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애하는 수령동지-343화 (343/350)

경애하는 수령동지 343화

현영숙의 예측대로, 일이 쉽게 풀리지 않고 더 많은 사람들 앞에 나서야 한다는 사실을 듣자마자 방금 전까지 기세등등했던 김정은은 순식간에 졸아들었다.

심각한 은둔형 외톨이인 그로서는 정든 일본을 떠나 이곳 공화국까지 온 것도 악플러들에 대한 분노와 엄청난 용기를 낸 덕에 가능했는데, 더 낯선 장소와 사람들, 특히 그에게 어린 시절 트라우마를 심어주었던 카메라와 기자들 앞에 서는 건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했다.

그리고 자신의 의도대로 김정은이 한풀 꺾이자 현영숙은 자리에서 일어나 잔뜩 움츠러든 정은의 어깨에 손을 살짝 올리며 원하는 걸 얻을 수 없어서 좌절한 아이를 달래는 초등학교 선생님처럼 목소리를 부드럽게 깔았다.

“무엇보다 봉황새의 식견을 알아보지 못하고 참새만 한 아량으로 참견해 대는 그런 소인배들을 일일이 처벌하는 건 김정일 전 비서…… 아니, ‘장군님’의 아들 되신 분께 너무 좀스러운 일 아닐까요? 생전에 인민들을 포용하는 넓은 아량으로 유명하셨던 장군님께서 여전히 살아 계셨다면 이런 일쯤이야 아마 허허 웃으며 그냥 넘어가셨을 거예요. 그러니 정은 동지도 그분의 본을 받아보면 어떨까요?”

“그, 그럴까요?”

“물론이지요. 그리고 전화위복이라고, 그런 일 때문에라도 이렇게 오랜만에 고향산천에 발걸음하게 됐는데, 괜히 그런 일로 속 썩이지 마시고 앞으로 이 공화국이 김 전 비서의 자랑스러운 장정으로서 정은 동지께 기대하는 역할이 뭔지에 대해 차분히 생각해 보는 게 어떨까요?”

현영숙의 말뜻은 ‘이런 시시한 일 가지고 바쁜 사람 또 귀찮게 하지 말고 간만에 고향 왔으니 언제까지 연금 타 먹을 생각 그만하고 직장이라도 좀 알아보는 게 어떠냐’라는 말을 좋게 돌려 말한 것이었지만, 그 말에 김정은은 뭔가를 깨달은 듯 고개를 들고 주위를, 정확히는 서기실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이 당사 9층 서기실의 조망창은, 현 2020년 공화국의 부유와 번영, 무엇보다 변화를 한눈에 가장 잘 관찰할 수 있는 위치였다.

보통강 일대의 마천루들과 스카이라인들을, 드넓은 도로와 공원과 미술관을, 그리고 그곳을 여유롭게 산책하는 공민들을 관찰하는 데 이 서기실보다 더 좋은 위치는 평양 어디를 뒤져봐도 없었다.

그리고 그 광경이, 현영숙 이전 이 방의 전 주인이었던 누군가가 평생 쌓아 올린 결정체라고 할 수 있는 그 광경이 그 순간 김정은을 변화시켰다.

‘그러고 보니 방 밖으로 나오는 게 이렇게 쉬울 줄이야……. 이렇게 쉬운 것을 나는 왜 그동안…….’

생각해 보면 너무나 쉬운 일이었다.

그냥 방문을 열고 한 발자국만 디디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주는 유일한 요새인 줄로만 알았던 어두침침한 세타가야 자택 방 밖의 햇살이 이렇게 밝은 줄도 몰랐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의식하지 못했지만 바로 바다 건너 옆 나라에, 이렇게 다른 세상이, 이렇게 넓은 세상이 있는 줄 몰랐다.

(악플러들의 인실X을 향한) 분노가 기폭제가 되어, 세상에서 가장 크고 단단한 벽인 줄 알았던 방 안과 방 밖 사이의 벽을 부수고, 정은을 어두운 방 밖으로 걷어차 내쫓은 것이다.

