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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7화 (7/248)

7

검을 손에 쥔 쪽은 율리안이었지만, 아르투르의 단검이 율리안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전장이었다면 시체가 된 쪽은 자신이었으리라 직감한 율리안은 손에서 검을 떨어뜨렸다.

“네가 이겼구나. 동생아.”

아르투르는 가볍게 웃고는 단검을 도로 강철 장화의 뒤편에 끼워 넣었다. 완전히 무장한 기사들의 싸움이 종종 격렬한 육박전으로 끝난다는 가르침을 아르투르는 잘 기억하고 있었다. 이러니 격투술은 기사의 필수 덕목이라 할 만하리라.

아르투르가 자리에서 일어나 율리안에게 손을 내밀자, 그는 아르투르의 손을 붙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율리안은 웃음을 띠며 아르투르의 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다들 보았는가! 아르투르 경의 비할 데 없는 용맹을! 그는 스스로 페르넬의 아들임을 증명했다. 오늘부로 내 동생의 혈통에 의문을 제기하는 자가 있다면, 내 명예를 모독한 것으로 간주하겠다!"

좌중이 웅성이는 가운데, 아르투르도 놀라 눈을 깜박였다.

“내 억지를 받아줬으니, 네게도 보상이 있어야겠지.”

아르투르는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호의를 받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탓이었다.

“고맙습니다. 형님.”

머쓱한 표정으로 아르투르가 기침을 했고, 율리안은 그의 손을 들어 올린 채 진영을 돌아다니며 그의 용맹을 칭송했다. 모두가 박수를 보내는 가운데, 펠릭스만이 얼굴을 찌푸렸다.

‘작은 형님이 바보짓을 하시는군. 즉흥적인 기분에 취해 정적에게 명분을 쥐어주는 꼴이라니, 이래서 내가 기사 놈들을 싫어하는 것이다.’

***

얼마 뒤, 두 형제는 왕의 막사에서 식사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소고기를 나이프로 거침없이 잘라낸 후 자신들의 입에 쑤셔 넣었다. 둘의 식사 예절은 교육받은 왕자들이라기 보단 거친 사내들에 가까웠다. 어쩌면 그게 오'데르만 왕조의 본질이리라. 기사도의 탈을 쓴 거칠 것 없는 전사들.

두 사람 모두 온 힘을 다해 싸운 터라 순식간에 올라온 요리가 동이 났다. 고기를 흡입하고 식사를 마치는 건 짧은 시간에 불과했다.

“이제 어디로 갈 생각이냐?”

“일단 발이 내키는 대로 가볼 생각입니다. 책으로만 보던 세상을 직접 경험하고 싶거든요.”

“정말 날 도와줄 생각은 없느냐? 네가 원하는 건 뭐든지 줄 수 있는데.”

율리안은 아쉬운 표정으로 되물었다.

“저야말로 되묻겠습니다. 형님, 전쟁 준비는 그만두시고 큰형님과 타협하시죠. 모두에게 무익한 싸움입니다.”

“네 뜻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양자는 서로의 입장을 잘 알고 있었다. 단지 알면서도 아쉬워서 되물어봤을 뿐이다. 그러다가 동시에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난 형님의 뒤치다꺼리나 하는 신세로 전락하고 싶지 않다.”

“저도 형님들의 그림자에 묻혀 살고 싶진 않습니다. 제 길을 찾아가야죠.”

“네 앞길에 무운이 함께 하길.”

“형님께서도 무탈하십시오.”

두 사람은 서로 오른손을 탁- 하고 부딪히고 서로의 갈 길을 향해 나아갔다. 서로의 뜻을 확인한 기사들의 발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

아르투르는 에쿠잘루스가 머무르고 있던 개울로 돌아왔다. 그 사이 율리안의 집사가 와서 여비라며 얼마간의 금화 주머니를 챙겨줬다. 아르투르는 사양하지 않고 받아들었다. 결투의 승자로써 당연한 권리였으니까.

두 왕의 행렬이 서쪽으로 떠나가는 동안, 아르투르는 남쪽으로 말을 몰았다. 중부 왕국의 드넓은 평야는 며칠을 가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이 곡창 지대가 중부 왕국을 두고 형님들이 그토록 싸우는 이유였다.

아르투르는 지도를 꺼내 지금 자신의 위치와 목적지를 대조했다. 이대로 평원을 가로지르는 것보다는 산을 하나 넘는 쪽이 더 빨랐다. 형님에게 말하진 않았지만 이미 행선지는 정해 놓았다.

