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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하는 수령동지-349화 (349/350)

경애하는 수령동지 349화

그녀의 입에서 나온 문제의 발언을 듣는 순간, 정환은 방금 뱃속으로 넘어간 제육볶음이 도로 올라와 식도에 탁 걸리는 것 같았다.

방금 내가 들은 게 그러니까……?

그리고 이런 딸의 선언에 충격을 받은 것은 정환만이 아니었는지 옆에서 지켜보던 유혜림 역시도 얼떨떨한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괘, 괜찮아요, 당신? 아, 아니, 그보다. 혜인아, 방금 그게 참말이니? 그러니까 공화국으로 돌아가서 정치를 하겠다는 게…….”

“네! 이제 얼마 안 있어 제2회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가 열리잖아요? 그러니 공화국으로 돌아가서 로동당에 입당한 후, 공천을 받아서 평양 지역구에 출마할 거에요!”

“하, 하지만 저번에는 미국에서 박사를 따고 교수 되겠다고 그러지 않았니?”

“흥, 마음이 바뀌었어요. 조선 속담에 호랑이는 가죽, 사람은 이름이랬는데 대학교수처럼 상아탑 안에서 공자왈 맹자왈 하는 것보다는 현실정치에서 활약해야 이름이 좀 더 남는 법 아니겠어요? 그리고, 다른 건 그렇다 쳐도 제가 누구 딸인데…….”

“……도대체 어쩌다가 그런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하게 된 거냐?”

마침내 충격을 좀 수습하고 간신히 입을 연 정환의 목소리에는 황당함과 어처구니없음, 분노가 가득 차 있었다.

간만에 일찍 퇴근해서 기분 좋게 집에 왔는데 이게 무슨 내시 오줌 누는 소리야?

“생각 좀 해봐라. 혜인이 네가 공화국 밖에서 산 지가 무려 15년이 넘는다. 조선말을 안 잊어먹은 것만 해도 다행인데 지금 공화국 정치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국내 주요 현안과 의제가 뭔지 알고는 있니? 아니, 애초에 당내 공천부터 어떻게 받아낼 생각이냐? 대체 로동당원들과 인민들 중에 네 얼굴이라도 아는 이가 몇 명이나 된다고…….”

“제 이름과 얼굴 자체야 많이 알려져 있죠.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아버지가 그 말씀을 하시니 좀 당황스러운데요. 그리고 공천이랑 당선 확률에 관해서라면…… 원래 정치인이란 여기 미국이나 공화국이나 인지도가 곧 표 아니겠어요?”

“설마……!!”

그제서야 딸이 무엇을 노리는지 깨달은 정환의 눈빛이 거세게 흔들렸다.

사실 혜인의 말대로, 현시점에서 남북 양측에 그녀의 존재는 물론, 얼굴과 이름까지도 잘 알려져 있었다.

시점상으로는 정환의 은퇴 직후부터, 그동안 끊임없이 소문으로만 맴돌던 ‘김정환의 자녀’에 대한 정보가 알음알음 퍼지더니, 마침내는 은퇴한 총서기가 그동안 비서와의 사이에서 어린 딸을 하나 두고 이제까지 존재를 숨겨오고 있었음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된 것이다.

곧 기자들이 혜인이 박사과정을 밟던 하버드 대학교로 몰려들었고, 교문 앞에까지 진을 친 파파라치와 구경꾼을 몇 번이고 캠퍼스 폴리스가 추방하는 일까지 벌어졌지만, 정환은 북조선 본국에 딱히 검열이나 정보통제, 추가적 보호 조치를 요청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감춰온 것만 해도 기적이야. 애초에 이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는 법이지. 이제 어린 애도 아니고, 자랄 만큼 자란 데다 유년기는 이 아버지가 충분히 지켜줬으니 이 정도 시선은 감당할 수 있어야 내 딸이지.

당시 은퇴한 직후였던 정환은 딸의 신변에 대한 국내외의 심각한 위협은 대부분 해소된 데다 북조선의 민주주의 체제도 슬슬 자리를 잡기 시작했으니 더는 그녀의 존재를 숨길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기에, 전화상으로 우려를 전하는 현영숙의 당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혜인의 개인 경호원 숫자를 좀 늘리는 것 외에는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다른 정치적인 고려는 다 제쳐놓고 서라도, 그와 유혜림 둘 다 더 이상 하나뿐인 딸을 투명인간으로 만들지 말자는 데에 동의한 지 오래였으니까.

