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왕 아르투르-19화 (19/248)

19

막스는 타고난 장사였다. 태어난 마을에서 누구도 힘으로 맞서지 못했다. 덕분에 농노의 아들임에도 기사를 보좌하는 하급 장교인 서전트(sergent)가 될 수 있었다. 농노보단 훨씬 잘 살게 됐지만, 기사들 따위에게 굽실거려야 하는 건 똑같았다.

어느 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왜 나보다 약한 놈들에게 고개를 숙여야 하지? 그래서 마을의 기사를 죽이고 탈주했다. 노상강도로 업을 바꾸니 수입이 훨씬 좋았다. 무엇보다 내키는 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가 좋았다. 원하는 물건이 있으면 빼앗고, 꼴 보기 싫은 놈은 죽이면 그만이고, 원하는 여자가 있으면 취하면 그만이었다. 이제 나으리들도 그를 두려워했다!

어느날 방랑 기사 한 명이 자신을 찾아왔다. 프레드릭이라고 하는 녀석이었는데, 일을 더 크게 해보지 않겠냐 제안했다.

‘놈이랑 손을 잡은 건 정말 현명한 선택이었어.’

막스는 귀족들이 마시는 앙저뱅 지방 산 포도주를 들이켜며 회상에 잠겨있었다. 프레드릭과 손을 잡은 후 모든 것이 풍족해졌다. 휘하엔 백 오십 명이 넘는 부하들이 있었고, 그들을 시중들기 위해서 잡아온 마을 사람들도 비슷한 수였다. 가히 삼백 명 규모의 인원을 밑에 둔 자신은 영주나 다름없는 권세를 누리는 것이다!

‘새 왕이 즉위했다고? 좆이나 까라지! 이 산에선 내가 왕이다!’

그때, 부하가 들어와서 소식을 전했다.

“대장, 볼프강 네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급히 대장을 뵐 일이 있다는군요.”

막스는 쥐고 있던 포도주잔을 벌컥 부하를 향해 내던졌다. 부하는 황급히 옆으로 움직여 피했다. 그의 걸걸한 목소리가 동굴 안에서 울렸다.

“병신새끼야! 내가 볼프강놈 따까리가 보자면 마음대로 볼 수 있는 사람이냐? 나는 천하장사 막스다! 방투산의 영주라고!”

부하는 속으로 막스를 욕했다. 성질 더러운 새끼. 너 언제 내가 칼로 긋고 만다.

“그럼 꺼지라고 할까요?”

“됐어. 들어오라고 해. 시답잖은 소리를 하면 사지를 찢어버릴 거라고 전하고.”

볼프강의 부하는 오른팔과 어깨 근육이 비대하게 발달한 중년의 사내였다. 콧수염을 기른 사내의 눈빛은 산전수전을 다 겪은 듯 느껴졌다. 순간 막스조차 움찔할 정도였으니까. 그는 윽박질러 기선을 제압하려던 시도를 포기했다.

“크흠, 그래. 볼프강 새끼가 나한텐 무슨 볼일이 있는데?”

중년의 사내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볼프강은 뒈졌습니다. 이제 막스님께서 산의 진정한 영주가 되신 거지요.”

막스가 의아해했다.

“뭐? 그 새끼가 왜? 인근 마을을 털러 간다고 패거리 백 명도 넘게 데리고 갔잖아.”

“다 그 새끼가 병신같이 지휘한 탓이죠. 마을에서 약탈한다고 시간 끌다가, 귀족들한테 후방을 습격당했습니다. 씨발, 내가 그래서 얼른 털고 돌아가자고 했는데. 제 동료들도 거의 뒈지고 극소수만 살아 돌아왔습니다.”

사내는 고통스럽게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막스는 큰 소리를 내며 웃었다.

“와-하하하핫! 존나 나대더니, 꼴좋다. 그러게 진작에 이 몸의 휘하로 들어왔어야지. 난 기사들 따위에게 지지 않거든! 근데, 그래서 그걸 왜 나한테 알리려고 온 거야?”

중년의 사내는 머뭇거리다가, 막스에게 한쪽 무릎을 꿇었다.

“산채에 남은 저희는 막스님을 새로운 대장으로 모시기로 결의했습니다. 산채에 오시면 볼프강이 모아둔 금은보화와 노예들이 있습니다. 부디 그것을 가지시고 저희를 이끌어주십시오.”

“어, 응? 너희가 날 대장으로 모시겠다고?”

막스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조금 놀랐다. 뭔가 이상하긴 했다. 볼프강 패거리와 우린 사이가 나쁜데?

“사실, 저희는 그동안 볼프강이 싫었지만 어쩔 수 없이 그를 따랐던 것입니다. 막스님 같이 힘센 분을 진정한 대장으로 모시고 싶었습니다.”

