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아르투르가 막사를 나서자 케이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에쿠잘루스를 데려와 두었다.
“바로 가실 줄 알았어요. 잘했죠?”
아르투르는 피식 웃곤 케이를 쓰다듬어줬다. 등자에 발을 걸친 그는 단숨에 에쿠잘루스의 등에 타올랐다. 에쿠잘루스는 활시위를 떠난 화살과 같은 속도로 달려 나갔다. 차가운 아침 공기가 아르투르를 맞이하며 폐에 신선한 활력을 불어넣는다. 말발굽 소리가 땅을 울리고, 나무로 둘러싸인 주변의 풍경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숲을 빠져나오자 언덕이 보였다. 그 너머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공격받는 마을과 도적들이 있으리라. 아드레날린이 신경을 타고 분비되어 아르투르를 흥분시켰다. 자신을 기다리는 전장은 어떤 곳인가.
에쿠잘루스는 힘차게 언덕을 타올랐다. 언덕을 오르자 환하기 그지없는 햇살이 그를 맞이했다. 새까맣게 모여든 무장한 무리가 강을 건널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너머에 있는 마을 사람들은 조막만 한 목책에 의지해 쟁기나 삽을 들고 고향을 지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르투르가 유심히 살펴보니, 도적들의 진영에 포승줄에 묶인 채 무릎 꿇려진 농부들이 보였다. 그들은 차례로 농부들의 목을 베어 창대에 내걸었으며 자기들끼리 낄낄거리며 마을 사람들을 도발했다.
“겁쟁이들아! 이리 나와서 복수를 해봐라!”
“고향 사람이 죽어 가는데 아무것도 못 하는 패배자 놈들!”
“내게 맞설 자 누구 없느냐!”
산적들은 자기네들끼리 낄낄대며, 상스럽고 외설적인 모욕을 퍼부었다. 숨을 고르던 아르투르는 전율과 분노를 함께 느꼈다.
‘이거야. 이런 싸움을 위해 날을 갈고 닦아온 거야. 내 검은 형제간의 권력 투쟁을 위해 준비된 게 아니야. 진짜로 내가 싸워야만 하는 이유, 명예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겠다고 했던, 맹세를 위한 싸움은 바로 이런 거였어.’
아르투르는 일종의 환희를 느끼고 있었다. 크리스티안과 논쟁을 벌이며 떠오르던 상념들이 사라졌고, 자랑스러운 싸움이 자신을 기다린다는 기대감이 차올랐다. 눈앞의 악당들에게 치솟는 분노는 차갑고 예리하게 정제됐다.
“내가-! 너희와 맞서겠다!”
아르투르의 고함이 쩌렁쩌렁 울렸고, 충직한 군마는 콧김을 내뿜으며 언덕을 타고 내려갔다. 영리한 군마들은 자신이 사지로 가는지, 아닌지 정도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망설임 없이 발을 내딛는 것은, 주인에 대한 충직과 신뢰 덕분이었다. 어디로 가든 자신은 아르투르와 함께였다. 그가 자신의 방패가 되어줄 것이고, 자신은 그의 발이 되어줄 것이다.
기사와 군마는 하나가 되어 무장한 백 명의 사내들을 향해 돌진했다. 말발굽에 짓눌린 풀들이 흩날리며 땅이 울린다.
두두두두두두두두두 -
후방을 경계하던 도적들은 달려오는 기병을 보고도 의아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어느 미친 자가 홀로 백 명을 상대로 싸움을 걸겠는가? 사자가 오는 것이겠거니 하며 달려오는 기사를 바라봤다. 점차 자신들에게 가까워지자, 보초병들이 소리쳤다.
“멈추어라! 네 정체를 밝혀라!”
아르투르는 그의 말을 들을 수 없었다. 불의에 대한 분노와 전투의 흥분, 명예로운 싸움을 위한 환희가 하나 되어 그의 몸을 움직였다. 멈추지 않고 질주해오는 기사를 보며, 보초병들은 재차 소리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고, 보초병들은 그제야 다른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저, 저 미친 새끼! 적, 적이다! 후방에 적!”
전리품을 어떻게 정산할지 주사위를 굴리고 있던 도적들은 적이 나타났다는 소식에 후방을 돌아봤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건 단 한 명의 기병뿐이었기에, 고참 도적들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저마다 무기를 들어 올렸다.
“어느 애송이 기사가 정의감에 미쳤나 보군. 잘됐어. 본보기를 보이자고.”
도적대장 볼프강이 웃음을 터뜨리며 자신의 장창을 들어 올렸다.
“저놈은 잡아서 산 채로 가죽을 벗긴 후 사지를 하나씩 포를 뜨는 거다! 몸값은 필요 없어. 귀족 놈들에게 본보기를 보내는 거야! 궁수대, 준비!”
