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왕 아르투르-3화 (3/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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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넬 왕은 세상을 떠나며 수백 명에 달하는 사람들에게 유산을 내렸다. 오랫동안 자신을 섬겨온 이들에 대한 충성이자, 대를 이어 자신의 아들들에게 충성해달라는 부탁이었으리라.

상속인이 너무 많아 왕실 기사들은 따로 그들을 불러내서 각각 유산을 나눠주었다. 수많은 인파가 늘어서 자신의 이름이 불리길 기다렸다. 누군가는 수십만의 백성을 다스릴 수 있는 영지를, 누군가는 평생을 놀고먹을 수 있는 연금을 수령했다. 감격한 수령인들은 선왕의 관대함과 자비로움에 감사를 표하며 떠나간 왕을 애도했다.

아르투르 역시 자신의 이름이 불리길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강력한 귀족들의 이름이 지나갔다. 그들의 상속은 단순한 선물이 아닌 정치적인 고려가 들어간 안배였다. 그 다음에는 왕의 친구들이 받는 개인적인 포상이 이어졌고, 그 다음에는 왕을 오랫동안 모셔온 하인들의 이름이 불렸다. 그들은 모두 만족할 만한 유산을 받고 기뻐했다.

아르투르의 이름이 불린 것은 모든 순서가 지나서였다. 들뜨고 기대 되었던 기분은 초조함과 불안이 되어있었다. 마침내 아르투르의 이름이 불리자, 그는 앞으로 나가 기사단장이 건네주는 편지 한 장을 수령했다. 편지를 받은 아르투르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선왕께서 제게 물려주신 유산이 이게 전부입니까?”

편지를 건네준 기사단장은 반백의 노기사였다. 그는 나이가 들었음에도 체격이 어지간한 젊은이 못지않게 컸고, 전신이 근육질로 이뤄져있었다.

“맞습니다. 경. 그게 전부입니다.”

아르투르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오른손을 내밀었다.

“유언장을 직접 보고 싶습니다.”

기사단장 바야르는 딱한 표정을 지으며, 유언장을 내밀었고 아르투르는 두루마리를 낚아채서 펼쳤다. 수백 명의 이름이 적힌 명단을 따라 자신의 이름을 찾는다.

‘장남 루이스에게 중부 왕국과 대왕의 칭호를, 2왕자 율리안에게 동부 왕국을, 3왕자 펠릭스에게 서부 왕국을, 동생 페르디난트에게 스티리아 대공국을, 왕비 엘레노어에게 금화 300만개를…’

자신은 사생아다. 정통 왕족들과 같은 대우는 기대한 적도 없었다.

‘…테라일 바야르 경에게 생귀넬 백작령을, 아그라베인 경에게 리모쥬 자작령을, 샤를 경에게 엘피스 남작령을….’

왕실 기사들은 평생 동안 아버지를 모셔왔고 최고의 충신들이었다. 목숨을 걸고 같이 싸워온 아버지의 전우들이자, 오늘날의 왕국을 만들어낸 공신들. 보상 받아 마땅하다. 아르투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저 두루마리를 펼치며 읽어 내려간다.

다음에는 성(surname)이 없는 평민들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있었다.

‘왕실 마구간지기 장에게 준남작 작위를, 술 시종 기욤에게 세습할 수 있는 성(surname)과 왕실 농토 500평을 하사한다. 내 말벗 토미에겐 평생 동안 매달 은화 10닢을 내리도록 하라.’

항상 주변 사람을 아끼고 정이 많던 아버지다운 일이었다. 정치적으로 중요한 이들은 아니지만 평생에 걸쳐 자신을 보필해온 신하들을 아끼는 마음이 돋보이는 조치였다.

‘아르투르에게는 내가 사전에 작성해둔 편지 한 장을 남긴다.’

그것이 유언장의 마지막 문장이었다.

바야르는 동정심 가득한 눈빛으로 아르투르를 바라보며 말했다.

“편지를 읽어보시지요. 혹시 귀한 것이 있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아르투르는 두려움과 기대가 뒤섞인 채 편지를 열어봤다. 부유한 영지의 권리가 담긴 증서나 거액의 예치금이 있는 은행의 증서가 아닐까 기대하면서.

‘사랑하는 아들 아르투르, 나는 네게 가장 귀한 것을 남겼다. 네게 물려준 검에 내 삶의 모든 것이 담겼다. 그것을 들고 아발로니아에 있는 고대의 호수를 찾아가거라. 그곳에 너를 위한 보물이 예비 되어있다. 너는 내 아들 중 가장 귀한 것을 받았다. 잊지 말거라. 네게 물려준 것이 가장 귀한 것이다.’

