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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5화 (5/248)

5

금발의 기사가 도시를 내려다본다. 판금 갑옷은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인다.

해가 떠오르자, 도시는 새로운 하루를 맞이했다. 닭의 울음소리가 들리자 사람들이 깨어났다. 화덕에서 빵을 굽는 연기가 도시 곳곳에서 피어오르고 가장들은 일터를 향해 바삐 움직였다. 종소리가 울려 성문의 개방 시간이 되었음을 알린다.

경비병들이 걸쇠를 열자 문이 열리고, 열린 문틈으로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도시에 밀을 팔러 온 농부들, 인근 마을로 징세를 떠났던 세리들, 이국적인 외양의 상인들까지.

세 갈래의 강물 사이에 세워진 이 대도시, 아헨은 왕국의 수도였다. 수십만에 이르는 방대한 인구를 부양하기 위한 시설들이 거미줄처럼 촘촘히 얽혀져 있다. 생활용수를 전달하기 위한 수도관들이 펌프질되며 도시의 심장처럼 곳곳으로 물을 퍼 나르고 밀을 공급 받은 제빵업자들은 서둘러 빵을 굽는다. 각기 도시의 기능을 유지하기 위해 출근하는 사람들을 보자면, 흡사 하나의 생물체 내부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생체 기관을 보는 듯하다.

금발의 기사는 사과를 한 입 베어 물었다.

‘평범한 이들의 삶엔 변화가 없군. 대왕이 죽어도 세상은 돌아가는구나.’

아르투르는 모든 풍경을 뇌리에 담았다. 내가 태어나고 자라온 고향. 아헨.

어떤 사람들은 내게 북구로 돌아가라 손가락질했지. 내가 자라기 전엔 앞에서, 그들보다 키가 부쩍 커진 뒤에는 은밀한 목소리로.

바로 이곳이 내 고향이었는걸. 내가 태어나 자라온 내 사랑하는 고향. 나는 이곳의 모든 것을 사랑한다. 특히 이곳에 얽힌 내 추억들을.

세상 물정 모르던 시절, 평민 아이들과 골목을 뛰어다니며 뒹굴었다.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절로 떠오르는 시절이었다.

바야르 경의 종자로 들어가서 매 순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거친 훈련을 받았었지. 덕분에 나는 누구와 싸워도 자신 있는 기사가 되었어. 바야르 경께선 열다섯 살 성인이 되는 날 직접 검을 선물해주셨지.

열다섯 살 성인식 날 눈여겨보던 여자 아이와 첫 키스를 했지. 부용 가문의 카트린이었어. 가슴이 풍만한 아이었다. 지금은 뭘 하고 지내려나.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나를 직접 서임해주셨지. 아르투르는 병상에 누은 아버지를 떠올리며 자신의 허리춤에 찬 황금의 보검을 매만졌다. 실제로 누군가를 벨 수 없으니 쓸모없는 검이겠지만, 내겐 의미 있는 물건이야.

“사생아 아르투르는 이곳에 두고 기사 아르투르로 떠나는 거야.”

결심을 마친 아르투르는 주변에서 풀을 뜯던 육중한 백색 군마로 다가갔다.

“가자, 에쿠잘루스. 우리 둘이 여행을 떠나는 거야.”

오랫동안 주인과 호흡을 맞추었던 에쿠잘루스는 주인이 타기 쉽게 자신의 등을 내려주었다. 아르투르는 등자를 밟고 단숨에 뛰어올라 안장에 자신의 엉덩이를 안착시켰다.

‘스무 살, 젊은이가 모험을 떠나기에 이보다 적합한 나이가 있을까?’

세상을 구원한 구원자 발타리아도 스무 살에 그의 여정을 시작했다고 했지. 아르투르의 가슴은 자신도 그처럼 세상을 구하는 존재가 되지 않을까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렇게 위대한 존재는 못 되더라도, 적어도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는 일은 아주 재밌을 거야.

아르투르는 에쿠잘루스의 고삐를 잡고 거침없이 드넓은 평원을 질주했다. 그 와중, 건틀렛 문양이 그려진 깃발을 내건 두 깃발이 보였다. 수백 명에 달하는 수행원들이 말을 타고 뒤따르고 있었다. 필시 둘째 형님과 셋째 형님의 행렬이리라.

단기필마로 정처 없이 떠나는 방랑기사와 수백 명의 중무장한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자신들의 영지로 돌아가는 왕들. 그러한 차이가 느껴지는 광경에도 아르투르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들에겐 그들의 길이,

자신에겐 자신의 길이 있는 것이다.

***

아르투르와 에쿠잘루스는 개울가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오랜만에 느껴지는 해방감에 흥분해서 쉬지 않고 달려 나갔던 탓에 몇 시간 가지 못해 지치고 말았다. 아르투르는 투구에 물을 담아 한 모금 마시며 드넓은 지평선을 바라봤다.

한 무리의 기수들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게 보였다. 각각 은빛 건틀렛과 금빛 건틀렛의 깃발을 달고 있었다.

‘두 형님들의 기병들이군.’