볼프강의 말에 마을을 향해 활을 쏘던 궁병들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한 고참 도적은 돌진해오는 기사의 무모함에 웃음을 터뜨렸다.
“야, 야, 오게 둬. 불쌍하잖아.”
볼프강은 눈쌀을 찌푸리며 호통 쳤다.
“멍청이 새끼들아, 당장 쏴! 상대는 완전 무장한 기사란 말이다. 당장 말부터 쏴서 낙마시켜!”
볼프강의 불호령에 궁병들은 그제야 화살을 메기고 아르투르를 향해 조준했다. 그들은 더 이상 웃지 못했다. 황소만 한 크기의 군마가 지축을 울리며 돌진하고 있었고, 그 위에는 거구의 기사가 흉흉한 녹색 눈을 부라리며 마상 창을 앞으로 내세우고 있었다. 실로 엄청난 위압감이었다.
“쏴! 당장 쏘라고!”
그러나 날아가는 화살들은 족족 빗나갈 뿐이었다. 성급하게 쏜 탓도 있었고, 에쿠잘루스의 속도가 워낙 빨랐다.
“창, 창 쥔 놈들 앞으로 가! 뭐하냐! 앞으로 가라고! 궁병대는 새로 장전!”
볼프강은 허둥대는 부하들을 앞으로 떠밀었다. 엉거주춤 창을 쥔 도적들은 지시에 따라 아르투르를 겨누긴 했지만, 돌격해오는 아르투르를 보며 직감했다.
앞에 서면 반드시 죽는다.
그런 생각이 들자 창병들은 앞에 다른 이가 나서주길 바라며 뒷걸음질 쳤다. 모두가 그렇게 하자, 전열이 점차 뒤로 물러났다. 한 얼간이는 아예 창을 버리고 뒤로 내뺐다. 한 명이 도망치자 다른 이들도 똑같이 했다. 누구도 감히 아르투르의 앞을 가로막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흰색 폭풍처럼 들이닥친 기사는 도망가는 창병들을 무시하고, 적의 중심부를 향해 뛰어들었다. 에쿠잘루스가 발굽을 들어 올리며 도약했다. 일선에 선 창병들이 달아나자 도적들은 모두 어찌할 줄 몰랐다. 모두 같은 생각을 했다.
‘저놈이랑 마주치면 안 된다. 딴 놈이 막아주겠지!’
애초에 싸우기 위해 모인 집단이 아니었다. 그들은 약자들을 괴롭힐 땐 누구보다 대담하고 잔인했지만, 자신이 위험에 처하자 순한 양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도적질도 살아남아야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아르투르는 흩어지는 도적들의 광경을 똑똑히 목격할 수 있었다. 그는 도망치는 도적들을 마구잡이로 베어 넘기는 대신, 신속하게 도적들을 훑었다. 가장 경험 많고 무장이 훌륭한 놈들을 먼저 처치해야 했다. 제아무리 자신이 뛰어나도 한 명, 둘러싸이게 되면 죽음을 면치 못할 터였다. 그러니 애초에 뭉칠 수 없게 만들어야 했다.
‘등 뒤를 보이면 잔챙이고, 무기를 놓지 않고 천천히 물러나는 놈들이 진짜배기다.’
때마침 아르투르의 눈에는 견고한 방어진을 형성 중인 다섯 명의 고참 도적들이 보였다. 아르투르는 곧바로 고삐를 당겨 방향을 우측으로 틀었고, 에쿠잘루스는 번개같이 달려들었다. 마상창은 보병들의 창보다 길기에, 아르투르가 먼저 공격했다.
콰지끈 - !
뼈가 으스러지고 살점이 꿰뚫리는 소리가 들렸다. 가속력을 고스란히 받은 아르투르의 괴력이 일격에 세 명을 꿰뚫어 죽였다. 목이 꿰어지고, 두개골이 산산이 조각나며, 심장이 터졌다. 남은 둘은 무기를 뽑기도 전에 에쿠잘루스의 질량에 치여 온몸이 으스러지고, 뒷발굽에 맞아 턱뼈가 부러졌다.
아르투르는 곧바로 다른 고참병들을 향해 돌진했다. 오른손에는 여명, 왼손에는 도끼였다. 한 손이 한번 휘둘러질 때마다 한 명이 여지없이 쓰러졌다. 제대로 된 방어구를 갖추지 않았기에 맞는 족족 목숨을 잃었다.
“덤-벼-라! 쓰레기들아!”
도적 무리는 아르투르의 번개 같은 공격에 당황한 채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풋내기들을 지휘해야 할 고참들이 쓰러진데다가, 살아남은 고참이란 자들도 자기 목숨이 우선이었지 전투의 승패나 동료 따윈 한창 우선순위가 떨어졌기에 생기는 문제였다.
