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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입은 부상이 심각한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추격자들이 있는 한, 발걸음을 늦추게 되면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 그래서 아르투르는 에쿠잘루스를 재촉해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갔다. 적들이 산속에서 길을 헤매길 기대하면서.
주변으로 밤의 산의 풍경이 지나갔다. 밤에 말을 타고 산을 오르는 일은 위험한 일이었고, 아르투르의 정신은 혼미했기에 더더욱 그랬다. 사실상 아르투르는 에쿠잘루스에게 몸을 맡긴 채 고삐를 잡고 있을 뿐이었다. 에쿠잘루스가 영리한 군마인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아르투르가 혼미한 정신을 다잡고 주변을 둘러본 것은 한 공터에 이르러서였다. 해는 완전히 져서 어두컴컴해졌고, 사방엔 나무와 수풀들이 우거져있었다. 그동안 부상에 해둔 조치는 상처 부위에 붕대를 감아둔 것이 전부였다. 뒤에서 발굽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을 보아 추격자들이 밤에 산을 타는 일은 포기한 것처럼 보였다. 아르투르의 눈앞이 다시 아찔해졌다. 정신력으로 간신히 부여잡고 있던 의식의 끈을 놓자, 눈앞이 흐릿해지며 안장에서 굴러 떨어졌다.
‘아, 안 돼. 여기서 쓰러지면.’
에쿠잘루스는 어쩔 줄 모른 채 주인의 주변을 배회했지만 붉게 물들어가는 붕대와 가늘어져 가는 주인의 숨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에쿠잘루스는 상처를 혀로 핥고, 주인의 의식을 깨우기 위해 발굽으로 밀치기도 했지만 아르투르의 의식은 심연 속으로 잠든 뒤였다.
그때였다.
아르투르의 혁대에 걸려있던 낡은 황금검이 빛을 내기 시작한 것은.
***
눈을 뜨자 나무판자로 된 천장이 보였다. 등 뒤로는 뻑뻑한 감촉이 느껴졌고, 목에는 푹신한 뭔가가 걸렸다. 아르투르는 고개를 돌려 주변을 바라봤다. 자신은 흙벽으로 둘러싸인 방 안의 침대에 뉘어있었다. 주변에선 송진 냄새가 풍겨왔고, 방 한편에는 짐승의 가죽과 밀 포대 등이 가득 쌓여있었다.
위층과 연결되는 사다리가 놓여있는 것을 볼 때, 아르투르는 자신이 일종의 지하창고에 있다고 판단했다. 두 손은 자유로웠고 자신의 장비도 침대 아래 잘 정리되어 놓여있었다.
무엇보다 아르투르는 부상의 아픔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도끼에 맞았던 어깨를 들어 올려봐도 아무런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고, 옆구리도 깨끗하게 치유되어있었다. 자신의 옆에는 피 묻은 붕대와 피투성이 상의가 놓여있었지만.
아르투르는 기억을 되감아 자신이 왜 이곳에 놓여있는지 생각하고자 했지만,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것은 공터에서 낙마한 것이 전부였다. 어찌 되었건 안심할 수는 없었다.
정황상 자신을 이곳에 데려다 놓은 이는 자신에게 우호적일 공산이 높았지만, 만약을 대비해서 나쁠 건 없었으니까.
아르투르는 피투성이 상의를 입고 두 자루의 장검을 혁대에 찼다. 그리고 판금 팔 보호구를 착용하던 와중, 천장이 열리더니 소년 한 명이 사다리를 타고 내려왔다.
“나리, 일어나셨군요.”
눈동자와 모발은 모두 갈색이었고, 날렵하고 튼튼한 체격이었지만 아직 체구가 작고 볼살이 통통해 아직 2차 성징이 나타나지 않은 소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의복을 보아 할 때 높은 신분 같지는 않았다.
“네가 내 부상을 치료해준 것이냐?”
사다리를 내려온 소년은 눈을 껌뻑였다. 평민 소년이라면 기사 앞에서 주눅이 들 법도 한데, 그의 눈빛에는 거리낌이 없었다.
“상처를 치료한 건 제가 아닙니다. 제가 나리를 발견했을 때 이미 상처는 말끔히 치료되어있었어요. 하지만 나리를 데려온 건 제가 맞죠.”
