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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11화 (11/248)

11

하늘에는 먹구름이 가득하고 세찬 비가 땅을 두들긴다. 진흙탕 범벅이 된 도로 위에서 한 청년과 소년이 군마와 당나귀를 잡아끌면서 나아가고 있었다.

“마스터! 도로가 온통 진흙탕입니다! 비를 피하는 게 좋겠어요!”

소년은 잔뜩 비에 젖어 머리카락이 쳐져서는, 물에 빠진 강아지 같은 모양새였다.

“그만 찡찡거려라! 조금만 더 가면 마을이 나온다!”

비가 갑옷에 부딪혀 튕겨 나가는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쏟아지는 폭우 사이로 희미한 불빛이 보였다. 에쿠잘루스는 이 폭우가 지겨운지 주인보다 앞서나가 진흙탕의 물을 첨벙 튀기며 문 앞으로 나아갔다. 진흙물이 아르투르의 갑옷과 얼굴에 튀었다.

아르투르는 손으로 얼굴을 닦아냈다. 빗물과 함께 진흙들이 휩쓸려 내려갔다. 발걸음을 옮기자, 불빛을 둘러싼 풍경이 뚜렷해 보였다. 3m 가량 되는 목책이 둥글게 둘러쳐져 있었다. 마을의 건물들도 똑같이 나무로 지어져 있었고, 인구수도 수백 명은 될 법한 크기였다.

아르투르는 목책의 문으로 다가가 쭉 밀어봤지만, 덜컹거리기만 할 뿐 열리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가?!”

아르투르의 울리는 목소리는 빗속에서도 선명했다. 대답이 없자 재차 목책의 문을 두들긴다.

쾅 - 쾅.

문이 떨어져 나갈 듯 흔들리자 문 위에 달린 구멍 사이로 한 남자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는 아르투르를 살피곤/의 얼굴을 힐끗 보고는 담장 위로 고개를 빼 들고 아르투르 일행을 살핀다.

“잘 차려입은 갑옷을 보니 기사 나리신가 보군. 뒤에 소년은 종자분이고.”

“네 말대로다. 서둘러 문을 열어라.”

“기다리시오. 요새 겉치장만 그럴듯하게 하고 다니면서 기사를 사칭하는 불한당들이 있어서 말이오. 당신이 정말 기사라면 깃발이 있어야 하지 않소? 섬기는 군주도 있을 것이고.”

아르투르는 입가에 뒤틀린 미소를 지었다. 제 놈이 군주들의 이름을 들어봐야 알아듣기나 하겠는가.

“나는 방랑기사다. 주군을 섬기지 않는 기사지. 깃발은 아직 만들지 못했고. 알았으면 문을 열어다오.”

“내 질문은 끝나지 않았소. 마을에 소란을 일으킬만한 사람들을 들이지 않는 게 내 일이란 말이오. 당신들은 누구고 어디에서 온 거요? 제대로 된 대답을 해주기 전에는 열어주지 않겠소.”

문지기는 손을 내저으며 대답을 촉구했다. 아르투르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져갔다.

“내 이름은 아르투르다. 아헨에서 왔고, 페르넬 대왕에게 기사 서임을 받았지. 내 종자의 이름은 케이지. 일주일 전에 내 종자가 됬고 센 강 유역의 양치기 출신이다. 이만하면 됬나?”

문지기는 여전히 미심쩍은 표정이었다.

“뭐라도 당신 신분을 확인할만한 게 있소?”

“당장 문이나 열어라! 이 비천한 문지기 자식아! 문 부수고 들어가서 네놈을 내동댕이치기 전에 말이다. 언제까지 나를 빗속에 세워둘 셈이냐!”

아르투르의 분노가 담긴 목소리는 문지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문지기는 결국 뭐라고 궁시렁거리며 문의 경첩을 열었다. 입 모양을 보니 뭐라고 말했을지 대충 추측이 갔다. 지가 기사면 다야, 작위도 없는 주제에. 뭐 그 정도 이야기로 보였다.

아르투르는 다시 차오르는 화를 꾹 눌러 참았다. 참자. 피곤해서 짜증이 나는 걸 거야.

곧 문이 열렸고 문지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아르투르의 반만한 키를 가진 사내였고, 아르투르를 올려다보며 태연한 척하고 있었다. 그러나 눈빛에 깃든 불안감은 숨길 도리가 없었다.

“거… 거… 문은 열어줬지만! 절대로 문제 일으키지 마시오. 얼마 전에 방랑기사를 자처하는 건달들이 마을을 휘젓고 다녀서 사람들의 시선이 좋지 않으니까. 진짜 기사라면 명예를 알 것이라 기대하겠소.”