여명의 날이 번득이며 도적들을 베고, 찌르고, 찢어서 조각냈다. 도끼는 다섯 번째로 휘둘러질 때 두개골에 너무 깊이 박혀 부러지고 말았다. 그 사이 에쿠잘루스는 적 사이를 종횡무진하며 아르투르가 쓰러뜨린 적들을 짓밟아 마무리하고, 뒷발로 걷어찼다. 삽시간에 스무 명에 달하는 인원이 쓰러졌다.
몸을 피했던 볼프강은 고참들을 추려 반격을 개시했다. 궁수들은 에쿠잘루스를 겨냥하고, 창병들이 그 앞을 지켰다. 우습게도 자신은 장창을 들고 후방에 섰지만.
“쏴라! 도망치는 놈은 나한테 죽는다!”
속도를 잃은 에쿠잘루스를 향해 궁수들의 화살이 잇달아 날아갔다. 그러나 사냥용 활로는 철판으로 된 마갑에 흠집을 내는 게 전부였다. 몇몇 녀석들은 도끼나 창을 던졌지만 그것은 아르투르가 모두 여명을 휘둘러 쳐내버렸다.
아르투르는 자신에게 대항하던 덩치 큰 도적의 머리를 날려버린 후, 볼프강의 정예들을 향해 돌격했다. 볼프강을 향해 눈을 부라리면서.
“너는 부하들의 뒤에 숨는 것 밖에 할 줄 모르느냐! 구차한 목숨이 건지고 싶거든 도망쳐 보아라!”
볼프강은 이를 악물고 앞으로 나섰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뒤로 빠진다면 남는 것은 전열의 붕괴였다. 그는 장창을 앞으로 내세웠고, 다른 세 고참 도적들도 그렇게 했다. 그러나 아르투르는 멈추지 않고 에쿠잘루스를 몰아 돌진했다.
‘어리석은 놈. 장창의 벽 앞에서 뭘 어찌할 셈이냐. 우리 창이 네놈보다 길다. 그 같잖은 말만 쓰러지면, 네놈도 끝이야!’
두 대열이 충돌 직전에 이를 때, 아르투르는 허벅지를 움직여 에쿠잘루스에게 신호를 보냈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돌격하던 에쿠잘루스는 충돌 직전, 발굽을 들어 올리며 도약했다. 자그마치 2m는 될법한 높이었다. 자세를 낮추고 장창으로 에쿠잘루스의 몸통을 겨누고 있던 도적들은 할 말을 잃었다.
에쿠잘루스는 주인의 명령을 믿고 하늘로 몸을 날렸고, 그 결과 장창들을 피해 볼프강의 머리를 짓밟으며 착지했다. 두개골이 부서지고 뇌수가 터져 나왔다. 다른 창병들은 멍-하니 자신들의 창을 뛰어넘는 군마를 바라보다 여명에 목숨을 잃었다.
기병 앞에 놓인 궁수의 운명은 뻔했다. 창병들이 쓰러지자 그들은 곧장 뒤로 돌아 달아났지만, 모두 따라잡혀 죽었다. 더는 누구도 아르투르에게 대항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대부분의 고참병이 죽고 지휘관마저 쓰러진 이상, 남은 도적 무리는 깡패나 다름없었다.
그들은 사자 앞의 들개처럼 쓰러져갔다. 아르투르는 이전에 했던 일을 반복했다. 베고, 찌르고, 자르고, 으스러뜨린다. 전신에 피를 뒤집어쓴 아르투르는 마치 제집처럼 도적들의 무리를 오가며 그들을 휩쓸고 다녔다. 본능적인 공포가 도적들을 엄습했다.
어떤 용기 있는 도적이 외쳤다.
“도망치면 다 죽는다! 멍청이들아! 놈도 인간이다! 곧 지칠 거야!”
여명이 번득이고, 그것이 놈의 마지막 유언이 됐다. 아르투르는 동료들을 독려하거나, 질서를 지킨 채 후퇴하는 자들을 우선으로 공격했다. 그 일이 몇 번 반복되자 누구도 감히 재정비를 주도하지 못한 채, 자신의 목숨만을 구하기 위해 달아났다.
아르투르는 여전히 활력이 넘치고 분노는 꺼지지 않았다. 가장 많은 무리가 도망치는 곳으로 난입해 칼날을 휘둘렀다. 에쿠잘루스도 더는 참지 않고 자신의 흉포한 성미를 드러냈다. 일방적인 학살이 이어졌다.
“맙소사. 발타리아시여, 제가 무엇을 보고 있는 겁니까?”
크리스티안의 탄식에, 이 광경을 보고 있는 모두는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하고 있었으니까.
백 명의 사람들이 단 한 명을 피해 사방으로 달아나고 있는 광경을.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