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애하는 수령동지-346화 (346/350)

경애하는 수령동지 346화

2.6 권력 안정기 ~ 경제적 도약기 : 근대그룹의 월북, 국부펀드, 나진 3선.

위 사진은 북한의 첫 자체생산 원유 중 1호 배럴(Barrel)이다. [26]

아래 사진은 역사적인 평양 맥도날드 1호점.

그런 한국의 여유로움, -지금 와서 보면 방심– 을 틈타, 88년 취임 직후부터 영국과의 합작 하에 탐사 중이던 명천 유전이 마침내 본격적인 생산에 들어갔다.

나이가 좀 든 80년대 출생 위키러들이라면 기억하고 있겠지만, 체제경쟁에서의 승리를 굳히고 있다고 생각했던 남측이 당시 받은 충격은 북한이 핵무기 보유쯤은 천명했어야 그나마 비견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충격은 어디까지나 시작에 불과했는데, 그 후 김정환은 스스로 자칭했듯이 ‘신(新)경제 령도력’ [27]을 십분 발휘하여 무서운 속도로 북한을 탈바꿈시키기 시작했다.

[26] 해당 배럴은 현재 평양에 위치한 조선중앙력사박물관 산업발전관실에 소장 중.

[27] 사실상 시장경제체제, 혼합자본주의 경제체제로의 전환이었지만 당장은 대놓고 자본주의라는 말을 쓸 수 없었던 과도기 시기 자주 쓰였던 구호.

평양에는 맥도날드가 오픈했고 어른들은 해당화 담배가 아니라 말보로를 피우기 시작했으며 아이들조차도 생일 선물로 나이키를 바라는 시대가 도래했다.

이 시기에 김정환이 이룩한 변화에 대해서는 북한/경제/역사, 피오니 홀딩스/역사, 근대그룹/역사/월북 이후 등 해당 항목을 참조.

그렇게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북한의 경제적 성장을 못 미더운 눈으로 바라보며 애써 현실을 부정해 오던 남한의 인식을 결정적으로 바꾼 계기가 되었고, 그리고 동시에 서로를 항상 의식하면서도 외면하던 남북관계 역시 결정적으로 바꾼 계기가 되었다. [28]

[28] 대표적으로 성수대교 붕괴 사고일과 평양 증권거래소 개장일이 겹쳤던 날. 너무나 공교로운 우연 탓인지 이 사건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북이 성수대교에 폭탄을 설치해 개장일에 맞춰 붕괴시켰다는 음모론을 대표로 별의별 루머가 나돌고 있다.

바로 98년 외환위기, 그리고 뒤이은 남북 대타협이다.

2.7. 일개 개발 독재자에서 절대적 권위의 반열에 오르다 : 남북 대타협

당시 자세한 시대 상황과 IF 시나리오 등에 대해서는 외환위기/배경과 외환위기/IMF 해법론자들의 주장, 남북 대타협, 98년 안기부 쿠데타 미수 사건 등 해당 문서를 참조.

사진은 2018년 2월 8일, 남북 대타협 20주년을 맞아 기념식장에서 현영숙 조선로동당 총서기와 당시 당선인 신분이었던 안 대통령이 악수하는 모습.

그리고 이러한 북한 경제 개발상에 대한 남측의 의도적인 저평가는 남북 대타협 이후 종식될 수밖에 없었는데, 그만큼 남북 대타협은 파란만장했던 대한민국의 20세기를 마무리하는 끝이자 새로운 시작이었던 사건이었다.

남북 간 경제적 격차가 없어졌다는 인상을 [29] 한국 국민들 뇌리에 가장 크게 새겨놓은 사태이자, 문민정부 수립 10년 후에도 아직 군사 쿠데타의 망령이 맴돌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킨 사건이었다.

그 밖에도 유민중 정권으로 하여금 안기부 개혁의 명분을 제공해 방첩 기관이 경찰청 대공수사부와 대외정보조사만 담당하는 국정원으로 분할되는 등 경제 외의 많은 면에서 엄청난 변화를 불러일으킨 사건이기도 했다.

[29] 물론 사실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심리적인 면에서. 체제 전환 후 10여 년 가까이 지난 98년 당시에도 여전히 북한의 1인당 국민소득과 임금, 보유자산은 남측과 2배 가까이 차이가 났었다.

또한 이 사건은 동시에 남북 양국의 리더십에 있어서도 대단히 거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그전까지만 해도 유능한 지도자지만 아직 젊어 아버지 김일성 같은 절대적 반열에는 오르지 못했던 김정환의 권력을 확고부동하게 만들어 주었다.

외환위기의 돌풍 속, 남에서의 일자리와 생활기반을 잃고 새로운 기회를 찾아 경제성장 중인 북으로 올라오는 남측 이주민들의 행렬이라는, (아버지가 원하던 형태와는 많이 달랐지만) 일종의 체제승리를 거둔 총서기가 된 것이다.

