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애하는 수령동지-344화 (344/350)

경애하는 수령동지 344화

외전, 위키피디아 : 김정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2대 최고지도자

본명 : 김정환(金正桓 / Kim Jung Hwan)

출생 : 북한 평양직할시 만경대 구역(?) [1]

1962년 8월 16일 (58세)

학력 : 김일성 종합대학(국립평양종합대학) 정치경제학과 졸업

경력 :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총서기 (1988년 – 2018년)

조선로동당 정무원 총리 (1988년 – 1989년) [2]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1988년 – 2016년)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1988년 – 2018년)

가족 관계 : 父 김일성 母 김명애

배우자 유혜림 [3]

자녀 유혜인

[1] 김정환 집권 전 북한에서는 개인숭배와 우상화를 위해 부친 김일성을 비롯한 지도자들의 출생지(라고 주장하는 곳) 성역화를 진행해왔으나 김정환 집권 후 이러한 시도를 전혀 하지 않았기에 본인이 직접 밝히기 전까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모친 김명애가 김일성의 지근에서 통역사 역할을 하던 정부(情夫)였다는 점, 그리고 박세황 등의 여러 남측 정보원들의 증언을 종합해 볼 때 평양시가 가장 유력하다.

[2] 후일 내각으로 개칭 후 김용건에게 이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자리는 2016년에 이임.

[3] 사실혼 관계, 그 외에 지금까지도 여러 국내외 찌라시들에 의해 정부나 첩, 기쁨조(…) 등의 존재가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으나 사실관계가 불분명하기에 기재하지 않는다.

개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제2대 최고지도자이자 독재자.

개발독재자, 지능적 민주주의 탄압자라는 비판과 동시에, 세습 독재와 우상화라는 내부적 위기, 소련 붕괴와 남한의 경제적 추월이라는 외부적 위기가 닥친 북한을 선진국으로 이끌고 임기 후반에는 북만주 전쟁에서 승리하여 영토를 확장, 마침내는 남북통일까지 주도해 [4] 현재의 통일 한국을 이룩한 데 가장 크게 기여한 민족지도자라는 상반된 평을 동시에 듣는 인물.

박정희 전 대통령과 함께 남북한 사회에서 이념과 성향에 따라 가장 상반된 평을 듣는 인물이자 역시 박 전 대통령과 함께 본 위키에서 가장 많은 횟수의 편집, 수정 전쟁, 문서 보호조치, 토론을 불러일으킨 인물이기도 하다.

취임 시 공식적으로 부여받은 존칭은 ‘주석’이었던 자기 아버지 김일성과 비슷하게 ‘최고지도자(Supreme Reader)’지만, 남북 양국에서는 일반적으로 ‘김 총서기’, 내지는 ‘총서기’로 통칭되고 있다.

[4] 북한에서 첫 자유 선거가 행해진 지 몇 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양 행정부의 공식 입장은 ‘대등한 입장에서 상호 간 필요에 따라 통일을 이룩함’이지만 정치학자들과 세평은 대부분 당시 카운터 파트였던 전 전 대통령보다는 김정환 총서기가 더 개인으로서 더 큰 역할을 했다는 데 의견이 일치한다.

2. 김정환/생애

2.1. 청년 시절

1962년 8월 평양시에서 김일성과 그의 통역사였던 어머니 김명애 사이에서 태어났다.

김일성의 사생아들이 대체로 그렇듯이 김정환의 출생 시기와 출생지, 유년 시절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았다.

실제로 총서기 취임 직후에도 자기 아버지(와 이복형 김정일이 하려다 실패한)가 거친 신격화 과정, 출생지 사적지화나 어린 시절 무용담 등등도 없어서 취임 초반만 해도 국제사회, 특히 한국 정보당국은 이 ‘아닌 밤중에 홍두깨처럼 나타난 총서기라는 양반’의 정보를 수집하느라 제법 고생했다고 한다.