“문지기 따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명예는 잘 알고 있다.”

콧방귀를 낀 아르투르는 에쿠잘루스와 함께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케이와 그의 당나귀가 뒤를 따랐다.

“여관은 어디 있나?”

아르투르는 거만하게 문지기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헹, 기사 나리가 알아서 찾으쇼.”

아르투르는 불손한 문지기의 태도에 짜증이 끓어올랐다. 그는 문지기의 멱살을 잡아 진흙탕에 내동댕이치는 상상을 했다. 아주 간단한 일이다. 마음을 먹고 손을 뻗어 녀석의 목덜미를 잡은 뒤 집어 던지기만 하면 된다.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그때 튕 -하는 소리가 나며 동전 한 닢이 문지기의 손바닥 위에 놓였다. 케이가 던진 것이었다.

“아저씨, 이해해줘요. 마스터가 하루 종일 비를 맞고 오셔서 기분이 썩 좋지 않으십니다. 몸을 좀 녹이고 싶은데, 여관이 어디 있나요?”

문지기는 동전 한 닢에 싱글벙글 웃더니, 조곤조곤한 어투로 말했다.

“어이쿠. 고맙다. 이 길목을 따라 쭉 들어가. 그러다 보면 조랑말이 그려진 나무 간판이 보일 거야. 그곳이 마을의 유일한 여관이다. 데이븐이 보냈다고 하면 주인장이 덤을 줄 거다. 착한 녀석, 복 받거라.”

“감사합니다. 아저씨.”

문지기는 웃음으로 답했고, 케이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아르투르가 못마땅한 눈으로 케이와 문지기를 번갈아 봤다. 문지기는 아르투르의 시선을 외면했고 케이는 아르투르를 잡아끌며 마을 안으로 걸어 나갔다.

문지기와 거리가 좀 멀어지자마자, 아르투르가 입을 열었다.

“케이, 방금 네가 한 일은 주제넘은 일이다. 종자가 할 일은 마스터를 보필하는 것이지 바락바락 대드는 녀석들을 잘 구슬리는 것이 아니다. 그건 기사의 종자가 할 일이 아니야.”

“죄송해요. 마스터. 하지만 저는 이게 마스터를 잘 보필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대로 놔두시면 그 사람을 때릴 것 같았거든요.”

“그래. 그랬을 수도 있지. 설령 그렇다 한들 네가 나설 일이 아니라는 거다. 그자는 기사에게 갖춰야 하는 합당한 예의를 갖추지 않았어. 경칭도 사용하지 않았고, 태도도 무례했지. 체벌을 당해 마땅하다.”

소년은 조심히 아르투르의 눈치를 살폈다. 아르투르가 화가 난 표정은 아닌 것을 확인하고, 말을 이었다.

“마스터, 조금만 배려심을 보이시는 것이 어떨까요? 비가 새는 처마에 앉아 온종일 앉아있는 문지기의 신세를 상상해보세요. 그 사람은 마스터가 진짜 기사인지 아닌지도 의심하고 있다고요. 그러니 그런 반응이 당연한 것 아니겠어요?”

“쯧, 궁전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절대 용납되지 않았을 일이다. 저런 놈을 진흙탕에 집어 던지는 건 아주 쉬운 일이야.”

“바로 그거에요. 마스터가 문지기를 집어 던졌으면 마을 자경대가 몰려왔겠죠. 그 뒤엔 소란이 벌어졌을 거고요. 그런 만큼 우리가 여관에서 몸을 녹이는 시간은 늦어졌을 거예요. 간편하게 동전 한 닢으로 시간을 샀다고 보시면 어떨까요?”

아르투르는 여전히 뚱한 표정으로 케이를 바라봤다. 케이는 그의 시선을 슬쩍 피해 눈앞에 나타난 3층 건물을 가리켰다.

“마스터, 저 건물이에요. 드디어 여관에 도착했다고요!”

케이의 손가락이 향한 곳엔 달리는 조랑말이 조각된 간판이 있었다. 건물 안에는 불빛과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입구 근방에서 토사물을 쏟아내는 행인이 있어, 이곳이 선술집인 것을 영락없이 나타내고 있었다.

아르투르는 곧바로 선술집의 문을 거세게 노크했다.

“주인장 있는가!”

여전히 안에서는 왁자지껄한 웃음소리만 들릴 뿐, 아무도 그를 마중하러 나오지 않았다.

“주인장이 있느냐고 물었다.”

