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크리스티안은 개울을 건너왔고, 아르투르도 경계심을 풀었다.
“나머지 둘은 그냥 데려가라. 몸값은 필요 없다. 크리스티안 경.”
“호의에 감사하네. 아르투르 경.”
크리스티안은 뒤를 돌아보며 부하들을 향해 외쳤다.
“머리를 쓰란 말이다. 머리를.”
크리스티안은 손가락으로 붙잡힌 포로 한 명의 머리를 쿡쿡 찌르며 말했다.
“자기 신분도 잊고 경거망동하는 놈은 가만두지 않겠다. 마을에서 기사를 상대로 시비를 걸어? 이런 멍청한 놈들은 우리 형제단에게 해를 끼칠 뿐이야. 오늘만 살 놈들처럼 굴지 마. 이 짓도 다 먹고살자고 하는 거 아니냐.”
쓰러진 포로를 보며 동요가 일던 병사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내가 누누이 말했지. 행패는 부려도 될 만한 곳에서만 부리라고. 술집에서 기사를 상대로 시비를 걸고, 그것도 모자라 무기를 뽑아? 상대가 대체 누군 줄 알고 그런 멍청한 짓을 한 거냐? 함부로 시비 걸고 다니지 마라. 우리 형제단은 아무나 습격해서 약탈하는 산적단이 아니다. 그런 짓거리론 오래 못 간단 말이다.”
크리스티안의 목소리는 격정적이고 높았다.
“다시 경고한다. 경거망동하는 놈은 참하겠다. 주어진 임무에 충실해. 그러면 내가 너희 다 한 몫씩 잡게 해줄 테니까.”
병사들을 훈계한 크리스티안은 아르투르에게 재차 사과했고, 아르투르는 고개를 끄덕여 사과를 받아들였다.
“아르투르 경. 사죄의 차원에서 닭 한 마리 대접하고 싶군. 초청을 받아주겠나?”
“그렇게 하지. 크리스티안 경.”
두 사람은 언제 대치했느냐는 듯 미소를 지었다. 아르투르도//는 일단 화가 누그러졌다.
‘크리스티안 일당과 어울려보는 것도 좋겠어. 일단 녀석들에 대해 알아볼 법 하니까.’
식사는 금방 준비되었다. 크리스티안의 종자인 나이 많은 소년이 불을 피운 후 닭을 잡아 목을 비틀었다. 노릇노릇하게 닭이 구워지는 동안, 크리스티안과 아르투르는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눴다. 병사들이 아르투르를 바라보는 시선은 곱지 않았다.
‘이들은 여전히 날 경계하고 있어. 내가 누군지 알아보려는 거야. 만약 유력 가문의 자녀거나 봉신이라도 되면 큰일일 테니.’
아르투르가 지난 추격전에서 배운 건 신중함의 필요성이었다. 많은 뛰어난 기사들이 용기와 만용을 착각해 명을 달리한다고 했다. 제아무리 뛰어난 기사라도 등 뒤의 비수에 쓰러지는 일도 많다. 그런 만큼 아르투르는 대화에 응하되, 신경을 곤두세워 불의의 싸움에 대비했다.
“걱정할 필요 없네. 아르투르 경. 사실 녀석은 꼬투리를 잡아서 내쫓거나 죽일 생각이었거든. 그런 와중에 자네가 와서 일이 쉬워졌을 뿐이라고.”
그런 아르투르의 생각을 읽은 양, 크리스티안이 타들어 가는 말했다. 닭이 구워지며 노릇노릇한 냄새를 풍긴다.
“자네, 방랑기사지?”
아르투르는 대답을 신중하게 고려했다. 자신이 모시는 주군이 없다는 걸 알게 되면 이들의 태도가 돌변할까? 그렇다면 이들 모두와 싸워 이길 수 있을 것인가?
‘애초에 그런 걸 따질 거면 홀로 이곳으로 쳐들어왔으면 안 되지.’
아르투르는 흥분해서 신중하지 못한 판단을 했다고 생각했다. 일대일이라면 누구와 싸워도 이길 자신이 있었지만, 자기가 무적이 아니라는 것은 지난번 싸움에서 익히 깨달은 바였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지금은 차라리 대범하게 나서는 게 훨씬 나았다.
