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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14화 (14/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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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닥, 타닥.

모닥불이 타올랐다.

“마스터, 지금 저희가 가는 곳은 어떤 곳이죠? 가보신 적 있나요?”

케이의 호기심 가득한 목소리. 아르투르가 모닥불에 새 장작을 집어넣으며 답한다.

“도파뉴 백작령. 풍요롭고 부유한 영지지. 수도 지역과 비교해도 모자람이 없어. 물이 풍부해 농사를 짓기에 비옥하고, 질 좋은 철광산들도 많아. 중계 무역에도 최적의 입지고. 5년 전쯤 아버지와 방문했을 땐 번영하는 영지였어.”

선왕이란 말에 케이가 눈을 껌뻑인다.

“우와, 아버지라면 선왕 말씀이시죠?”

아르투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저 말해줘요. 대왕과 백작령을 방문했을 때 무슨 일이 있었나요? 영주는 어떤 사람이에요?”

케이의 호기심 어린 눈빛이 빛났다.

“왕의 행차에 따르는 일들이 있었지. 큰 연회가 있었고 영주의 가족들이 왕실 행렬을 맞이했어.”

“예쁜 아가씨들도 나왔겠고요?”

아르투르는 피식 웃었다.

“그랬지. 한껏 치장하고 멋을 부린 숙녀들이 많았어. 연회장에 들어가지도 못해서 춤은 신청도 못 했지만 말이야.”

“아….”

“어쨌든 그 영주는 좋은 사람이었어. 적어도 나나 왕실 가족들을 대할 때는 그랬지. 정말 성심성의를 다해 아버지를 모셨고, 왕실 일원들이 불편함 하나 느끼지 않게 최선을 다했다. 또 명예를 아는 기사였지. 중년의 나이임에도 젊은 기사들과 마상 시합을 치러 승승장구했거든. 내 마스터가 아니었다면 우승은 그의 차지였을 거다. 삼촌이 평하길 영민한 자라고도 했지. 자기 영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잘 알고 있다면서.”

케이가 고민하는 표정이 됐다.

“어쩌다가 그런 사람의 영지에 도적들이 들끓게 된 걸까요?”

“나도 모르겠다. 가면 알게 되겠지.”

낮은 중저음의 남성 목소리.

“전대 도파뉴 백작은 얼마 전에 죽었습니다. 경. 페르넬 대왕이 승하하실 무렵이었죠.”

카밀의 목소리였다. 병사들을 대표하는 지위인 아밋서텐이자, 형제단에서 가장 뛰어난 궁수. 아르투르는 반기는 목소리로 그를 맞이했다.

“아밋서텐 아닌가. 이름이 카밀이라고 했지? 이리 와서 같이 앉지. 그나저나 더 자세히 말해주겠나? 전대 백작이 죽었다고?”

//“대화에 참여하게 된 걸 환영하네. 더 자세히 말해주겠나? 전대 백작이 죽었다고?”

카밀은 몸을 녹이기 위해 모닥불 주변에 앉았다. 가을밤의 추위는 차가웠다.

“2년 전 마상시합을 하다 낙마 사고로 식물인간 상태가 됐다가, 얼마 전에 죽었습니다.

페르넬 대왕께서 승하하실 쯤이었을겁니다. 후계자라고 남은 건 열 살짜리 소녀고, 섭정은 젊은 아가씨입니다. 그러니 영지를 노리는 야심가들이 몰려들기 딱 좋은 상황이죠.” 카밀은 과거를 돌이키며 말했다.

“게다가, 경의 기억과는 달리 도파뉴 백작은 악질적인 인간이었습니다. 온갖 구실로 백성들을 수탈했죠. 초야세를 내지 못한 농노 부부에게 실제로 초야권을 행사했다는 소문까지 돌 정도였으니까요.”

아르투르는 눈살을 찌푸렸다. 초야권은 야만인들의 관습이었다. 데네토르가 세워지기 한창 전의 이야기다. 지금도 왕과 영주들은 초야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만, 그건 결혼세를 거두기 위한 명분에 불과했다. 실제로 행사했다간 교회로부터 엄청난 질타를 받을 것이 분명했다. 아르투르의 표정을 살피던 카밀이 설명을 덧붙인다.

“실제로 행사했는지는 모르지요. 어쨌든 소문은 일말의 진실을 담고 있기 마련입니다. 영주가 그 지경이니 장원을 버리고 탈출하는 농노들이 많았죠. 이들이 외부에서 온 무력 집단들과 합류하게 되면서 영지가 그 지경이 된 겁니다.”

“설명 고맙군. 꽤 자세히 아는 것 같은데, 자네는 그런 정보들을 어디서 얻은 건가?”

“도파뉴 백작의 봉신이 제 고용주였습니다. 백작에 대해 이런저런 소문을 접할 수 있었죠. 일부는 사실이었고요. 지금 저희가 가는 땅은 반쯤 무법 상태나 다름없는 곳이라고 봐야 할 겁니다. 평시라면 왕실에서 개입했을 상황이죠.”