이러한 사정으로 인하여, 아버지 은퇴 후 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녀 본인이 지적한 대로 유혜인이라는 ‘총서기의 무남독녀’의 존재와 그 일거수일투족은, 남북을 막론하고 잘 알려져 있다 정도가 아니라 웬만한 연예인 뺨 후려칠 만큼 유명한 상태…… 였지만 정작 당사자 정환에게는 지금 중요한 건 그딴 게 아니었다.

방금 전 딸의 말이 암시하는 바를 깨달은 것이다.

“……그러니까, 이 아버지의 후광 덕을 보겠다 그거냐?”

‘내가 이런 사태를 막으려고 그동안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데!’라고 정환이 속으로 절규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물었지만, 아버지의 이런 바람을 무시하듯 혜인은 매정할 정도로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후보 등록만 해도 제 의사와는 무관하게 결국 그렇게 될 거 아닌가요? 그렇다면 차라리 제가 가지고 태어난 혜택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게 맞지 않겠어요?”

“딸아. 미안하지만, 꿈도 꾸지 마라.”

“여보…….”

“아니, 여보, 잠시만. 잠시만 내 말을 들어줘.”

옆에서 머뭇거리는 유혜림을 부드럽게 제지하면서도 정환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리 지금 그가 그동안 (총서기로서의 의무에 지나칠 정도로 충실하느라 방기해 온) 아버지로서의 의무에 충실하려는 때라고 해도, 이것만큼은 결코 딸을 응원해 줄 수 없었다.

정환은 냉정한 목소리로 자신을 응시하는 혜인에게 칼같이 매듭을 지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네가 무슨 일이 있어도 정계에 진출하겠다면 이 아버지는 일절 도와주지 않을 거다. 지원 유세나 청탁, 언론 노출, 기타 등등 네가 바라는 도움은 물론이고 어떤 경우에도 네 선거에 긍정적인 의사를 표명하는 일조차도 없을 거라는 뜻이다. 아니, 오히려 나는 최선을 다해 말렸는데 철없는 딸내미 교육을 잘못해서 부끄럽다고 가능한 한 널리 알리고 다닐 거다.”

“…….”

“이제까지 나와 네 어머니가 무엇을 위해서 그 모든 희생을 무릅쓰고, 너에게도 강요해 왔는지 모르지는 않았을 거라고 믿었는데 참으로 실망스럽기 그지없구나. 설마 나한테 물려받은 게 공부 머리뿐인 거냐?”

“……혜인아, 이 오마니도 부탁한다. 아버지 말씀 듣거라, 이렇게 말씀하시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지 않니?”

“……끝까지 반대하실 생각이세요?”

“사실 도대체 무슨 생각에서 나나 네 엄마가 그걸 도와줄 거라고 믿었는지부터가 제일 궁금하다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다.”

“…….”

예상했던 답변이었지만 막상 눈앞에서 아버지의 차가운 반응을 마주하자 혜인은 분하다는 듯 이를 앙 다물었다.

그 모습을 정환은 그저 말없이 응시하고만 있었고, 유혜림은 의미 모를 한숨을 내쉬며 남편과 하나뿐인 딸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가족 간의 대화가 중단된 거실에는 여전히 홀로 떠들어대고 있는 TV 소리만이 시끄러웠다.

그때, 혜인은 TV에서 흘러나오는 다음 뉴스를 듣자마자 눈을 빛냈다.

-리경수 조선로동당 정치국 상임위원은 작금 남측의 정치적 혼란상에 대하여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남측 행정부의 혼란상이 빠른 시일 내에 수습되기를 바란다’라는 짤막하고 원론적인 논평만을 남기며 말을 아꼈습니다. 이러한 질문은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벌써부터 포스트 김정환, 현영숙 총서기가 이끄는 다당제 조선로동당 체제의 유력한 후계자로 지목되고 있는 리 상임위원의 위상을 나타내는 질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좋아요. 끝까지 허락 안 해주실 거라면 저도 다 생각이 있어요.”

“……무슨 생각?”

