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왕 아르투르-2화 (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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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 -

쇠가 부딪히며 둔탁한 마찰음이 퍼져나간다. 진동소리가 울려 퍼지며 고요함이 깨어진다.

쿵 -

요란한 소리가 사자의 안식처를 재차 노크한다. 세월 속에 잠들었던 묘지가 깨어날 준비를 했다.

쿵 -

세 번째 노크 소리가 들린다.

화르륵 -

어두운 묘지 곳곳에서 횃불이 피어오르며 검은 옷을 입은 수도사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신과 인간의 중재자들. 내세로의 여행을 바래다주는 묘지기들이다. 새로운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누가 왔는가?”

수도사들은 일제히 감정이 일체 실리지 않는 목소리를 내뱉는다.

“세 왕국을 다스리시는 대왕이시자 일곱 공작령과 열두 백작령을 다스리시는 자, 서부 대륙의 재건자, 페르넬 오'데르만 폐하이시다!”

왕의 죽음을 알리는 포고꾼이 당당한 기세로 외친다. 단호한 대답이 들린다.

“우리는 그가 누군지 모른다.”

쿵 - 쿵 - 쿵.

지팡이로 쇠문을 강하게 두드리는 소리가 묘지를 재차 울렸다. 수도사들은 미동 없이 문 앞을 지킨 석상들처럼 우뚝 서 있을 뿐이다.

“누가 왔는가?”

“데네토르 왕실 기사단의 수장이시며, 스무 번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백 번의 결투에서 승리한 자, 무적의 페르넬 오'데르만 경이다!”

문 너머에서 외치는 목소리는 여전히 기세가 좋다. 아주 당당하고 자부심이 넘친다. 생전의 고인이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한층 차가워진 대답.

“우리는 그가 누군지 모른다!”

짧은 침묵이 이어졌다. 세찬 마찰음이 다시금 울려 퍼졌다.

“누가 왔는가?”

수도사들은 이번에도 미동 없이 똑같은 톤의 목소리로 답했다.

“죄 많은 인간, 페르넬입니다.”

마침내 나온, 겸손하고 솔직한 대답. 그것이 고인에게 남은 전부다.

“그렇다면 들어오라.”

누그러워진 목소리엔 따뜻한 연민이 담겨있었다. 문지기들이 걸쇠를 열어젖힌 후 세차게 양손으로 문을 밀었다. 거센 햇살이 문틈으로 쏟아지며 묘지에 빛을 드리운다. 그 너머에선, 검은 망토를 입은 네 명의 건장한 사내들이 고인의 석관을 들춰 맨 채 묘지로 들어섰다.

아버지를 잃은 네 형제는 묵묵히 수도사들의 인도를 따라간다. 돌로 지어진 묘지는 차디차고 햇빛 하나 들지 않는다. 어둠 속의 횃불들이 유일한 불빛이다. 행렬은 긴 복도를 지나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터벅 - 터벅 - 터벅.

그들이 한걸음 내려갈 때마다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진다. 웃음이 많으신 분, 언제나 따뜻했던 분, 아들들을 사랑하던 아버지, 위대한 왕. 그것이 네 형제가 공유하고 있는 고인에 대한 기억이었다.

계단을 타고 내려가자 왕실 묘역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때 신을 대신해서 통치하던 선대 왕들이건만 이제는 썩은 살점마저 남지 않은 뼛가루에 불과했다. 머잖아 페르넬 왕 또한 같은 처치가 되리라. 왕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일지라도, 죽고 나서는 가장 보잘 것 없는 이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형제들은 묘역의 끝자리로 갔다. 다른 묘역들과 달리 말끔하게 청소되어 있고 관의 크기에 딱 맞는 여유 공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사전에 준비된 것이 분명했다. 앞장 선 수도사가 횃불로 그곳을 가리키자, 그들은 관을 조심히 내려두었다. 스쳐지나가는 빛 덕분에 묘역의 앞자리에 새겨진 이름이 보였다.

‘페르넬 드 오'데르만. 서방 교회력 245~310. 조상들의 곁에 잠들다.’

아르투르와 그의 형제들은 충혈된 눈으로 관을 바라봤다, 두꺼운 돌로 만들어진 네모난 관 위에, 고인의 모습을 본따 만든 얼굴상이 새겨져 있다. 색채까지 들어간 이 고급스런 석고상은 한창 시절의 대왕의 모습을 그려 놨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그의 위대한 날들을 기리기 위해서.

