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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하는 수령동지-345화 (345/350)

경애하는 수령동지 345화

하여간 좀 많이 아스트랄해 보이는 이런 가설들이 끊이지 않고 제기되는 이유에는 당시 김정환이 일본에서 어울리던 인사들이 어둠의 세계, 속된 말로 ‘구린’ 냄새가 많이 나는 인간들이었던 것도 한몫했다.

앞서 등장한 허영준은 말할 것도 없는 야쿠자, 조직범죄자고, 당시 김정환과 관계를 맺었던 ‘나카오 에이이치’ 등 일본 정치인들은 버블 당시 NTT 민영화 등 유착 의혹이 강하게 제기되었던 여러 비리의 중심부에 있었던 인물이다.

허영준(범죄자) : 믿기 싫으면 마쇼. 사실 나도 그 당시에 그 도련님…… 아니, 쇼군 사마(장군님)인가? 하여간 그 젊은 장군님이 부리는 마술을 옆에서 보고 있으면 믿어지지 않을 지경이었던 건 마찬가지니까. 아직도 가끔은 그때가 그리워. 시도 때도 없이 나를 도쿄만에 처넣겠다 협박하는 걸 빼면 말이지.

하여간 이렇게 자금을 축적한 김정환은 장성택과 현영숙 등 외화를 구해오라는 김정일의 압박에 항상 시달리던 중앙당의 인사들에게 로비를 해 자신의 지위를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으며, 마침내 3년 후 1988년에는 당시 북한의 국가적 사업이었던 류경 호텔의 자재 책임자가 되어 고국에 돌아가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그 후 김정환 본인과 북한, 나아가 한반도 전체의 운명을 바꾼 사건이 발발한다.

2.4. 집권 초기~ : 88년 평양 프룬제 쿠데타 사건과 총서기 등극. 그리고 천안문 사태.

88년 류경호텔 임의 붕괴 유도 - 평양 프룬제 쿠데타 사건은 각각 해당 항목 참조.

해당 사건의 자세한 배경과 가담 인물, 프룬제 일파들의 성향과 그 안에서 김정환의 위치에 대한 고찰, 여파와 타임 라인 등은 해당 항목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위 사건으로 인하여 김정환은 사전에 프룬제 일파의 일원이자 [15] 이제는 자신의 충실한 동지로 끌어들인 유혜림으로부터 일파의 전모와 최종목적에 대해 들어 알고 있었으며, 이들과의 합작 하에 마침내 조선로동당의 총서기로 등극한다.

당시 쿠데타는 표면적으로는 ‘김영룡 당시 보위부장이 김정일과 김일성을 시해하기 위해 꾸민 것’이었지만 본 위키의 서버는 서울에 위치한 관계로 검열이나 반달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해당 사건의 상세를 기술한다. [16]

[15] 아마 당시에는 이미 연인 관계로 발전해 있던 것으로 추정.

[16] 현재까지도 조선로동당 측은 소극적이나마 이런 입장을 견지하지만, 지금은 김정환 집권기처럼 이런 사실의 전파자를 처벌하거나 검열하지는 않는다.

해당 사건은 현재까지도 구 북한 지역 내에서도 가장 민감한 토론 주제 중 하나이자 조선로동당의 역린이기도 한데, 아직까지도 평양의 공민들 중 적지 않은 수는 해당 사고, 아니, 폭파에서 가족이나 친지, 혹은 본인이 해당 사고에서 큰 피해를 본 경험이 아직 생생하기 때문이다.

후술할 김정환/평가 항목의 ‘부정적 평가’에도 나오지만 ‘굳이 그렇게 무고한 민간인 피해가 많이 나오는 방법을 선택했어야 했느냐’ 하는 비판과 ‘호위의 벽에 둘러싸여 한 번의 실패도 용납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라는 옹호론이 북한 웹상에서도 공존하고 있다.

