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아르투르 일행은 이틀간 나아갔다. 인원수는 적었지만 사기는 높았다. 그들의 대장이 혼자서 적들을 전멸시킨 것이 이틀 전이었다. 무적의 기사가 함께하는데 두려울 것이 무엇이겠냐는 자신감이 있었다. 한 명의 용장이 가져다주는 무형의 이점이었다.
첫째 날은 도로를 따라 행군하던 중, 파괴된 짐마차를 발견했다. 까마귀들이 몰려들어 마부석과 짐칸에 있는 시체를 쪼아 먹고 있었다. 부패가 상당히 진행된 것으로 보아 살해당한 지 오래된 모양이었다. 주변에는 산산이 조각난 상자들과 눌어붙은 핏자국이 가득했다. 아르투르가 마부의 시체로 다가가자, 까마귀들은 그를 피해 퍼드득 날아갔다.
아르투르는 마부의 목걸이를 살폈다. 쌍두마차가 그려진 철로 된 명패였다.
“행상인 길드의 표식이라…”
아르투르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들은 매년 초, 동부 대륙 및 저 너머 미지의 땅에서 수집한 진귀한 물품들을 진상했다. 왕실은 대신 자유로운 상행과 안전 통행을 보장했고, 도로가 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가는 행상인들은 왕국 전역으로 물류를 공급했다. 마치 심장이 온몸에 피를 공급하는 역할을 하듯.
그것도 이제 옛말이다. 왕의 통행증을 가진 상인들이 도로에서 공격받는 시대가 되었다. 아르투르는 직접 길가에 묘를 파고 그들을 묻어줬다. 명복을 비는 의미도 있었지만, 전염병의 창궐을 막으려는 의도였다. 이런 식으로 시체를 방치해두면 걷잡을 수 없이 역병이 퍼져나간다. 형제단원 몇몇은 남은 물건이 없나 살펴보기도 했지만, 도적들이 워낙 꼼꼼하게 털어가 남은 것이 없었다.
둘째 날은 도로에서 벗어나 산림이 우거진 산으로 향했다. 지도에는 방투산이라고 표기되어있었다. 이곳은 도파뉴 영지 북쪽의 주요 도로를 감시할 수 있는 교통의 요지였다. 어느 눈썰미 좋은 도적이 이곳에 와서 자리를 잡았다고 했다.
아르투르가 산의 입구로 들어갈 때, 크리스티안이 의견을 제시했다.
“후퇴해서 다른 귀족들과 연합하는 게 어떤가? 마을을 돌며 병사를 더 모아보아도 좋고. 우린 고작 30명일세. 이 숫자로 도적들의 근거지를 치는 건 무모해. 귀족들이 괜히 성에 은거하고 있는 게 아닐 걸세.”
아르투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시간을 끌면 도적들은 화장실에 모여든 파리들처럼 퍼져나갈 걸세. 지금 쳐야 해. 놈들은 오히려 지금 방심하고 있을 거야. 우리가 먼저 공격한다면 승산은 충분하다네.”
“자네 뜻이 그렇다면야 따르지.”
그러나 병사들은 두려움을 내보이고 있었다. 말단 병사도 지금 이 작전이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고 있었다. 도적들은 최소한 수배에 달할 것이고, 그런 와중에 산에 웅크리고 있을 것이다. 무서운 것이 당연하다. 아르투르는 그들을 살피며 말했다.
“돌아가고 싶은 이는 말리지 않겠다. 그러나 전투의 승리는 숫자에만 달린 것이 아니다. 나를 믿고 따라오면 너희에게 승리를 가져다주마. 나는 한 명도 따라오지 않더라도 가겠다.”
아르투르는 망설임 없이 뒤로 돌아 마저 산을 향해 걸어갔다. 마을에서 아르투르를 따라온 병사들을 빼면, 나머지는 앞서가는 아르투르를 바라보기만 한 채 발걸음을 옮기길 주저했다.
