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창가로 햇살이 들어왔다.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에 아르투르의 잠이 깼다. 그의 곁에는 붉은 곱슬머리의 여인이 나신으로 푹 안겨있었다. 아르투르는 여인의 머리카락을 한번 쓸어 담고, 잠을 깨우지 않기 위해 살며시 침대에서 일어났다.
지난밤이 불현듯 떠오른다. 만취한 채 파트너를 바꿔가며 춤을 추던 아르투르는, 유독 눈에 띄는 상대를 만났다. 여인은 그에게 은근한 시선을 보냈고, 아르투르는 다가가 춤을 신청했다. 젊은이들의 눈빛에 불꽃이 튀자, 그 뒤의 일은 순식간에 진행됐다.
‘이름이 뭐였더라.’
에라, 모르겠다. 둘 다 즐겼으면 된 거지. 꼭 기억할 필요는 없잖은가.
그는 눈을 비비며 방을 나섰고, 식사하기 위해 1층으로 내려갔다. 그는 지금 촌장의 3층 집에 머무르고 있었다. 2층 계단을 내려가다, 슬며시 열린 방문 사이로 케이가 침대에 퍼질러 있는 모습을 봤다.
‘나 때는 상상도 못 하던 일인데.’
아르투르는 뭔가 억울했다. 종자 시절, 자신은 항상 동이 트기 전에 일어나야 했다. 모두가 잠든 시간에 바야르 경의 군마에게 여물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했고, 갑옷을 닦고 나면 그제야 해가 떴다. 바야르 경은 그때쯤 일어나 아침 단련을 시작했었고.
‘저놈은 정말 팔자가 좋군.’
아르투르는 감정을 실어 케이의 이마에 꿀밤을 놨다. 아악- 하는 비명을 지르며 케이는 잠에서 깨어났다.
“마스터! 왜 때려요! 어제 할 일 다 하고 잤단 말이에요!”
….자신을 깨워주는 기사에게 성을 내는 종자가 있다?
“시끄럽다. 어느 종자가 기사보다 늦게 일어나나! 당장 마구간으로 가서 일과를 시작해라!”
아르투르의 고함에, 케이는 분한 표정을 지었지만 풀이 죽어 마구간으로 허겁지겁 내려갔다.
‘어휴, 저 녀석은 대체 언제쯤… 애초에 열두 살짜리를 종자로 받은 내가 바보지.’
아르투르는 아침부터 한숨을 쉬며 정해놓은 일정을 시작했다. 축제는 끝났고, 이제 다음 일을 준비해야 했다. 현지에 대한 정보가 더 필요했기에 그는 곧장 촌장을 만나러 갔다.
촌장 부부는 아르투르와 크리스티안을 융숭히 대접했다. 케이는 아르투르의 배려로 식사를 마치고 일과를 하도록 허락받았다. 그런데 녀석은 고마워하기보다는, 토라진 얼굴로 말없이 식사만 했다. 아르투르는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았다. 녀석도 윗사람을 섬긴다는 게 무엇인지 좀 배워야 했으니까.
“드시지요. 기사 나리들. 그나마 저희 마을에서 가장 좋은 것들입니다.”
어제 먹다 남은 소고기 건더기가 들어간 수프와 갓 화덕에서 구워낸 빵이었다. 화려하진 않아도 배를 채우기엔 충분했다.
“뭐라고 부르면 되겠소?”
“피에르라고 부르십시오. 나으리.”
“좋소. 피에르. 물어볼 것이 많소. 이 지방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요? 영지를 지켜야 할 기사들이 어디로 가서 도적들이 이렇게 대담해진 거요?”
피에르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부디 제 말에 노여워 마십시오. 백작님이 약하시기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 그분의 나이가 올해로 열 살이시지요. 게다가 여자의 몸이십니다. 소녀가 백작이라고 있는데, 모두 우습게보지 않겠습니까? 섭정이라고 계신 분은 젊은 과부시구요.”
아르투르는 노인의 목소리에서 체념과 실망을 읽어냈다. 평소라면 그를 꾸짖었겠지만, 지금만큼은 노인을 타박할 수 없었다. 군주가 백성을 보호해주지 못한다면 충성을 바칠 이유가 없다. 고귀한 자가 받아 마땅한 경의를 받지 못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선대 백작께서 계시던 시절엔 이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분이 돌아가시자 가신들이 주군을 두려워하지 않게 됐지요. 그래서 그들은 패를 갈라 싸움을 벌였습니다. 아랫사람들만 한창 죽어 나갔지요. 징병에, 새로운 세금에…
아르투르는 약간 이해가 된다는 표정이 됐다.
“탈주한 농노들이나 생계를 이을 수 없는 농민들이 도적이 된 거군.”
