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애하는 수령동지 338화
정환의 냉정한 설명이 끝나자 강의실의 분위기는 조금씩 미묘하게 바뀌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삐딱한 태도로 불만에 가득 찬 표정이던 절반 이상의 학생들이 조금씩 고개를 갸웃거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들도 전공이 전공이고, 다니는 학교가 학교인 만큼 결코 현실정치에 문외한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학생들 중에는 하원의원 어머니나, 장관 아버지, 심지어 일국의 수반을 친인척으로 두고 있는 경우도 많았다.
어린 시절부터 주변 사람들이 선거 자금을 조달하고 정치적 우군을 만들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미소를 짓고, 연설을 하고, 손목이 부러져라 악수를 해대는 걸 가장 가까이에서 본 만큼 정치판이 이상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는 걸 그들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이곳은 현대판 금권정치의 본고장 미국 아닌가.
지금 이 강의실에 앉아 있는 학생들 중에는 졸업 후 워싱턴에 진출하기 위해 벌써부터 선거자금 후원회를 기웃거리거나, 반대로 돈이 당선인을 결정하는 미국의 정치 현실을 바꾸는 것을 일생의 목표로 삼은 이들도 다수였다.
그리고 지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정환에게 항의한 사만사 질리브랜드도 그런 신념을 가진 학생들 중 하나였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벌써 정환의 말을 납득했다는 뜻은 아니었다.
“좋아요, 교수님이 트럼프 지지자처럼 무지하고 끔찍한 인간들이 아니라는 걸 확인하게 되어서 기쁘네요.”
“고맙군.”
“하지만 그래도 미국의 유권자들이 대통령을 선택할 때 정치적 올바름을 우선순위에서 제하기 시작했다는 교수님 말씀은 여전히 납득이 안 가는데요. 정권이 민주당으로 넘어간 지 고작 4년이고, 전임 콘돌리자 라이스 대통령은 공화당…….”
사만사의 항변이 끝나기도 전에 정환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사만사 양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줬군. 미안하지만 정치적 올바름 의제는 더 이상 민주당의 독점소유가 아니게 된지 꽤 되었네. 당장 전임 콘돌리자 라이스 대통령부터 임기 내내 국외적으로는 강경했지만 국내적으로는 자신의 인종적, 정체성에 걸맞게 민주당과 크게 다르지 않지 않았나? 그 전임 맥케인도 공화당 내에서는 상대적으로 진보적이었던 인사고…… 내 말이 틀리다고 생각하나?”
“그, 그건 아니지만…….”
정환의 반박에 사만사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듯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실제로 콘돌리자 라이스 대통령은 사상 최초 흑인 여성 대통령이라는 자신의 타이틀에 걸맞게 임기 내내 국내적으로 진보적인 정책을 펼쳤다.
임기 중 끊임없이 일어난 아프리카 미국인에 대한 경찰의 폭력에도 강경하게 대응했으며 가끔은 공화당에서 애써 외면하려 했던 동성애자들의 목소리에도 우호적인 제스처를 취해서 당내 기독교 우파들을 식겁하게 만들고는 했다.
뭐, 정작 재선 도전 당시에는 그 점을 주로 내세우다가 자신보다 한술 더 뜬 워렌 현 대통령에게 패배하기는 했지만.
“말하자면 정치적 올바름이란 가치관은 지난 15년 동안 당에 상관없이 워싱턴을 지배해 왔다는 거지. 라이스에서 워렌으로, 공화당에서 민주당으로 정권이 바뀌기는 했지만 그건 시계가 역행한 게 아니라 오히려 초침 속도가 가속한 것이네. 이번에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되면 그게 역행이고. 미국 유권자들이 질릴 때도 됐지.”
“…….”
사만사는 분한 듯이 뭐라 더 말하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다른 사람이 문답에 끼어들었다.
아까부터 풀이 죽어 있다가 정환이 트럼프가 당선될 수도 있다는 발언을 하자 왠지 모르게 급격하게 생기를 되찾은 듯한 브라이언이었다.
