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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10화 (10/248)

10

전혀 예상하지 못한 요구였다.

“진심이냐? 장난이 아니고?”

소년은 진지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오래전부터 저도 기사가 되고 싶었어요. 하지만 누가 양치기를 종자로 받아주겠어요?”

“내 옆은 그리 안전한 자리가 아니야. 네가 들은 대로 난 선왕의 아들이다. 더군다나 영지도 없는 방랑 기사(Knight Errant)지. 침대 위에서 보내는 날보다 텐트에서 잠들어야 하는 날이 많을 거다. 예기치 못한 위험도 수없이 겪을 것이고.”

“길거리에서 노숙하고 차갑고 텁텁한 빵을 억지로 씹어먹는 일은 제가 나리보다 익숙할걸요. 위험, 위험이라, 뭐 어떤가요. 지금이 아니면 제가 기사가 될 기회도, 이 좁아터진 깡촌에서 벗어날 기회도 다신 오지 않을 거예요. 제 처지에 나리보다 좋은 마스터를 구할 순 없을 거라고요.”

아르투르는 소년의 눈빛을 마주 봤다. 그는 소년이 막연한 호기심으로 자신을 따라나서는 걸 원치는 않았다. 종자가 되는 일은 고되고 힘든 일이다. 방랑 기사의 종자라면 더욱더.

소년은 주먹을 불끈 쥔 채 결연한 눈빛으로 아르투르를 쳐다봤다. 나는 당신을 따라가고 싶다고. 반드시 기사가 되고 싶다고. 그 눈빛의 결의가 아르투르의 마음을 움직였다.

“좋다. 네가 날 구해준 대가로 요구하는 것이라면, 널 종자로 받아들여 주마. 하지만 다시 생각해봐라. 종자가 된다는 건 그리 낭만적인 일이 아니야. 거칠고 힘든 일이지.”

“뭐가 됐든 산속에서 양이나 치면서 늙어가는 것보단 훨씬 나을 거에요.”

소년은 또렷이 아르투르를 바라보며 말했고, 아르투르도 고개만 끄덕였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케이라고 합니다. 나리.”

***

두 사람이 만난 지는 오래되지 않았지만 뭉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전부터 그랬던 것 마냥 아르투르는 케이에게 지시를 했고, 케이도 그것을 받아들였다.

“가축들과 짐을 처분하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리겠느냐?”

“어…. 가만, 그건 시간이 좀 걸리겠는 데요. 하지만 우리가 급히 떠나야 한다면 두고 가도 돼요. 삼촌에게 남긴다는 편지 한 장을 보내는 것으로 충분할 거에요. 그보다 지금 나리께 따라붙은 추격자들에 대해 알아보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요.”

“맞는 말이다. 나는 에쿠잘루스를 찾아서 데려올 테니 너는 그들에 대해 알아 보거라.”

“타고 오신 말의 이름인가 보군요. 에쿠잘루스.”

“그래. 앞으론 네가 보살펴줘야 할 녀석이지. 내 둘도 없는 친구야. 반드시 되찾아야지. 그리고 여행 경비도 녀석의 짐에 있고.”

“분부대로 할게요. 나리.”

아르투르의 말을 듣고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케이를 보며 그를 종자로 받아들인 것이 옳은 판단인지 다시 생각해봤다.

우선 무방비 상태에 빠졌던 자신을 공격하거나 장비를 훔치지 않은 것만 해도 정직함은 증명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종자가 되기엔 살짝 늦은 나이였고, 이런 위험천만한 여행에 동반할 정도로 친분이 깊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녀석이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마당에 거부할 수도 없었고, 이미 거두겠다고 말을 했으니 되돌이킬 수도 없었다.

결국, 자신도 이제 종자를 둔 기사가 된 것이다. 아르투르는 판금 갑옷을 착용하며 아버지가 물려주었던 황금검의 손잡이를 매만졌다. 왠지 이전보다 매끈해진 느낌이었다. 따로 손질한 적은 없으니 기분 탓이겠지.

그 후 아르투르는 케이의 인도를 받아 자신이 발견된 공터로 갔고, 그곳에서부터 에쿠잘루스를 찾아다녔다. 발굽에 짓눌린 잡초들을 따라 산을 오르다 보니 샘에 이르렀다. 육중한 크기의 백마가 샘물을 마시며 주저앉아있었고, 주변에는 쓰러진 늑대 한 마리가 있었다.