“그렇습니다. 나리. 하지만 그때까지는 나름대로 괜찮았습니다. 오히려 도적들을 귀족들의 폭정에 대항하는 의적이라며 좋아하는 이들도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저희 마을에서도 도적단에 합류한 청년들이 있었고요. 그런데, 진짜 문제는 페르넬 대왕이 위독하시다는 소문이 퍼지자 벌어졌습니다.”
아르투르는 촌장의 말에 한층 귀를 기울였다. 돌이켜보면 중앙 정계가 마비된 것도 그쯤이었다. 반년 전, 아버지는 알현실에서 신년 인사를 받다가 갑자기 쓰러졌고, 마비가 와서 침대에만 누워있어야 하는 지경이 됐다. 공개 행사에서 벌어진 일이라 숨길 수도 없었다. 그리고 왕자와 제후들의 권력 다툼이 시작되었지.
“대왕이 쓰러지자, 귀족들이 고용해온 용병들이 마음을 달리 먹은 겁니다. 그들은 옛 고용주를 향해 칼날을 돌렸고, 급습을 받은 명망 높은 여러 귀족가가 단절됐지요. 질서가 무너지자 인근의 모든 불한당들이 한 몫 잡기 위해 이곳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렇게 지금의 난장판이 된 겁니다.”
아르투르는 수저를 내려놓고 생각에 빠졌다. 용병 관리를 그렇게 엉망으로 하는 귀족들은 많지 않다. 하물며 도파뉴의 유력 가문들이라면 만만치 않은 가문들일 텐데.
“귀족들이 그렇게 쉽게 당했단 말인가?”
“도적들의 중심에는 프레드릭이라는 방랑 기사가 있었습니다. 듣자하니 신묘한 쌍검술을 사용한다더군요. 마치 북구의 광전사들처럼 싸워 뛰어난 기사들도 그를 당해내지 못했다고 합니다. 살육에 미친 자지만, 악당들 사이에선 더 대담한 악행을 저지르는 자가 인정받기 마련이겠죠.”
“그래도 여전히 이상해. 도파뉴 백작과 그 가신들은 중부에서 명성 높은 영주들이다. 싸움 좀 잘하는 방랑기사가 이끄는 어중이떠중이들에게 패배했다는 건 믿기지 않는군.”
“제가 뉘 앞이라고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백작가에서 한 차례 대규모 토벌군을 보낸 적이 있으나, 그조차 패배했습니다. 그 뒤로 백작가는 토벌을 포기하고 자신의 근거지만 지키고 있지요. 귀족들도 자신의 성에 틀어박힌 채 나오지 않고 있구요. 이게 다 겁 많은 과부와 세상 물정 모르는 소녀가 영지를 다스리는 탓입니다. 아르투르 경 같이 힘 있는 분이 백작이 되어야 합니다.”
실로 불충한 발언이지만, 아르투르는 목소리 속에서 백작가에 대한 깊은 실망감과 좌절을 느낄 수 있었기에 타박하지 않았다. 자신이 촌장의 처지였어도 똑같이 말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백성을 지키지 못하는 군주는 원망을 들어 마땅하다.
“도적들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해주게. 주요 근거지는 어디인지, 숫자는 얼마나 되는지, 유명한 자들은 어떤 자들인지 말이야.”
“기꺼이 말씀드리지요.”
피에르는 그가 알고 있는 도파뉴 백작령의 정세에 대한 모든 것을 알려주었다. 도적단들의 이름과 규모, 알려진 근거지, 근방 귀족들의 성 같은 정보가 나왔다. 그는 마을 유지답게 지역 사정에는 제법 밝은 편이었고, 두 기사는 그의 말을 경청했다.
매우 심각한 상황이었다. 도적들은 수백 명 규모로 몰려다니며 귀족들을 척살하고 마을을 불태우고 다녔다. 그런 무리가 여럿이니 영지가 남아나질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따금 마을이나 장원이 항전을 벌여 도적 무리를 격퇴하면 프레드릭이 도적들을 연합해와서 깡그리 파괴해버린다고 했다. 소귀족들이 대처하기엔 어려운 상황이었다.
“약탈자들을 하나로 규합해서 온다고?”
아르투르의 표정엔 의아함이 더해져 갔다.
“네. 이제 프레드릭은 도적들의 왕을 자처하고 있습니다. 규모가 큰 도적단은 모두 그와 협력하니까요. 더욱이 그가 이끄는 도적단은 경험 많은 용병들이 많아 귀족들의 군대와도 능히 싸운다는군요.”
“정보 고맙네. 앞으로도 엘베르 마을의 안전을 위해 힘써보지.”
대화가 끝나고 두 기사는 마을을 돌며 의견을 나눴다.
“이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나?”
아르투르가 크리스티안에게 물었다.
“수상한데. 뭔가 석연치 않아.”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는군. 말도 안 되는 일 투성이야.”
그때 케이가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손을 들었다.
“마스터, 뭐가 이상한 건가요?”
