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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4화 (4/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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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창고를 나온 아르투르는 왕의 행방을 묻기 위해 사람을 찾았다. 복도 건너편에서 걸어오는 중년의 하인이 보였다. 화장실 청소를 담당하고 있는 샘이었다.

“왕께서는 어디 계신가?”

샘은 못 마땅한 표정으로 아르투르를 바라보며 퉁명스럽게 답한다.

“내가 왜 그 질문에 답해야하오?”

샘의 말은 부글부글 끓던 아르투르의 기분을 터뜨리는 기폭제가 됐다. 아르투르는 억세고 굳센 팔을 뻗어 샘의 멱살을 붙잡아 공중으로 들어올렸다.

“이제부터 나는 아르투르 경(sir)이란 말이다. 경! 기사라고! 네가 그 따위로 굴어도 되는 사람이 아니다!”

아르투르가 울분을 토하며 말할 때 샘의 눈동자엔 두려움이 깃들었다. 놈은 공중에서 허우적거리며 말했다.

“컥 - 컥, 죄송… 죄송합니다. 경.”

“다시 묻지. 왕께서는 어디 계신가?”

“왕께선…내실에 계십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아르투르 경.”

샘은 비굴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살폈다. 일부는 자신들에게 불똥이 튈까 두려워하는 눈빛이었다.

‘사생아 놈이 기사 작위로 유세부린다고 빈정거리겠군.’

샘에게 호된 맛을 보여주려던 아르투르는 그의 태도를 보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에 대한 냉대는 왕비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한 이들의 생존전략이었다. 이런 사람들에게 화를 내봐야 자기 꼴만 우스워지리라.

아르투르는 샘을 바닥에 내던진 뒤, 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긴 복도들과 여러 방을 지나는 도중 궁전 내의 수많은 인파를 마주친다. 하인과 하녀, 기사들과 귀족들. 그들은 자신이 지나갈 때마다 무언가 수군거렸다. 딱한 눈빛을 보내는 자들, 멸시하는 눈빛을 보내는 자들. 그러나 고개를 돌려 마주 보면 그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릴 따름이었다.

‘마주 볼 용기도 없는 같잖은 놈들.’

아르투르는 아랑곳 않고 내실을 향해 나아갔다. 궁정의 공식적인 행사가 열리는 알현실과 달리 내실(privy room)은 왕의 사적인 생활을 위해 준비된 방들이 있었다.

판금 갑옷을 입고 도끼창을 든 근위병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삼엄한 경계를 펼치는 가운데, 황금 망토의 기사들이 그들을 지휘했다. 물샐틈없는 경호였다.

‘형님께서 경호에 유달리 신경을 쓰시는군. 혹은 아버지께서 그만큼 두려움 없이 사셨거나.’

아르투르가 내실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젖히고자 할 때 양 옆의 근위병들이 도끼창(halberd)을 교차시키며 출입을 가로 막았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왕실 기사가 허리춤의 장검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멈추시오. 누구도 왕의 허가 없이 내실에 들어갈 수 없소.”

“나는 왕의 동생이오. 왕실 가족이라면 내실에 얼마든지 출입할 수 있는 것이 선왕의 법도요.”

“선왕 시절에는 그랬지.”

무미건조한 대답이 돌아오자 표정이 절로 찌푸려졌다. 황금 망토를 입은 왕실 기사들은 명령과 규정에 지나치게 철저했다.

“그럼 왕께 아르투르가 왔다고 전달해주시오.”

왕실 기사는 고개를 끄덕이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얼마 뒤, 돌아온 기사는 무뚝뚝한 목소리로 답했다.

“기다리시오.”

“그러지.”

아르투르는 기다림이 오래 가지 않을 것이라고 여기며 벽에 등을 기댄 채 팔짱을 꼈다. 그러나 오 분이 흐르고, 삼십 분이 흐름에도 왕의 호출이 없자 그의 표정은 점차 짜증으로 구겨져갔다.

‘언제까지 기다리라고 말씀이라도 해주시지. 마냥 기다리게 만드는 건 형님답지 않으시군. 배려심이 깊은 분이였는데 말이야.’

벽에 등을 기대고 있던 아르투르는 하인을 시켜 의자를 가져오도록 했다. 아르투르는 의자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바야르 경의 말대로 더 이상 형님들은 날 신뢰하지 않을까? 내 아버지의 왕국을, 나의 집을 떠나야만 한단 말인가?

자기에겐 오랜 꿈이 있었다. 왕조의 영광을 위해 강력한 적에 맞서 싸우는 것. 나라와 가문을 지켜내고 그 공로로 인정을 받아 동등한 왕자로 인정받는다. 그리고 광대한 영토를 하사받아 새로운 방계 왕조를 창설하는.

그런 꿈을 몇 번이나 꾸었는지 모른다.

그건 단순히 꿈에 불과했던 걸까?