두루마리의 내용을 읽어 내린 아르투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당혹스럽고, 황당하고, 허탈했다.

‘형님들과 내가 같은 몫을 받을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어. 하지만 아버지는, 나를 아들로 생각 하신 게 맞긴 한가? 하다못해 아버지의 술친구에게도 연금을 내리셨건만.’

가슴 속에서 불쾌한 감정이 꿈틀거리고, 온 몸이 달아올랐다.

‘아버지, 왜 제게는 땅 한 조각 남기지 않으신 겁니까. 금은보화라도 주실 수 있었잖아요. 낡은 검 한 자루와 낙후된 섬나라로 떠나라는 편지가 전부입니까. 멀리 떠나라고 하실 거면 여비라도 남겨주시지 그랬습니까.’

실소를 내뱉으며 손에 쥔 편지를 강하게 움켜쥔다. 종이가 그의 마음처럼 바사삭 구겨져 내린다. 그 광경을 바라보는 바야르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뭐라고 적혀있던가요?”

“가장 귀한 것을 제게 물려주시겠다면서, 아발로니아로 떠나라는 말씀을 하시더군요.”

아르투르는 씁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낡은 검 한 자루와 왕국을 떠나라는 편지, 이게 제가 받은 전부입니까? 저는 아버지께 술친구나 궁중 광대보다도 못한 존재였던 겁니까?”

그는 고개를 들어 눈을 치켜뜨고 바야르를 바라봤다. 모든 설움을 눈에 가득 담아서.

“마스터는 아버지의 오랜 친구시죠. 아버지는 제게 "가장 귀한 것“을 물려주셨다고 했는데, 저는 미천한 사생아라 부왕의 뜻을 도저히 알 수가 없더군요. 제가 대체 어떤 귀한 것을 물려받은 겁니까?”

바야르는 안타까운 눈빛으로 한숨을 내쉰다.

“아르투르, 네 아버지는 네게 가장 귀한 것을 물려준 게 맞다. 네 목숨 말이야.”

“뭐요?”

아르투르의 눈이 커져서 깜박였다.

“페르넬은 네 생각보다 훨씬 너를 아꼈다. 부모는 막내에게 가장 마음이 간단다. 페르넬은 항상 네게 미안해하고, 안타까워했지. 그래서 널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오래도록 고민했단다.”

“고민 끝에 나온 게 낙후된 섬나라로 떠나 여생을 살라는 훈계입니까?!”

억울함으로 일그러진 목소리가 높아진다. 분명히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건만, 가슴으론 받아들일 수 없다.

“진정하거라. 아르투르. 너도 지금 궁정의 분위기를 알지 않느냐. 지금 세 왕자가 왕국을 두고 싸움을 벌이기 직전이다. 네 아버지는 이런 상황을 생전에 이미 우려했었다. 달리 방법이 없어 나눠서 상속 했을 뿐. 왕좌는 하나고 왕의 아들은 넷이다. 이게 문제의 근본이야.”

아르투르는 팔짱을 낀 채 눈을 감았다. 스승이 말하는 바를 알지 못할 정도의 바보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 찝찝하고 못마땅한 기분은 갈 곳이 없다. 자연스레 날카로운 말이 튀어 나간다.

“그게 제가 땅 한 뼘 하나 받지 못한 것과 무슨 상관입니까?”

바야르의 표정에 짜증이 섞였다.

“어린애처럼 굴지마라. 넌 똑똑한 녀석이니 이미 알게다. 내가 누누이 말했었지 않느냐. 사생아는 형들의 그림자 속에 쥐 죽은 듯이 살아야한다고. 남들의 눈에 띄어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헌데, 지금은 페르넬의 사생아가 누구보다 페르넬을 닮았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히 돌아다닌다. 네가 항상 능력을 뽐내고 다닌 탓이지.”

아르투르가 따지듯 되물으려 할 때, 바야르는 퉁명스럽게 목소리를 이었다.

“때문에 형제들 간의 다툼이 벌어지면 가장 먼저 제거될 건 너다. 사생아라서 아무런 지지 세력도 없는 네가 뭘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차라리 평범하게 살았더라면 네 형들이 널 경쟁자로 여기진 않았을 텐데. 네 아버지는 널 구하기 위해서 어떤 유산도 상속하지 않은 거다. 그 대신 명예와 긍지를 물려주었으니 떠나라는 이야기를 한 게다. 이 왕국에 네가 발붙일 곳은 없다.”

