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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하는 수령동지-342화 (342/350)

경애하는 수령동지 342화

한순간 현영숙은 머리가 띵해지는 걸 느끼며 이 공화국과 김정환의 마지막 유지를 지키기 위해 암살까지 고려했던 몇 초 전의 자신을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

지금 동네 보안서(파출소) 서장도 아니고 한 국가의 수반을 눈앞에서 독대하면서 청탁을 요청한다는 게, 고작 자신한테 인터넷에서 악플을 단 키보드 워리어 몇 명 엄벌해 달라는 거라고?

이건 무슨 아홉 살짜리 초등학생이 학교 사회 시간에 대통령 할아버지께 편지 쓰는 시간도 아니고…….

단 한 번이라도 사회생활을, 아니, 뉴스라도 제대로 챙겨 보는 사람이라면 생각조차 못 했을 청탁에 현영숙은 잠시 손을 이마에 짚었다.

눈앞의 상대방, 정은의 표정이 지극히 진지하지만 않았다면 방금 말은 농담이었거나 아니면 최소한 공화국 내에서만큼은 무소불위의 권력자인 그녀를 우회적으로 비판하려는 행위 예술 퍼포먼스 같은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경력으로 따지면 30년 넘게, 지금은 은퇴한 주군 정환보다도 더 오래 공화국 정계에서 구른 이 여정객에게 이렇게 짧은 시간에, 이렇게 말문이 막히게 할 수 있는 것도 나름 업적이라면 업적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 업적을 이룬 눈앞의 사람, 정은은 자기가 대화 장소와 상대방의 레벨을 심하게 착각했다는 걸 아직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자기 혼자 떠들어댔다.

“……전 그 새끼들 닉네임도 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현 서기님! 뭐? 조선로동당이 독재를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총체적으로 보면 니혼데이고쿠(일본제국) 보다는 낫다고? 이 거지 같은 빨갱이 새끼들, 나는 일본에 있으니까 절대로 고소 못 해? 조만간 경찰서 바닥에서 데꿀데꿀 구르면서 제발 선처해 달라고 질질 짜는 걸 보고야 말 겁니다!”

“……분명히 PC 인사이드라 하셨죠, 그 사이트가?”

“네, 그렇습니다. 사람 마음에 아주 열불이 나게 만드는 놈들이니 꼭 좀 조져…… 아니, 엄벌 부탁드립니다.”

PC 인사이드라.

심리적 충격을 대충 수습한 현영숙은 손가락을 관자놀이에 대고 정은이 말한 생소한 단어를 입속에서 굴려보았다.

보통 그녀 나이대의 당 간부들이면 요즘 젊은 애들이 드나드는 인터넷 커뮤니티 이름 같은 거야 깜깜이지만…….

현영숙은 전직이 전직인 데다 온라인 여론이 현시대 정치에 미치는 영향력에 대해 결코 과소평가하지 않는 사람이었기에, 선전부에서 PC 인사이드라는 사이트의 성향에 대한 세간의 평가를 요약해 놓은 보고서 내용을 몇 초 만에 기억해 낼 수 있었다.

-허구한 날 사회 불만과 타인, 자신의 인생에 대한 혐오와 연예인 뒷소문이나 게시판에 배설하며 시간을 낭비하는 타 커뮤니티의 잉여 인생들과는 전혀 다르게!! 매일 사회정의와 소수자 존중 사회 이룩에 보탬이 될 생산적이고 유용한 사이버 토론이 이루어지며, 또 그러한 토론들이 실제 사회운동이 되어 여러 정치적 변화를 이끌어낸 적 있는 사이트.

-대중들에게서는 북남조선 인터넷의 몇 남지 않은 청정구역이자 지성과 인류애, 양심의 최후의 보루라는 이미지가 강하며 요즘처럼 날로 사이버 공간이 날로 혐오와 물질만능주의에 경도되어 가는 현 시국에 대한 깊은 우려 하에 행동하는, 실천적인 현자(賢者)들과 진보적인 엘리트 지식인들이 모여 형성한 실로 격조 높은 인터넷 커뮤니티.

-특히 ‘정치 사회 갤러리’, ‘국내 농구 갤러리’, ‘해외 야구 갤러리’ 등 리더 역할을 하는 갤러리들의 경우, 올드 회원이라는 사실이 오프라인에서도 하나의 자랑거리, 이성에 대한 인기 요인으로 받아들여질 만큼 조선의 젊은 오피니언 리더들이 다수 모여 있으므로, 차후 조선로동당 예비 청년 당원들의 주요 모집 후보군으로 고려해 볼 것.