레무스 정교회는 세상의 종말이 다가오면 천상으로 승천해 영만 남았던 자들이 구세주의 부름을 받아 돌아온다고 가르쳤다. 그들의 말이 맞는다면 세상의 종말 때가 되면 아버지도 깨어나시겠지.

‘안녕히 주무십시오. 아버지.’

네 형제는 침묵을 유지하며 계단을 올랐다. 어떤 말도 나눌 필요 없었다. 그저 눈빛으로 충분했다. 서로가 같은 상실감을 공유하고 있는 것을 알기에.

그들은 우애 좋은 형제들이었다. 아버지는 네 형제에게 공평한 사랑을 베풀었고, 형제들은 서로를 도우며 자라왔다. 그들은 막역한 친구들이자 가족이었다.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내어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분명히, 그렇게 생각했었다.

***

“형님, 진심이오? 중부 영토를 혼자서 다스리겠다고 하신 것이?”

옥좌가 놓인 왕의 알현실에서 거침없는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2 왕자 율리안으로 그는 아버지를 닮아 키도 무척 크고 온 몸이 근육질로 이뤄져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내가 우리 중 맏이가 아니더냐. 이젠 아버지가 계시지 않으니 내가 우리 가문의 수장이다. 가장 중요한 것을 지켜내는 일이 내 의무이자 권리다.”

옥좌에 앉은 루이스 왕은 두 동생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확신에 찬 단호한 목소리다. 그는 훤칠한 키를 지니고 또렷한 눈을 지녀 한 눈에 봐도 높은 지위의 사람이라고 직감할 수 있을 법 했다.

“형님, 어찌 우리에게 이러실 수가 있소? 형제끼리는 밀 한 톨도 나누어 먹어야한다고 하지 않으셨소? 그런데 이제 와서 좋은 것을 혼자 독차지 하시려는 게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는 듯한, 억울한 감정이 가득 실린 외침이었다. 그의 옆에 서 있던 3왕자 펠릭스도 작은 형의 말을 거든다. 그는 다른 형제들에 비해 눈에 띄는 특징을 지니진 않았지만, 재주가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율리안 형님의 말이 맞습니다. 형님, 저희에게도 중부 왕국의 일부를 떼어주십시오. 1/3. 딱 그것이면 됩니다. 그러면 공평한 분배가 될 겁니다.”

펠릭스의 말에 루이스는 기가 찼다. 황당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두 동생에게 답한다.

“무슨 소리냐? 너희는 각각 동부 왕국과 서부 왕국을 물려받지 않았느냐? 형제들이 각각 하나의 왕국을 물려받았으니, 이보다 공평한 유산 상속이 어디 있단 말이냐?”

율리안이 항변했다.

“말장난하지 마시오! 서부 왕국은 소국에 불과하고, 동부 왕국은 황무지와 불모지로 가득한 텅 빈 나라에 불과하지 않소? 그러지 마시고, 우리에게도 중부의 영토를 나눠주시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우리가 형님을 가문의 수장으로 극진히 모시겠소.”

루이스의 얼굴이 찌푸려지고, 그는 차분한 어조로 유언장을 읽어 내려갔다.

“중부 왕국과 대왕의 칭호를 루이스에게 물려준다. 율리안과 펠릭스는 각각 동부와 서부를 상속한다. 두 사람은 영토 내에서 독자적인 왕의 칭호와 권리를 가지나, 루이스를 주군으로 모셔야한다.”

유언장을 모두 읽은 루이스는 눈살을 찌푸리며 동생들을 바라본다.

“부왕의 유언장에 명시된 내용이다. 이미 아버님과 왕국의 중신들이 끝내놓은 일이거늘, 이제 와서 분란을 일으키는 의도가 무어냐?”

루이스의 차분한 어조에 율리안은 할 말을 잃은 듯 입을 쭈뼛거렸다. 하지만, 펠릭스는 비릿한 냉소를 지으며 비아냥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유언장. 말년에 정신이 혼미해진 아버지를 숙부와 큰형님이 달달 볶아서 작성한 유언장 말입니까? 우연하게도 숙부께서도 금광이 있는 스티리아의 대공 작위를 상속 받으셨죠. 정말로 그 유언장이 아버지의 뜻대로 작성된 걸까요? 뻔히, 아들들이 있는데 그런 중요한 작위를 동생에게 주었을까요? 저는 그 점에 대해 의심스러운 점이 매우 많습니다.”