“크리스티안 경, 정말 가실 겁니까?”
카밀이 되물었다. 크리스티안도 앞서 가는 아르투르를 보며 씁- 하며 상황을 정리해봤다.
‘저 괴물 자식은 우리도 다 제 놈 같은 줄 알고 있는 거야. 하지만, 잘 이용하면 나쁘지 않겠어.’
“자자, 주목. 저 산에는 도적들의 본거지가 있을 것이다. 이틀 전에 우리가 쓸어버린 볼프강 일당 말이야. 생각해봐라. 그곳에 남은 건 잔당에 불과할 거다. 우리가 피땀 흘려 싸운 것인데, 전리품은 얻어야 하지 않겠나? 금은보화가 우리를 기다린다. 가자! 신세를 바꾸려면 목숨쯤은 걸 줄 알아야지!”
크리스티안의 독려는 잘 먹혔다. 보물, 도적들의 산채에 있을 보물이 단원들의 눈에 아른거렸다. 그러자 그들은 용감하게 아르투르를 뒤따르기 시작했다. 케이는 이 모습을 똑똑히 보았고, 무엇이 평범한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는지 되새겼다.
“크리스티안 경이 사람들을 이끌어본 경험이 많아 도움이 될 거라는 마스터의 말이 맞았네요. 그도 허당은 아니었네요.”
아르투르는 뒤에서 걸어오는 병사들을 슬쩍 보았을 뿐, 큰 생각 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수완은 좋은 친구 같긴 하군. 하지만 진정한 용사들이라면 금보다는 승리의 영광이나 명예를 원할 거다.”
“그건 마스터가 바라는 것 같아요. 제 생각엔 마스터가 더 많은 사람을 이끌고 싶다면 사람들이 뭘 바라는지에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해요. 따지고 보면, 마스터가 자기 왕국을 가지고 싶어하는 것도 다를 바 없잖아요.”
케이의 당돌한 말에 아르투르는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따지고 보면 자신이나 저들이나 서로 바라는 것의 크기가 다를 뿐, 욕망하는 것을 쫒고 있다는 건 다를 게 없었다.
그렇게 형제단은 각기 다른 목표를 지닌 채 산을 올랐다. 누군가는 명성과 명예, 누군가는 복수, 다른 누군가는 일확천금의 꿈을 쫒아서 말이다. 방투산의 산세는 험하지 않아 앞으로 나아가는 데 별 어려움은 없었다. 그들은 머지않아 산 중턱에 도달했다. 두 개의 큰 바위가 서로 마주 보고 있는 언덕이 보였다. 아르투르가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아밋서텐. 활을 빌려주게.”
앞장서서 걷던 아르투르는 카밀에게 손을 내밀었고, 그는 말없이 매고 있던 장궁과 화살통을 내주었다. 아르투르는 허리 뒤편에 화살통을 매자마자 활시위를 매겼다. 바위 옆의 덤불을 겨냥하고 있었다.
핑- 하며 활줄이 놓이는 소리가 났다. 거세게 바람을 가로질러 날아간 화살이 덤불 속으로 들어가자, 악- 하는 비명이 났다. 아르투르는 두 번째 화살을 장전했다. 이번엔 반대편의 덤불이었다. 그러자 바위 뒤와 나무 뒤에 숨어있던 세 명의 척후들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아르투르의 세 번째 화살이 척후의 목덜미를 꿰뚫었지만, 둘이 남았다.
그때 뒤편에서 화살이 날아들어 한 명을 더 쓰러뜨렸다. 카밀도 부하에게 활을 건네받아 쏘고 있던 것이다. 마지막 척후병을 향해 두 사람의 화살이 날아갔지만, 그는 날렵하게 굴러 화살을 피해낸 뒤 지그재그로 움직이며 산을 달려 나갔다.
장애물이 많아 두 궁수는 시야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 와중에 쏘아 맞히는 것도 결코 쉽지 않았다. 카밀은 혀를 차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놈을 놓치면 안 됩니다!”