마지막 말에서 소년의 우쭐거림이 느껴졌다. 아르투르는 팔짱을 끼고 소년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네 보호자와 이야기를 하고 싶다.”
소년이 고개를 저었다.
“없어요. 아버지는 징병 돼서 돌아오지 않았고, 어머니는 작년 겨울에 시름시름 앓다 죽었어요. 유일한 혈육인 삼촌 가족은 수도에 있고요. 그러니 나리는 제가 살려드린 것에 대해 저와 이야기를 하셔야 합니다.”
소년은 당당하게 아르투르를 바라봤다. 아르투르는 이 소년이 싫지 않았기에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무엇보다 이 소년의 말이 맞는다면, 자신이 어떤 식으로든 빚을 지고 있는 게 분명했다.
“좋다. 그럼 차근차근 설명해다오. 네가 날 어디서 발견했고, 왜 나를 이곳으로 데려왔는지 말이야.”
“아, 조금만 있다 그렇게 할게요. 지금은 식사를 드리러 온 거 에요. 애들 밥줄 시간이 돼서 걔들부터 챙겨주고 와야되요. 나리는 여기 계세요. 아직 나리를 뒤쫓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니까요.”
소년은 말을 마치고 가져왔던 스프 그릇을 아르투르 앞에 내려놓고,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날 뒤쫓는 사람들?”
소년은 태연히 답한다.
“네. 그분들도 기사들이던데요. 나리를 찾아 밤새 산에 있던 사람들을 들볶고 다녔거든요. 아직 근처에 있을 거예요.”
소년이 말을 마치고 올라갔고, 아르투르는 생각에 잠겼다. 그때 허기진 배꼽 신호가 전해졌다. 눈앞의 색도 없고 냄새도 없는 스프가 눈에 들어왔다. 아르투르는 조막만 한 나무 숟가락을 들어 스프를 먹었다. 아무런 맛도 없었다.
‘스프에 고기 건더기가 없다니, 무슨 맛으로 먹는 것인지 모르겠군.’
그렇지만 배고픔은 정직했다. 이 정도 양으로 간에 기별도 오지 않던 아르투르는 그릇을 들어 올려 물처럼 마셨다. 한순간에 스프를 담은 그릇이 텅 비었다. 어느 정도 허기가 가시자 잡생각이 들었다.
‘평민들은 이런 식사에 익숙하단 말인가?’
그건 그렇고, 아르투르는 자신의 상처가 어떻게 된 건지 의아했다. 궁정의 가장 노련한 의사도 이미 입은 상처를 없던 것으로 만들 순 없었다. 마상창에 옆구리가 꿰뚫리고 도끼로 어깨를 맞았는데 꿰맨 자국 하나 없는 건 기적이었지, 의술의 영역이 아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걸까?
그때 다시 지하창고의 문이 열리며 소년이 내려왔다.
“나리,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하지만 닭들은 제때 밥을 안 챙겨주면 울타리 밖으로 나가려 들거든요. 양들은 가만히 놔둬도 알아서 잘하는데… 닭은 손이 많이 간다니까요. 참, 저희 무슨 이야기 하고 있었죠?”
“날 구해준 경황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했다.”
“좋아요. 그렇게 하죠.”
소년의 이야기는 간단했다. 소년은 밤중에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나갔다가, 공터에 아르투르가 쓰러진 것을 보고 집으로 데려왔다. 사례금을 두둑이 받을 생각으로 말이다.
“질문이 있다. 나를 발견했을 때 상처가 말끔히 치료되어 있었다고 했는데, 아는 것이 있느냐?”
“어, 그건 저도 몰라요. 제가 나리를 발견했을 땐 상처 하나 없이 말끔했어요. 집으로 데려와 갑옷을 벗겨본 뒤에야 피칠갑이 되신 걸 알았죠. 갑옷도 뚫려있고요. 오히려 제가 여쭤볼게요. 예사 상처를 입으셨던 게 아니던데, 어떻게 나으신 건가요? 마법사들의 비약이라도 가지고 계신 건가요?”
“나도 모르겠다. 일단 네 말을 계속해다오. 내 말은 어디로 갔고?”
“아, 그 큰 흰색 말은 처음엔 절 위협하더니 제가 나리를 안전한 곳으로 데려갈 거라고 하자 혼자 산속으로 가더군요.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 듯했어요.”