하지만 98년 외환위기 극복과 함께 이루어진 남북 대타협(항목 참조) 이후 상호 왕래가 이전과는 비할 바 없이 활발해지고 그에 따라 폐쇄적이라는 북한에서도 가장 폐쇄적이라는 최고지도자의 신상에 관한 연구와 정보수집도 빛을 보기 시작했는데,

어린 시절부터 지도자가 되기 전까지의 김정환에 대해 아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증언하는 바에 따르면 김정환은 ‘유약하고 주눅 들어 있는, 군관보다는 학자풍의 청년’이었다고 한다.

-수령님의 핏줄이 우리 김대에 입학했다길래 멀리서 보러 간 적이 있었지요. 지금에서야 말할 수 있는 거이지만 당시는 얼굴은 하얗고 팔은 가느다랗고, 순전 책상 물림처럼 생긴 게, 이게 과연 그 김일성 장군의 아들인가, 어머니 피가 더 세었던가 고개를 갸우뚱거린 거이 기억 납니다. 기래서 나중에 그분이 총서기직에 취임했다고 들었을 때도…… 흠흠, 혹시 다른 당 간부들이 허수아비로 내세운 거이 아닌가, 그런 의심도 품었던 적이 있습네다. 기런 의심 때문에 입을 함부로 놀리다가 대가를 혹독히 치렀지만…….

(김일철 교수,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

-당시 최고존엄의 핏줄에 관한 경호와 신상파악 전반은 우리 호위 제1국 내에서 담당하고 있었는데, 총서기 동지는 당시 경호 우선순위에서 많이 아래쪽이었디요. 일반적으로는 녀성 동지들이 아니면 파견되지 않는 녀성 군관 덜렁 하나만 붙여둔 이유도 그런 거이였고. 결과적으로는 그 녀성 군관이 공화국의 국모가 되었으니 사람 인생 모르는 거이라고 해야 되려나……?

(당시 호위사령부 요인, 익명 요구)

여러 미디어 매체들에서 지능적이고 냉혹한, 남측 지도자들을 가지고 노는 철혈의 독재자라는 이미지에 익숙한 한국인들로서는 쉽게 믿기 힘든 사실일지도 모르겠지만 아마도 수령의 사생아라는 점, 특히 이복형 김정일이 자기 입지를 확고히 하고 태어난 사생아라는 점이 청년 시절의 김정환으로 하여금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히 밟는 [5] 신중함을 겸비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김정환에게 특기할 점이라면, 공화국 최고의 수재들이 모인다는 김대에서도 특출나게 성적이 좋았다는 점인데, 이게 소위 ‘백두혈통 가산점’ 같은 게 작용한 것이 아니라 [6] 진짜로 본인 실력으로 좋은 성적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의 아버지 김일성, 그리고 그때까지만 해도 까마득하게 높은 곳에 있던 경쟁자이자 이복형 김정일 전부 학업과는 영 거리가 먼 타입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전주 김가(金家)에 있어서 김정환이란 그야말로 돌연변이가 아닐 수 없다.

[5] 이런 어린 시절의 은인자중하는 행보에 주목한 일부 비판적인 호사가들은 김정환을 고대 로마의 폭군 칼리굴라에 빗대 악평하기도 한다. 물론 두 명의 집권 후 행보를 보면 심하게 편향된 비판이 아닐 수 없지만.

[6] 사실 당시 김정환은 그런 특별 대우를 받을 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다고 표현하는 쪽이 맞다.

하지만 이런 돌연변이(?)도 최소한 청년 시절 때만큼은 다른 김씨 일가들과 비슷하게 인민들을 마소처럼 부려야 한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볼 수 있는 단서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아래 나올 ‘인민들은 배고파야 복종한다’ 발언이다.

2.2. 세뇌에서 벗어나게 한 일본 유학 시절

-어차피 인민들은 개돼지나 다름없다. 그들에게 복잡한 리론(이론)이나 정책은 이해할 수도,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것에 불과하다. 굶지는 말되 항상 족함을 모르게 해야 한다…… (중략) 영도력 있는, 호랑이 같고 무쇠 같은 지도자가 없다면 이 공화국은 금세 외세의 손아귀에 넘어간다.