아직 서부 대륙에는 데네토르 왕국에 복속되지 않은 문명 지역이 여럿 있었다. 그 중 대륙의 최남단에 있는 레무리아 반도엔 여러 도시 국가들이 난립하고 있었고, 그들은 동방 대륙과의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고 배웠다.

그런데 최근 이 도시 국가들끼리 서로 경쟁을 벌이며, 이따금 군사적 충돌이 일어난다는 풍문이 들려왔다. 용병 모집 공고도 함께 말이다. 아르투르는 그곳에서라면 자신이 출세할 길을 얻을 수 있으리라 직감해, 레무리아로 향하기로 했다.

‘대왕의 아들이 고작 용병이나 되려고 떠나는 건가.’

자괴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넓은 세상을 보고 싶다는 호기심도 강하게 들어왔다. 그래. 꼭 용병 일이 아니더라도 레무리아 반도는 가볼 가치가 있을 것이다. 문득 레무리아 반도의 여인들은 마음씨가 무척 곱고 생기가 넘친다는 소문을 떠올렸다. 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아르투르는 인접한 산으로 가기 위해 센 강을 지나야 했다. 이 길이라면 사흘 이상 시간을 단축할 수 있으리라. 다리를 찾기 위해 강을 따라 말을 달리자, 해가 질 무렵 목조 다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목조 다리는 세 명의 기병이 나란히 건너갈 수 있을 정도로 컸는데, 다리의 양옆에 통행세를 걷는 병사들이 있었다. 다만 아르투르가 보기에, 통행료를 받는 수비병치고는 무장 상태가 과했다. 번쩍이는 사슬 보호구들과 군용 장창은 마을 민병대가 가질 법한 무기들은 아니었으니까.

아르투르는 개의치 않고 다리로 다가갔고, 두 병사가 고개를 들어 아르투르를 올려다봤다.

“안녕하십니까. 나으리.”

두 사람은 한눈에 아르투르가 귀한 신분임을 알아보고 고개를 숙였다. 빛나는 판금 갑옷과 육중한 군마는 그들이 평생 수입을 모아도 살 수 없는 것들이었다. 아르투르는 가볍게 목례하고는, 통행세로 동전 두 닢을 튕겼다. 오른편에 있던 병사는 잽싸게 그것을 받아든다.

아르투르가 마저 다리를 건너려 할 때, 오른편에 있던 병사가 황급히 되물었다.

“경,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그건 왜 묻지? 너희 일은 통행세를 받는 일이 아닌가?”

“센 강 어귀를 지나는 모든 기사의 명단을 기록하라는 왕의 명령이 있으셨습니다. 그래서…”

“왕? 어느 왕 말이냐? 네가 지금 뉘 면전을 가로막는지 알게 된다면 감히 되묻지 못할 것이다. 경을 치고 싶지 않거든 비켜라.”

아르투르가 눈을 부라리자 병사는 어쩔 줄 몰라하며 옆으로 비켜섰다. 기사는 오만한 눈빛으로 자신들을 내려다보며 다리를 건넜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왼편의 병사가 속삭였다.

‘두 자루의 검을 찬 장신의 기사, 거대한 백마를 탄 금발. 주군께서 명령하신 자와 일치해.’

오른편의 병사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동의해. 놈이 왔다고 신호하자고.’

두 병사는 붉은 깃발을 들어 올려 허공에서 펄럭였다.

***

다리를 건너던 아르투르는 금방 수상함을 느끼고 뒤를 돌아봤다. 붉은 깃발이 펄럭이자 그에 호응해 다리 양옆에서 다른 붉은 깃발들이 올라오고, 구릉 너머에서 무장한 병사들이 새롭게 나타났다. 그들은 일사불란하게 창을 앞세우며 다리를 향해 달려왔고, 다리의 양편을 지키던 병사들은 자신에게 창을 겨누며 방패를 앞세웠다.

분명한 습격의 의도였다.

아르투르는 같잖다는 표정을 지으며 매어뒀던 마상 창을 꺼내 들며 에쿠잘루스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질주를 명령받은 에쿠잘루스가 쏜살같이 돌진했다. 말발굽 소리가 나무판자를 두들기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그 모습에 당황한 건너편의 보병대장이 소리쳤다.

“아르투르 경! 진정하시오! 우리는 왕의 명령을 받고 그대를 데리러 온 것이오!”

“목숨이 아까운 자는 비켜서라!”

