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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16화 (16/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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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해가 중천에 이를 때쯤 추격이 끝이 났다. 아르투르는 쉬지 않고 적들을 쫓아 쓰러뜨렸다. 목숨을 애걸하는 도적들도 있었지만 자비는 없었다. 전쟁에는 마땅한 관습이 있지만, 이것은 전쟁이 아니었다.

짐승만도 못한 이들을 징벌하는 과정일 뿐.

아르투르가 추격을 마치고 돌아오자, 그를 경외시하는 눈길이 가득했다. 존경과 두려움이 함께 느껴졌다. 케이는 엄청난 선망을 담아 아르투르를 바라봤다. 자신도 언젠가 저런 기사가 될 수 있을까 생각하며.

아르투르는 등자를 딛고 말에서 내렸다. 워낙 오랜 시간을 싸웠던 터라, 온몸이 한계였다. 그의 충성스런 군마도 다를 바 없는 처지였다. 온몸에 피와 피부 조각, 오물이 묻어 매우 불쾌했다.

그 와중, 백발의 노인이 걸어 나와 아르투르 앞에 고개를 숙였다. 마을의 유지이자 촌장인 자였다.

“고귀한 기사이시여, 원하는 게 있으면 뭐든지 말씀하십시오. 저희가 드릴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드리겠습니다.”

아르투르는 힘겹게 숨을 내뱉었다.

“따뜻한 목욕물이 필요하다.”

얼마 뒤, 아르투르는 촌장의 집에 있는 둥근 욕조에 몸을 깊이 담갔다. 마을 소년들이 부지런히 뜨거운 물을 퍼 날랐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올라왔다. 그는 등을 기대고, 눈을 감은 채 피로가 씻겨내려 가길 기다렸다.

“마스터!”

케이가 들뜬 목소리로 욕조의 가림막을 열며 들어왔다. 품에는 아르투르의 흉갑을 들고 있는 채로. 아르투르는 눈을 감은 채 되물었다.

“에쿠잘루스는?”

“방금 잠들었어요. 저와 마굿간지기가 목욕을 시켜줬답니다.”

“앞으론 말을 다루는 일은 반드시 네 손으로만 하여라. 군마 관리는 종자의 가장 중요한 의무다. 기사의 가장 가까운 동료이자 가장 중요한 무기이거늘, 어찌 남에게 맡길 수 있겠느냐?”

아르투르의 꾸지람에 케이가 풀이 죽어 답한다.

“네. 마스터. 앞으론 안 그럴게요.”

“이제 알았으면 됐다. 배워나가야지.”

얼마간 침묵이 흘렀다. 아르투르는 원형 욕조에 등을 기댄 채 축 늘어졌고, 케이는 잘 닦인 수건으로 흉갑에 묻은 피딱지들을 닦아냈다. 케이가 금세 입을 열었다.

“마스터, 정말 멋졌어요! 마치 전설에 나오는 용사들 같았다고요. 어떻게 혼자 그 많은 적을 상대로 달려들 생각을 하신 거죠? 두렵지 않으셨나요?”

방금 풀이 죽었다곤 믿기 어려운, 활기차고 신나는 목소리였다.

“분노가 앞섰을 뿐이다. 현명한 판단은 아니었지. 본대를 기다렸어야 전술적으로 옳은 판단이었다. 보고 배우지 말아라. 무모한 일이었으니까.”

아르투르는 차분히 답했다. 자신도 어떻게 백 명을 쓰러뜨릴 수 있었는지 설명하지 못했다. 맨정신으로 하라면 결코 할 수 없을 일이니까.

“하지만 결국 혼자서 다 처치하셨잖아요?!”

케이가 들뜬 목소리로 되물었다.

“상대가 시정잡배들이었으니까. 잘 훈련된 기사 서넛만 있었어도 쓰러지는 건 나였을 거야. 제대로 싸울 생각 없는 놈들만 모아두니 저런 꼴이 벌어지는 것이다. 부득이하게 다수의 상대와 싸워야 할 때면, 누가 싸울 의지가 있고 누가 겁만 주면 도망갈지 분별하는 게 가장 중요한 과제다. 잊지 말아라. 역전의 용사라도 포위를 당하면 죽게 된다.”

아르투르는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케이는 잽싸게 일어나 수건을 가져다주었고, 아르투르는 수건을 받아 몸을 씻고 옷을 입었다. 떡 벌어진 어깨와 곳곳의 잘 단련된 근육은 완벽한 남성적 조형미를 이뤘다.