‘그렇지만 큰형님은 그렇게 하지 않겠지.’

카밀은 아르투르에게 깍 뜻이 인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다시 순찰하러 가보겠습니다. 좋은 밤 되십시오. 아르투르 경.”

케이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느낌이 나는 데요.”

“실제로도 그럴 거야. 저런 전문 군인이라면 어딘가 정착하고도 남을 보수를 받았을 거다. 정착하지 않은 이유가 있겠지. 아니면 흔히 그러듯 술과 여자로 재산을 탕진했거나.”

“제가 볼 때 그런 사람은 아닌 것 같네요. 마스터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알 수 있어요. 비굴하진 않되, 항상 예의를 차리죠. 어느 정도 분별력을 갖추고 있는 사람 같아요. 어떤 사람일지 궁금하네요.”

“너무 신경 쓰지 말고 잠이나 자거라. 내일부터 긴 여정이 될 테니까.”

***

형제단은 여러 마을을 거치며 도파뉴 백작령으로 향했다. 크리스티안은 도착한 마을에서 돈을 지불하고 식량을 구입했다. 병사들에게는 민가에서 문제를 일으키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고, 그 지시는 잘 지켜졌다. 아르투르는 그게 얼마 전에 한 명을 처형한 효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르투르는 다른 단원들과 친해지고자 노력했지만, 별로 마음에 맞는 이를 찾지 못했다. 병사들의 대부분은 크리스티안에게 지급 받는 보수를 술과 여자로 탕진하는 하루살이 인생들이거나, 어딘가 과거가 의심스러운 자들이었다. 그들의 말과 행동은 모두 거칠었다. 이런 무뢰배들을 통제할 수 있는 크리스티안의 수완에 감탄했다.

크리스티안과는 유용한 대화를 나누곤 했다. 아르투르는 시대의 명장들의 곁에서 보고 배운데다가, 병법서라면 외울 정도로 읽어 크리스티안에게 해줄 말이 많았고, 그는 소규모 군사 집단의 지도자로서 모병 방법과 병사를 유지하는 요령에 대해 가르쳐줬다. 생각보다 둘은 공통점이 많았다. 명성과 권력을 얻고자 하는 야망, 일신의 능력만 믿고 세파에 몸을 맡길 수 있는 과감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따금 드러나는 가치관의 차이는 커 보였다.

‘어쩐지 이 녀석에겐 정이 안 간단 말이야.’

아르투르는 당분간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크리스티안을 지켜보기로 했다. 그는 분명히 유능하다. 하지만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그가 가장 마음에 들어 한 이는 카밀이었다. 그는 평소에는 병사들의 군율을 관리하는 한편, 그들의 고충을 두 지휘관에게 정중히 전달하는 역할도 수행했다. 자기 일과가 끝나면 홀로 맥주를 한잔 하고 조용히 자거나, 궁술 연습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케이는 그나마 나이가 비슷한 크리스티안의 종자와 친분을 쌓으려 했지만, 둘의 성격은 잘 맞는 편이 아니었다.

“마스터, 놈과 친해지기 싫어요. 성격이 고약하다고요.”

“나도 마찬가지다. 분명 목표도 비슷하고 능력도 있는데 마음이 안 간단 말야. 사람을 도구로 대하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그렇지만 일정한 군율을 유지한 채 군사 집단을 유지하는 건 분명한 그의 재능이었다. 적어도 당분간은 함께 하는 것이 그에게 좋았다. 또, 오래 보다 보면 그의 새로운 면모에 대해서도 배울 수 있을 터였다.

두 사람이 형제단에 한참 적응해나갈 때, 열흘에 해당하는 거리를 행군한 형제단은 목적지에 이르렀다. 도파뉴 백작령에 도착한 그들은 이전까지의 영토와는 확연히 달라진 반응을 통해 그들이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농부들은 저 멀리에서 아르투르와 크리스티안이 앞에 선 무리를 보자마자 꽁지가 빠져라 마을로 도망쳤다. 얼마 뒤, 인근 마을에서 땡 - 땡 - 땡 하는 종소리가 들리더니, 마을 청년들이 쟁기와 낫, 사냥용 활 등을 꺼내와 목책에 자리 잡았다.

형제단은 개의치 않고 마을로 접근하던 중, 목책 위에서 가장 체격이 큰 민병대원이 소리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당신들은 누구요! 무슨 목적이고!”

목책 위에 선 민병대원들의 눈빛은 단호했다. 쟁기를 불끈 움켜쥔 그들의 손아귀에선 고향과 가족을 지키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느껴졌다. 카밀이 앞으로 나서 외쳤다.

“우린 드류 숲의 형제단이오! 영주를 만나러 성으로 가고 있소. 마을에서 식량을 구매할 것을 희망하오.”

그때 크리스티안이 손을 내저어 카밀을 멈추게 했다.