즉 이 말은 극단적 쾌락주의, 이기주의, 냉소적 정치 혐오, 여성 혐오, 배타주의, 피해망상, 인종차별에 찌든 넷우익의 전형인 김정은의 사이버 정체성하고는 정반대라는 뜻이니, 누군지는 몰라도 정은이 아니꼬웠던 이 사이트 이용자 하나와 시비가 붙은 것이겠지.

그리고 그다음은 뭐 쉽게 예측할 수 있는 것처럼, 서로 댓글에 댓글에 댓글에 댓글을 달아가며 밤을 새워 비아냥거리고 조롱하고 말꼬리 잡고 인신공격하며 무의미한 시간 낭비를 계속하다, 결국 어느 한쪽이 고소를 들먹인 것일 것이다.

그 한쪽이 바로 지금 현영숙 눈앞에 있는 정은이고.

“하아…… 대체 그 동무들이 뭐라고 정은 동지를 조롱했길래 그렇게 동지가 화가 났는지 궁금하군요.”

그딴 시답잖은 걸 굳이 시간을 들여 알고 싶지는 않지만!

……이라는 말은 예의상 생략하며 현영숙이 묻자 ‘인생은 실전이다, X만이들아’ 욕구에 불타오르는 정은은 콧김까지 뿜으며 씩씩거리다가 이내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중심이자 조선로동당의 두뇌인 이 서기실에서 들어주기에는 참 수준 낮은 이야기지만 그 자초지종이란 다음과 같았다.

-金山 : www 바카춍들 www 키타조센 같은 인권 전무, 전체주의, 징병제, 군부독재, 언론 탄압, 구타 군대, 권력 세습, 반미, 미친 개인숭배, 정신론 가득인 똥통 우민화 국가와 통일이라니, 국가 붕괴도 곧일까?

-리키니스 : 아…… 그러니까 지금 너 일본제국 말하는 거지? 맞아? 말하는 거 들어보니까 그거밖에 없는데.

-金山 : …….

-갓드니스 : ㅋㅋㅋㅋ 웃었다 ㅋㅋㅋ

-일해라 핫산 : ㅋㅋㅋㅋ 그러고 보니 딱 그대로네. 아니, 북한은 마지막에 민주주의로 전환하기나 했지. 그럼 북한이 더 나은 거 아님?

-金山 : 네놈들, 방금 사이버 모욕죄의 구성요건인 공연성과 적시성을 모두 충족한 건 알까? 공화국 공안부 사이버 수사조에 통보했고 나 만나면 합의나 선처 같은 건 바라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이정훈 : 합의나 선처 같은 소리 하고 앉아 있네. IP 보니까 빼박 일본에서 접속하는 거구만. 바다 건너에서 고소는 얼어 죽을……. 혹시 아직도 일제 강점기인 줄 앎?

-金山 : 몰랐겠지만 사실 내 정체는 백두혈통, 키타조센에서 가장 숭배받는 신의 혈족이다! 내 숙부가 무려 총서기 김정환이야! 리얼에서 만나면 네놈들 모두 내 앞에 도게자(土下座 :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림)해야 할 거다!

-mamuun87 : 쟤 상태 점점 안 좋아지네. 뭐 하나만 물어보자. 뭔가 이상한 약을 먹어서 머리가 이상해진 거냐, 아니면 꼭 먹어야 되는 약을 걸러서 그런 거냐?

-22nd : 너 친구 없지.

-괄목상대 : 너네 어머니 우신다. 정신 차려, 너는 시X 아무것도 없는 병신이야!

“아직도 그놈들 조롱을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돕니다! 크윽, 빌어먹을 조센징들, 키타조센 같은 삼류 개발도상국에 사는 놈들이 감히 우리 니폰진을 저평가하다니, 있을 수 없는…….”

“……알았어요, 알았어. 가급적 원하는 대로 해주도록 노력해 볼 테니까 일단 입 좀 다물어봐요, 동무.”

현영숙이 더 들어주기 지친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으며 눈살을 찌푸리자 혼자 화나서 씨근덕대는 김정은은 그때서야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퍼뜩 정신을 차리고 겁먹은 표정으로 현영숙을 바라보았다.

아차, 방금 내가 무슨 말을 한 거지.