사내의 아부에 막스의 입이 귀까지 올라갔다.

“아무렴! 볼프강 새끼보단 내가 낫지! 야, 너 마음에 든다. 내가 그 산채를 접수하면 대장으론 널 임명할게. 이름이 뭐냐?’

“카밀이라고 합니다. 막스 대장님.”

“자, 자. 돌아가서 그쪽 패거리에게 전해. 내가 너희를 거둬주겠다고! 지금 당장 부하들을 데리고 가서 너흴 보호해줄게. 야, 대신에 금은이랑 여자들한텐 손대지 마. 다 내꺼야. 건드리는 새끼는 죽여 버릴 줄 알아.”

“분부가 있겠습니까? 진정한 대장을 모시게 되서 기쁩니다.”

“좋아, 아주 좋아!”

막스는 폴짝 폴짝 튀며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 2m가 넘는 못생긴 거한이 천진난만하게 웃는 모습은, 제 3자에겐 좀 추해 보였다.

‘볼프강 패거리도 흡수하면, 프레드릭 놈과도 한판 해볼 만 할 거야. 개 같은 새끼, 자기가 뭐라고 내 약탈품을 뜯어가?’

카밀은 고개를 숙인 후, 조용히 막스의 산채를 빠져나왔다. 그는 오래된 거목에 등을 기대며 속삭였다.

“작전 성공이다. 꼬맹아.”

덤불 속에서 앳된 소년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스터께서 기뻐하실 겁니다.”

케이는 덤불 속의 포복 자세를 풀고, 일어나서 산길을 달려 나갔다. 케이는 자신이 중요한 임무를 맡고 있다는 생각에 들떠있었고, 발걸음도 그만큼 가볍게 느껴졌다. 여태까지 마스터에겐 짐만 된 기분이었다. 크리스티안의 싸가지 없는 종자는 벌써 칼을 능숙하게 다루던데, 자기가 할 줄 아는 거라곤 돌팔매질뿐이다. 전투가 벌어지면 안전한 곳에 숨어 마스터를 응원하고 있어야 할 상황이었다.

‘적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에선 최선을 다해야지.’

케이는 온 힘을 다해 산등성이를 타고 올랐다. 숨이 차오르고 맥박이 요동친다. 체력 하나만큼은 자신 있다. 달리고 또 달렸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일어난다.

케이는 험준한 계곡에 도착했다. 그는 폴짝폴짝 바위를 타고 넘어, 계곡의 위로 올라갔다. 그는 무릎에 손을 얹고,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마스터, 성공했어요. 놈들이 온대요.”

아르투르는 숨어 있던 나무 뒤에서 나와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가 빙긋 웃었다.

“아주 잘했다. 전령의 임무는 중요성을 몇 번 강조해도 모자라다. 오늘 넌 이미 네 몫을 다했다. 이제 에쿠잘루스를 지키고 있거라.”

“네. 마스터.”

아르투르의 손에는 주변의 지형을 작성해둔 지도가 들려있었다. 막스 일당이 볼프강의 산채로 가려면 이 계곡이 가장 빠른 길이었다. 물론 꼼짝없이 매복 공격에 당하기도 제격이기 때문에, 생각 있는 지휘관이라면 행군로로는 삼지 않을 길이었다.

‘하지만 놈들은 누군가 자신들을 노리러 왔다곤 생각하지 않겠지.’

아르투르는 미소를 지으며, 사전에 정해둔 장소로 궁수들을 배치했다. 카밀이 공을 들여 훈련해둔 자질 있는 자들이었다. 숫자는 여덟 명이지만 쓸 만한 궁수들이었다. 왕실 궁수들에 비하면 훈련병 수준에 불과했지만, 도적들 상대로는 충분히 유용한 전력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발걸음을 낙엽으로 쓸어 담아 지우고, 나무 뒤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어지간히 눈썰미 좋은 정찰병이 아니라면 이들이 숨어있다는 것을 알게 어려웠다. 아르투르는 장궁을 맨 채 덤불에 숨어 계곡 아래를 내려다봤다.

꽤 시간이 흐르자,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의 크기로 보아 수많은 인파였다. 산짐승들이 그들을 피해 달아나는 모습이 보인다. 아르투르가 고개를 들어 살펴보니, 어림잡아도 백 명은 될법한 무리가 계곡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선두에는 판금 갑옷을 입은 덩치 큰 사내가 있었다. 투구는 끼지 않고 옆구리에 이고 있었다.

‘이거야 원, 척후병도 보내지 않고 계곡으로 들어오다니.’