아르투르는 피할 생각 없이 무기를 점검했다. 오른편에 찬 장검, "여명"은 예리하게 잘 갈려 언제건 적을 쓰러뜨릴 준비가 되어있었다. 에쿠잘루스에 매어둔 육중한 도끼창(halberd)를 꺼내들어 자신의 옆에 내려두었다. 아르투르는 큼지막한 무기를 옆에 두고 있을 때 상대의 말이 더 공손해진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들이 자신에게 무슨 볼 일이 있건, 자긴 그들에게 볼 일이 없었다. 돌이켜보면 둘과는 사춘기가 시작될 무렵부터 서먹해졌었다. 자신이 부정해왔을 뿐, 객관적으로 돌아보자면 그랬다. 이제 와서 주고받을 말이라 봐야 권력에 관한 것이 전부이리라.

달려오던 기병들은 아르투르의 근처에서 말고삐를 잡아당기며 멈춰 섰다. 그들 중 가장 근사한 갑옷을 입고 있는 중년의 기사가 앞으로 나섰다.

“당신이 아르투르인가?”

고압적인 목소리였다.

“그러는 당신은 누구인가?”

아르투르도 위압적으로 대답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네가 누군지 관심 없다. 형님들이 보내신 이유나 말해라.”

아르투르의 말에 기사 옆의 앳된 소년이 소리쳤다.

“말조심해라! 북구인 잡종! 이분은 호아스 가문의 가주이시자 동부 왕국의 사령관이신….”

그러자 아르투르가 소년을 노려봤는데, 그 기세가 워낙 사나워 소년은 말하다말고 굳어버렸다.

“사령…사령관이신….”

중년의 기사는 얼 타는 종자의 머리통을 세게 후려쳤다. 악 소리를 내며 놈이 말 위에서 떨어졌다.

“한심한 놈 같으니. 어쨌든, 이봐. 잡종. 이제 널 지켜주던 아버지는 없다. 험한 세상 살아나가려면 예의를 차릴 줄 알아야 할 거야.”

“예의? 세상에 어느 기사가 말을 탄 채로 같은 기사를 내려다보며 이야기하나? 당장 꺼지거나 말에서 내려와라. 나는 네 아랫사람이 아니다.”

중년 기사는 얼굴을 찌푸리고 말에서 내렸다.

“왕들께서 너를 부르신다. 따라와라. 아르투르.”

“형님들께서 날 보고 싶으시다시면 이곳으로 찾아오시라고 해라. 난 그분들이랑 할 이야기가 없어.”

아르투르의 말에 중년의 기사를 비롯한 모두의 표정이 굳었다. 그저 에쿠잘루스만이 멀뚱히 주변을 둘러보고 있을 뿐이었다.

“알겠다. 그 말 그대로 전하도록 하지.”

“야, 잠깐만.”

“야? 날 부른거냐?”

“다시 한 번 잡종이라고 부르면 그때는 네 목숨을 걸어야할 거다. 혓바닥이나.”

아르투르는 가만히 중년의 기사를 노려봤고, 그도 지지 않고 투구 사이로 아르투르를 마주봤다. 하지만 맹렬한 시선에 눈앞이 아찔해진 기사는 고개를 돌려 모른 척하며 자신들의 본진으로 돌아갔다.

“별 것도 아닌 게 깝치고 있어. 네놈 주군이 아니었으면 넌 오늘 뒈졌을 거다!”

아르투르는 그가 떠난 자리에 침을 뱉었다.

***

같은 시각, 호화 텐트에서 왕국을 전복할 계획을 짜던 두 명의 왕은 가져온 소식에 서로 다른 반응을 보였다.

“하하하하하! 그래. 그래야 녀석 답지. 놈이 오기 싫다니 우리가 가주자꾸나.”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흔쾌히 요청을 받아들인 율리안이 있던 반면,

“저희가 왜 사생아 따위의 말에 휘둘려야합니까? 오지 않으면 잡아오라고 명령하시지요.”

노골적인 불쾌감을 드러내며 적의를 드러내는 펠릭스도 있다.

“형제간에 누가 오고 가건 무슨 상관이냐? 여봐라! 내 말을 대령해라!”

***

“어서 오십시오. 형님들.”

출발하기 위해 에쿠잘루스에 짐을 묶고 있던 아르투르는, 수많은 수행원을 데리고 접근한 두 형제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연히 안 올 줄 알았는데. 왔다는 건 분명히 진지한 안건이라는 뜻이다. 작별인사 따위를 하려는 건 아닌 게 분명했다.

율리안 왕은 양팔을 번쩍 벌리고 가식적인 미소를 지어보이며 과장된 환영을 해줬다.

“그동안 잘 지냈느냐? 장례식 중에 워낙 정신이 없어서 널 챙긴다는 걸 깜빡했는데….”

“율리안 형님. 마음에 없는 말씀은 마시고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위대한 왕들께서 미천한 동생에겐 무슨 볼일이십니까?”

펠릭스의 표정은 갈수록 굳어갔다. 잘해줄수록 기고만장한 놈이라니까.

“큼 - 큼. 그렇게 말하니 무안하구나. 상황이 이렇게 되어 유감이다만, 널 아끼는 건 진심이다.”

