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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6화 (6/248)

6

“첫 상대는 제가 지명하겠습니다.”

율리안은 피식 웃었다.

“원하는 대로 하여라.”

아르투르는 일전에 자신과 대치했던 중년의 기사를 가리켰다. 그는 콧방귀를 끼며 말에서 내리고, 종자에게 투구를 받아 머리에 눌러쓴다.

“애송이한테 얕보인 모양이구나. 나는 동부 왕국의 원로 기사이자 율리안 왕의 챔피언이다.”

아르투르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를 노려봤다.

“네가 누군지는 관심 없다. 나와 내 아버지를 모욕했다는 게 중요하지.”

“내 별명이 왜 '장검의 호아스'인지 알게 해주마. '잡종' 아르투르.”

호아스가 말을 마치기 전 허공에서 금속이 번뜩였다. 그는 허둥지둥 오른팔을 들어 올려 공격을 막아냈다. 판금 갑옷과 검신이 부딪히며 챙 -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비겁한 놈이! 준비되기도 전에 공격을 하다니!”

아르투르는 여명을 들어 공격을 계속했다. 상단과 중단, 하단으로 순서를 바꿔가며 찰나의 순간 세 번의 공격이 가해졌다. 흡사 검에서 불꽃이 튀는 듯했다.

호아스는 아르투르의 공격을 얻어맞을 때마다 자세가 흐트러졌고, 마침내 다리를 얻어맞고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갑옷이 아니었다면 세 토막이 나서 흩뿌려졌을 일격이었다. 그 틈을 타 아르투르가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검을 반대로 쥔다. 건틀렛을 낀 손으로 검날과 십자막이를 붙잡은 채, 손잡이로 호아스 경의 투구를 후려쳤다. 호아스는 강력한 일격을 얻어맞고 뒤로 뻗어버린다. 아르투르는 쏜살같이 달려들어 호아스의 복부에 올라탄 다음, 그의 면갑을 들어 올려 건틀렛을 낀 오른손으로 후려쳤다.

그것으로 결투는 끝이 났다.

아르투르의 건틀렛에는 붉은 피가 잔뜩 튀었다. 호아스의 입가는 흉하게 짓눌리고 이빨이 깨져나갔다. 아르투르의 왼손이 올라가는 모습을 본 호아스는 새어나오는 발음으로 간신히 말했다.

“으허으..하-항복이므니다…. 살려주십시오….”

아르투르는 호아스가 제때 항복을 선언한 게 아쉬웠다. 한 대 더 치고 싶었는데.

“머리를 조아린다면 항복을 받아주마.”

잔뜩 공포에 질려있던 호아스는 지체 없이 그렇게 했다. 두 무릎을 꿇고 엎드린 채 땅에 머리를 박았다.

“죄송하므니다…. 아르투르 경. 제 모욕에 대해 사과드리므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기사들은 호아스를 비웃기 시작했다. 평소에 콧대 높기 그지없던 그가 목숨을 구걸하는 모습이 우습기 짝이 없던 모양이었다. 호아스는 땅에 머리를 조아리며 자신의 무례함을 연신 사과했다. 기사의 자존심은 드높기 짝이 없지만, 대부분 목숨과 바꿀 정도는 아니다.

아르투르는 고개만 끄덕여 사죄를 받고는 흑마를 탄 율리안을 바라봤다.

“첫 번째 결투는 끝났습니다.”

아르투르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 사이 실력이 더 늘었구나.”

율리안은 자신의 측근이 처참한 패배를 당했음에도 분노하지 않고, 오히려 이전보다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아르투르를 바라봤다.

“펠릭스. 네 챔피언을 지명하거라. 아르투르와 싸울 기사로 누굴 지명할 테냐?”

아르투르는 양손을 펼쳐 보이며 거만한 태도로 주변을 도발했다. 누가 나와도 상관없다는 강력한 자신감의 표시였다. 그 꼴을 본 펠릭스는 비릿한 미소를 짓더니, 뒤편을 향해 손을 까딱했다.

“부르셨습니까. 주군.”

펠릭스의 부름이 거한이 나타나 성큼성큼 걸어왔다.

“저 기고만장한 잡종에게 실전이 무엇인지 보여주거라.”

펠릭스는 말을 마치며 거한에게 눈짓을 보냈다. 거한은 단숨에 그 신호를 알아차렸다. 실수를 가장해서 죽여라. 그런 방식으로 그와 주군은 여러 귀족을 처리해왔다. 많은 원한이 생기긴 했지만 자신에게 따박따박 대전료가 들어오는 한 알 바는 아니었다. 정신이 나간 채 울부짖는 귀족 놈들을 보는 일은 퍽이나 즐거웠으니까.