루이스의 옆에서 다툼을 지켜보던 중년의 왕족이 모멸감으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오'데르만 왕조의 남자치고 체구는 평범했지만 눈빛이 남달라 품격 있는 기운을 내뿜었다.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놈! 오냐오냐 해주었더니 내게 기어오르는 것이냐? 네가 지금 왕국을 물려받은 것이 누구 덕인지 아느냐? 너희가 젖먹이에 불과할 동안 나는 형님과 함께 서부 대륙을 평정했다. 내가, 형님과 함께 오늘날의 왕국을 만들었단 말이다! 오늘날 네가 떵떵거릴 수 있는 것이 다 누구 덕이라고 생각하는 게냐?”

흥분한 왕족의 목소리에, 아들들의 싸움을 지켜보던 왕비가 끼어들었다. 그녀도 격앙된 목소리였다.

“물론 이들의 아버지인 페르넬 대왕 덕분이지요. 입조심 하십시오. 묜시뇰. 감히 선왕의 후계자들 앞에서 무슨 망언입니까? 그대는 선왕의 하인이었을 뿐입니다. 선왕의 은혜에 감사하고 주제넘게 끼어들지 마십시오. 당신이 왕국의 주인이라도 되는 양 행동하지 말라는 겁니다.”

페르디난트는 왕비의 말에 기가 막혀 할 말을 잃었다. 그 사이 왕비는 뒤로 돌아 아들들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아들들아. 싸우지 말고 조금씩만 양보하여라. 형제들끼린 서로를 지켜 주어야 한다. 너희의 권좌를 노리는 야심가들이 주변에 가득하다. 응? 서로 싸우지 말고.”

루이스는 억울한 표정으로 왕비를 바라봤다.

“어머니! 어머니께서도 공증하셨던 유언장이 아닙니까? 이미 정리가 끝난 문제를 들먹이는 동생들이 문제지요! 전 양보할 것이 없습니다!”

왕비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천연덕스럽게 답했다.

“루이스. 맏이인 네가 양보해야한다. 동생들에게 아량을 베풀어야지. 펠릭스, 율리안, 너희도 형님께 공손히 청해야지, 이렇게 대들어서는 곤란하지. 자, 자 모두 한발씩 양보하거라.”

왕비의 말에도, 세 왕자는 서로를 노려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알현실에 있던 모든 이들이 숨을 죽이고 세 사람의 대립을 지켜봤다. 침묵을 깬 것은 율리안 왕자였다.

“어찌되었건, 나는 이러한 상속안을 받아들일 수 없소. 형님. 형님은 나보다 2년 일찍 태어난 게 전부지만 나는 아버지와 함께 전장을 누벼왔단 말이오. 형님과 동등한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소.”

루이스는 내면에서 타오르는 분노에 부르르 손을 떨다가, 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둘 다 머리를 식히는 게 좋겠다. 이성을 되찾으면 도로 날 찾아오거라. 지금 너희 모습은 재물에 눈 먼 북구인 약탈자들과 다를 바가 없구나.”

루이스는 바닥을 박차고 일어나 알현실을 떠나갔고, 황금 망토를 입은 왕실 기사들이 뒤를 따랐다. 페르디난트 대공도 왕비를 노려본 후, 루이스를 따라갔다.

두 왕자와 왕비도 지지 않고 자신들의 경쟁자들을 주시했다. 알현실의 문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닫혔다. 이 모든 풍경을 구석에서 지켜보던 아르투르는 한숨을 쉬었다.

‘워낙 큰 소리로 싸우셔서, 궁전의 모두가 소란을 눈치 챘을 거야. 하필이면 아버님의 죽음을 조문하고자 전국의 귀족과 백성들이 모두 몰려온 가운데 말이야. 머지않아 왕국 전역으로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나가겠군. 바로, 왕실이 내분을 일으킬 거라는 소문이 말이야.’

‘오늘의 대화가 왕국에 알려지면, 평화를 꿈꾸는 자라면 누구나 불안에 떨겠지. 난세를 바라는 야심가들은 기뻐할지도 모르지. 아버지의 유산, 하나 된 서부대륙은 이제 끝났군.’

아르투르는 쪽문으로 떠나가며, 못마땅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실로 대단하신 형님들이야. 아버지가 50년 동안 이룬 업적을 50분 만에 무너뜨리시다니.’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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