아르투르는 황급히 달려갔다. 늑대는 목뼈가 부러져 죽어있었고 에쿠잘루스의 몸 곳곳에는 발톱에 의해 할퀴어진 상처가 가득했다. 다행히 상처가 깊지는 않아 아르투르는 한숨을 내쉬며 안장에 매여 있던 여행 가방에서 연고를 꺼내 발라주었다. 밤중에 늑대가 에쿠잘루스를 습격했고, 사나운 군마의 발길질에 얻어맞아 사냥을 실패한 모양이다.

에쿠잘루스는 주인의 냄새를 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쿠잘루스는 혓바닥으로 아르투르의 얼굴을 핣았고, 그는 웃음을 지으며 에쿠잘루스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서로를 신뢰하고 의지하는 관계, 두 인마의 유대는 특별했다.

“미안하다. 다신 널 혼자 두지 않으마.”

에쿠잘루스는 계속해서 아르투르의 얼굴을 핣으며 시간을 보냈다. 해후를 마친 두 인마는 케이의 집으로 돌아갔다. 아르투르가 앞장서서 걸었고, 에쿠잘루스는 그를 뒤따랐다. 마구를 끌 필요도 없었다.

도중에 마주친 사슴과 토끼는 풀을 뜯으며 멀뚱히 지나가는 손님들을 바라봤다. 늑대 무리와 마주치기도 했지만, 아르투르가 가만히 노려보고 에쿠잘루스가 앞발을 들어 올리며 위협하자 슬그머니 옆으로 물러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케이의 집에 도착했다. 통나무로 만들어진 단층집은 꽤 그럴듯한 목조 건물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집 앞에는 양들을 방목하기 좋은 널찍한 언덕이 있었고, 집 뒤편에는 닭들이 모이를 쪼며 돌아다녔다.

‘이 정도 재산이면 장가가는데도 문제가 없겠고, 넉넉히 지내기엔 모자람이 없겠다만.’

아르투르는 이런 안정된 삶을 버리고 자신을 따라나서겠다는 케이를 말리고 싶었다. 그렇지만 새로운 세상과 신분 상승에 대한 그의 열망은 진심이었다. 편안한 삶을 포기하고 야망을 택한 것은 자신도 마찬가지였기에 알아볼 수 있었다.

‘썩 괜찮은 종자를 얻은 것 같기도 해.’

그는 부모를 일찍 여읜 탓인지 또래 소년들보다 조숙해 보였고, 양치기로 자라서 일반인치고는 건강해 보였다. 지금부터라도 종자로서 교육받는다면 스무 살 즘엔 기사가 되기에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저녁 식사는 말린 양고기를 뜯었다. 아직 아헨을 떠난 지 사흘밖에 되지 않아 제법 먹을만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양고기는 건조해질 것이고, 고기는 눅눅해질 것이었다.

‘앞으론 그런 식사가 내 주식이 될 테지.’

아르투르는 저무는 해를 바라보며 감상에 잠겼다.

‘내가 허황한 꿈을 꾸는 것은 아닐까. 궁전을 떠난 지 며칠 됐다고 벌써 죽을 고비를 넘긴 거야.’

하지만 이미 결정한 이상 뒤는 없었다. 인제 와서 처량 맞은 신세로 남에게 자신을 거두어 달라 청할 생각은 없었다. 한번 모험을 떠나기로 마음먹었으니, 무엇이라도 해내고 말리라.

아르투르는 더는 잡생각이 자신을 집어삼키지 않게 단련에 매진했다. 갑옷을 입은 채 팔굽혀펴기를 하기도 하고, 양을 어깨에 짊어지고 언덕을 내달렸다. 에쿠잘루스도 식사를 마치고 기분 전환 삼아 아르투르를 뒤 따라다녔다. 그렇게 몇 시간이고 자신을 혹사한 아르투르는 편안한 마음으로 짚단 위에서 잠이 들었다.

***

다음 날 아침, 케이가 아르투르를 흔들어 깨웠다. 종자가 기사를 대하는 태도치곤 영 아니었다. 아르투르는 눈을 비비며 케이의 말에 귀 기울인다.

“나리, 새로운 기사 무리가 산 아래에 나타나서 나리를 쫓던 추격자들을 내쫓았어요.”

“새로운 기사들은 어떤 깃발을 썼느냐?”

“강철 건틀렛이요.”