그런데 이번엔 세상 물정 모르고 자란 왕의 아들이 대상이라니! 거한은 아르투르의 잘생긴 얼굴이 부서지는 모습을 떠올리며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아르투르 역시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거한을 살폈다. 상대는 몸통과 팔, 다리만을 판금 갑옷으로 보호하고 나머지는 가죽을 덧대서 보호하고 있었다. 기동성을 최대한 늘리기 위한 조치인 모양이었다. 특이한 점은 어떤 문장도 없던 데다가, 등 뒤에는 두 자루의 큼지막한 도끼를 매고 있는 것이었다.

“넌 기사는 아닌 것 같은데.”

아르투르는 평온한 어조로 물었다.

“하! 나는 '기사 도살자' 자크렌이다! 지금이라도 항복하고 어르신들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좋을 것이다.”

자크렌은 일부러 아르투르를 도발했다. 저 어린 놈의 성격으로 볼 때 도발에 결코 물러나지 않으리라. 자신을 보고 겁먹어서 결투를 포기하게 되면 주군의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될 테지만, 자존심을 건드리면 그럴 일은 없겠지.

“결투에서 도끼를 쓰려고? 진심이냐?”

아르투르의 평온한 시선은 도끼에 가 있었다. 기사들이 결투에서 검을 사용하는 까닭은, 가장 손에 익은 무기인 탓도 있지만 가급적 상대를 죽이지 않기 위해서였다. 원한이 있지 않는 상대를 일부러 죽이게 되면 불필요한 악명과 원한이 쌓이기 마련이었다.

“겁이 나느냐? 그럼 항복하거라!”

기사도살자는 누런 이를 드러내며 아르투르를 비웃었다.

“펠릭스 형님. 아끼는 부하 같은데, 잘못 생각하신 겁니다.”

아르투르는 한숨을 내쉬며 에쿠잘루스의 짐에 걸어두었던 할버드를 들어 올려 어깨에 걸쳤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구나. 나는 명예나 따지는 기사들보다 경험 많은 용병을 신뢰할 뿐이다.”

펠릭스는 능청을 떨며 아르투르를 바라봤다.

“하긴, 형님은 기사 작위를 날로 받으셨으니 그렇게 생각하실 법 하죠. 두 번 말씀 안 드립니다.”

“시끄럽고 싸우기나 하거라. 겁이 나면 항복하든가.”

아르투르의 시선은 펠릭스에게서 벗어나 자칭 기사도살자를 향했다. 그는 실컷 웃더니, 왼손에 쥔 도끼를 아르투르를 향해 날렸다. 도끼가 바람을 가르며 날아왔지만 궤적을 정확히 읽어낸 아르투르는 할버드를 공중에서 한 바퀴 돌려 간단하게 쳐냈다.

그게 바로 기사도살자가 노리던 행동이었다. 할버드 같은 폴암류 무기는 사정거리가 길지만 근접전에 들어가면 운용이 까다롭다. 그런데 투척된 도끼를 막느라 시간을 들였으니, 기사도살자의 접근엔 무방비가 된 셈이다. 달려가서 목을 치면 끝이다.

적어도 자크렌은 그렇게 생각했다.

공중에서 아르투르의 할버드가 번득이자 자크렌의 머리통이 공중에 날았다. 그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이해하지 못한 채 눈을 크게 뜨고 죽었다.

주인을 잃은 거한의 몸뚱아리가 무너져 내렸다. 깨끗한 절단면에서 피가 분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결투를 지켜보던 모든 기사는 입을 크게 벌린 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되새겼다. 아르투르는 할버드로 날아온 왼손의 도끼를 쳐낸 다음, 자크렌이 달려오는 도중 할버드의 자리를 원상 복구시킨 후 목덜미를 향해 공격한 것이 전부였다.

“그럴듯한 계획이 있었나보군. 아무 소용도 없었지만.”

아르투르는 싸늘한 시선으로 자크렌의 시체를 내려다봤다. 명예나 예의는 갖출 법한 상대에게 갖추는 것이다. 결투사를 가장한 살인청부업자는 모욕당해 싸다.

모든 기사가 경탄의 눈빛으로 아르투르를 바라보며 서로 수군거릴 때, 단 한 사람만이 만족스러운 미소로 아르투르를 바라보고 있었다.

율리안 왕자였다.

그는 아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

페르넬 대왕의 사생아가 뛰어난 용력을 가졌다는 소문은 유명했다. 하지만 소문, 특히 왕가에 관련된 소문이란 과장되기 마련이기에 진지하게 이야기를 듣는 이는 드물었다. 그러나 많은 기사는 오히려 소문이 실제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아르투르가 보인 무용은 단순히 "뛰어난 용력"이라고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호아스 경과 기사도살자 자크렌 모두 자신의 명성을 증명해온 동부와 서부의 실력자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단 몇 합 만에 나가떨어졌으니, 다음 상대는 자신이 되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잘못 했다간 목이 달아날 것이고, 운이 좋더라도 단단히 망신을 치르게 될 터였다. 펠릭스 왕자는 완전히 굳은 표정으로 상황을 바라봤다.