“어느 정도는 알아듣지. 아주 영리한 녀석이고. 네가 내게 적의를 품고 있지 않다는 것 정도는 이해했을 거다.”
소년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잇는다.
“아무튼, 문제는 그 뒤였어요. 제가 나리를 집에 모셔다 놓고 양들을 보러 갔을 때 말을 탄 다른 기사들이 우리 집을 찾아왔거든요. 백마를 탄 금발의 기사를 본 적이 있느냐면서요. 알려주면 금화 열 닢으로 포상하겠다고 했죠.”
소년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지어졌다. 아르투르는 순간 놈이 밀고라도 했는지 불안해졌다.
“하지만 저는 모른다고 했어요. 그 사람들이 좋은 일로 나리를 찾는 게 아니란 걸 직감했거든요.”
아르투르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소년을 쳐다봤다.
“왜 나를 그들에게 넘기지 않았지? 그편이 더 안전했을 텐데.”
소년은 멋쩍게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하층민의 삶은 험난하답니다. 나리. 저흰 눈치가 빨라야 해요. 그들에게 나리의 행방을 알려줬으면 나리만 죽는 게 아니라 저도 죽었을거에요. 입막음을 위해서건 사례금이 아까워서건요. 좋은 일로 나리를 찾는 것 같았으면 당연히 말씀드렸겠죠.”
소년의 표정에선 조금의 씁쓸함이 느껴졌다. 아버지의 치세는 태평성대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자신이 알지 못하는 민간의 삶은 그리 편안하지만은 않았던 모양이다.
“어찌됐건요. 나으리, 제가 나리의 목숨을 구했어요. 기사들은 신의를 중히 여긴다 들었습니다. 합당한 보상을 기대해도 되겠지요?”
아르투르는 소년이 말을 마치자 생각에 잠겨 턱을 괬다. 자신을 찾는 기사들은 분명 펠릭스의 하수인들일 것이다. 자신을 찾지 못했으니 아직 활동하고 있을 것이다. 당분간 산에서 은신하고 있는 게 좋은가? 아니면 서둘러 에쿠잘루스를 찾아 벗어나야 할까?
우선 에쿠잘루스부터 찾아야 했다. 누구도 길들이지 못하는 그 난폭한 말을 열두 살에 길들인 이후, 둘은 형제나 다름없는 사이였으니까. 아무렇게나 쓰고 버려도 되는 군마가 아니었다. 자신이 가장 힘들던 시기에 곁을 지켜둔 동생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녀석을 찾으리라.
“저, 나으리?”
소년이 조심히 되묻자 아르투르는 고민에서 깨어났다.
“네 말이 맞다. 너는 내 목숨을 구했고, 곤경에 빠진 나를 약탈하는 대신 친절을 베풀었지. 그에 합당한 보상을 줄 거다. 하지만, 당장은 네게 줄 것이 없구나.”
소년이 빙긋 웃었다.
“나리가 주신 칼이나 갑옷만 주셔도 전 평생 일하지 않아도 될 거에요.”
“그건 좀 양보해다오. 아버지의 유품이다. 네가 바라는 것이 금이라면 말을 되찾는 대로 충분히 사례하겠다.”
소년은 거침없이 웃었다.
“농담입니다. 나리의 장비나 돈이 필요했다면 기절한 나리를 죽이고 가져갔겠죠. 제가 얻고 싶은 건 그런 게 아니에요. 왕의 아들을 구했는데 고작 그런 보상에 만족할 리가 있나요.”
아르투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왕의 아들이라고? 날카롭게 되묻는다.
“…그 이야긴 어디서 들었지?”
“어?! 혹시 몰라서 떠본 건데 진짜였네요. 어… 수도에 있는 삼촌에게 나리에 대한 소문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쓰러진 나리를 봤을 때 삼촌이 말씀하시던 분이라고 직감했죠. 아무튼, 나리의 정체를 알게 됐으니 더 당당히 보상을 요구할 수 있겠네요.”
아르투르는 조금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좋다. 뜸 들이지 말고 말하거라. 네가 뭘 바라는지 말이다. 내 명예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면 뭐든지 들어주도록 하마.”
소년은 그 말을 듣고도 머뭇거리다가,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리의 종자가 되고 싶습니다.”
예상치 못한 요구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