가끔 이러한 옹호론에 경도되다 못해 주화입마의 수준에까지 이르러 ‘김정환은 제 이복형과 아버지를 암살하고 불법적으로 정권을 잡은 패륜아고, 김정일 장군이 최고지도자에 등극했으면 통일은 더 빨리 오고 현 공화국의 모든 문제는 나아졌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부류가 요즘 적지 않게 보이는데, [17]

‘김정일/생전 행적과 사후평가’ 항목에서 볼 수 있는 김정일의 생전 성향과 능력을 본다면 그럴 가능성은 희박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하여간 이렇게 집권한 김정환은 신 3대 노선을 발표하고 중국으로부터 얻어낸 자금으로 인민 생활을 지원하고 시급하게 필요한 인프라를 복구 재건하는 데 성공한다. [18]

그리고 불과 1년 후 발발한 천안문 사태와 소위 탱크맨(Tank Man)의 사망이라는 상황도 북한의 경제 성장에 호기를 만들어주었는데, 뒤이은 국제사회의 대중(對中) 경제 제재가 비슷한 개발도상국이었지만 인구와 투자 유치 등 모든 면에서 앞서 있던 중국을 잠시 주저앉히는 역할을 해주었던 것이다. [19] [20]

[17] 다만 해당 의견 자체의 비현실성과는 별개로, 현재 북한 내에서 표현의 자유라는 개념이 정착하고 있는 증거라고 이러한 논의의 등장을 긍정적으로 보는 의견도 있다. 실제로 김정환 집권기에도 단순한 사회 불만이 아니라 정권 자체의 정통성을 공격하는 논의는 철저하게 통제되었다.

[18] 이는 70년대 후반부터 정체 일로, 80년대 초반부터는 정체에서 퇴보로 접어 들어가던 북한 경제에 반드시 필요한 조처였다.

[19] 물론 이건 북한 입장에서만 한정할 때 그렇다는 것이고, 당시 중국 지도부 내 온건파였던 자오쯔양 총서기와 탱크맨의 사망은 그때까지만 해도 감히 그 마오쩌둥에 비견될 정도였던 덩샤오핑의 퇴진이라는 나비효과를 불러온다.

[20] 실제로 이때 심복 장쩌민의 배신과 덩샤오핑의 퇴진이 아니었다면 중국이 국제사회(당시는 아프간을 비롯한 중동)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시간이 10년은 늦춰졌을 것이라는 게 중론.

출처 :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청소하자 – 그날 텐안먼에서 벌어진 일’ 김동욱 박사 저

2년의 기간 동안 꿈꿔오던 개혁개방을 위해 달려나갈 외부적 조건은 다 마련되었다.

그러나 막상 그 시기가 되자 과거의 잔재가 김정환의 발목을 잡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신임 총서기 김정환의 권력이 영 확고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는데, 아직 군을 장악하고 있는 홍계성 상장, 백승철 차수 등 프룬제 일파들은 건재했고, 인민들에 대한 김정환 본인의 인지도 역시 아직은 미미했다.

다른 무엇보다 당시 북한은 여느 개발도상국이 경제 개발 초기에 가장 필요한 해외자본의 유치가 난망한 상황이었는데, 예나 지금이나 세계 자본시장의 패권은 누가 뭐래도 달러화를 발행하는 미국이 쥐고 있었고, 프룬제 일파의 친소련파 성향 이전에 당시 북한에 있어서 반미(反美) 노선이란 ‘남조선해방전쟁’ [21] 이후로 반쯤 국시(國是)나 다름없었다.

[21] 현재는 김정환 본인이 폐기한 명칭이지만 당시에는 한국전쟁을 이렇게 불렀다.

그 반미라는 국시의 시초이자 상징이나 다름없는 자신의 아버지, 김일성이 노쇠한 상태로나마 여전히 살아 있었고, 그 주변에는 김정환의 체제 전환을 향한 최근 행보를 영 못마땅하게 바라보고 있는 김일성의 노 가신들이 응집해 있었다.