“저기 교수님, 그래도 트럼프가 대통령이 될 거라는 교수님 예측에는…… 여전히 무리한 점이 좀 있어 보이는데요. 아, 물론 제가 트럼프가 당선되길 바란다는 뜻은 절대 아니고…… 그러니까 제 개인적인 성향을 떠나 현실적으로 난관이 많다는 뜻이에요.”
“그런가, 브라이언 군? 왜 그렇지?”
“그게…… 모든 여론 조사가 이미 말해주고 있지 않나요? 트럼프에게는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얻어야 할 선거인단 표, 정확히는 그 선거인단에게 자기 지지를 위임할 각 주 유권자들의 지지가 한참 부족해요. 히스패닉, 흑인, 여성, 장애인 등등 이 모든 계층들과 인종집단을 다 적으로 돌렸는데 이긴 후보는 미국 역사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브라이언의 말에 강의실 대다수의 학생들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은 누가 들어도, 이곳 학생이 아니라 미국 정치판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누가 들어도 동의할 만큼 21세기 이후 치러진 모든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통용된 ‘상식’이었으니까.
하지만 여전히 정환은 고개를 저었다.
“자네 말이 맞네. 하지만 트럼프가 그 모든 소수자에게 잃어버린 표 손실을 만회할 수 있을 정도로 압도적인 한 다수 집단에 적극적으로 구애하고 있다는 것을 여전히 간과하고 있군.”
“……??? 그 다수 집단이라는 게 어디인가요? 저는 대체…….”
“미국의 블루 컬러 노동자들과 소상공인들, 정확히는 그만 코로나로 인한 모든 제한과 봉쇄를 풀고 경제 회복에 집중하기를 바라는 사람들 전부지. 굳이 월스트리트 저널 같은 거 안 펼쳐봐도 지금 전 세계 경기가 금융위기 때만큼이나, 어쩌면 그 이상으로 후퇴하고 있다는 건 잘 알지 않나?”
실제로 정환의 말대로 바이러스 판데믹을 맞은 지금 전 세계는 거의 반쯤 일시 정지 상태라, 모든 물자와 인력의 이동이 정지했으며 당연히 경제도 제대로 돌아갈 리 없었다.
게다가 이 판데믹 – 경제위기는 빈자에게 더욱 가혹해서, IT 회사처럼 자택 근무가 가능한 첨단 산업의 고학력 종사자들은 이 난리통에도 직업을 유지했지만, 직접 산업현장에 출근해야 하는 육체노동자들이나 단순 서비스직들은 자기 의사와 무관한 강제 휴직, 그리고 해고를 마주해야만 했는데,
이러한 빈자, 특히 소수인종들의 경제위기가 조지 플로이드 항의 시위의 배경이 되었다고 분석하는 전문가들도 적지 않은 형편이었다.
그리고 트럼프는 이미 바이러스도 대충 잡았고, 이제 방역 같은 건 집어치우고 경제 정상화에나 집중하자는 입장이었는데 당장 일을 해야 먹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솔깃한 이야기였지만 사실상 거의 모든 의료 전문가들에게 ‘지금 방심하면 이제까지 해온 모든 것이 허사’라고 비판받는 상황이었다.
실제로 이 의견에는 다시 정환에 대한 전의를 다진 사만사는 물론 앤드루까지도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그건 정말로 말이 안 되는 거 같은데요, 교수님. 당장 폭스 뉴스를 빼고 거의 모든 언론에서 트럼프 말을 따랐다가는 미국이 망할 수도 있다고 매일 같이 내보내고 있는데…… 게다가 경제적 피해를 감수하고 과감한 결단을 내려 확산세를 이쯤에서 진정시킨 건 전적으로 워렌 대통령의 공이라는 게 사실이잖아요.”