“우선, 귀족들이 그리 쉽게 당할 리 없다. 이곳의 귀족들은 전쟁에 잔뼈가 굵은 베테랑들이야. 용병 통제에도 충분히 경험이 있는 자들이다. 그들이 처음에 그리 쉽게 당한 건 이상해.”
“두 번째로, 토벌군이 도적왕인가 뭔가 하는 놈에게 패배했다는 것도 이상하다. 도파뉴 백작의 군대는 왕국에서 유명한 정예병들이었어. 숫자가 좀 많다고 어중이떠중이들에게 패할 군대가 아니란 거지.”
아르투르는 턱에 손을 올린 채 답했다.
“제일 이상한 건 도적왕이야. 소속도, 규율도 없는 수천 명의 약탈자를 한 명이 규합한다고?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게 가능하다면 도적단이 아니라 군대겠지. 이 일이 제일 이상해. 아주 지독한 냄새가 풍기고 있어.”
“그건 어떤 냄새죠?”
아르투르는 이번 사건에서 풍기는 냄새가 아주 익숙했다. 궁정에 살았던 사람이라면 화장실 냄새만큼이나 익숙한 그것.
“음모의 냄새. 도적왕의 뒤에는 배후가 있다. 신속하게 움직여야겠어.”
크리스티안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떻게 할 셈인가?”
“즉각 병력을 모아서 가장 가까운 도적들의 근거지부터 친다. 마침 이곳에서 이틀거리에 볼프강 무리가 머물던 산채가 있군. 그곳에 가서 잔당부터 소탕하지. 점심을 먹고 바로 출발하세나.”
“그렇게 하지.”
형제단은 바쁘게 움직였다. 태반이 전날 과음을 한 채 아직도 일어나지 못했다. 그들은 카밀이 체벌을 가한 뒤에나 굼뜨게 움직였다. 대륙 최고의 군대를 보고 자란 아르투르는 이 광경이 너무 낯설었다. 이런 군대로 제대로 도적들을 토벌할 수 있을까?
‘왕실군 백 명만 있어도 아무 생각 없이 다 쓸어버릴 텐데.’
큰 형님은 과연 자신의 백성들이 이렇게 고통 받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을까? 그렇게 용의주도하신 분이 모를 리는 없었다. 단지, 왕이 고려해야 하는 수많은 안건 중 뒤에 있을 뿐이리라. 아르투르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셨다면, 당장 도착해서 근위기사들과 모조리 때려죽이셨을 거야.’
형제단이 출발을 준비하는 와중 의외의 일이 벌어졌다. 마을 청년들 가운데 아르투르의 용맹에 감동해 그를 따라나서겠다는 의용병들이 있었다. 아르투르는 집안에 다른 아들이 없거나, 병사로 적합하지 않은 이들은 도로 돌려보냈다. 그러자 일곱 명이 남았다. 이들은 모두 체격이 건장하고 복수를 하겠다는 열의에 불타고 있어 병사로써 썩 괜찮았다. 아르투르는 어제 노획한 무기를 그들에게 나눠줬다.
정오가 되자, 형제단은 마을 사람들의 환송을 받으며 떠나갔다. 선두에는 에쿠잘루스를 탄 아르투르와 당나귀를 끄는 케이가 있었다. 길가에 누군가 아르투르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르투르는 정체를 알아보고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붉은 머리의 젊은 여인이었다. 그녀는 아르투르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내 이름은 엘로디에요. 기억해주세요.”
“잊지 못할 추억을 남겨줘서 고맙다. 엘로디. 끝까지 기억하마.”
아르투르는 말을 멈춰 세우지 않고 지나쳤다. 엘로디는 그런 아르투르를 보며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진심을 담아, 손을 흔들어줬다. 아르투르는 뒤로 돌아 한번 웃고는, 손을 마주 흔들었다.
완전히 마을에서 벗어날 때쯤, 케이가 되물었다.
“그 누나는 마스터한테 마음이 있던걸요.”
“알고 있다. 그래 봐야 나는 결국 떠나야 하는 사람이다.”
“그래도 따뜻한 말이라도 해줄 수 있었잖아요.”
아르투르는 케이의 꿀밤을 때렸다.
“우린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저, 순간순간에 충실하면 족한 것이다. 내 연애에 신경 쓸 시간이 있다면 다음 전투에서 살아남게 해달라고 기도나 하거라.”
“발타리아 님은 기도를 별로 안 들어주시던데….”
아르투르는 이제는 멀어진 엘베르 마을을 되돌아봤다. 자신이 구해내지 못했더라면 잿더미가 됐을 곳이다. 그러나 아직 도움이 필요한 마을은 가득했고, 베어 넘길 적들도 너무 많았다. 아직 되돌아볼 때가 아니었다.
주인의 감정을 읽은 에쿠잘루스는 길을 따라 매섭게 질주했다. 아르투르는 도로 앞을 바라본다. 다가올 전투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운명이 무엇일지 궁금해하며.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