고함에 누군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벌컥- 하며 문이 열리더니 숨을 몰아쉬는 종업원이 나타났다. 주근깨 있는 뺨과 뒤로 묶은 빨간 머리가 인상적인 젊은 여자였다. 그녀는 위아래로 찾아온 손님을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한번 훑어보고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건장한 체격과 판금 갑옷, 무장에 군마까지. 누가 봐도 영락없는 기사였으니까.

“늦어서 죄송합니다. 나리. 주문이 밀렸던 터라 응답이 늦었습니다.”

아르투르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에서 이틀간 묶을 생각이다. 그동안 식사와 숙소를 부탁하마. 아, 마구간도 비워다오. 에쿠잘루스는 좁은 공간에 있는 걸 싫어하니 다른 말들은 비워야 한다.”

여급은 아르투르의 눈치를 보며 그의 말을 하나씩 되새겼다.

“이틀간 묵으실 거고, 식사와 여관은 모두 최고급으로. 그리고 마구간도 이틀간 대여하실 거죠, 맞으시지요?”

아르투르는 고개만 끄덕였다. 마구간을 빌리는 게 가능하냐, 방이 있느냐 따위는 묻지 않았다. 고귀한 푸른 피에게 그건 당연한 권리였으니까. 마구간이 있으면 당연히 빌릴 수 있는 것이고, 방이 없다면 기존의 손님을 내쫓아서라도 만들어야 했다. 그것이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대하는 적합한 태도였다.

아르투르가 살아온 세상에서 그건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이 아버지와 형님들에게 그렇게 했고, 반면에 하인들은 기사들을 대할 때 그렇게 했다. 케이는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입가를 우물거렸지만, 주제넘은 일이라고 생각하며 목구멍으로 넘겼다.

여급은 여관 안으로 뛰어 들어가 배가 불쑥 나온 중년의 사내에게 이를 전했고, 사내도 허겁지겁 뛰어나와 고개를 조아리며 극진히 모시겠노라 말하며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아르투르는 기분이 조금 풀어지는 것을 느끼며 선술집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아르투르는 선술집에 단 하나 있는 3층 방으로 안내받았다. 동물의 조각상 등이 장식되어있었고, 바닥에는 카펫이 깔려있었다. 방은 전체적으로 깨끗하고 잘 정돈되어있는 편이었다. 한쪽에선 장작불이 타올라 방 안을 따뜻하게 했다.

젊은 기사는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은화 한 닢을 주인장에게 주었다. 주인장은 연신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면서 식사를 직접 가지고 왔다. 따끈따끈한 닭고기 스프와 방금 구운 빵, 신선한 야채가 곁들어진 훌륭한 한 끼였다.

“일주일 만의 제대로 된 식사군.”

“그러게요.”

케이는 여전히 이런 대접이 낯선지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허기져 있던 두 사람은 옷을 갈아입고 식사를 시작했다. 먹는 것에 열중하느라 별다른 대화가 오가진 않았다. 그저 아르투르가 빵을 집어삼키는 케이를 보며 작게 웃었을 뿐이다.

‘녀석도 한참 많이 먹을 때지. 배고팠을 거야.’

식사를 마친 아르투르는 케이를 불렀다.

“휴식을 마치는 대로 마구간으로 가서 에쿠잘루스가 잘 쉬고 있는지 보고 오너라. 갈기도 닦아주고, 이가 생기진 않았는지 살펴봐 줘야 한다. 알겠느냐?”

“네. 마스터.”

케이가 식사를 마치고 마구간으로 향했을 때, 아르투르는 아래층에서 뭔가가 깨지고 부서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비명이 들렸다. 문제가 생겼음을 직감한 그는 곧장 뛰어 내려갔다.

1층에는 사람들이 한군데 모여 서로 웅성거리고 있었다.

“다들 이러시면 안 됩니다! 기사 나리께서 아시면 어쩌시려고들 이러십니까?”

“아앙? 주인장, 당신이 한 일이잖아? 왜 우리 탓을 해? 잘 나신 기사 나리의 말을 모신다고 우리말들을 쫓아냈잖아.”

두 사람의 사내가 케이를 발로 걷어차고 있었고, 한 사내는 여관 주인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손님! 어쩔 수가 없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주변에는 깨진 유리 조각이 굴러다녔고, 케이의 이마에선 피가 흘렀다.

“그래? 정말로 어쩔 수 없는지 보자고. 이놈의 마스터가 어떻게 나오나 보자고.”

그때 아르투르가 인파를 헤치고 나왔다.

“날 찾았나 보군.”

곧장 아르투르의 주먹이 놈의 면상을 향해 날아들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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