“그거야 의사들, 보건 의학 전문가들 시선이지. 유감스럽지만 현재 유권자들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문외한들 입장에서 워렌 대통령은 지금 이 나라를 코로나 바이러스에서 구해낸 영웅이 아니라 별로 대단치도 않은 바이러스 핑계로 재선을 노리며 자신들 일자리를 죽이는 마귀할멈, 기회주의자야. 안 그래도 그 전부터 의료보험 의무가입 이야기를 해댔으니 더더욱 그렇게 보일 테고.”
“하지만…… 하지만 전문가들이 날마다 언론에 나와서 그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지금 브라질이나 러시아가 방역에 실패해서 하루에 확진자가 몇만 명씩 나오는지 비교해서 설명해 주는데 그래도…….”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자네들 지금 이 2020년 미국에서 가장 대중에게 신뢰받지 못하는, 공공의 적 집단 두 곳이 어디인지 아나? 첫 번째는 의사고, 두 번째는 CNN을 비롯한 진보성향 언론이야. 둘 다 탐욕스런 사기꾼 이미지지. 그런데 그 ‘CNN’에 나오는 ‘의사’라, 유권자들 중 몇 명이나 믿을지 나는 회의적인데.”
“그래도…… 트럼프의 다른 공약은 어떻고요? 멕시코 장벽이라니, 무슨 SF 영화도 아니고 상식적으로 그걸 실제로 실천할 거라고 유권자들 중에서 믿을 사람이…….”
“여러분. 내가 마지막으로 말하는데…….”
아무리 그래도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마지막까지 부인하려는 학생들에게 정환은 개강 이후 처음으로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주 잠시나마 지금 그는 조지타운 대학교 석좌교수가 아니라, 조선로동당 총서기, 최고지도자였던 시절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민주주의라는 시스템을 너무 과신하지 말게. 완전무결한 독재자가 존재할 수 없는 이상 누구 말마따나 그건 최선의 정치 체제가 아니라 차악의 체제니까.”
“맙소사, 교수님! 아무리 그래도 설마 지금 파시즘을 옹호하시려는 건 아니겠…….”
“아니, 현재의 미국인들이 민주주의의 장점을 발휘할 만한 상황이 아니라고 말하는 거야. 민주주의를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결국 잘 교육 받은 시민의 조직인데 지금 미국인들의 과반수는 적절한 교육에서 소외되어 있고 인종과 성별, 소득, 성적 지향 등으로 분열될 만큼 분열되어 있고, 겁에 잔뜩 질려 있기까지 하지. 트럼프 같은 싸구려 선동가가 민주주의의 태생적 약점을 이용하기에 딱 좋은 상황 아닌가?”
“……아니요! 제 생각에 김 교수님이 그런 결론을 내리신 건 교수님이 예전에…….”
‘독재자였으니까요’라고 말할 뻔했던 사만사는 자신이 실수를 했음을 깨닫고 급하게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흥분했다지만 결코 자기 교수에게 할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환은, 그리고 다른 학생들은 전부 사만사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듣지 않아도 진작에 눈치챈 듯했다.
“…….”
잠시 강의실 전체에 죽음 같은 침묵이 흘렀다.
10여 초쯤 지났을까, 그 어색한 침묵을 먼저 깨뜨린 건 이번에도 정환의 별거 아니라는 듯 가벼운 목소리였다.
“좋아, 사만사 양은 아무리 생각해도 내 예측과 그 근거를 납득할 수 없는 모양이군. 어차피 11월이 되면 자동으로 누가 틀리고 맞았는지 드러날 테지만…… 그냥 기다리면 너무 심심할 테니 우리 모두 내기라도 한번 해보면 어떻겠나?”
“……내기라고요, 교수님?”
내기라는 말에 얼어붙었던 강의실에는 금방 훈풍이 불었다.
내기라니, 설마…… 지금 이 상황에서 내기할 건 하나밖에 없기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설마 이렇게 답이 뻔한 문제를…….
“그래, 내기! 요즘처럼 우울한 시국에 이런 재미라도 있어야지. 만약 내 지금 예측이 틀렸다면, 그러니까 이번 선거에서 트럼프가 지고 워렌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한다면 이번 학기가 끝날 때까지 내 강의에서는 과제를 전혀 내주지 않겠네. 하지만 만약 자네들이 틀렸다면…….”