한국의 전임 대통령 박이삼에게는 (10년 후에나 발효되는) 까임방지권을 [30], 후임 유민중에게는 김준필과 내각제 및 신군부 대통령 사면 논의 전면 백지화라는 제한적인 영향만을 미친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하여간, 이렇게 해서 무명의 백두혈통, 김정환은 취임 10년 만에 최소한 공화국 내에서만큼은 불가침적 업적을 세운 절대적 존재가 되었다.

[30] 상술했듯 남북대타협 10년 후 재평가되기 시작한 시점 한정. 98년 당시에 박이삼에 대한 한국 대중의 반감은 ‘이완용 이래 최악의 매국노’였다.

2.8 국내외의 도전 : 학총련, 템즈강 줄기들의 발흥, 그리고 점차 악화되어 가는 중국과의 관계.

2.8.1. 민주주의의 바람, 조기에 잦아들다.

조선사회주의학생총연맹, 김정환/부정적 평가/민주주의 탄압 해당 항목과 같이 읽을 것을 추천.

-그때만 해도 우리는 금세 김정환이 타도될 거라 생각했습네다. 실제로 처음에는 기렇게 되어가는 듯했디요. 기런데 그거이 좌절되자 해서는 안 될 선택을 한 겁네다. 남조선 동포들에게 군대를 끌고 와 고향을 침공해 달라니…… 지금 생각해 보면 참 후회되디요.

-그래도 결국은 북한에 민주주의가 찾아오지 않았습니까? 시간은 많이 늦었지만, 그럼 결국 여러분이 이긴 거 아닌가요?

-그거이 어찌 우리가 이긴 거입네까? 우리 손으로 자유 민주주의를 쟁취한 거이 아니라, 김정환이가 옜다, 가져라, 나는 그만하고 쉴란다 하고 던져준 거인데. 이거이는 학총련과 우리의 승리가 아니라, 총서기, 아니, 김정환이가 이기고 도망가 버린 거이 아니갔습네까.

(2017, KT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당시 학총련 망명자들 인터뷰 발췌.)

21세기, 총서기 김정환이 집권 15년 차, 신체적으로는 40대라는 장년기에 접어들면서, 공화국 내부는 물론 남한에서조차 초미의 관심사는 김정환의 후계 구도였다.

정작 김정환 본인은 당시 40대, 아직 한창의 나이였지만, 아버지 김일성도 대략 그때쯤 아들 김정일을 자신의 후계로 지명하고 후계 구도를 굳히기 시작했고, 무엇보다 가장 큰 변수는 남북 대타협과 함께 북으로 밀려들어 온 사람과 정보, 다시 말해 민주주의의 물결이었다.

실제로 동일한 언어와 문화, 무엇보다 군부 독재 타도와 민주화 경험을 가진 한국 국민들의 공화국 유입은 금세 북한 사회 사이사이에 자유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켰고, 그렇게 탄생한 존재가 바로 조선사회주의학생총연맹, 바로 학총련이었다.

그러나 한국의 운동권과는 달리, 이미 남조선의 민주화 과정을 철저히 학습한 김정환이라는 통치자에 의하여 학총련은 불과 3년 만에 지능적으로 철저히 분쇄되었다.

그 구체적인 과정은 학총련/분류와 23호 관리소, 리경수/일생[31] 해당 항목 참조.

[31] 현재 해당 인물과 ‘2006년 김대 집단구타 사건’ 해당 문서는 북한 평양 IP 발로 추정되는 지속적인 반달에 의해서 문서보호 조치 되어 있음.

2.8.2. 중국발 금융위기로 시작된 중진국 함정, 정치권력에 도전하는 자본 권력.

2001년 상하이 테러, 중국 – 아프간 전쟁, 해당 항목 참조.

김정환이 국내로부터의 도전에 직면하고 그것을 수습했을 때쯤, 우방국 중국 역시도 역사적인 홍역을 치르고 있었다.

중국 – 아프간 전쟁과 그 뒷수습이 초래한 막대한 사회경제적 불안이 바로 그것이었는데 전비(戰費)로만 무려 2조 달러를 넘게 지출했으며, 중국 사회에는 아프간산 헤로인이 널리 퍼지는 결과를 가져왔으나 그럼에도 전쟁 목표 중 하나였던 제국 서부의 안정은 거의 이끌어 내지를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실패한 전쟁의 책임자였던 장쩌민이 강제적으로 물러난 이후, 새롭게 수립된 시진핑 – 보시라이 공동정권에서 중조(中朝) 관계는 이전보다 훨씬 대립적, 말하자면 냉전 상태로 흘러갔다. [32][33]

마침내는 시진핑보다 더욱 모험주의적이고 교조주의적, 기회주의적인 보시라이 단독 정권이 수립된 후, 이러한 대립 관계가 결국 불러온 최종적 결과에 대해서는 후술할 ‘북만주 전쟁’ 항목에서 참조. [34]

[32] 사실 북한의 경제적 체급이 커지고 중국 동북방에 끼치는 영향력이 커져갈수록 이러한 대립은 외교노선과 무관하게 언젠가 일어났어야 할 일이라고 보는 시각이 많다.