‘강철 건틀렛이면, 큰 형님의 깃발이군.’

아르투르는 곰곰이 상황을 그렸다. 자신을 추격하던 이들은 펠릭스의 가신들이었고, 새로 나타난 기사들은 큰형님 루이스의 가신들. 그런데 루이스 형님의 가신들이 펠릭스의 가신들을 내쫓았다라….

상황이 쉽게 생각이 됐다. 이곳은 중부 왕국의 일부, 루이스 왕의 영토다. 어떤 군주도 자신의 영토에서 다른 세력이 군대를 움직이는 걸 용납할 생각은 없었다.

‘하루 만에 수도까지 연락이 가진 않았겠고, 루이스 형님이 막내 형님을 감시하는 인원을 붙여둔 모양이군. 그들이 평소에 내려진 지침에 따라 움직인 거고.’

어찌 되었건, 자신을 노리던 추격자들이 사라졌으니 좋은 일이다. 하지만 루이스 왕의 기사들이라고 자신에게 우호적이라고 볼 근거는 없었다. 되도록 피하는 게 낫겠지.

“케이. 언제든지 떠날 수 있다고 했지?”

“아, 그랬죠.”

“좋아. 지금 이 길로 바로 떠나자.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는 게 좋겠어.”

“음. 그렇게 말씀드리긴 했는데. 조금 아깝긴 해요. 처분할 시간을 좀 주시면 안 될까요?”

“그럴 시간이 없다. 곧장 따라오거라. 아니면 여기 남던가.”

케이는 풀죽은 표정으로 마지못해 아르투르에게 동의했다.

두 사람이 떠날 채비를 갖추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르투르는 왔을 때처럼 판금 갑옷 한 벌과 에쿠잘루스에 실어둔 가방 하나, 무기 한 자루가 전부였다. 케이는 긴 모직 망토를 두르고 챙이 넓은 모자를 썼다. 손에는 양치기들이 사용하는 큼지막한 지팡이가 들렸다. 그의 뒤엔 당나귀 한 마리가 있었다.

“후회는 정말 없느냐? 나는 네게 보장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이미 절 종자로 받아주셨잖아요.”

케이는 흰 이를 드러내면서 씩 웃었고, 미련 없이 자신의 통나무집과 양들을 내버려둔 채 아르투르를 따라왔다.

“여기 남으면 안락한 삶을 살 수 있을 텐데.”

“그럴 순 있겠죠. 하지만 전 양치기로 죽고 싶지는 않아요. 이곳에 남는다고 한들, 크게 달라질 일은 없을 거예요. 반면 나리를 따라가면 훨씬 넓은 세상을 볼 수 있겠죠. 그것으로 충분해요.”

궁정에서 쫓겨난 방랑기사와 고향을 버리고 떠난 양치기 소년. 아르투르는 퍽 재밌는 조합이라고 생각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나리, 우린 어디로 가는 건가요? 검술은 언제부터 가르쳐주실 거죠? 저도 제 칼을 가지고 싶은데 언제쯤 얻을 수 있을까요?”

케이의 말에 삽시간에 쏟아졌다.

“군장을 싸는 법, 갑옷을 수선하는 법, 말을 관리하는 법, 기사를 대하는 예법부터 가르칠 거다. 싸우는 법은 그다음이야.”

“그건 허드렛일이나 하는 하인이잖아요!”

“몰랐느냐? 종자는 기사의 하인이다. 번거롭고 거친 일들을 대신해주는 하인. 나도, 우리 아버지도, 왕국 최고의 기사인 바야르 경도 그 일부터 시작했다. 누군가를 모실 줄 알아야 이끄는 법도 배울 수 있는 법이다.”

케이의 표정은 사기 당했다는 억울함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그건 말도 안 돼요!”

“우선 기사를 대하는 말투부터 배워야겠구나. 네 상급자에게 그런 식으로 말해선 안 된다. 불만이 있더라도 표정을 숨기고 복종해야지. 의문을 제기 할 때는 공손히 청해야 한다.”

“…에이! 그게 기사가 되는 것과 무슨 상관이에요. 전 어서 말을 타고 무기를 다루는 법을 배우고 싶다고요.”

아르투르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새로운 종자를 길들이는 데는 제법 공을 쏟아야 할 모양이었다.

“이제부터 나리가 아니라 마스터라고 부르거라. 내가 이제부터 네 상급자라는 것도 잊지 말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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