율리안은 머쓱한 표정으로 아르투르의 시선을 피하다, 그의 눈동자를 마주보곤 말했다.

“이번 유산 상속. 너도 불만이 많을 텐데?”

아르투르는 율리안을 가만히 바라보며 의중을 읽어냈다. 그는 호탕하고 관대한 모습을 연기하고 있을 뿐, 실제로는 권력에 굶주려 있는 것이 분명했다.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의 눈빛은 감출 수 없다. 자신의 눈빛이 그렇듯이.

“기대하던 바는 아니였지요. 그래서요?”

율리안은 통한다는 듯, 웃음을 유지하며 말을 이어갔다.

“전부 욕심 많은 자들이 유언장을 위조해서 벌어진 일이다. 모두 함께 우리의 몫을 되찾자꾸나. 일이 끝나면 네게 공작위를 하사하마.”

“셋이 힘을 합쳐 큰형님과 삼촌을 몰아내고 권력을 나누자는 거지요?”

냉랭한 목소리로 펠릭스가 끼어든다.

“아니. 우리 둘이 권력을 차지하고 너는 우리 신하가 되라는 이야기다. 건방진 소리 말거라. 형님의 제안에 감사함을 느껴야지.”

아르투르는 슬슬 이런 대화에 진절머리가 나기 시작했다. 하루 빨리 이 지긋지긋한 권력 다툼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됐습니다. 중부 왕국을 통째로 주신다고 해도 전 이 다툼에 끼어들지 않을 겁니다. 첫째로 저는 가족들과 싸울 생각이 없습니다. 둘째로, 승산이 없습니다.”

율리안은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두 번째는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내겐 왕국 최고의 정예인 동부 군단이 있다. 펠릭스와 어머님께는 풍부한 물자와 자금이 있지. 우리 형제 중 내가 가장 전쟁 경험이 많다. 형님은 사람 한번 못 죽여본 샌님이고, 삼촌은 늙었어. 이미 이긴 거나 마찬가지다.”

“왜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십니까? 아버지와 함께 하던 최고의 기사들이 모두 큰 형님께 충성하고 있습니다. 우린 아직 그 늙은이들의 상대가 못 됩니다. 그리고 전쟁이 어디 개인의 무용이나 군재만으로 이기는 일입니까? 시간은 결국 비옥한 중부를 차지한 큰형님 편입니다.”

율리안은 더욱 흥미로운 표정으로 아르투르를 바라본다.

“형님과 펠릭스는 생각이 너무 많고, 난 항상 행동이 앞서지. 그런 점에서 너는 균형감 있는 사내다. 역시 네 능력이 탐나는구나. 날 믿고 따라와다오. 아버지와 삼촌이 새 시대를 열었듯, 우리 셋의 협력이 새로운 시대를 열게 될거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싫습니다. 승산이 있건 없건 안할 겁니다. 아버님께서 세상을 떠난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형제들끼리 칼을 겨눕니까. 전 그런 일에 관심 없습니다.”

율리안은 그 말에 심각한 표정이 된다. 강하게 아르투르를 노려본다.

“네가 순순히 가지 않을 거라곤 생각했다만, 정말 그렇게 결정할거냐?”

“네. 절 죽이겠다고 위협하셔도 변하지 않을 겁니다.”

“넌 정말 뛰어난 녀석이야. 하지만 그래서, 내 밑으로 들이거나 제거해야하는 인물이지.”

율리안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검을 뽑아들었고, 그의 기사들도 그렇게 했다. 하지만 하나같이 그들의 얼굴엔 부끄러움이 가득했다. 아르투르는 그들의 표정을 바라보다가 율리안을 쳐다봤다.

“결투로 정하지요. 저희는 기사 아닙니까.”

그 말에 율리안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행동은 아무리 봐도 명예나 긍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아르투르는 그걸 감수하고서라도 회유하거나 제거할 가치가 있었을 뿐.

“형님이 지정한 기사들과 연속으로 세 번을 겨루겠습니다. 모두 이기면 절 보내주시고 한번이라도 패한다면 형님의 뜻대로 하십시오.”

펠릭스가 율리안에게 말했다.

“형님. 잡종의 이야기 따위 들을 필요 없소. 숙부의 끄나풀인 게 분명하니 여기서 제거 합시다.”

하지만 율리안은 펠릭스의 말에 흔들리지 않았고 그는 결정을 내렸다.

“좋아. 그렇게 하자. 단, 네가 한번이라도 진다면 정말로 내게 충성을 바쳐야한다. 기사의 명예를 걸고 약속하거라.”

“명예요? 강제로 충성을 받아내길 원하시면서 명예까지 바라십니까? 욕심이 많으시군요.”

“그래서 받아들일 것이냐? 말 것이냐? 기사는 자신이 말한 바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 나도 그렇게 하겠다.”

“좋습니다. 받아들이죠. 어차피 제가 이길테니까요.”

아르투르는 여유로운 태도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오른쪽 허리춤에 걸어두었던 여명을 뽑아들었다. 번뜩이는 칼날이 오후의 햇살을 받아 찬란하게 빛났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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