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왕 아르투르-8화 (8/248)

8

선두의 기병을 쓰러뜨린 아르투르는 행렬을 스쳐 지나갔다. 양옆으로 마상창의 공격이 가해졌지만 재빠르게 피하거나, 오히려 창을 붙잡아 상대 기수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자신들을 스쳐 지나가는 아르투르를 보며, 기병들은 황급히 말머리를 돌려세웠다. 그러나 아르투르는 그들을 맞상대하는 대신 앞을 향해 말을 계속 달려 나갔고, 기병들은 마음이 급해져 대오를 갖추지 않고 추격했다.

“추격해서 끝장을 내라! 놈을 놓치지 마!”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였다. 만난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아르투르는 어쨌든 에쿠잘루스를 재촉해 강변을 따라 질주했다. 일부러 추격자들보다 조금 빠른 속도를 유지할 뿐, 잡을 수도 없게 멀어지진 않았다. 석양이 지는 가운데 한 명의 기사가 금발의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질주하고, 뒤를 따라 여덟 명의 기병들이 말을 달렸다. 말발굽 소리와 강물 소리가 겹쳐 화음을 이룬다.

얼마간 달리던 아르투르가 뒤를 돌아보자, 추격자들의 말이 체력이 떨어진 것이 눈에 띄게 보였다. 최고 속도를 몇 분이나 유지했으니 당연한 일 일터이다. 에쿠잘루스는 아직도 힘이 넘쳐흘렀지만 보통의 말들은 그렇지 못했다.

오랫동안 에쿠잘루스와 호흡을 맞춰온 아르투르는 고삐를 잡아당기지 않고도 말머리를 돌릴 수 있었다. 마치 U턴을 하듯이 옆으로 방향을 돌려 속력을 잃는 것을 최소화했고, 추격자들을 맞상대하기 위해 곧바로 달려 나갔다.

“덤벼라!”

추격자들이 무질서하게 달려오는 동안 대오가 완전히 깨졌고, 몇몇은 뒤에 쳐졌다. 따돌리려면 얼마든지 따돌릴 수 있었다. 곱게 돌려보낼 생각이 없었을 뿐. 선두에 선 기사는 겨드랑이에 마상창을 끼우고 돌격해왔다. 아르투르는 오른손에 여명을 쥐고 마주 돌격했다.

“으랴앗!”

마상창의 공격이 가해질 때, 아르투르는 여명의 십자막이를 비틀어 공격을 쳐냈고, 놈이 탄 갈색 군마의 허벅지를 깊숙이 찔러 넣었다.

“푸히히히히힝!”

말이 구슬픈 비명을 내뱉으며 쓰러지자, 기사는 달려오던 가속력을 몸에 고스란히 실은 채 앞으로 나뒹굴었다. 기사는 허어억 - 하는 비명을 내뱉으며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고통 때문에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 사이 곁으로 다가온 에쿠잘루스가 얼굴을 거세게 걷어찼고 뒤로 나뒹굴더니 온몸을 부르르 떨고는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이런 잡종 녀석이!”

뒤편의 기병이 흥분해서 지친 말을 재촉하며 돌격했다. 아르투르는 침착하게 에쿠잘루스를 몰아 옆으로 몰아 마상창을 피한 후, 양손으로 여명을 잡고 머리에 내리찍었다. 쇠사슬로 엮어 만든 투구가 산산조각나며 뼛조각과 뇌수, 피가 엉겨서 튀었다.

그 광경을 바라본 후방의 기사들은 말을 멈춰 세우고 대오를 정비했다. 아르투르도 에쿠잘루스를 쉬게 하며 추격자들과 대치한다. 숫자는 셋. 낙오병까지 포함하면 다섯.

모두 고유의 문장을 갖추고 무장 상태가 좋은 것으로 보아 기사 계급이라고 추론할 수 있었다. 그중 대장으로 보이는 자의 문장은 푸른 물고기였는데, 퍽이나 낯이 익는 문장이었다.

“호아스 경. 이빨도 모자라 이번엔 목을 잃고 싶은건가?”

아르투르는 조롱 섞인 웃음을 호아스에게 보내며 여유롭게 웃었다. 상대는 대답 없이 오른손의 메이스, 왼손의 방패를 들었다.

“이야길 좀 해보시지. 율리안 형님이 보내신 건가? 분명 우린 형제답게 헤어졌다고 믿었는데 말이야.”

“나는 이제 더 현명한 왕을 섬긴다. 펠릭스 왕 말이야. 네게 안부 전하라고 하시더군. 마지막 가는 길 평온하길 바란다고.”