아르투르의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선두에 서 있던 병사들의 눈빛에 공포가 서렸다. 맨 앞에 서 있던 병사 몇몇이 뒷걸음질을 쳤다. 아르투르는 예리한 눈길로 자신의 앞길을 막아서는 병사들의 대열을 살폈다. 숫자는 열다섯 내외였지만, 아직 대열이 정비되지 않은 데다가 갑작스러운 전투 상황에 당황하는 눈빛이었다.

바야르 경의 다른 가르침이 떠올랐다. 다수의 적을 상대 할 때는 공포가 최고의 무기라고 했지. 그렇다면 차분히 생각할 시간을 줘서는 안 된다.

아르투르는 상대의 말에 개의치 않고 겨드랑이에 마상 창을 끼웠다. 창이 정확하게 고정되어 언제건 아르투르가 원하는 방향을 꿰뚫을 준비를 마쳤다.

보병대장은 순식간에 다가선 아르투르의 모습에 경악했다. 그는 검을 들어 올리며 다급히 소리쳤다.

“석궁 - 석궁을 겨눠라!”

그것이 그의 유언이 되었다. 마상 창이 콰지끈 - 소리를 내며 부러졌고, 보병대장의 몸통을 꿰뚫고 뒤에 서 있던 병사들마저 쓰러뜨렸다. 세 사람이 꼬챙이에 꿰여 비명소리를 지르며 쓰러졌다. 아르투르는 무너진 병사들 틈으로 들어가 여명을 내리쳤다.

첫 일격에 넋 놓고 있던 보병의 머리가 투구 채로 쪼개졌고, 두 번째 일격에 피가 흩뿌려지며 다른 병사의 머리통이 날아갔다. 그 와중에 에쿠잘루스는 진로를 방해하던 병사에 부딪혀 공중으로 붕 띄워버리고, 접근하던 병사를 뒷발로 걷어차 날려버렸다.

눈 깜짝할 사이 일곱에 달하는 병사들이 쓰러지자, 나머지는 공포에 질려 무기를 버리고 달아났다. 이 병사들에게 금발의 기사는 같은 인간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재앙이었다. 아르투르는 도망가던 병사 한둘을 베어 쫓아 보내곤, 지나온 다리 건너편을 바라봤다.

또 다른 병사 무리가 다리를 건너오다가, 눈앞에서 펼쳐진 광경에 허둥대고 있었다.

기세 좋게 달려오던 선두의 병사들은 뒤로 가려고 동료들을 밀치고 있었고, 서로 네가 앞장서라며 싸우는 혼란스런 상황이었다. 그 중 지휘관으로 보이는 중보병이 전열에서 도망가려는 병사 한 명을 베어죽이며 소리쳤다.

“멍청이들아! 내 손에 죽고 싶지 않거든 앞으로 가라! 너희 상대는 단 한 명이다! 한 명이라고!”

그때 다리 건너편에서 뭔가가 번쩍였다. 다들 뭐가 벌어 졌나 눈을 껌뻑하는 사이, 바람을 가르며 날아온 창이 지휘관의 목덜미를 정확히 꿰뚫었다. 그는 비명도 내지 못하고 꺼억-대다가 강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광경에 다른 병사들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너나 할 것 없이 도로 다리 건너편으로 도망갔다.

아르투르는 그들을 한번 비웃어주곤 말머리를 돌렸다. 잘 준비된 습격이라면 이런 잔챙이들만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과연 그의 예상대로 언덕에서 열댓에 달하는 기병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 마갑을 씌운 육중한 군마에 올라타고, 판금 갑옷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기사거나 그에 따르는 전문 군인이리라.

"형님 중 한 분이 참, 거한 작별 인사를 하시는군.”

아르투르는 전혀 주눅이 들지 않고 두 번째 마상 창을 준비했다. 자신을 노리는 자가 있다면 되받아치면 그만이고 함정이 있다면 돌파하면 그만이었다. 뭔가 수상함을 느끼고도 자신 있게 건너온 이유였다. 열이면 열, 백이면 백. 모두 쓰러뜨려 주마.

“혼자선 마주 보지도 못하는 겁쟁이들아! 내 앞에 설 용기가 있는 자가 있느냐!”

강인하게 타고난 에쿠잘루스에겐 아직 원기가 넘쳤고, 아르투르가 허벅지로 옆구리를 치며 재촉하자 주인의 명에 따라 다시 언덕 위를 향해 질주했다. 상대 기병들도 마주 달려왔지만, 생각한 것보다 아르투르가 빨라 두 무리의 사이는 급속히 가까워졌다.

콰지직 - !

마상 창이 부딪히고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기병들의 선두에 서 있던 기수가 창에 몸통을 꿰뚫리고 낙마했다. 주인을 잃은 그의 군마가 구슬피 울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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