해가 질 무렵에 형님을 보러왔건만, 창문 너머로 보이는 하늘은 완전히 검게 물들어있었다. 해가 지고 밤이 오는 모습은 흡사 왕국의 미래를 예견하는 것처럼 보인다. 세 형님들이 왕좌를 두고 싸운다면, 데네토르 왕국이 대가를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큰형님의 편을 들어 다른 형님들과 싸우게 되는 것인가?’

벌컥 -

고민이 깊어질 쯤, 내실의 문이 열리며 삼촌인묜시놀인 페르디난트 대공이 걸어 나왔다. 묜시뇰은 본디 왕의 가장 나이 많은 동생을 일컫는 칭호로 왕의 사후에 상속 받을 권리가 있는 인물이었다.

즉, 그는 왕자들을 제외하면 가장 높은 왕위 계승 서열에 위치한 사내였다. 페르넬과 페르디난트 형제는 힘을 합쳐 왕조를 부흥시켰고 그 결과가 서부 대륙의 대부분을 차지한 데네토르 왕국이었다.

맏이인 페르넬이 용맹과 카리스마를 떨치며 전장을 제패하는 동안, 동생인 페르디난트는 신출귀몰한 전략과 철저한 계획으로 왕국을 바로 세웠다.

왕국의 막후 실력자. 사실상의 왕국의 2인자.

그의 키는 곧고 컸다. 회색 깃털로 장식된 고풍스런 회색 의복은 그의 멋을 더해주었다. 걸음걸이는 대영주답게 당당했고, 시선은 자부심과 오만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숙부가 자신을 올려다보자, 아르투르는 자신이 위축된다고 느꼈다. 오'데르만 혈통의 녹색빛 눈동자가 교차했다.

‘숙부의 저 뻣뻣한 고개가 아버지를 제외한 사람에게 숙여진 적이 있을까? 새로운 왕에게는?’

의문은 오래 가지 않았다.

“루이스를 만나러 온 것이냐.”

아무래도 묜시뇰에게 새로운 왕은 어린 조카에 불과한 모양이다.

“그렇습니다. 삼촌. 제가 아버지의 임종을 지킬 수 있게 변호해주셨지요. 깊이 감사하고 있습니다.”

“됐다. 결국 실패했지 않느냐. 내 힘이 부족했던 탓이지.”

잠시간의 적막이 흘렀다. 두 사람은 친밀하지는 않았지만,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사이었다.

“삼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아르투르가 말하자마자 빠르게 대답했다.

“유산 상속에 대한 이의 제기를 하고 싶은 거냐?”

정곡을 찔린 아르투르가 당황하며 얼굴을 붉힌다.

“그것이, 예. 맞습니다.”

페르디난트는 일채의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표정으로 답했다.

“나도 네게 영지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형님의 의지가 워낙 완고하셨지. 나로썬 이해할 수 없지만, 형님의 결정이 그러하시다니 내가 할 말이 무어가 있었겠느냐.”

“바야르 경께선 아버지가 정쟁에서 절 보호하고자 하셨던 조치라더군요. 맞습니까?”

페르디난트는 냉소를 짓는다.

“형님은 좋은 사람이지 바보가 아니었다. 아르투르. 범상치 않은 능력을 갖춘 왕의 사생아. 거기서 이미 넌 원치 않아도 정쟁에 휘말려든거야. 형님도 그걸 알았다.”

페르디난트의 말에 아르투르는 입을 다물었다.

‘아버지, 대체 당신의 뜻은 뭡니까? 왜 이런 낡은 골동품이나 준거냐고요? 사나운 사자들의 싸움터에 홀로 던져진 사슴 꼴이 되라고?’

“유언장에 답이 있을 게다. 지혜로운 분이셨고, 널 사랑했다. 그러니 방법을 남겨 두셨을 거다.”

“유언장에는 아발로니아로 검을 들고 떠나라는 말이 전부였습니다.”

“내가 너라면 그 말을 그대로 따르겠다.”

아르투르는 그 말에 억울한 듯 소리쳤다.

“야만인들이 사는 낙후된 섬나라로 갈 순 없습니다! 왕국을 떠나더라도 그런 오지로는 가지 않을 겁니다.”

“그것도 네 선택이겠지. 루이스에게 영지를 내려달라 할 셈이냐?”

“아버지가 주신 게 없으니 형님께라도 부탁해야겠죠.”

페르디난트는 희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안쓰러움이었을까, 안타까움이었을까, 그도 아니면 조롱이였을까.

“한번 해보거라. 네가 원하는 대답을 얻진 못하겠지만.”

그는 툭-툭 아르투르의 어깨를 치고 지나가며 속삭였다.