[33] 실제로 연변자치주/역사 항목에서 볼 수 있듯이 김정환이 무슨 초능력을 발휘해 조선족들을 북한 측에 포섭한 것이 아니라, ‘공화국 자체의 국력이 중국의 그것과 반비례해서 강해지던 시대적 배경에 북한 당국 측의 진출 정책이 더해졌기에 가능했다’라고 김용건 상임위원장은 자서전에서 밝히고 있다.

[34] 중국 명칭인 ‘연변내전’으로도 검색 가능.

2.9. 템즈강 줄기, 그리고 이영박과의 악연.

정치 지도자들의 속셈이야 어쨌건, 현재의 한일 관계와 유사하게 북중은 서로 경제적으로 이미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전자와 후자의 상호간 경제적 체급 차이만큼이나 북한 경제는 필연적으로 중국의 경제 상황에 크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아무리 초인적인 지도자 김정환이라도 2008년 사천성 대지진으로 시작된 부동산 위기의 파도가 북한에까지 밀어닥치는 것을 막을 수 없었고, 현재까지도 북측 사회에서 자조적으로 통용되는 ‘75만 원 세대’ [35] 등의 단어도 이 시기에 대거 생겨났다.

[35] 이전까지 사행산업에 완강한 입장을 취하던 북한의 첫 내국인 출입 가능 카지노인 홍원랜드도 이 시기에 개업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정치권력이 인민들의 식의주 해결에 부족함을 드러내면서, 그 기회를 틈타 자본 권력, 민간과 공공 부문 양쪽에서 그 세를 넓히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신자유주의 바람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템즈강 줄기 일원들이 공화국 정치권력의 성지, 로동당 중앙위 안에 자신들의 대표로 보낸 사람이 바로 이영박이었다.

-다 아는 사람들이구만.

(이영박 평양시 책임 서기, 신 서평양 역 착공식 자리에서 과거 몸담았던 근대 건설 임원들을 만나며.)

근대 건설 샐러리맨 신화와 공화국의 철인, 이 만남이 결과적으로 어떻게 악연으로 끝났는지, 그리고 그 와중에 어떻게 로동당 내 권력 구도가 재편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김영일 항목 참조.

2.10. 최대의 도전, 연변 내전 발발.

표면적으로는 부정선거 항의 시위로 시작한 조선족 자치주의 독립 투쟁이지만, 종전 후 4년 현재에 와서는 누구나 북한군, 그리고 나아가 한국군과 미군이 뒤에 있었음을 모두가 인정하는 70여 년 만에 동북아시아에서 일어난 대리전(Proxy War).

남북한의 태평양 정보 공동체 동시 가입 등 일관된 북한의 친미 노선, 연변자치주의 준속주화, 장성택의 노동당 조직지도부 부부장의 암살 [36] 도발 등 여러 요인들이 겹치고 겹쳐 일어난 일이다.

이섭기/월북 이후, 2014 장성택 암살 의혹, 북만주 전쟁/배경, /전개 해당 문서 참조.

[36] 단, 현재까지도 노동당 측에서는 암살을 부인하고 있음. 장성택이 중국의 지원을 받아 김정환을 몰아내고 김정남(항목참조)를 옹립하기 위한 쿠데타를 일으키려다가 실패해서 중국으로 망명하던 중 제거되었다는 설이 제기됨.

2.11. 승전, 그리고 박수 칠 때 내려오다.

사진은 2018년 10월, 구(舊) 김일성 광장, 현 대동문 광장에서 퇴임 연설을 하는 김정환.

무려 160만 명의 군중이 당시 광장과 그 주변에 운집했으며, 실시간으로 퇴임식 중계를 본 사람은 무려 천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37]

기적 같은 승전 후, 김정환은 승전지도자라는 타이틀을 버리고 스스로 권좌에서 내려왔다.

일부에서는 싱가포르의 리콴유 가문처럼 아버지의 후광 아래 대대손손 유지되는 세습 왕조의 중시조(中始祖)가 되지 않을까 제기되던 예상을 전부 깨버리고 공화국을 떠나 2020년 현재 조지타운 대학교의 일개 교수로 재직 중이다.

-앞으로는 삼천육백만 공화국 인민의 아바이가 아니라 딸아이 하나의 아버지로만 살겠다.