“케이, 이번 전투로 난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됐다. 난 재물과 작위를 노리며 배회하는 평범한 방랑 기사 따위가 되고 싶은 게 아니다. 나는 내가 옳다고 믿는 바를 위해 싸우고 싶은 거다. 명예를 걸고 싸울 만한 전장을 원하는 거지.”

그는 자신에게 되뇌기 위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나는 아르투르다. 페르넬의 아들, 아르투르.”

흰색 의복을 걸친 그는 케이가 내미는 두 자루의 장검을 허리에 찼다. 검은 기사의 상징이자 최소한의 호신 도구이므로 몸에서 떨어뜨릴 수 없었다. 그는 성큼성큼 방을 걸어 나갔다. 케이가 쫄래쫄래 따라오며 말한다.

“마스터, 더 쉬셔야죠! 어디 가세요?!”

“크리스티안과 담판을 지으러 가야겠어. 결심이 섰다.”

아르투르가 그리 말하며 문을 열자, 마을 사람들의 열렬한 환호 소리가 들려왔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온 마을의 사람들이 몰려와 있었다. 진심 어린 감사와 기쁨이 넘쳐흐르는 표정들이었다.

“감사합니다! 나리! 저흰 꼼짝 없이 다 죽은 줄 알았습니다!”

“엘베르의 구원자 아르투르 만세!”

“홀로 백인의 도적들을 베어 넘기신 용맹한 아르투르 경 만세!”

사람들이 각각 칭송을 늘어놓는 가운데, 한 쌍의 소년소녀가 다가와 아르투르에게 화환을 내밀었다. 아르투르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것을 받아들여 목에 걸었다. 냉대와 멸시에 익숙했지만, 환대는 여전히 낯설었기에 쑥스러운 감정이 들었다. 그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어떤 대답을 해야 할 지 고민했다.

“도적들이 다시 온다면 같은 결과를 맞이하게 될 거요. 당신들은 이제 안전하오!”

사람들은 더욱더 큰 환호로 응답했다. 아르투르는 한동안 마을 사람들의 환대에 응해 말대답을 해주고,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들이 말하길 오늘 자신을 위해 소를 잡아 잔치를 열 것이니 꼭 참석해달라고 했다. 마을 처녀들이 가져다준 장미꽃이 너무 많아 나중엔 케이가 받았다.

“잠시 만날 사람들이 있어 다녀오겠소. 그 뒤에 같이 즐깁시다.”

아르투르는 잠시 그들을 뒤로 하고 크리스티안을 만나러 마을 회관으로 향했다. 둘 사이에는 아직 합의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일전의 식량 문제가 그랬고, 가치관이 다른 것으로 보아 앞으로 충돌이 잦을 모양이었다.

‘하지만 확신하겠어. 나는 내 길을 가야만 한다.’

그는 아직도 마을을 공격하던 도적들을 보며 끓어오르던 분노를 잊지 못했다. 자신이 초인적인 힘과 용기를 발휘해 그들 사이로 돌격할 수 있던 원동력. 자신은 그들과는 달라야 했다. 자신은 고작 돈이나 작위만을 위해 싸우는 게 아니다. 마땅히 기사라면 그래야 한다.

마을 회관에 도착하자 형제단원들이 식사를 하며 떠들고 있었다. 아르투르가 나타나자 그들 역시 큰 환호로 맞이했다. 여럿이 죽고 다쳐야 했을 전투를 혼자서 승리로 이끌어준 영웅에 대한 경의였고, 많은 이들은 그의 무력에 순수한 경의를 보냈다.

좀 더 주의 깊은 이들은 불과 열흘 전 자신들이 아르투르와 전투 직전까지 갔었다는 점을 상기했다.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때 싸웠더라면 도적들과 같은 신세가 됐겠어.’

다름 아닌 크리스티안도 그런 부류였다. 그는 웃으면서 아르투르를 맞이했지만, 속내는 경악과 공포에 가까웠다. 하지만 겉으론 호쾌한 미소를 지어냈다.

“정말, 정말로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네. 음유시인들이 백 년이 지나도록 그대의 용맹을 노래할 걸세.”

“고맙네. 하지만 먼저 논의해야 할 게 있다네.”

맥주잔을 내미는 크리스티안을 향해 손을 내저은 아르투르는 그의 반대편에 앉았다. 크리스티안은 침을 꿀꺽 삼켰다. 아르투르가 보인 용맹은 상상을 초월하는, 말 그대로 초인적인 결과물이었다.

칼밥을 먹고 사는 사람들은 강한 자를 따른다. 그래야 이기고, 이겨야 오래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 이대로면 자신의 지도력이 위험해질 터였다. 그렇다고 그와 여기서 결별한다면, 적으로 다시 만날지도 모른다. 그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적으로 둬선 안 된다면, 반드시 아군이 되어야 한다.’