그리고 그 밖의 세상, 인터넷 공간이 아닌 진짜 세상은 그가 두려워했던 만큼 나쁘지도 적대적이지도 않았다.

“어떠세요. 정은 동지? 오랜 방랑을 끝내고 조국의 부름에 응답할 마음은 없나요?”

“……그러겠습니다. 많이 늦은 것 같지만, 지금이라도…… 뭐라도 해보면 되겠지요.”

“훌륭한 생각이에요. 혹시 뭐 생각해 놓은 거라도 있나요? 조국에서 정은 동지의 새 출발을 격려하는 의미로, 총서기로서 제가 할 수 있는 뭐라도 해주고 싶네요.”

그 짧은 사이에 뭔가 변한 듯한 김정은의 모습에 현영숙이 살짝 의아함을 느끼면서도 그렇게 묻자, 김정은은 잠시 입을 헤 벌리고 생각에 잠겼다.

각오는 거창하게 다졌지만, 막상 뭔가를 해보려고 하니 자기가 할 수 있는 게 영 없었던 것이다.

머리 쓰는 공부는 15년 전 대학 자퇴한 이후로 때려치웠고, 몸 쓰는 일을 하자니 신체 조건이 영 안 따라준다.

그럼 자기가 그나마 좋아하고 잘하는 일 중에서 앉아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메, 아니, 아니, 애니메이션 전문 스트리밍 사업을 해볼까 하는데요.”

“애니메이션이요?”

“네, 불법다운 같은 게 아니라 일본에서 정식으로 판권을 사서 공화국 내에 독점적으로 스트리밍하는 방식으로. 공화국에도 애니메이션 좋아하는 애들은 많고, 처음에는 니폰…… 아니, 일본산 애니메이션 수입으로 시작해서 나중에 경험이 쌓이고 돈도 좀 모이면 자체 제작도 하고…… 키타조센…… 흠, 북조선 애니메이터들은 예나 지금이나 솜씨가 좋으니까요.”

“흐음, 그쪽은 잘 모르지만 제법 훌륭한 생각 같네요. 하기야 요즘은 OTT 플랫폼들의 춘추전국시대니. 좋아요. 저도 적극적으로 지원해 드리죠.”

정은은 별생각 없이 말한 것이었고 현영숙 역시도 잘 모르고 있었지만, 의외로 이런 정은의 생애 첫 사업 구상은 나름 괜찮은 것이었다.

2018년 정환의 은퇴 이후 민주주의와 표현의 자유라는 바람이 본격적으로 불어닥치면서, 미디어 예술 업계에도 그동안 금기시되거나 검열 당국의 규제에 걸리던 외국산 창작물들의 진입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는 와중이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언어가 같고 이미 비슷한 길을 걸어온 한국산) 웹하드 사이트 다운 등으로 수면 아래서 볼 사람이야 다 보고 있었지만, 2020년 북조선은 그동안 대부분 음지의 수요였던 애니메이션 시장이 한창 양성화되는 기로에 서 있었다.

정은처럼 (오덕후에) 일본에 오래 살아 일본어에도 능숙한 사람이 당국의 지원까지 받아 스트리밍 업체를 세우면 이미 시장에 선행 진출한 한국 업체들하고도 충분히 경쟁해 볼 만할 것이라고 현영숙은 생각했다.

그리고 그때, 현영숙의 뇌리에 눈앞의 김정은 문제를 처리하느라 잠시 잊고 있었던 또 하나의 백두혈통이 떠올랐다.

“아참, 그러고 보니 정은 동지의 누이동생…… 그러니까 여정 동무는 지금 어디서 뭐 하고 있나요?”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언제나 하던 거 하고 있겠지요.”

“언제나 하던 거라면…….”

“그놈의 칸코쿠…… 아니, 남조선 아이돌 쫓아다니는 거지 뭐겠습니까. 무슨 방탄청년단인가 그깟 양산형 아이돌 뭐가 그리 좋다고…….”