“아니! 식량은 너희가 무상으로 제공해야 한다. 식량만 제공한다면 너희 마을은 해를 입지 않을 것이다.”

그 말에 에쿠잘루스에 타고 있던 아르투르가 크리스티안을 바라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식량만 건네주면 가는 거요?!”

“그래! 기사의 명예를 걸고 약속하지!”

“그렇다면 마을에서 멀어지시오! 우리가 중간 지점에 밀 포대를 가져다줄 테니 그것을 가지고 떠나시오.”

아르투르는 크리스티안의 옆에서 말했다.

“돈이 부족하다면 내가 보태겠네. 강제로 징발할 필요는 없어. 농민들이 겨울을 버티려면 돈이나 식량 둘 중 하나는 필요할 걸세.”

크리스티안도 역으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르투르가 이의를 제기할지 전혀 몰랐다는 양.

“우린 저들을 위해 도적들을 토벌하러 왔네. 마땅히 식량 정도는 제공해줘야지. 돈은 넣어두게. 지금부터 돈을 주고 식량을 구매하면 다른 마을도 돈을 받으려 들 거야.”

“쯧, 어쩔 수 없지.”

아르투르는 일단은 마지못해 수긍했다. 지금까지 형제단을 이끌어온 건 크리스티안이었다. 경험 많은 이의 지도력은 인정하는 편이 좋으리라.

마을에선 네 포대의 밀을 가져다주었고, 크리스티안은 이것이 부족하다며 두 배의 분량과 닭도 요구했다. 말다툼이 벌어졌지만, 눈을 부라리는 무장 병사들의 위협에 농민들은 크리스티안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했다. 아르투르는 못마땅한 눈으로 크리스티안을 쳐다봤다.

들리는 마을마다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도움 요청을 가장한 위협이 있었고, 마을들은 마지못해 자신들의 귀중한 식량을 무상으로 내주었다. 참던 아르투르는 크리스티안을 보며 정색했다.

“크리스티안. 더는 식량을 징발하지 말게. 우린 도적단을 토벌하러 온 거지, 도적이 되려 온 것은 아니지 않나.”

“도적이라니? 우린 정당한 대가를 받고 있을 뿐이야. 스무 명의 인원을 먹여 살리고 월급까지 주려면 어쩔 수 없네. 게다가 우린 영주를 대신해 그들을 보호해주고 있으니 세금을 받은 셈 치면 돼.”

“보상은 농민이 아니라 영주에게 받아야겠지. 저들에겐 생명이 걸린 문제일 수 있어. 더 이상 그러지 말게.”

“이 순진한 친구 보게, 누가 자기 영지민들을 챙겨줬다고 보상해주겠어? 우리가 스스로 챙기는 수밖에 없어. 결국 집단을 이끌려면 항상 물자와 자금에 예민해야 한다고.”

아르투르의 차가운 시선을 맞서 크리스티안은 말을 길게 늘어놨다.

“아르투르, 우리는 방랑 기사야. 영지가 있는 한가한 녀석들과는 다르다고. 찬 빵, 더운 빵 가릴 처지가 아닐세. 기회가 될 때 뭐든지 긁어모아야 해.”

“하지만 이전의 마을들에선 식량에 대한 비용을 지불했을 텐데?”

“그 지역은 우리가 없이도 잘 돌아갔으니까 말야. 굳이 우리의 보호가 필요 없는 곳이잖아?”

아르투르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진짜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닐 텐데.”

“무슨 말이지?”

“자네는 여태까지 지나온 마을들은 영주의 보호 아래 있어서 건드리기 싫었던 거고, 도파뉴에선 영주가 제대로 이들을 보호하고 있지 못하니 두려울 것이 없는 것 아닌가?’

“누가 들으면 우리가 강도라도 되는 줄 알겠어.”

두 사람 사이의 긴장감이 고조됐다. 아르투르는 지금 우리가 한 일이 강도질과 다를 게 뭐냐고 되묻고 싶었지만, 일단은 억눌렀다. 그의 말대로 방랑 기사와 왕실 기사는 행동이 달라야만 한다. 방랑 기사가 그렇게 행동했다간 굶어 죽기 딱이고, 아무것도 이뤄내지 못할 터였다.

그렇다고 위협으로 재물을 갈취해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건 방랑 기사가 아니라 산적이나 강도나 다름없었다. 실제로 많은 방랑기사가 강도로 전락하곤 했다.

“-크리스티안.”

아르투르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으려는 순간, 막사가 펄럭이며 카밀이 뛰어 들어왔다.

“기사님들, 회의 중에 죄송합니다. 하지만 급한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크리스티안도 아르투르를 바라보며 무언가 말하려던 참에, 두 사람은 동시에 들어온 카밀을 바라봤다.

“인근 마을에서 지원 요청이 왔습니다. 백여 명이 넘는 도적 무리가 마을을 포위했다는군요.”

두 사람은 서로 하려던 말을 집어삼키고, 현장을 직접 보기 위해 군마를 타고 달려 나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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