(김정환, 태양절[7] 날 축하연 자리에서)

[7] 김일성 주석의 생일을 기념하는 북한의 공휴일. 지금 이 글을 읽는 남북한, 특히 20–30대 북한 위키러들은 상상하기 힘들겠지만, 당시 한창 수령 우상숭배 작업이 무르익어 가던 당시 북한에서는 무려 최대 국경일이었다!

현재까지도 남북한 양 사회 모두에 적지 않게 포진해 있는 극렬 김정환 숭배자들에게는 가장 외면하고 싶은 사실이겠지만, 김정환이 인민들에게 자유와 행복을 찾아주기 위해 젊은 시절부터 일체의 사심 없이 아버지와 이복형에게 쿠데타를 준비하고 일으켰다는 일각의 주장은 위 문장 하나로 반박 가능하다.

이미 해당 자리에 참석한 다수의 노(老) 간부들, 장령들의 수없이 많은 증언과 교차검증을 통하여 김정환이 틀림없이 저 발언을 자신의 입으로 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으며 그렇기에 본 항목 역시 수많은 ‘합리적 의심’에서 비롯된 수정과 반달을 이겨내고 해당 발언을 존치시키는 데 성공했다.

발언의 적절성이나 도덕성을 떠나, 해당 축하연 자리에서 나온 저 발언은 김정환을 처음으로 야인(野人), 조선 시대로 따지면 왕세자의 위치에 있던 김정일의 잠재적 숙청대상인 일개 군(君)의 위치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약간이나마 세간의 주목을 받게 해준 계기라고도 할 수 있는데,

실제 저 발언이 진심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연구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고 김정환 본인이 자서전이라도 출판하지 않는 이상 그 상태로 남아 있을 확률이 높겠지만, 최소한 살아가면서 생각이 바뀐 것은 분명하다. [8] [9]

[8] 근래 학자들 사이에서는 저 문제적 발언을 두고 야인 신세에서 벗어나 일본에 가서 세력 기반을 쌓을 준비, 그게 안 되면 최소한 감옥이나 다름없던 북한에서 도피하기 위해서 고도의 계산 하에 한 발언이라는 설이 힘을 얻고 있다.

[9] 아니면 최소한 그 전에 시장경제체제의 장점에 대한 정보를 어떤 식으로든 보거나 듣고 그걸 두 눈으로 보기 위해서였던지. 그게 아니면 일본에 정착하자마자 보여준 마이더스의 손 일화를 설명하기 힘들다.

김정환을 위해서 변명을 좀 해보자면, 태어나서 23세에 이르기까지 주체사상과 사회주의 자력갱생 경제 제일만 외치던 모국 외에 타 체제는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세뇌 교육하에서 살아왔는데, 아무리 위인의 자질을 타고난 사람이라도 그런 환경의 영향을 조금도 받지 않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아바디의 비위를 맞춰 얻어낸 일본으로의 ‘유학’ 기회는 김정환으로 하여금 이후 자신이 만들어갈 새로운 공화국이 계획경제 체제가 아닌 시장경제 체제로 방향을 잡아야 함을 뇌리에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해당 항목으로 들어가면 알 수 있겠지만 버블 경제 시절 일본만큼 공산주의의 퇴조와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풍요로움, 동시에 금융자본주의의 본질을 잘 보여주는 시간적, 공간적 배경은 드물었다.