아르투르도 그의 뒤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케이도 함께였다. 아르투르는 언덕을 재빨리 뛰어 올라갔지만, 전신에 판금 갑옷을 걸친 터라 추격전, 그것도 등산을 해야 하는 추격전에선 불리했다. 워낙 힘과 체력이 좋아 천 옷만 걸친 척후병에 비해 느리진 않았지만, 따라잡기에 충분한 속도도 아니었다. 더욱이 그의 큰 체격은 나뭇가지나 돌멩이 같은 장애물을 피하기 어렵게 했다.
그때 케이가 아주 익숙한 표정으로 날렵하게 언덕을 타올랐다. 산은 양치기들의 생활 터전이다. 즉, 케이의 놀이터나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소년의 몸은 어른들이 가지 못하는 수풀이 우거진 곳이나 바위틈으로 달릴 수 있게 해줬다.
케이는 카밀과 아르투르보다 앞서 나가, 마침내 도망치던 적 적후를 시야에 넣었다. 케이는 잽싸게 허리띠의 주머니에서 돌멩이를 꺼내, 어깨에 멘 줄에 걸었다. 케이는 투석구(Sling)를 사용해 산짐승들을 쫓아내던 기억들을 되새기고, 도망치는 적의 머리를 겨냥해 손을 놓았다.
매끈한 돌덩이가 보기 좋게 날아가 척후병의 머리에 명중했다. 놈은 피를 흘리며 쓰러졌고, 신음소리를 내며 다시 일어서려했다. 케이는 두 번째 투석구를 준비했다. 그 때 뒤에서 나타난 카밀이 그의 손을 잡고 내렸다.
“꼬맹아, 척후는 다 죽이는 게 아니라 생포하는 거다.”
말을 마치고 카밀은 활을 당겨 척후의 다리에 화살을 꽃아 다시 넘어뜨렸다. 카밀은 쓰러진 척후병의 뒷목을 쳐서 기절시킨 후 본대로 돌아갔다. 케이는 그제야 도착한 아르투르를 보며 승리의 V자를 내보였다.
“마스터, 저도 방금 빵 값은 했다고요?”
전신 갑옷을 입고 이들과 같은 속력을 내느라 땀을 뻘뻘 흘리던 아르투르는 그 광경에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함께 본대로 돌아갔다. 카밀은 붕대로 놈의 상처를 응급처치한 뒤, 물을 뿌려 깨웠다.
“으…으으으음…?”
간신히 눈을 뜬 척후는 비몽사몽 헤매고 있다가, 금발의 기사가 팔짱을 끼고 있는 모습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옆에는 동료들을 짓밟아 죽이던 괴물 말이 있잖은가!
“히-이익. 괴, 괴, 괴물이다.”
“네게 그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좋군. 자, 잡아먹히고 싶지 않다면 아는 정보를 모두 내놓아라.”
그는 몸을 부르르 떨면서, 숨을 몰아쉬었다.
“빨리 대답해, 짜샤.”
케이가 허리에 손을 올린 채 재촉한다.
“말씀드리면. 살려주실 겁니까? 기사의 명예를 걸고 저를 안전하게 풀어주겠다고 약조하시면, 모두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아르투르는 침묵을 지키며, 냉엄한 시선으로 그를 내려다보았을 뿐이다. 카밀은 누런 이를 내보이며 웃어 보였다. 번뜩이는 단검이 그의 오른손에 들려있었다.
“용병의 명예를 걸고 약조하마. 네가 아는 것을 말하면, 깨끗하게 죽여주마.”
“살- 살려주십쇼!”
“그건 나리들께서 바라시는 정보가 아니야.”
그는 어디를 어떻게 해야 최대한의 고통이 가해지는지 알고 있었다. 어디를 찌르지 않아야 질긴 목숨이 이어지는지도. 쉽게 말해, 고문 기술에 숙달되어 있었다. 아르투르는 그가 어디서 이런 기술을 배웠나 문득 궁금해졌다.