아르투르는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도 어렴풋이 느끼곤 있었다. 언젠가부터 형님들이 자신을 견제하고 은근한 질시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 아닌지. 그런 마당에 세 사람이 왕위를 두고 싸우게 된다면, 자신도 결코 안전한 처지는 아닐 것이다.

….

하지만 그렇다고 왕국을 떠나 낙후된 섬으로 가라는 말을 따를 순 없지. 일평생 무예에 모든 것을 바쳐왔으니 분명히 쓸모가 있을 것이다.

특히 이런 시기라면.

“마스터, 말씀하시는 바는 알겠습니다. 하지만 죽을 듯이 수련해온 건, 망명자 신세로 왕국을 떠나기 위해서는 아닙니다. 싸움이 겁나서 도망가는 겁쟁이가 되지 말라고 하셨던 것이 마스터의 가르침이었죠.”

아르투르는 최대한 공손한 태도를 유지하려고 했지만 성난 심정은 숨길 수가 없었다. 바야르는 차분하게 답했다.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피하는 것도 용기라고 가르쳤지. 이제 너도 한 명의 기사이니 네 뜻대로 하거라. 하지만 옛 스승으로 마지막 충고는 해주마. 이 왕국 어디에도, 네 편은 없다. 누군가 네게 호의를 드러내면 널 이용하기 위해서 일뿐이다.

널 진정으로 아끼는 사람이 있다면, 왕국을 떠나라고 이야기할 것이다. 아발로니아는 탁월한 망명지지. 그곳으로 떠나 분란이 끝나길 기다렸다가 돌아오도록 해라. 그게 네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바야르는 어린 아이를 타이르는 할아버지의 표정이었다. 아르투르는 그 표정에 더욱 자극 받은 지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요. 저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저도 페르넬의 아들이고, 오'데르만 왕조의 일원입니다. 집안에 싸움이 있다면 중재할 것이고, 싸워야할 상황이 있다면 마땅히 싸울 겁니다.”

“아무도 사생아를 왕조의 일원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너 혼자만의 생각일 뿐이야.”

바야르의 냉정한 표정은 단호한 경고를 전하고 있었다. 아르투르는 냉소를 머금어보였다.

“두고 보시지요. 마스터. 결국 모두가 절 페르넬의 아들이라고 인정하게 될 겁니다. 그때가 되면 마스터께서도 저를 과소평가하셨다는 걸 알게 되실 겁니다. 제가 증명해보이겠습니다.”

말을 남긴 아르투르는 획-하고 몸을 돌려 왕실 보물창고를 걸어 나갔다. 바야르의 말대로, 지금 궁정에서 자신이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러니 아군을 찾을 것이다.

‘형제들과의 싸움이 임박한 지금, 큰 형님은 한 명의 기사라고 더욱 절실한 상황일 것이다. 내 실력은 궁정에서 모두 인정받고 있으니 기회가 있겠지. 게다가 그분은 항상 날 친동생과 다름없이 아껴주시지 않았는가.’

떠나가는 아르투르의 귓전에 바야르의 말이 들려왔다.

“남의 꼭두각시가 되지 말거라. 너는 유능한 젊은이다. 미래에는 무언가 대단한 일을 해낼지도 모르지. 하지만 지금은 경험도 세력도 없는 애송이일 뿐이야. 네 아비의 친구이자 옛 스승으로 하는 충고니 잘 새겨 듣거라. 넌 네 형제들과 경쟁하기엔 아직 역부족이야.”

“그런지 아니지는 두고 보면 알게 되겠지요.”

아르투르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방을 빠져나갔다.

‘가엾은 놈. 네가 적장자로 태어났다면 네 자질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을 것을. 그렇게 될 수 있었다면 페르넬이 쌓아올린 이 위대한 왕국은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할 수 있었을 텐데. 신께서도 야속하시지.’

바야르는 자신의 애석한 마음을 깊은 한숨으로 내뱉었다.

‘바보 같은 녀석. 네 형들은 더 이상 너와 같이 뛰어놀던 순진한 소년들이 아니다. 세 명의 왕을 모시는 동안, 권력이 어떻게 그들을 바꿔왔는지 너무 잘 봐왔다. 순진한 녀석. 너무 늦기 전에 깨닫기를.’

떠나간 제자를 바라보는 스승의 표정이 착잡해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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