하지만 해당 시기 일본은 청년 김정환의 눈을 뜨이게 한 신천지이자 동시에 아직까지도 김정환을 연구하는 (남북일을 막론한) 학자들로 하여금 최대의 미스터리로 남아 있는 시기이기도 한데, 아직까지도 인터넷 검색창에 ‘김정환’ 이름만 치면 ‘김정환 비자금 1000억 달러’, ‘김정환 일본 금괴 200톤’ 등이 자동완성으로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2.3 버블경제 시기 일본에서 이룬 마이더스의 손 신화(?) 그리고 쿠데타 준비

하여간에 김정환은 이렇게 생애 처음으로 감시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운 일본에 북조선 외교관 신분으로 유학 겸 망명을 떠나게 되는데, 여기서 그는 무슨 수를 썼는지 몰라도 어마어마한 부를 이룩한다. (볼드체)

정확한 액수와 출처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지만, 최소 1억 달러 이상, 많게는 수십억 달러를 추산하는 연구도 있는데 당시 김정환의 상황이 상황이었던 만큼 많은 부분이 비밀에 가려져 있다 보니 불분명하지만,

이 당시 김정환이 어떠한 수단을 써서 엄청난 자금을 소유하게 되었고, 이 자금이 후일 류경 호텔 임의 붕괴 유도-프룬제 쿠데타의 큰 기반이 되었음은 부인하는 이가 없다.

그의 첫 가신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자 유혜림을 제외하면 거의 유일한 동지라고 할 수 있는 김용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일관되게 주장해온 바에 따르면, 김정일에게 전별금 조로 받은 ‘용돈’을 당시 버블의 극한을 달리던 일본 증권시장에 투자해 이룩했다고 하는데, 현재까지도 이를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이는 대중과 학계를 막론하고 전무하다시피 하다.

-김용건 상임위원장(당시 재일본 조총련 대표) : 남조선 동무들 좋을 대로 생각하시오들. 주둥아리가 부르트게 있는 그대로 말을 해줘도 도통 믿지를 않으니 원…….

그도 그럴 것이, 상식적으로 불과 몇 년 전까지 주식 투자는커녕 개인의 은행 계좌조차 없던 북한에서만 평생 살아오던 23세 젊은이가 일본에 오자마자 갑자기 난다긴다하는 투자자들 뺨치는 투자의 신이 되었다는 걸 그 누가 납득할 수 있겠는가?

많은 학자와 언론인들의 조사, 남북 이주민들과 당시 일본에서의 증언들을 종합해도 도대체 김정환이 어디서 그렇게 많은 자금을 모집할 수 있었는지는 현재까지도 그의 전 생애 중 가장 미스테리한 부분 중 하나이다.

현재 남북관계 - 통일과정사(史)의 하위분과 학문 [10] 이라고 할 수 있는 ‘김정환과 김정환의 북한’의 전문가들에게 가장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는 설은, ‘통제가 안 되는 김정일 정권의 전복을 위하여 중국으로부터 비밀스러운 자금 지원을 받았다’인데……. [11]

[10] 분과학문이지만 김정환이라는 인물이 북한을 넘어 한반도 근현대 역사 전체에 끼친 영향을 감안할 때 절대 하위분과학문이라고만은 볼 수 없기는 하다.

[11] 2008년 노윤현 정권 당시 KTBC에서 제작된 드라마 ‘동토의 철인’에서는 해당 설을 채용했다.

문제는 이 가설에도 쉽게 납득 할 수 없는 부분이 생긴다는 점이다.

당시 말 그대로 일개 쩌리에 불과했던 김정환에게 중국에서 도대체 무얼 믿고 수억 달러에 이르는 그 거대한 자금을 지원해 주었느냐 하는 것인데, 심지어 당시 중국의 최고 영도인이던 덩샤오핑과 김정일은 딱히 원수지간도 아니었다!

따라서 현재까지도 해당 부분은 하술할 ‘김정환 마약왕 설’등 많은 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미스테리로 남아 있으며, 수많은 영상 매체들에서 각종 가설을 제기하고 있으나 이 중 정확한 것은 없다고 보아야 한다.

2.3.1. 김정환 마약왕 설?

‘김정환 마약왕 설’ 해당 문서 참조.