기사들이 눈치를 보며 자신이 지명되지 않길 기다리는 동안 아르투르는 하품했다. 어깨에 할버드를 짊어진 그는 도전적인 시선으로 주변을 돌아봤다.

“다음은 누구냐?”

아르투르의 도전적인 목소리.

“바로 나다.”

패기 넘치는 목소리가 답해왔다. 아르투르의 시선이 향한 곳엔 자신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는 율리안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키가 아르투르보다 머리가 하나 작았지만, 그런데도 기사들의 평균적인 체격보다 한 단계는 뛰어난 체격을 지닌 근육질의 사내였다. 등에는 사람 키만 한 대검을 짊어지고 있었다.

형님이 걸어오는 것을 본 아르투르가 할버드를 내려놓으려 하자 율리안이 손을 내저어 만류했다.

“친선 시합 따위를 하려는 게 아니니 괜찮다. 서로 가장 잘 쓰는 무기로 결판을 내자꾸나.”

율리안의 입가엔 자신만만한 미소가 퍼졌다.

“원하신다면. 형님이라면 저도 안심하고 전력을 다해 싸울 수 있겠군요.”

“그렇게 여유 부릴 때가 아닐 것이다!”

율리안은 대검을 뽑아들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아르투르는 침착하게 자세를 고쳐 잡으며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검과 폴암의 대결은 결국 사정거리 싸움이었다. 형님에게 접근을 허용해선 곤란했다.

율리안이 거리를 좁히려고 할 때마다 번개같이 할버드의 도끼날이 날아들었다. 율리안은 그때마다 재차 뒤로 물러나 방어를 굳혀야 했다. 병장기가 부딪힐 때마다 흡사 불꽃이 튀는 것처럼 느껴졌다. 맹렬하기 그지없는 싸움이었다.

두 사람의 기예가 동등했기에 공수를 전환하며 교전이 이어졌다. 할버드가 찌르면 대검의 검신이 그것을 쳐내고 대검을 내리치면 할버드의 도끼날로 걸어 공격을 막았다. 거리를 벌린 채 공방이 이어졌다. 흔히 볼 수 없는 일류 실력자들의 싸움에 기사들이 탄성을 내뱉었다.

율리안은 자신의 열세를 직감했다. 교전이 이어질수록 자신의 체력이 더 빨리 떨어지고 있었다. 사정거리가 긴 무기를 사용하는 아르투르는 간단한 동작만으로 자신에게 많은 체력을 요구하는 방어 자세를 강요할 수 있었다. 반면 자신이 공격을 시도할 때마다 아르투르는 멀찍이 물러나면 그만이었다.

‘약삭빠른 녀석, 어렸을 때부터 여러 무기를 손에 익히더니 괴물이 됐구나.'’

율리안은 결정을 내리고 온 힘을 다해 아르투르에게 돌격했다. 아르투르는 일전에 그랬듯 뒤로 물러나며 강하게 할버드를 내리쳐 돌격을 저지했다. 날아오는 일격을 본 율리안은 옆으로 굴렀다. 간발의 차이로 할버드가 땅바닥을 후려쳤다.

아르투르가 다시 할버드를 거둬들일 때, 율리안은 쏜살같이 달려 나가 어깨로 앞세워 아르투르에게 부딪혔다. 순간 균형을 잃은 아르투르는 손에서 할버드를 놓쳤고 뒤로 넘어지는 와중 굴렀다.

자세를 바로잡은 율리안은 막 일어나려는 아르투르에게 대검을 내리쳤다. 아르투르는 쏜살같이 여명을 뽑아들어 공격을 방어했다. 율리안의 내리누르는 힘과 아르투르의 올려치려는 힘이 대결했다. 분명히 위를 차지한 율리안이 더 유리했지만, 결판이 쉽사리 나지 않고 서로 온 힘을 다해 서로의 손에 집중시켰다.

아르투르는 점차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고 검에서 손을 놓으며 옆으로 굴렀다. 율리안의 대검이 땅을 후려치며 쾅 -하는 소리를 냈다. 아르투르는 잽싸게 몸을 날려 율리안의 다리를 잡고 넘어뜨렸다. 율리안도 넘어지면서 무기는 손에서 떨어뜨렸지만 지지 않고 대처했다.

형제 사이에 건틀렛을 낀 주먹질이 오가고, 서로 레슬링을 하며 엎치락뒤치락했다. 우애 좋은 형제의 싸움은 그렇게 끊임없이 이어지다가,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땅바닥에 떨어진 검으로 향했다. 두 사람은 동시에 손을 뻗었고, 누군가 검을 움켜쥐었다.

두 포개어진 기사 중 한 사람의 목에 칼날이 겨누어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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