“나는 네놈 같은 악당들에게 이런 걸 할 때가 제일 좋더라고. 그러면 사람을 죽이는 걸 업으로 삼는 나도 쓸 만해진 것 같거든. 빨리 죽고 싶거든 사실대로 말하는 게 좋을 거다!”
“으아아아악! 살려주세요!”
“죽여달라는 말이 나와야 하는데.”
잔인한 심문이 계속 이어졌다. 아르투르는 이따금 눈살을 찌푸리긴 했지만, 팔짱을 낀 채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케이가 조심스레 아르투르에게 물었다.
“어…저기요. 마스터.”
아르투르는 눈짓으로 대답했다. 케이는 조금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야 상관없지만… 마스터가 이걸 허용하시니 놀라워서요. 고문은 마스터의 명예와는 어울리지 않는 일 아닌가요?”
“적들이 존중받아 마땅한 자들이라면, 적어도 그들도 전쟁 관습을 준수하리라 기대할 수 있다면 당연히 고문은 안 되는 일이지. 하지만 이놈들은 어떨까? 놈들이 우리 편을 잡았다면 어떻게 했겠느냐?”
“뭐… 저 정도는 당연히 했겠죠. 마을에서 하던 짓들을 돌이켜보면 그보다 더 할 수도 있을 것이고.”
아르투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하거라. 명예롭게 살라는 건 현실을 모르는 바보가 되라는 게 아니야. 우린 놈에게 알아내야 할 정보가 있고, 그렇다고 풀어주면 언젠가 우리 뒤통수를 치겠지. 오히려 놈을 살려주겠다고 약조하고서 죽이거나, 놈을 풀어줘서 동료들을 위험에 처하게 한다면 그것에 불명예스러운 일이겠지.”
“다른 기사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요?”
아르투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종종 어떤 기사들은 특정한 원칙을 완고하게 지키는 것을 명예라고 부른다. 내가 동의하지 않을 뿐. 명예는 결국 사람을 위한 것이다. 원칙을 잊게 되면 명예는 허울에 지나지 않아.”
아르투르가 케이에게 명예에 대한 철학을 가르치는 동안, 카밀은 척후병에게서 지휘관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정보를 알아냈다. 카밀은 등을 돌려 아르투르를 바라봤다. 명령을 기다리는 것이다. 크리스티안은 내심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봤다.
“살려, 살려주십시오! 제발!”
아르투르는 손가락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카밀이 손짓하자 척후병의 목이 그였고, 피를 쏟아내며 몸부림치다 숨이 끊어졌다. 그 뒤, 지휘관들은 얻은 정보를 종합해봤다.
첫째, 방투산에는 두 개의 도적 산채가 있다. 하나는 볼프강 일당이 사용하던 것. 오십 명 가량의 잔당이 남아있다고 한다. 다른 하나는 막스라는 괴력의 도적이 이끄는 도적단. 숫자는 적어도 백 명에서, 많게는 이백 명 정도라고 했다. 두 집단은 오랫동안 경쟁해왔고, 한때는 칼부림이 날 정도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둘째, 2주마다 도적왕 프레드릭의 부하들이 와서 약탈품의 일부를 거두어간다. 다른 도적단들과 질적으로 다른 진짜 병사들인 모양이다.
나머지는 지리 정보나 그가 속한 볼프강 일당의 자세한 정보였다. 카밀은 어느 정도는 믿을법하지만, 완전히 포로의 심문 내용을 신뢰해서도 안 된다고 조언했다. 지도부는 고민에 빠졌다.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정면으론 승산이 없군. 최소한, 피해가 너무 심할 걸세.”
아르투르야 살아남겠지만, 나머지는 모두 죽을 거라는 우회적인 표현이었다.
“나한테 좋은 생각이 있네.”
카밀과 크리스티안은 아르투르를 바라봤다.
“-힘이 부족할 땐, 머리를 써야지.”
아르투르는 손가락으로 자기 머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