‘아, 그러고 보니 코로나도 한풀 잦아들었고, 평양 투어 재개한다고 보고를 들은 기억이 나네.’

생각만 해도 괘씸하다는 듯 정은이 이죽거리는 걸 보자 현영숙은 고용희 가족의 일본 체류 기간 행적 보고 중 김여정에 관한 부분을 다시 떠올렸다.

김정은이 학교를 중퇴하고 히키코모리가 되었다면 여동생 김여정은 넘쳐나는 돈과 시간을 소위 덕질, 그러니까 잘생긴 남자 아이돌 쫓아다니는 데 투자했던 것이다.

-꺄악! 정전국 오라버니 이쪽 좀 봐주시라요!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시작해서 그 대상이 90년도 중반에는 미국 아이돌, 90년도 후반에는 일본 아이돌, 2000년대 초중반 이후에는 다시 신토불이 한국 아이돌로 바뀌었을 뿐, 무려 서른이 넘은 지금까지도 별다른 직업 없이 매일매일을 북남조선, 중국, 일본을 오가며 아이돌 팬 활동이 정은의 여동생, 김여정의 현재 일상이었다.

참고로 현재 몰두하고 있는 한국 아이돌은 방탄청년단인가 하는 아이돌이었는데, 이전에는 넓어봐야 중국, 일본 정도로 해외 활동이 한정되었던 타 아이돌과는 달리 미국, 유럽, 남미까지 글로벌적으로 노는 그들의 각 대륙별 콘서트, 팬미팅까지 따라다닐 정도로 이전과는 차원이 다르게 열성이라 당분간은 헤어나오지 못할 게 확실했다.

덕분에 KPOP이고 아이돌이고 ‘칸코쿠 문화는 다 일본 문화의 표절이고 싸구려’라고 주장하는 좀 다른 의미로 비생산적인 오빠 김정은에게조차 한심한 시선을 받고 있었지만, 대부분의 여동생이 그렇듯이 여정 본인은 그런 오빠의 시선에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물론 방 밖으로 나오지도 않는 오빠와는 달리 나름 지나칠 정도로 활동적으로(?) 사는 인생이라 혹시라도 그녀가 오빠의 뒤를 밟을까 내심 걱정했던 어머니 고용희를 포함한 다른 가족들은 ‘차라리 저게 낫다’ 하고 한숨을 내쉬었지만 말이다.

일설에 따르면 아이돌들 생일 때마다 금괴(!)를 하나씩 보내주는 정체불명의 헤비 팬, 소위 ‘큰손’ 중 한 명이 김여정이라는 설도 있다.

콘서트 등 공연 행사가 열릴 수 없는 일본에서 도한한 것도 강력한 방역정책으로 코로나 바이러스의 초기 진압에 어느 정도 성공한 한국과 북조선에서는 아이돌 콘서트 등 공연문화 행사가 어느 정도 재개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컸다.

아마 지금쯤은 콘서트장에 도착해 굿즈를 쓸어 담거나 응원 준비에 열중하고 있을 것이다.

‘이것 참, 이런 걸 보면 다시 한번 총서기님이 돌연변이라는 게 증명된 거 같군.’

이렇게 모든 백두혈통의 근황을 파악하고 나니 현영숙은 참으로 달곰씁쓸하면서도 복잡미묘한 표정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첫째 아들은 인디밴드 기타리스트, 둘째 아들은 은둔형 외톨이 졸업 직후 아니메 스트리밍 사이트 운영, 셋째 딸은 아이돌 헤비 팬이라니.

인생의 행복이란 사회적인 성취나 부, 지위에 있는 게 아니니 각자 좋아하는 걸 하며 행복을 추구하는 게 정답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생계나 가족 부양 걱정 없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실컷 하며 사는 그들의 인생은 어떤 사람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민족의 위인이시자 백두산줄기의 정기를 받고 태어난 민족 절세의 장군’ 김정일이 아들딸에게 원했던 모습은 지금 그들의 이런 모습과는 분명히 거리가 멀었을 거 아닌가.