투구 속에서 조용한 분노로 들끓는 목소리가 답했다.

“기사가 주군을 너무 쉽게 바꾸는군.”

아르투르가 비웃음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닥쳐라! 빌어먹을 놈! 사지를 찢어 죽여도 모자랄 놈! 네놈 때문에 나는 비웃음거리가 돼서 소속된 궁정을 옮길 수밖에 없었단 말이다! 비천한 사생아 놈아!”

아르투르는 할 말이 없는 이들은 욕을 한다는 격언이 떠올랐다 먼저 시비를 건 것이 제 놈인데, 이제 와서 자길 탓하는 게 어이가 없었다.

“우리가 정겹게 이야기할 사인 아니었지. 언제까지 계집애처럼 서성댈 셈이냐? 열 명이 습격한 것으로도 모자라 겁먹고 달아날 생각이냐?”

추격자들은 아르투르의 도발에 넘어가지 않고 침착하게 열을 유지하며 낙오자들을 기다렸다. 썩 상황이 좋지 않았다. 완전히 방비된 기사가 셋. 도발에 넘어가지도 않았고, 하나씩이라면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지만 동시에 실력자 둘 이상을 상대하는 건 위험한 일이었다.

‘이대로 도망쳐도 그만이긴 하지.’

머릿속에서 전술적 유불리를 계산하던 아르투르는 곧 생각을 지우고 전투의 흥분에 몸을 맡겼다. 거리낄 게 뭐가 있으랴. 나는 최강의 기사에게 배웠고 내 앞을 가로막으면 그저 베어버릴 뿐!

아르투르는 에쿠잘루스를 몰아 돌진했다. 신속한 돌진은 기사들의 예상 밖이었지만, 노련한 무사들답게 대처했다. 호아스가 정면에서 싸우게 내버려두고 양옆으로 산개한 것이다.

아르투르의 첫 일격은 방패에 가로막혔고, 호아스는 재차 방패를 들어 공격을 막아내는 데 전념했다. 두 번째, 세 번째 일격 모두 방패로 막아냈지만 쩌적-소리가 나며 그의 방패에 금이 갔다.

“빨리! 얼마 못 버틴다!”

호아스의 다급한 외침에 산개했던 두 기사가 양옆에서 아르투르를 공격해왔다. 마상창이 아르투르의 갑옷을 관통해 옆구리를 꿰뚫었고, 도끼가 어깨 갑옷을 부수고 깊숙이 처박혔다.

피가 역류하며 아르투르가 입에서 피를 토해냈다.

‘젠장, 분명 피했다고 생각했는데.’

각 기사가 마상창과 도끼를 상처에서 빼내자 그 사이로 피가 뿜어져 나왔다. 머리가 아찔해지고 몸이 받은 충격 때문에 멍-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호아스가 정면에서 자신의 얼굴을 향해 메이스를 내리쳤다.

‘저 공격에 맞으면 끝이다!”

아르투르는 고통을 참아내며 안장에서 발을 떼 일부러 말에서 떨어졌다. 옆구리의 관통상이 치명적인 고통을 가져다줬지만 잘 단련된 근육들이 버티고 있어 정신력으로 이겨낼 수 있었다.

아르투르는 떨어지면서 곧장 호아스의 말을 향해 여명을 위로 찔렀다. 호아스는 안장에 다리를 건채로 왼편으로 쓰러졌다. 다른 기사의 말발굽이 아르투르를 짓밟으려 했기에 옆으로 굴러 공격을 피한 후, 꿇어앉으며 방어자세를 취했다.

도끼를 든 기사가 말을 몰아 달려와 아르투르를 내리쳤다. 여명으로 도끼의 날을 후려쳐 받아냈지만, 말의 힘과 가속도가 가해진 공격 때문에 팔이 부들거렸다. 준비된 기사 셋을 상대로 정면으로 돌격한 건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지만, 이미 내려진 판단을 되돌이킬 순 없었다.

‘최선의 수를 찾아. 지금 상황에서.’

호아스는 날뛰는 부상당한 말에 깔려 다리를 빼내기 위해 낑낑대고 있었고, 한 명의 기사가 그를 지키고 있었다. 도끼를 든 기사는 말머리를 돌려 재돌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지금이 기회다. 아르투르는 본능적인 전술 판단을 마쳤다.

재돌격 준비를 한 기사가 도끼를 허공에서 휘두르며 자신을 향해 달려왔다. 아르투르는 놈의 말머리를 향해 여명을 내던졌다. 장검이 번득이며 날아가 말머리를 꿰뚫고 기사를 내동댕이쳤다. 아르투르는 바람 같이 기사를 향해 달려 나갔고, 호아스를 호위하던 기사도 장검을 빼내들고 말을 몰아와 후방에서 검을 휘둘렀다.