“정계에 진출하겠다는 말은 취소하죠. 그 대신에…….”

“대신에……?”

“그 대신에 결혼할래요.”

“뭐!?!?!”

이번에야말로 유혜림과 정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특히 정환은 방금 전 혜인의 시선이 향한 곳을 눈치 채고 급하게 물었다.

설마…….

“결혼이라니, 대체 누구랑?”

“흐음, 지금 저기 TV에 나오는 저 리경수라는 사람, 아직 미혼이죠? 아마 서른 좀 넘은 걸로 아는데 어차피 요즘은 공화국에서도 나이 차나 늦은 결혼이 욕먹는 시대는 아니고. 알아보니 김대 졸업, 하버드 출신에 출세 가도를 달리고 있는 데다 얼굴도…… 뭐 저 정도면 제법 괜찮은 편이니 제가 그런대로 만족할 수 있겠네요.”

“지금 그게 무슨 미친 소리냐! 절대 안 돼!”

“……아직 제 말 다 안 끝났어요. 하여튼 가장 중요한 건, 저 나이에 당 정치국 상임위원이라는 건데, 저 정도 조건이면 공화국에서도 난다긴다하는 집안 처자들이 줄을 서겠죠? 어차피 저 사람도 언젠가 총서기 자리에 오를 생각이 있다면 전 총서기의 딸만큼 훌륭한 정략결혼 상대도 없을 테니, 저랑 서로 이해관계가 일치하네요. 데릴사위 들인다고 생각하시면 되잖아요?”

“아니! 미안하지만 그것도 절대 용납할 수 없다. 여러 가지 의미로다!”

“여러 가지 의미가 구체적으로 뭔지는 좀 궁금하지만, 아버지가 무슨 권리로요? 제 정계 진출이야 자의건 타의건 아버지 이름에 수혜를 입을 테니 아버지가 발언권이 있다고 쳐도, 누구와 결혼하건 그건 전적으로 제 개인적인 문제 아닌가요?”

“아, 아니, 그건 그렇지만…….”

“설마 딸을 외국에 홀로 15년 동안이나 버려두신 분이 딸이 어떤 남자와 결혼할지 일일이 간섭하시려는 건 아닐 거라고 믿어요. 아버지는 그 정도로 뻔뻔하신 분이 아니잖아요?”

“…….”

평생을 산전수전 다 겪은 정환도 이 순간만큼은 할 말을 잃었다.

물론 혜인의 말처럼 딸과 15년 동안 떨어져 살며 아버지 노릇을 방기한 아버지가 딸의 결혼문제까지 간섭하려 드는 건 일반적인 기준으로 염치없는 짓인 게 맞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반 ‘여염집’의 기준으로 보면 그렇다는 것이고 정치적인 시각으로 보면 자기 말대로 혜인은 그냥 일개 여성이 아니라 전 총서기이자 최고지도자, 지금은 비록 은퇴했지만 여전히 현직 현영숙 총서기와 맞먹을 정도로,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남북 한반도에서 큰 정치적 영향력을 가진 인물인 김정환의 무남독녀다.

따라서 경제적인 면에서만 금수저가 있는 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금수저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관점에서 보면, 혜인이 정환에게 물려받은 정치적 자산은 비유하자면 금수저 정도가 아니라 숫제 석유왕 수준인 것이다.

그리고 미국의 클린턴 부부, 오바마 부부 (비록 둘 다 대통령은 못 됐지만)의 사례에서 볼 수 있다시피, ‘부부는 일심동체’라는 케케묵은 격언과 친족주의는 동서고금의 선진국, 개발도상국을 막론하고 이 시대에도 여전히 어느 정도 유효하다.

즉 지금 혜인은 자신이 그 ‘왕관’을 상속받을 수 없을 바에야 그 유산 전부와 자기자신까지 제3의 동맹군 –그러니까 리경수– 에게 죄 넘겨버리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정작 문제의 리경수가 자기도 모르게 바다 건너편에서 진행되고 있는 이 정략결혼 논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지에 대해서는 두 부녀 모두 전혀 안중에 없었지만.)

“이건 말도 안 된다. 혜인이 너는 대체 누굴 닮았길래 이런 걸 배워서…….”

“당연히 아버지죠. 누구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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