이미 늙어 쇠약해진 데다 반 시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지만, 여전히 김일성은 (그 실체와는 무관하게) 공화국에서 살아 있는 신이나 마찬가지였고, 김정환이 꿈꾸었던 신 공화국으로의 길을 가로막는 모든 세력의 구심점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여기서 김정환에게 다시 잇따른 행운이 발생하나, 이게 정말 순수한 행운인지에 대해서는 역시 논란이 많고 문서도 길어졌기에 다시 별도항목으로 분리하여 서술한다.

2.4.1 김일성 서거, 그리고 최고지도자 등극

김일성 암살설 해당 항목 참고

위 문단의 ‘류경호텔 임의 붕괴설’과 함께 현재 북에서의 김정환 반대론자들의 주요 떡밥.

해당설을 주장하는 이들의 공통된 주장은, 처음 임의 붕괴 공격 당시 김정환의 목표는 김일성이었는데 실패하자, 아버지를 결사적으로 지키려던 아들이자 정통 후계자인 김정일과 김영룡 보위부장이 방해되어 그들을 반역자로 몰아 먼저 제거했고, 인민들의 관심이 어느 정도 식고 난 후 처음 목표였던 아버지까지 독극물을 써서 제거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김정환과 결탁하고 군권을 장악한 실행부대 역할이었던 프룬제 일파의 첫 봉기 목표는 ‘수령 세습 독재 체제 타도’였고, 그 수뇌부 백승철 [22] 은 평소에도 김일성과 김정일에 대한 불만을 노골적으로 주변 부하들에게 말하고 다녔다니 이런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22] 후일 김정환에 의해 조선인민군 차수로 임명됨. 지금은 없어졌지만 당시 북한에서는 서방권 원수 직급에 준하는 지위였음.

이 가설도 김정환이 적극적으로 자기 아버지의 제거를 주창했다는 ‘김정환 주도설’과 김일성을 제거하라는 프룬제 일파들의 압박에 떠밀렸을 뿐이라는, 심지어 암살을 프룬제 쪽에서 보고도 없이 먼저 결행했고 김정환은 암살 자체도 뒤늦게 알았다는 ‘사후보고설’로 나뉘지만,

그러나 당 대회 직후 장성택 당시 청년사업부 부부장을 거의 독단으로 조직지도부 부장 자리에 앉히는 등 반란 세력 내에서 김정환의 지위는 분명히 일정 비중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과연 정말로 아버지의 죽음에 김정환이 일절 관계되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대부분의 학자들은 ‘김정환이 직접 김일성을 죽이지는 않았다고 해도, 그 직후 들고나온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당부하는 소위 김일성의 마지막 유서는 거의 확실하게 조작’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23]

[23] 단, 이상의 김일성 암살설 및 유서 조작설 등은 현재 북에서 실업과 대기업, 대자본에 대한 반감, 극우 성향 민족제일당에 대한 반동 등으로 준동하는 극좌 권위주의 성향의 정치 단체들에 의해 제기되었으며 해당 단체들의 프로파간다로 악용되는 경우가 매우 잦으니 인용과 연구에 주의할 것.

어느 쪽이든 위와 같은 과정을 거쳐 김일성과 그 유산이 ‘동시에 죽어준’ 덕분에 개혁개방과 글로벌 무역체제로의 편입을 위한 마지막 장애물까지 없어지자 이제 북미 수교에는 그동안 쌓아왔던 대립의 세월을 극적으로 청산할 그럴듯한 명분만 있으면 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김정환에게 운이 따라준 덕에, 때마침 이 모든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수 있는 대형 이벤트가 발생해 주는데, 바로 이라크의 또 다른 독재자 사담 후세인의 쿠웨이트 침공, 그로 인해 발발한 걸프전이었다.

2.5. 집권 초기 ~ 권력 안정기 : 걸프전 참전과 극적인 친미 외교 선포.

걸프전 항목의 ‘조선인민군의 활약’ 해당 항목 참조

쿠웨이트의 영국 소유 유전에서 일하던 북조선 소속 노동자들이 이라크군에 의해 억류되는 사태가 발생하자, 김정환에게는 개전과 다국적군 참가의 명분이 섰다.