너무 흥분하는 바람에 방금 자신이 간접적으로 조선로동당의 현 당수 눈앞에서 공화국을 비하했다는 사실을 깜빡한 것이다.

아무리 자신이 인터넷상에서는 여포라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은 자신과 하나뿐인 어머니의 생계 수단을 꽉 틀어쥐고 있는 사람이다.

정철이 형이야 그렇다 쳐도, 자신이나 어머니는 눈앞의 이 여자가 주는 거나 다름없는 연금이 끊기면 남은 인생을 궁핍하게 살아야 할 거 아닌가.

혹시나 이 일을 가지고 뭔가 트집을 잡아서 유자녀 연금 취소라도 지시하면 어쩌나 김정은이 노심초사하며 그녀의 눈치를 살피던 그때, 현영숙도 나름대로 노심초사하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정은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하아, 방에 틀어박힌 지 15년째라 세상 물정을 거의 모른다고는 들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대체 그 난폭하면서도 교활하고 의뭉스러웠던 김정일이에게서 어떻게 저런 자식이 태어난 거야?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동시에 이해가 가는 측면도 없지 않아 있었다.

일본에서의 인생 행적에 대해 받은 보고와 지금 눈앞의 모습을 종합해보면, 김정은은 한마디로 몸만 큰 어린아이였다.

상처받고, 세상과 다른 사람에 겁먹은 채로 자기 방에 숨어버린, 자신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을 절대로 참지 못해서 떼쓰고 울부짖는 어린아이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바다를 건너 여기까지 찾아와 이런 어처구니없는 요청을 진지하게 부탁한 정신 구조도 이해가 갔다.

한 번도 넘어졌다 일어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어른 아이, 김정은에게는 그 댓글로 인해 받은 자신의 상처가 세상 그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일 테니까.

그리고, 그를 어른이 아닌 화나서 떼쓰는 어린아이라고 생각하니 이 난감한 상황에 대한 해결책도 금방 떠올랐다.

‘아이를 길러본 적은 없지만…… 그나저나 총서기 동지께서 공화국의 미래에 대해 고심하셨던 이 신성한 서기실에서 이런 잡무까지 해야 한다니.’

“자, 봐요. 정은 동지…… 우선 나와 당이 정은 동지가 요청한…… 이 동무들에 대한 엄벌을 내리는 건 쉬운 일이기는 해요. 법적으로도 문제 될 건 없고, 있다 해도 제가 중간에 조금만 손을 쓰면 어려울 거야 없지요.”

“역시!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오마니께서 항상 현 부장 동무는 너무나 자애롭고 너그러운, 아바디께서도 생전에 많이 칭찬하신 당의 충실한 일꾼이라 그러시더니, 그 말씀이 맞았군요!”

애들을 타이르는 목소리로 차분하게 그를 달래며 운을 떼는 현영숙의 말 중 앞부분만 들은 정은은 손뼉을 치며 당장 자리에서 뛰어 일어날 듯이 기뻐했다.

그리고 현영숙은 그런 정은에게 ‘지금 동무의 행동은 대통령 집무실에 찾아가 층간소음을 해결해 달라고 민원을 넣은 거나 다름없다’라는 일침을 놔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젊을 때나 지금이나 그녀는 인내심이 강한 편이었다.

그리고 아이들을 달래서 버릇을 들이는 과정은 남이나 북이나 전 세계 어디나 똑같은 법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주지 않을 거예요.”

“네에? 대체 어째서…….”

“생각해 보세요. 이 PC 인사이드라는 사이트는 남조선 동무들도 이용하는데, 그곳 인민들은 아직까지는 제가 직접 처벌할 수 있는 범위 밖에 있어요. 물론 현재는 북남 간 사법통합이 이루어지는 와중이라 평양에서 저지른 범죄행위에 대해 고소장이 접수되면 서울에서도 재판을 할 수 있기는 하지만, 시간이 상당히 오래 걸리겠죠. 그때까지 기다릴 자신이 있나요?”

“……그, 그렇지만…… 이, 이 건방진 놈들을 그대로 놔두는 건……..”

“만약 그렇다고 해도, 그 경우에는 정은 동지가 남조선 사법당국에 직접 출석해야 할 가능성이 높은데, 그러면 아무래도 세간의 시선이 많이 쏠리지 않겠어요? ‘김정일 전 로동당 비서의 아들, 남조선 네티즌 고소.’ 이런 식으로 기사도 날 것이고…….”

“그, 그건 아무래도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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