“말한대로 난 방랑기사다. 자네처럼 말이지.”
“아주 잘 됐군. 아르투르 경, 나와 함께 일하지 않겠나?”
아르투르는 무언의 눈빛을 보냈다. 추가적인 설명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방금 자네가 봤다시피 내가 이끄는 무리는 아주 엉망이야. 일확천금을 노릴 생각만 하는 애송이들, 갈데없는 퇴역병사, 오늘만 사는 불한당… 어찌 보면 낙오자들만 모인 집단이지. 이대로는 제대로 된 군사 집단이 될 수가 없어.”
크리스티안은 잘 구워진 닭의 다리를 뜯어서 건네줬고, 아르투르는 닭다리를 받아 한입에 넣고 질겅질겅 씹었다.
“내가 이놈들 가르치고, 통제하는 것도 한계가 있지. 나 혼자로는 말이야. 지금 나는 동등한 입장에서 협업해줄 동료가 필요하네. 애송이들에게 군기를 가르치고 앞장서서 싸울 사람이 필요해. 난 그게 자네가 되어줬으면 해. 혼자서 무장 병사들의 소굴을 찾아올 수 있는 패기를 지닌 용맹한 기사라, 내가 정말로 찾던 동료야.”
“-내가 왜 자네의 휘하로 들어갈 거라고 생각하나?”
아르투르가 크리스티안을 내려다보며 예리하게 물었다.
“내 부하가 되라는 이야기가 아니야. 나와 동등한 입장으로 합류해달라는 거지. 형제단의 공동 지도자로 말이야. 그리고 난 자네의 눈빛만 봐도 알겠네. 자네도 나 못지않은 야심가라는 거 말이야. 뭔가를 갈망하는 그 눈! 우리 같은 방랑 기사들에게 절실한 것이지.”
크리스티안의 푸른 눈동자가 아르투르를 또렷이 바라봤다. 아르투르는 닭다리를 뜯으며 그를 바라봤다.
“나도 자네와 같은 방랑 기사다. 서임 받은 영지에 남을 수도 있었지만 마을 하나 다스리며 늙어가는 건 내 꿈이 아니었어. 그래서 홀로 뛰쳐나와 형제단을 꾸린 거지. 페르넬 왕이 죽고 세 왕자가 왕국을 나눠 가졌으니, 머잖아 큰 전쟁이 벌어질 거야. 그러면 무력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거고, 우리에겐 신분 상승의 기회다. 그때를 위해선 가능한 한 휘하의 사람들을 늘려놔야 해.”
크리스티안은 최대한의 설득력을 담아 아르투르를 바라봤다.
“난세는 곧 혼돈의 시대지. 하지만 혼돈은 위로 올라갈 사다리일 뿐이야. 우린 지금보다 나은 것을 가질 힘과 권리가 있지. 힘을 합치자고. 그리고 같이 위로 올라가는 거야. 나와 함께 하지.자네가 합류해준다면 훨씬 많은 일을 해볼 수 있을 거야. 어떤가?”
아르투르는 닭다리를 입에 문 채 생각했다. 크리스티안의 말대로 형제단은 정예 군사 집단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군사 집단의 모습을 그럭저럭 갖추곤 있었다.
‘내 왕국을 만들기 위해서는 결국 군사력이 필요해. 나 혼자로는 할 수 없는 일이지. 이들과 합류하는 게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겠어.’
“일단 함께 합류하지.”
아르투르가 뼈만 남은 닭 다리를 뒤로 던지며 말했다.
‘마음에 걸리는 건 있지만… 정 문제가 되면 헤어지면 그만이다. 이 남자가 어떻게 병력과 인원을 모으고 유지하는지는 곁에서 배울 가치가 있겠어.’
크리스티안은 아르투르에게 오른손을 내밀었고, 아르투르는 그것을 꼭 잡았다. 두 기사는 나름의 속셈을 가지고, 하지만 서로의 필요에 의해 일단 손을 잡기로 했다.
***
“그렇게 됐다. 떠날 채비를 하거라.”
마을로 돌아온 아르투르는 케이에게 소식을 전했다. 그는 에쿠잘루스의 갈기를 빗질해 주고 있던 참이었다.
“예? 저희가 그 형제단이란 곳에 들어가게 됐다구요?”