정환이 이렇게 운을 떼며 뒷말을 빼자 사만사는 기다렸다는 듯 눈을 빛내면서 자신에 찬 어조로 선언했다.
“만약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다면, 이번 강의에서 김 교수님이 여기 있는 우리들 전부에게 F를 주셔도 좋아요. 누가 봐도 답이 뻔한 것조차 예측을 못 하고, 이번 학기 내내 헛 배운 거나 다름없으니까 그래도 할 말이 없죠. 모두들 동의하지?
“그럼, 당연하지!”
“우리 모두 찬성이야, 사만사!”
누가 봐도 자신들이 이길 게 확실한 내기에 파격적인 보상까지 걸리자 강의실 곳곳에서 사만사의 의견에 동조하는 환호성과 휘파람, 박수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살벌했던 강의실은 어느새 맥주가 한 순배 돌아간 퇴근 시간 펍(Pub)처럼 떠들썩하게 달아올랐다.
그렇게 학생들 중 누구도, 손톱만큼도 ‘만에 하나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음을 확인한 정환은 못 이기는 척하며 사만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흐음, 여러분들이 그 정도로 확신한다면…… 좋아, 받아들이지.”
“Hell Yeah~! 김 교수님 최고십니다!”
“Boo Whooo!! 나중에 무르기 없기에요?”
“하하, 그럴 리가 있겠나? 하여간에 나도 두 달 후가 기대되는군. 아,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모두 마스크 챙겨 쓰는 거 까먹지 말고, 몸 건강히 다음 시간에 보도록 하지. 그럼 이만!”
그렇게 종강이 선언되자 학생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흥분된 얼굴로 서로서로 키득거리며 강의실을 나갔다.
두 달까지 기다릴 것도 없이 확실한 자신들의 승리에, 그리고 숙제가 많이 줄어든 이번 학기에 벌써부터 가슴이 부푼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중에서 ‘두 달만 기다리면 저 교수님의 콧대를 납작하게 해줄 수 있다!’라는 확신에 가득 차 자신에게 도발적인 눈빛을 던지는 사만사 등 학생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정환은 내심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래서 머리만 뜨거운 애송이들은 안 된다니까.
‘쯧쯧, 어리석고 불쌍한 학부생들 같으니라고. 그래 봐야 자기들이 먼저 제안한 건데 뭘 어쩌겠어. 특히 저기 사만사, 두 달 후면 학우들 사이에서 그야말로 역적이 될 텐데 그때 가서 자비롭게 구명용 튜브를 던져주고 조교쯤으로 삼아야겠군.’
그렇게 후일 조지 타운대 모든 입학생들에게 ‘외교학부 9월 대참사’로 구전되며 김정환 교수의 악명을 널리 알리게 된 사태가 이렇게 막을 열었다.
이번 학기를 여유롭게 보낼 생각에 의기양양한 저 애송이 학부생들은 곧 캠퍼스 밖 진짜 세상은 대학 졸업장 따위로는 헤쳐나가기 힘든 온갖 고난과 음모와 함정들(대학원생이라든지)이 꿈틀거리고 있는 복마전 같은 곳이라는 사실을 톡톡히 깨닫게 될 것이다.
사만사를 포함, 오늘 겁 없이 그에게 도전한 학생들이 두 달 후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을 ‘경애하는 우리의 최고 교수님이자 포토맥강 정기를 받아 태어난 워싱턴 절세 위인’으로 숭배할 생각을 하니 교수, 강의실을 나서는 정환의 입가에는 절로 음흉한 미소가 그려졌다.
정치판 30년 고인물이 아무것도 모르는 뉴비들을 죽음의 함정으로 끌어들인 음모가 시작된 그 날,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워싱턴의 가을 하늘은 오늘도 청명하기 그지없었다.
외전 –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정치와 리더십’ 코스 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