아르투르는 마치 곡예를 하듯 자세를 낮추었고, 자신의 눈 위로 지나가는 장검의 칼날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쓰러진 기사의 앞으로 몸을 날려, 그의 손아귀에 있던 도끼를 뺏어 들고 기사의 머리를 내리찍었다. 손목 보호대를 낀 손을 들어 올려 공격을 막아내려 했지만 그의 오른손은 갑옷째 잘려나갔고, 안면에 도끼가 박혔다. 아르투르의 얼굴에 피가 가득 튀었다.

아르투르는 몸을 일으켜 돌진해오는 장검 기사의 말을 향해 도끼를 내던졌다. 이번에도 정확히 미간에 명중했고, 말은 기수를 태운 채 쓰러졌다. 시체에 깔려 낑낑대던 기사는 아르투르가 다가와 자신의 안면갑을 젖히는 모습을 보았다. 피를 머금은 여명이 석양빛에 반사되어 붉게 빛나는 것이 그가 생애 마지막으로 본 광경이었다.

그 사이 호아스는 말의 사체에서 빠져나와 두 발로 서 있었다. 이 광경을 본 그는 공포에 질렸다. 저 괴물 놈은 심각한 부상을 입고도 움직임이 전혀 느려지질 않았다. 평소와 같이 민첩하게 뛰어다녔고, 기예도 모자람이 없었다. 도대체, 저놈은 뭐하는 괴물이란 말인가.

‘결코 나 혼자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냐. 다른 둘, 다른 둘이 오길 기다려야 한다.’

여명을 든 아르투르가 호아스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부상 때문에 오래 싸울수록 불리한 입장이었다. 오른손에는 여명을, 왼손에는 도끼를 집어 든 아르투르의 모습은 엄청난 위압감을 줬다.

“네 무례함에 대한 대가는 목숨으로 받아가마.”

오른손의 여명을 내리치자 호아스는 방패를 들어 올렸지만 단숨에 박살났다. 곧이어 도끼를 목 보호구를 향해 휘두르자 호아스는 일격에 목이 날아갔다. 피가 흩뿌려졌다.

그때 도착한 두 명의 사내 중 한 사람은, 곧장 장검을 빼 들고 달려왔지만 상대의 투구가 부실한 것을 보고 정수리에 도끼를 맞춰 일격에 절명시켰다.

다른 한 명은 말도 제대로 다루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다가 낙마해버리고 말았다. 낙마한 기수는 몸을 오들오들 떨며 허리춤의 장검에 허겁지겁 손을 가져다 댔다. 아르투르는 옆구리의 창조각을 빼내 부러뜨리며 놈에게 다가갔다.

“너, 호아스의 종자렷다.”

투구 안에서 훌쩍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앳된 소년의 것이었다.

“뽑지 마라. 애를 죽이고 싶진 않으니까.”

아르투르의 숨소리가 갈수록 거칠어졌다. 그는 왼손에 들려있는 호아스의 머리통을 소년에게 던졌다. 소년은 그 광경에 허걱 -하는 소리를 내며 숨이 멎어버렸다.

“펠릭스 형님께 머리를 가져가거라. 그리고 전해. 형님의 형제애에 내가 감동했다고 말이다. 이 빚은 결코 잊지 않겠다. 늦건, 빠르건, 반드시 이 형제애에 보답하고 말 거라고.”

아르투르는 검을 반대로 쥐면서 말을 덧붙였다.

“주군의 복수가 하고 싶다면 서임을 받은 뒤 날 찾아와라, 그땐 기꺼이 상대해주지.”

말을 마치자마자 아르투르는 여명의 손잡이로 호아스의 종자의 머리를 쳐서 기절시켰다. 직후, 휘파람을 불어 에쿠잘루스를 불러냈다. 주인에게 순종적인 군마에 올라탄 아르투르는 말의 옆구리를 걷어차며 이곳에서 벗어날 것을 재촉했다.

에쿠잘루스는 주인이 생사를 넘나들며 싸우는 동안 꾸준히 체력을 비축해뒀다. 그의 이름대로, 바람처럼 신속하게 자리를 이탈했다. 아르투르는 멀어져가는 석양을 바라봤다. 석양 너머에서 새로운 기병 무리가 뒤쫓아 오는 것이 보였다. 아르투르는 이를 악물고, 흐려져 가는 의식을 억지로 붙잡았다.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