이렇게 도무지 답이 안 나오는 문제다 보니 가끔 좀 독특한 소수설을 미는 학자들도 있는데, 그 소수파들이 미는 설의 요지는,

‘김정환은 당시 버블 경제로 사회 전체에 향락적인 분위기가 감돌던 일본에서 빙두(氷毒)라는 이명으로 불리던 메스암페타민계 약물 등 북한산 각성제 [12]를 팔아치워 대규모 비자금을 마련했다’라는 설이다.

[12] 실제로 최첨단 산업의 세계적 리더 국가가 된 현재로써는 상상도 하기 힘든 일이지만 김정환 집권 전까지만 해도 당시 북한은 국가 차원에서 마약을 생산해 통치 자금으로 유용했다.

해당 문서에 들어가기 귀찮은 위키러들을 위하여 학설의 주요 근거를 압축해서 설명하자면,

-공식적인 설명, 그러니까 ‘김정환 마이더스의 손 설’은 아무리 당시 일본 버블 경제가 미쳐 돌아갔다지만 고작 3년여 만에 최소 수십억 달러(1980년대 기준이다!)로 추정되는 그 엄청난 규모의 자금을 순수한 투자 수익으로 마련했다는 것은 누가 봐도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

-당시 김정환은 유명한 재일 교포 야쿠자였던 허영준과 커넥션이 있었다는 것이 여러 목격담으로 증명되는데 당시 야쿠자들은 버블 경제를 맞아 사회 분위기가 향락의 끝을 치달은 일본 내 마약 시장의 큰손이자 80년대 한일(韓日) 간 히로뽕 루트의 개척자로서 대단히 적합한 판매책이었다는 점.

-일본 망명 당시 김정환의 공식적 신분은 북한의 외교관이라 사법적 처벌에 대한 부담이 민간인에 비해 훨씬 덜했다는 점 등이 있다.

1980년대 일본처럼 고도로 행정력과 경찰력이 발달한 국가에서 3년이 넘는 기간 동안 마약을 수십억 달러 규모로 팔아치웠는데 단 한 번도 체포되거나 혐의조차 받지 않았다는 점,

얼마 전까지 백면서생이던 인간이 한 달 만에 갑자기 거대 범죄조직을 구성하고 이끄는 수뇌로 돌변해 생산, 판매, 자금세탁까지 완벽하게 [13][14] 해내는 것도 만만치 않게 비현실적이라는 점 등으로 인해 폐기된 학설이지만 일각에서는 아직도 적지 않은 지지를 얻고 있는 이론이다.

[13] 여기에는 김정일, 그러니까 북한 당국 측의 조직적인 지원이 있었다면 충분히 가능했을지도 모른다는 반론이 있다. 즉 유학을 보낸 것은 위장이고 당시 김정환은 일본에서 김정일의 불법적인 통치 자금을 조성하는, 말하자면 ‘궂은일 처리조’로 보내졌다는 이야기.

[14] 당시 김정환이 일본에서 체포되거나 감옥에 들어가도 김정일로서는 모른 척해도 손해 볼 것 하나 없으니 어느 면에서는 일리가 있는 가설이기는 하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 CIA도 콘트라 반군에게 마약을 팔아치우다 몇 년 만에 걸려서 스캔들이 났는데 과연 이게 당시 북한 첩보능력으로 가능했을지는……?

주로 반(反)김정환, 반북한 성향이 강한 한국 학자들에게서 비하성 감정을 강하게 섞어 제기되고 있는 학설이며 특성상 일본에서의 혐한, 혐북(北) 성향 우익 인사들에게서도 자주 제기되는 이론이니 믿을지 말지는 판단은 그저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에게 맡긴다.

#작가의 말

후우…… 재미를 유지하면서 중간에 휴재 없이 계속 쓸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가급적 힘내보겠습니다. 가능하다면 연참도 하고…….

중간선 연출이나 [1] 같은 각주가 보기 불편하신 분들은 댓글로 의견을 이야기해주시면, 다음 화에 가급적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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