 보였다. 자비를 요청하는 지역 주민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사내가 앞으로 나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나으리, 저희를 주신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깊게 감사드립니다. 은혜를 갚기 위해 뭐든 하겠습니다. 그러나 염치 불구하고 하나만 더 부탁하겠습니다. 이들을 위한 재판을 열어주시지 않겠습니까?”

“재 - 에 - 판?”

상상도 못 한 요청에 아르투르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그것은 화가 났다기보다는, 매우 당혹스런 감정이었다.

“자네가 법을 잘 모르나 본데, 재판은 죄의 유무를 가리기 위해 필요한 절차일세. 이미 이들은 죄가 명백해. 살인, 절도, 강간, 유아살해, 교회모독, 뭐 , 나머진 생략하지. 이미 이것만으로도 모두 즉결 처형감일세.”

사내는 매우 조심스러운 태도로 아르투르의 눈치를 살폈다. 간신히 입을 열어 답했다.

“그… 그렇다고 이들 전부가 그런 악행에 가담한 건 아니잖습니까? 조금만, 조금만 자비를 베풀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악행을 벌이러 온 외지인들은 말씀하신 대로 죽어 마땅하겠으나, 이곳 출신의 도적들은 다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던 사연이 있습니다. 부디 고려하여주십시오.”

사내는 도로 고개를 잔뜩 숙였다. 그는 자신의 막내아들을 위해 탄원하고 있었다. 아르투르는 이 상황이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아, 머릿속에서 상황을 다시금 정리해봤다.

“그대들이, 도적으로부터 가장 많은 것을 잃은 피해자들이 아닌가? 왜, 도대체 왜 그대들이 이들이 용서받을 기회를 주자는 건 지 알 수가 없군.”

그 말에 탄원하러 온 지역 주민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그저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숙인 채, 아르투르의 자비를 바랄 뿐이었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빨리들 하게.”

그중 나이 많은 이가 뭐라고 말하려다가, 다시 눈을 질끈 감고 입을 닫았다. 그때 목책에 삐뚤게 기대어있던 카밀이 입을 열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도적들도 피해자인 면이 있는 거지요.”

아르투르가 시선을 돌려 카밀을 바라봤다.

“그게 무슨?”

“귀족 나으리들이 영지를 말아먹었지 않습니까. 그 때문에 도적들이 생겨났던 거지요. 이들은 왜 자기 이웃이, 가족이 도적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 공감하고 있는 겁니다. 아르투르 경.”

아르투르는 눈살을 찌푸리며 카밀을 바라봤다. 카밀은 풀고 있던 팔짱을 풀고, 아르투르의 앞에 서서 그를 당당히 올려다봤다.

“도적이라고 다 같은 이유로 도적이 아닙니다. 제 한 몸 편해지고자 그런 짓을 하는 불한당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도 많습니다. 나으리.”

“-도적은 도적일 뿐이다.”

아르투르의 단호한 목소리에 카밀은 아르투르를 바라봤다.

“죄송합니다만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나으리께선 굶주림이 무언지 아시는지요. 삶에 희망이 사라지면 막다른 궁지에 몰리기 마련입니다. 겨울을 날 식량이 없어 아이들이 배를 곪아가는 것을 보게 되면 무엇이든지 하게 되지요. 또한 영주에 거역하다 마을에서 쫓겨난 사람은 무엇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카밀은 떳떳이 아르투르를 바라봤다. 그는 아르투르를 상급자로 모신 이후, 단 한 번도 그에게 대든 적이 없었다. 항상 자신에게 공손한 태도를 보였던 그의 돌변에 아르투르는 당혹감을 느꼈다.

“난 자네라면 내 뜻을 이해해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다름 아닌 어제 도적 척후병을 고문한 게 자네이지 않나?

“아, 그놈이요. 그놈은 이곳 출신이 아니었습니다. 딱 봐도 한 탕하러 온 개자식이란 걸 알 수 있었죠. 봐줄 만한 사정도 없던 거지요,”

아르투르를 그를 내려다봤다. 카밀의 눈동자는 어느 때보다 맑았고, 힘이 넘쳤다. 평소에 카밀의 모습과는 정반대되는 모양새였다.

“자네가 그걸 어떻게 알지?”

“전 살면서 많은 경험을 했습니다. 그만큼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지요. 경께서도 제 나이쯤 되면 사람 보는 눈이 생기실 겁니다. 세상엔 오직 경험만이 전해줄 수 있는 것들이 있거든요, 궁정 교육과 기사 작위만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아르투르는 화가 치밀어올라. 매섭게 카밀을 노려봤다. 카밀도 지지 않고 아르투르를 바라봤다. 둘의 시선이 격렬하게 부딪혔다.

“경께서 진정 명예로운 기사시라면, 이들에게 마땅히 재판을 열어주셔야 합니다. 경중에 따라 처벌을 달리하고, 정상참작 될 수 있는 자들은 사면해 마땅하지요. 제가 드릴 말씀은 여기까지입니다.”

아르투르는 카밀을 노려봤고, 두 사람 사이엔 팽팽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마침내, 아르투르가 입을 열었다.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