“-혹시 하려는 이야기가 일전의 논쟁에 관한 것이면, 전적으로 자네 뜻에 따르지. 앞으로 마을에서 강제로 식량을 보급 받는 일은 없을 걸세. 부디 형제단에서 우리를 이끌어주게. 이전처럼 병사들의 임금은 내가 지불하겠네. 우린 자네처럼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해. 나보다 자네가 나보다 나은 지도자가 될 거야. 지휘권도 양도할 테니, 우리를 떠나지 말아 주게나.”

크리스티안은 의례적인 미소를 지었다. 아르투르는 궁정에서 자라난 사람이다. 미소의 가면 뒤에 숨겨진 진짜 감정을 읽어내는 일은 자주 해보던 일이다.

‘이 자의 말은 진심이다. 적어도 지금은. 먼저 고개를 숙인 이상 몰아붙일 필요는 없겠지.’

“그렇게 결단해줘서 고맙네, 크리스티안. 자네와 계속 함께하게 돼서 기쁘군.”

어느 정도는 진심이었다. 아르투르는 이번 전투의 승리가 행운이 따라준 결과라고 생각했다. 앞으로도 그런 행운이 따른다는 보장은 없었다. 결국 큰 싸움을 위해선 등을 믿고 맡길 동료가 필요했다.

크리스티안은 재차 아르투르에게 맥주잔을 건넸다.

“백인을 벤 아르투르 경을 위하여 건배!”

“형제단의 미래를 위해서도 건배하겠네.”

두 기사는 잔을 부딪친 후 들이마신다. 맥주의 시원한 입가심을 느꼈다. 끝없는 축제가 이어졌다. 엘베르 마을은 일행을 위해 기꺼이 식량 창고를 열었고, 맥주와 빵이 쏟아졌다. 아르투르는 걱정을 놓고 술을 물처럼 들이마셨다. 오늘만큼은 자신이 생각해도 즐길 자격이 있었으니까.

저녁이 되자, 그들은 마을 중앙에 캠프파이어를 쌓아놓고 소와 돼지를 잡아 기사들을 대접했다.

“이렇게 식량 창고를 열면 겨울을 날 수는 있는 거요?”

아르투르가 촌장에게 되물었다.

“걱정 마십시오. 은인들을 위해 대접할 정도의 여유는 있습니다.”

아르투르는 마을의 식량 사정이 궁금하긴 했지만, 구태여 캐묻진 않기로 했다. 그들이 알아서 할 일이다. 이미 대접하기로 했던 것을 무르자고 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었고.

“물어보고 싶은 게 많소. 어째서 도파뉴 백작령이 이 꼴이 되었는지, 근방에 다른 도적들의 동향은 어떤지… 또….”

촌장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존귀한 기사님, 날이 밝으면 물으시는 모든 것에 대답해드리겠습니다. 부디 지금만큼은 즐겨주시지요. 저희가 은혜에 보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니까요.”

그리 말하며 술 한 잔을 따라주자, 아르투르는 재차 술을 들이켰다. 그는 일종의 해방감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의 힘으로 처음으로 뭔가를 이뤄낸 날이었다. 자신은 충분히 즐길 자격이 있었다.

촌장은 고귀한 신분이거나 특출난 자는 아니었지만, 반백년을 넘게 살아온 노인답게 눈앞의 젊은 기사가 어떤 심정일지, 무엇을 원할지 훤히 보고 있었다. 촌장은 말없이 캠프파이어를 가리켰다. 그곳에선 젊은 남녀들이 어울려 즉흥적인 춤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모든 것이 아르투르가 일상처럼 지내온 궁중 무도회에 비하면 뒤떨어졌다. 참석자들의 수준도, 장식도, 요리도. 그러나 아르투르는 어떤 화려한 무도회보다 황홀한 춤판이라고 느꼈다. 자신은 이제 소외된 외톨이가 아니라, 모든 참석자가 자신을 기다리는 축제의 주인공이었다.

아르투르는 분위기에 자신을 내던졌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이 이뤄낸 성과에 환희를 느끼며 축제를 즐겼다. 마주치는 남자마다 고개를 숙여 경의를 표했고, 자신과 춤추려는 여인들이 끊이지 않았다.

아르투르는 가슴속 깊은 곳의 공허함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밤이 깊어갔지만 아르투르는 이날을 결코 잊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오늘은, 자신의 가치가 증명된 날이다.

흥겨운 밤이, 점점 더 깊어져 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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