‘셋째, 펠릭스가 네 목숨을 노리고 있다. 루이스는 그걸 방관하고 있고. 무기를 손에서 떼어놓지 말고 모든 먹고 마시는 것에 유의하거라. 신분을 숨기고 내 영지로 온다면 네 후견인이 되어주마.’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셋째 형님이 자길 질시하고 비방한 건 오래된 일이였지만, 그래도 우리는 같은 형제들이 아닌가.

적어도 그렇게 믿고 싶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가족들 간의 싸움이 임박한 건가? 더 이상 형제들에게 나는 신뢰받을 수 없는가?

직접 확인해보면 될 일.

그때 시기 좋게 자신을 부르는 루이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동생아. 오래 기다렸구나. 간만에 식사나 하자꾸나.”

***

식사는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별로 궁금치 않은 신변잡기적 이야기. 숨길 수 없는 긴장감. 그 뒤에 몰려오는 어색함.

침묵이 뒤따르고 아르투르가 본론을 꺼낸다.

“형님, 제게 영지를 주십시오.”

루이스는 고기를 썰면서 답한다.

“아버지께서 네게 남기신 편지가 있던데, 뭐라고 하시더냐?”

“물려주신 검을 가지고 아발로니아로 떠나라고 하시더군요.”

루이스는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가, 눈을 뜨며 아르투르를 마주봤다.

“역시 아버님은 현명한 분이셨군. 당신 사후에 벌어질 일을 내다보신 것 같구나. 아발로니아로 떠나 있거라. 그게 형제들 간의 우애와 왕국의 평화를 위한 최선의 결정이다. 그렇게 한다면 네 안전은 내가 책임져주마.”

아르투르는 쓴 웃음을 지었다.

더 이상 형제애는 없었다. 아버지의 유산을 두고 다투는 경쟁자들만 남았을 뿐.

“그리 말씀하시니 아무 것도 청하지 않겠습니다. 먼저 일어나보겠습니다. 저는 누군가의 보호가 필요한 사람이 아닙니다.”

루이스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득였다.

“삼촌은 너를 지하 감옥에 가두라고 조언하더군.”

“그렇게 하실 겁니까?”

아르투르는 덤덤하게 답했다.

“아니면 작위를 주고 널 중용하거나. 나는 둘 다 내키지 않는구나. 그러니 널 자유롭게 보내주마. 무슨 일이 있더라도 우리는 형제다. 그걸 잊지 마라.”

루이스의 목소리엔 아쉬움이 가득했다.

“신뢰하지 못하는 형제가 무슨 소용입니까?”

아르투르의 냉소 섞인 대답에, 루이스는 쓴웃음을 짓는다.

“왕이 되면 내 심정을 이해할 게다. 율리안은 내전을 벌이겠다고 위협 중이고 펠릭스는 내 포도주 잔에 독을 타려고 하고 있어. 어머니와 삼촌도 권력에 대한 야망이 가득한 사람들이지. 그들 모두 나를 그들의 뜻대로 날 움직이는 데만 관심이 있다. 대체 내가 누굴 믿어야 한단 말이냐?”

루이스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내가 네게 영지를 주면? 그러면 너는 내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칠 수 있느냐? 내 명령에 따라 형제들과 싸우고 삼촌을 벨 수 있느냐? 네 친구들을 죽이라는 명령이 내려지면 어떨 것 같으냐?”

젊은 왕의 눈동자에선 눈물이 흘렀다.

“그런 잔인한 일을 네게 시키고 싶지 않다. 너도 바라지 않을 테지. 하루아침에 내가 가장 사랑하고 신뢰하던 이들이 적이 되어버렸다. 나는 너도 그렇게 잃고 싶지 않다. 사랑스런 동생으로 남아다오.”

목이 메여가는 루이스의 목소리에, 아르투르도 무언가 목에 걸린 것만 같았다. 내 정당한 몫을 내놓으라고 소리쳐야 하건만 마음이 굳어버렸다. 아르투르는 가만히 보다가 형님을 끌어안았다.

아르투르의 어린 시절 기억에서, 큰형님은 항상 커 보이는 사람이었다. 때로는 아버지를 대신해서 의지할 수 있는 집안의 기둥이자, 차별 없이 동생들을 대해주던 착하신 분. 어느덧 자신은 그를 내려다볼 수 있게 됐지만 여전히 자신의 마음속에 큰 존재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제 어디로 갈 생각이냐?”

“물려받은 왕관이 없으니 제 손으로 만들어내야겠지요. 다만 형님들의 몫을 탐내진 않을 겁니다. 적어도 큰형님의 길을 방해할 만한 행동은 하지 않겠습니다.”

루이스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감돌았다.

“천상의 주인께서 네 앞길을 축복하시길. 나도 네 앞길을 방해하지 않겠다.”

아르투르는 깊게 고개를 숙여 존경의 뜻을 표하고 뒤돌아서서 내실을 빠져나갔다.

두 형제는 동시에 말했다.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히.”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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