일부 김정환 폄하론자들 중에서는 당시 미국과의 수교에 미쳐있던 김정환이 일부러 이라크군에게 억류될 가능성이 높은 위험지대에 자국 노동자들을 보냈다는 음모론을 제기하는 자들도 있는데, 당시 사담 후세인의 쿠웨이트 침공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후세인의 즉흥적 구상이었으므로 김정환이 예지력이라도 갖고 있지 않은 이상 불가능하다.

과정이야 어쨌건, 김정환 본인이 찾아온 기회를 잡는 능력은 탁월하다는 게 다시 한번 드러났는데, 해상저격여단 등 특수전 부대를 중심으로 구성한 파병군을 급파해 국제사회에 화려하게 데뷔했음은 물론, 이후 이어진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과의 회담까지 이끌어낸 것이다. [24]

[24] 뿐만 아니라 해당 파병은 간접적으로 여전히 구소련 시절 교리에 물들어 있던 북한 장성들에게 큰 충격을 주는 충격요법 역할도 했다.

백승철 전 차수의 자서전 ‘붉은 별을 안고’ 해당 챕터 참조.

참고로 나중에 당시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 대통령이 본인 자서전에서의 해당 회담, 그리고 회담에서 조우한 김정환에 관련된 묘사가 대단히 의미심장 한데,

‘분명히 유능하고 남다른 통찰력이 있지만, 표를 모아서 당선되고 임기가 정해진 민주주의 국가의 정치인이었다면 실패했을 확률이 높았을 친구’

‘전통적인 의미의 정치인이라기보다는 자신만의 특이한 정치철학과 이론하에, 한 국가를 무대로 그 이론을 장기간에 걸쳐 실험하는 것 같은 과학자를 연상시키는 젊은 지도자’

……이다.

개인 감상이야 어쨌든 김정환은 해당 회담에서 부시를 설득, 차후 동북아시아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지정학적 가치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텐안먼 경제 제재로 인해 중국의 ‘세계의 공장화’와 투자 유치가 잠시 일시 정지된 시대적 배경 하에, 몇 가지 무역협정과 세계 무역기구 가입을 보장하는 합의에 다다른 두 지도자의 만남으로부터 북한은 본격적인 경제적 도약을 시작한다.

하지만 아직 이때까지만 해도 북한은 그저 이제 막 경제 개발을 시작한 구 공산국가였으며 아치에너미 격이었던 남조선, 한국과의 경제적 격차는 이미 크게 벌어져 있었다.

실제로 이때까지만 해도 서울에서는 북한의 개혁개방에 대해서 ‘우리의 앞선 자본과 경제력으로 북한의 장벽을 허물고 흡수통일을 이룩하자’라는 구상이 나오고 있었으며 그렇기에 김정환 정권이 초기에 견지한 통미봉남 전술에 대해서도 그다지 위기감을 느끼지 않고 있었다.

최소한 뒤이은 근대그룹의 월북과 6년 후 타결될 남북 대타협까지는 그랬다.

특히 남북 대타협의 경우, 본 위키의 연대기적 서술로 인해서 좀 하단에 나오지만 당시이를 결단한 박이삼 전 대통령의 아들 박한철이 북으로부터 1억 달러를 수뢰했다는 둥, 심지어 미국에서 만난 북한 여간첩에게 홀려 섹스 비디오를 찍혀서(!) [25] 박이삼이 암중 압력을 받았다는 둥의 루머까지 돌 정도로 아직까지도 한국 국민들에게 그 충격이 남아있는 사건이다.

[25] 해당 인물의 항목을 참조하면 알겠지만 이 문제가 아니더라도 한보 사태 등 여러모로 전횡이 잦아 소(小)통령 등으로 불리며 구설수에 오르던 인물이다. 이런 비하성 루머가 나도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셈.

#작가의 말

생애 파트가 왜 이렇게 길어지는지 모르겠네요;;;

단순히 내용 요약에 그치지 않으려고 노력은 하고 있는데 이거 참;;

중간중간에 좀 짧게 ‘해당 항목 참조’ 형식으로 넘기는 건 그런 노력의 일환이라 보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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