아르투르는 도적단의 행렬을 눈대중으로 짐작했다. 숫자는 많지만 군기는 엉망이고, 무장 상태도 가볍다. 가장 기초적인 구보조차 안 맞는 모습을 보며, 아르투르는 코웃음을 쳤다. 저번에 쓸어버린 것들과 별 다를 바 없는 무리다.

그들이 계곡 중간에 이르렀을 때쯤, 아르투르는 손짓으로 막스를 가리켰다. 다른 궁수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화살을 메겼다. 아르투르는 팔꿈치를 끝까지 잡아당겼다. 활시위가 팽팽해졌고, 긴장감이 맴돌았다.

- 핑

팽팽하게 당겨진 활줄이 놓이며 화살이 공중을 가르며 바람처럼 날아갔다. 그것을 신호로 다른 여덟 명의 궁수들도 사격을 개시했다. 아홉 개의 날랜 맹수가 노리는 곳은 단 한 점, 막스의 목덜미였다.

막스는 주변에 좀 더 귀를 기울였다면 화살이 날아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에겐 불행하게도, 옆의 부하와 어제 죽인 농노 가족에 대해 낄낄거리고 있던 막스는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다.

단숨에 두 발의 화살이 그에게 명중했다. 다른 화살들은 모두 갑옷을 맞춰 튕겨 나가거나 치명적이지 않은 상처를 남겼지만, 아르투르와 카밀이 당긴 화살은 각각 목덜미와 눈을 꿰뚫었다. 그는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쓰러져서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불편하다고 투구를 안 쓰고 다니면 저런 꼴이 되는 거지.’

아르투르는 혀를 찼다. 대장부터가 긴장을 풀고 투구를 벗고 다니던 판국이니, 그 부하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앞서 가던 대장이 갑자기 쓰러졌음에도 뒤따르던 도적들은 어리둥절해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들이 당황한 사이, 두 번째 공격이 쏟아졌다. 각기 다른 목표를 조준한 화살들이 쏟아지자 대여섯 명이 픽픽 쓰러졌다. 방어구가 부실한 자들이 대부분이라 죽거나 치명상을 입었다.

“습격이다!! 습격이야!!!”

요란한 소리를 낸 놈은 바로 화살에 맞아 죽었다. 도적단은 그제야 상황을 파악했다.

적의 위치를 찾기 위해 주변을 살폈지만, 이미 궁수들은 몸을 숨긴 뒤였다. 그들이 주위를 살피는 사이, 궁수들은 세 번째 화살을 장전했다. 그들은 몸을 드러낸 후 조준했고, 쏘았다. 이번에는 적의 궁수들을 겨냥한 공격이었다. 어김없이 도적들이 쓰러졌다. 사격을 마친 궁수들은 도로 나무 뒤로 숨었다.

“도망쳐!!!”

“아냐, 적은 소수다! 전열 갖추고, 궁수들을 중심으로 대응해라!”

“저 위에 적이 있다! 계곡을 올라!”

머리를 잃은 도적단은 각기 다른 지시 속에서 우왕좌왕했다. 그런데 적이 보이질 않는데, 대체 누구와 싸워야 한단 말인가? 도적 궁수들이 나무 위에 엄폐한 궁수들을 노려보긴 했지만, 헛되이 빗나가거나 나무만 맞추었을 뿐이다. 네 번째, 다섯 번째 사격이 이어진다.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한 채 속절없이 동료들이 쓰러져가자 공포가 퍼져나간다. 언제, 어디서 날아오는지 모르는 공격에 옆자리의 사람이 쓰러진다. 적이 보이면 뭐라고 하겠건만, 무력하기 그지없다.

그때 계곡 위로 은빛 갑옷을 입은 금발의 기사가 나타났다. 도적들이 웅성거리면서 그에게 삿대질했지만 아르투르의 큰 목소리에 묻혔다.

“모두 주목!”

“너흰 포위됐고, 이미 승산이 없다. 살고 싶다면 도망쳐라! 활을 든 자, 계곡 위로 올라오려고 하는 자, 쓸데없는 선동을 하는 자는 먼저 사살될 것이다.”

“개소리 집어치워!”

동료의 죽음에 분노하고 있던 도적 궁수 한 명이 화살통에서 화살을 꺼내 들었지만, 뭘 하기도 전에 미간이 꿰뚫려 절명했다.

“무엇을 하느냐. 도망치면 혹시 살 수도 있지 않은가? 아니면 여기 있다가 다 죽든가.”

그것이 결정타였다. 저항을 시도하던 동료가 속절없이 죽은 것을 본 도적들은, 항전을 포기하고 목숨을 살리기 위해 도망쳤다. 그것이 그들의 목숨을 끊는 결정이 되었다. 궁수들에게 등을 보인 채 도망치는 산적들은 사냥꾼 앞의 사냥감에 불과했다. 하나씩, 하나씩, 그들은 추격당해 죽어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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