케이는 의외라는 눈빛이었다. 그런 눈빛이었다.
“마스터가 뭐가 아쉬워서요?”
“궁금한 게 생겼거든. 영지도 없는 기사가 스무 명의 무장 병사들을 거느린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야. 단순히 마구잡이 약탈을 하고 다닌 거라면 금방 토벌 당했을 거야. 수완이 좋은 녀석이다. 눈치도 빠르고. 같이 일해 볼 가치가 있어.”
케이는 미심쩍은 눈치였지만, 마스터가 그렇다니 일단 따르기로 했다. 케이는 여관에 밥값과 숙박비를 정산했고, 아르투르의 지시에 따라 은화 한 닢을 소란에 대한 대가로 추가 지급했다.
케이는 마구간에서 에쿠잘루스와 당나귀를 끌고 나왔고, 두 사람은 형제단에 합류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이 도착하자 크리스티안은 팔 벌려 환영해줬다.
“어서 오게! 형제단의 새 일원이 된 것을 환영하지!”
형제단의 아밋서텐을 맡고 있던 중년의 사내도 아르투르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어서 오십시오. 아르투르 경. 저는 카밀이라고 합니다. 병사들의 대변인인 아밋서텐의 역할을 하고 있지요. 앞으로 당신 역시 상급자로 모시겠습니다.”
“장궁이라, 희귀한 무기를 쓰는군. 어디서 배운 건가?”
“페르넬 대왕의 밑에서 종군하며 익힐 기회가 있었습니다. 북구인들에 맞서 한창 군대를 이끄실 때였지요.”
아르투르의 얼굴에 갸우뚱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래? 선왕의 군대에 있던 사람이 왜 지금은 형제단에 합류해있는 건가?”
“뭐, 간단합니다. 전쟁이 끝나고 일부의 병사들만 남기고 해산시켰으니까요. 저는 달리 갈 곳이 없었고, 이곳저곳 적 없이 떠돌다 크리스티안 경에게 발탁되었을 뿐입니다.”
아르투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 호기심이 갔지만, 지금은 새롭게 알게 된 인원들과 안면을 트는 것이 중요해 뒤로 넘어갔다. 아르투르는 스무 명의 병사들과 함께 대화를 나눴다.
병사들은 처음에는 쭈뼛대며 아르투르를 대했다. 그들 무리에 새로운 기사가 합류한 것을 반기는 이들도 있었고, 모셔야 할 상전이 하나 늘어났다며 뒤로 한숨 쉬는 무리, 그리고 일전의 악연 때문에 경계하는 이들도 있었다.
‘같이 먹고 자다 보면 해결될 일이지.’
형제단원들과의 인사가 끝나자, 크리스티안은 아르투르와 향후의 진로를 논의했다.
“지금 식량은 풍족하지만, 병사들에게 줄 급료가 부족한 상황이야. 어떻게든 돈을 마련해야 하는 상황이지. 다행히 최근에 들어온 좋은 소식이 있어.”
“뭔지 궁금하군.”
“인근의 도파뉴 백작령에 도적들이 들끓고 있다는 소식이야. 백작은 자체 병력만으로 소탕을 어려워하고 있고, 상위 군주인 국왕은 형제들과의 싸움 때문에 도와줄 수 없는 상황이야. 우리의 도움이 절실할걸세.”
“썩 괜찮은 제안인데. 그런 정보는 어디서 얻은 건가?”
그 말에 크리스티안이 씩 웃었다.
“내 개인적인 비법이지만… 자네한테만 알려주지. 음유시인들만큼 소식에 빠른 이들은 드물어. 이 지방, 저 지방 옮겨 다니며 빌어먹고 사는 게 일이란 말이지. 그 친구들 생계를 좀 챙겨주면 쓸 만한 정보들을 얻을 수 있지.”
음유 시인을 통해서 정보를 수집한다라, 생각해보지 못한 발상이었다. 그 뒤로도 두 사람은 지도를 펴놓고 최적의 행군 경로를 논의하며 시간을 보냈다. 군사적 지식과 지리학에 있어선 주로 크리스티안이 아르투르의 말을 듣는 편이었다.
다음날, 아침이 밝자 두 기사는 스물한 명의 무리를 이끌고 도파뉴 백작령을 향해 움직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