심지어 김씨 일가의 지근에서 그들을 섬기고 선전하며 그들 중 대부분의 실제 모습이 인민들에게 보이는 것과는 거리가 한참 멀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현영숙조차도 결코 남들에게 자랑하기 힘든 정은과 여정의 이런 모습을 보며 이유 모를 실망감마저 살짝 느꼈을 정도니까.

‘백두산 정기 유통기한이 총서기 대에서 끊긴 건가……?’

아니, 그렇게 보면 그 전 김일성이나 김정일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 두 명의 패악질을 보며 혈통론에 대한 기대는 예전에 저버린 그녀가 아직도 ‘백두혈통’ 김정은에게 미세한 기대나마 걸었던 것은 아마도 그의 삼촌, 정환이 보여준 모습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머니야 달라도 일단 한 핏줄이기는 하니, 정환이 한때 보여준 모습의 아주 조금, 천분의 일이라도 존재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한때 정환과 같은 철인의 재림에 대한 희망을 가져봐도 좋지 않을까 하는 공적인 동시에 개인적인 기대.

사실을 말하자면 김씨 일가의 국가 사유화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두 번 다시 이 공화국에 드리워지지 않게 해야 한다는 정환의 신념을 잘 이해하는 현영숙조차도 그런 기대를 미세하게나마 품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 이 자리에서 정은이 그런 모습을 아주 아주 조금이라도 보여줬다면 상황이 많이 달라졌을지도 모르지만, 다행이면서 동시에 불행이게도, ‘우월한 유전자를 타고 난 백두혈통’ 따위는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녀는 다시 한번 확인했을 뿐이었다.

-백두혈통이라니, 현 부장 동무, 그런 비과학적이고 터무니없는 게 있을 리가 있겠어? 설령 있어도 나는 자식에게 그런 정체 모를 물건을 물려주는 건 사양이야. 이제 보니 현 부장도 가끔 보면 귀여운 면이 있군그래.

“흠, 아무튼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현 총서기님. 오늘 바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아니에요. 간만에 저도 여러모로…… 의미 있는 시간을 가진 것 같아 기뻐요.”

“아, 그리고 현 총서기님…… 음…… 이 말씀을 드렸어야 했는데…… 음…… 앞으로 다시 만나뵙기 힘든 분인 것 같아서…….”

접견을 끝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향하는 그를 배웅하는 현영숙에게 정은은 잠시 머뭇거리면서 말을 더듬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현영숙에게 정은은 한참 주저하더니 이내 용기를 내서 입을 열었다.

일단 한번 방 밖으로 나오는 용기를 내자, 두 번째는 첫 번째보다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저, 저…… 오늘 저에게 좋은 말씀 많이 해주시고…… 그리고 무엇보다 저를 방 밖으로 나올 수 있는 계기가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흐음?”

“사, 사실 조금 전부터 느낀 건데…… 오늘 일이 아니었으면 저는 평생 제 방안에 갇혀 살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런데 일단 한번 나와보니까……. 제 생각보다 괜찮은 것 같습니다.”

“…….”

더듬거리면서도 용기를 내어 그렇게 말하는 정은을 보며 현영숙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역사는 기묘한 반복과 역설, 아이러니로 가득 차 있다고 했던가?

그녀의 입가에 맺힌 미소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소녀처럼 활달했고, 눈빛은 과거의 어딘가, 그리고 누군가를 떠올리는 듯했다.

“원래 담을 허물고 나오는 첫걸음이 가장 어렵죠. 하지만 일단 첫발을 내디디면, 밖의 세상이 상상한 것만큼 그렇게 나쁘지만도 적대적이지만도 않다는 걸 알게 될 거에요. 동무를 지켜주는 줄 알았던 담이란, 사실 동무를 세상으로부터 격리시키는 장애물에 불과했다는 것도. 30년 전 이 공화국과 저도 어떤 분 덕에 그걸 어렵게 깨달았답니다. 고국에 돌아오신 걸 환영해요, 김정은 동지.”

외전, 그가 돌아왔다 (완)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