현재까지도 북한은 물론 남한에서도 통일을 위한 자문역할이나 최소한 명예직으로라도 전 총서기를 어떻게든 다시 정계로 끌어들이려는 각종 러브 콜에 위와 같이 응답했기에 최소한 당분간은 어떤 식으로든 정계 복귀 여지가 전혀 없어 보인다.

[37] 참고로 퇴임식 당일, 김정환이 용강 국제공항에서 미국행 비행기를 탄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총서기의 마지막 가는 모습을 보기 위해 공항 출국장까지 인민들이 몰려들어 잠시 항공기 운항이 중단되는 일까지 있었다(…)

3. 김정환/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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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간 북한의 최고지도자이자 총서기였던 김정환에 대한 평가를 기술하는 항목.

3.1. 긍정적인 평가

3.1.1. 세습 포기, 결과적으로 민주주의 도입.

-그럼 저, ‘인민 김정환’은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김정환, 자신이 취임한 지 정확하게 30년 후, 2018년 퇴임식에서.)

‘세습 체제 종식’도 ‘이양’도 아닌 ‘포기’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데 많은 토론이 있었지만, 결국 이 문서에는 ‘포기’로 기술하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과정이 어찌 되었건, 지금 이 위키에 구 북한 지역 위키러들이 접속하고 쓰고 편집할 수 있는 것은, 결국 김정환이 스스로 자신의 독재 권력을 내려놓고 인민에게 그 권력을 돌려주기로 결단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었기에.

그는 최고의 자리에서, 최고의 순간에, 누구나 다 영구집권할 거라고 예상된 순간에 은퇴와 자유선거, 민주정으로의 전환을 발표하며 마지막 순간까지 세상의 뒤통수를 쳤다.

아무리 독재정의 지속 여부에 부정적인 사람이라도 개혁개방과 경제성장, 승전과 영토확장까지 성공시킨 시점에서, 설령 그가 숨겨둔 딸을 인민 대중 앞에 내보이며 ‘공화국의 후계는 앞으로도 저희 김가가 계속 이끌어갈 겁니다’라고 말했다 해도 큰 저항이 없었을 것이라는 건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김정환은 세습을, 심지어 간부들이 타협책으로 제시했을 법한 ‘조선로동당 1당 독재’까지도 포기하고 민주주의를 택했다. [38]

[38] 세습이나 1당 독재나 어느 쪽이든 21세기 대한민국이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결국 통일에도 김정환이 가장 큰 공로자라는 데에는 아무도 반대할 수 없을 것이다.

그가 그런 결정을 내린 배경에 어떤 심리가 작용했는지는 그야말로 본인만이 알겠지만, 30여 년 전 부시가 그를 만났을 때 ‘국가를 대상으로 실험하는 지도자’라는 평을 내렸다는 것을 떠올리면 참으로 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3.1.2. 남침에 대한 전격적인 인정과 반성.

‘2016년 평양 평화 선언’ 항목 참조.

그야말로 김정환의 영구 까임방지권(볼드체).

아무리 김정환에 비판적인 학자나 인사라도 이 선언에 한정해서 만큼은 그야말로 ‘역사에 남을 과감하고 선구적인 결단력’이라고 칭찬해 마지않는 그야말로, 남북 모두가 김정환에게 빚을 진 업적.

하지만 이 역시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자들이 없지 않은데, 이미 세습 없이 퇴임을 결정한 시점에서 한국으로 하여금 자신의 안정적인 퇴임을 보장해 줄 수밖에 없게 만드는 정치적인 계산이 들어갔다고 바라보는 시선도 있다. [39][40][41]

[39] 당시 사실상 승전을 거둔 북측에서 먼저 통일 논의를 들고나올 이유가 전혀 없었던 만큼, 이러한 정치적 퍼포먼스로 인해 김정환 개인에게 일종의 부채의식을 느끼게 된 남측으로 하여금 통일 논의의 구심점이자 상징이 되어버린 그 자신의 안정적인 퇴임을 보장해 줄 수밖에 없도록 했다는 뜻이다.

[40] 차후에, 아니면 십 년 후에라도 북한 내부에서 김정환의 권위를 격하시키려는 세력이 나올 경우, 종래의 북측 김정환 지지자들은 물론 남측의 통일 찬성 세력과도 정치적으로 대립하게 될 수밖에 없으니까.

[41] 그래서 벌써부터 북측 통일 반대론자들은 ‘남조선에 공화국 강산을 팔아넘겨 자기 일신의 노후 안락을 샀다’라고 비난하는 의견이 나오는 중.

해당 선언이 통일 과정에 미친 영향은 2016년부터 현재까지 해당 위키의 장기 프로젝트로 지속 갱신 중인 ‘위키피디아/한반도 통일’ 항목의 ‘역사/정치적 배경/북측’ 항목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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