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애하는 수령동지 336화
외전,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정치와 리더십’ 코스
워싱턴의 젖줄, 포토맥 강을 면하고 있는 조지 타운 대학교의 가을은 아름답고 여유로웠다.
9월의 워싱턴에 내려온 가을은 시원하고 쾌적하며 맑아서 동부 미국의 날씨가 그 거주민들에게 호의적일 때 얼마나 매력적일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이 유서 깊은 도시의 유서 깊은 대학 캠퍼스를 현재 가장 열심히 즐기고 있는 것은 정작 그 학교의 학생들이 아니라, 대부분 관광객들이라는 점이 좀 안타깝기는 했지만.
하여간 낙엽이 내려앉은 아름다운 캠퍼스 전경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듯 이 건물 저 건물을 이동하며 학업에 종사 중인 학생들 일부의 얼굴에는 오늘따라 유달리 어떤 기대감과 열기가 섞인 묘한 흥분이 도사리고 있었는데, 그건 바로 지금부터 그들이 참석할 어떤 강의의 강사 때문이었다.
물론 지금 그들이 다니는 학교가 미국, 나아가 서방 세계의 정가와 외교가를 이끌 미래의 리더들이 가장 많이 배출되는 조지타운 대학교인 만큼 정계에서 방귀 좀 뀌는 전현직 높으신 분들이야 (과장 좀 보태서 발에 챌 만큼) 자주 보지만, 오늘 이 사람은 이 대학교 기준으로도 좀 많이 특별했다.
오늘 그들이 조지타운 대 메인 빌딩 강의실에서 청강할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정치와 리더십’을 강의할 석좌 교수(Distinguished Professor)의 전직은, 보좌관도 장관도 대통령도 아닌 무려 총서기장, 그러니까 공산권 국가의 독재자였으니까.
“흠, 학기가 시작된 지는 좀 지났지만 오늘은 유독 청강생이 많은 편이니 다시 한번 내 소개를 짧게 해야 할 듯하군. 만나서 반갑습니다, 여러분. 내 이름은 김정환, 그냥 김 교수님이나 아니면 현재 내가 동북아균형안보재단에서 맡고 있는 직책명, 체어맨(Chairman, 이사장) 김이라고 불러도 되고. 그리고 내 경력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 부분은 너무 유명해서 따로 설명 안 하셔도 될 것 같은데요, 김 교수님? 이런 일이 처음도 아니고 아마 지금 저 뒤에까지 서 있는 사람들은 다른 건 몰라도 교수님 유명세는 확실히 알고 들어왔을 거 같은데…….”
-하하하하하……!!!
학생들 중 한 명의 우스갯소리와 뒤이은 짧은 웃음소리가 강의실을 휩쓸자, 강단에 서 있던 교수, 전직 조선로동당 총서기장 김정환은 자신도 어깨를 으쓱했다.
확실히 정환이 고국을 떠나 미국에 도착해서 지금 이 자리에 임용된 지 몇 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의 유명세(혹은 악명)는 여전히 자자했다.
요즘에야 간신히 잠잠해졌지만 그가 이 대학에 첫 출근한 날에는 그와 셀카를 찍으려는 사람들과 ‘독재자는 당장 미국에서 꺼져라, 조지타운 대 인사부는 각성하라’라는 팻말을 든 시위대, 이렇게 상반된 두 무리가 그를 두고 쟁탈전 아닌 쟁탈전을 벌여대는 통에 나름 곤욕을 치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후자의 ‘독재자 꺼져’ 무리는 그의 경호원들이 나설 것도 없이 캠퍼스 경찰들이 조기 진압해서 요즘에는 잠잠하고, 전자의 ‘사인해 주실래요? 가능하면 셀카도’ 무리는…… 사실은 그것도 좀 부담스러워서 아직까지도 열심히 피해 다니고 있는 중이었다.
“고맙네, 앤드류 군. 그럼 그 부분은 넘어가고 바로 지난번에 이어서 강의를 진행하도록 하지. 지난번 시간에 우리는 지금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코로나바이러스가 각국의 정치적 리더십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서 토론했었지.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다들 마스크 챙겨서 쓴 게 참 마음에 드는군. 내 학생들이 최소한 바보는 아닌 수준의…… 주의력과 지성을 겸비하고 목숨 아까운 줄도 알고 있다는 게 증명되었으니 말이야.”
정환의 어투는 담담했고 이번에도 약간의 웃음소리가 일어났지만, 조금 전보다는 확연하게 작았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알다시피 올해 3월부터 전 세계에 확산되기 시작한 코로나바이러스, Covid–19, 내지는 우한 폐렴은 유례없는 전염률과 치명률을 보이며 지구 전체를 바꿔놓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곳, 미국은 안 그래도 전부터 많이 부실했던 의료보험 시스템과 인종 갈등, 거기에 바이러스의 위험성에 대한 일반적인 미국 시민들의 무지까지 겹쳐 타 대륙이나 국가보다 월등한 사망률을 기록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나마 그전부터 의료보험 개혁을 외쳐오던 현 대통령을 중심으로 방역 당국과 주 방위군까지 힘을 합쳐 판데믹의 제1파(First Wave)를 넘기고 사망자를 몇만 명 수준(?)에서 억제하는 데 성공했지만, 모든 전문가들은 아직 방심하기에는 이르다고 경고하고 있었다.
사실 그들이 지금 이렇게 강의실에 모여 앉아 면대면으로 강의를 주최할 수 있게 허가가 난 것조차도 기껏해야 얼마 전의 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조금 전보다 확연히 진지해진 강의실을 쓸어보며 정환은 슬슬 오늘 강의의 본론으로 들어갔다.
“자…… 그럼 지난번 강의 시간에 청강했던 학생들은 내가 이 바이러스가 현 미국이라는 국가가 가지고 있던 모든 문제점을 한 번에 터트려서 대중들에게 보여줬다고 평했던 것도 기억하겠군? 그때 내가 열거한 문제점들이 뭐였지?”
“인종 갈등과 거대 제약회사들의 로비가 왜곡시킨 보험제도, 파탄 난 공교육, 궁극적으로 빈부 격차라고 하셨죠.”
“……거기에 더해서 이 나라의 건국 초기부터 잠재되어 있던 지나친 개인주의적 전통으로 인한 국민들의 비협조도 있었지. 그게 바로 지금 전반적인 아시아 국가들이 비교적 판데믹을 잘 억제하고 있는 데 비해 미국이나 유럽 국가들이 더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유기도 하고 말이야.”
“……!!!”
정환의 이런 중얼거림에, 정확히는 ‘지나친 개인주의적 전통’을 언급하는 부분에서 몇몇 학생들, 그리고 청강을 하던 청중들 중 일부는 살짝 불편한 표정을 지었지만 뭐라 입을 열지는 못했다.
그리고 정환 역시도 눈치채지 못한 건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건지, 프로젝터 슬라이드를 넘겨 화면에 한 중년 여성이 오벌 오피스(Oval Office : 미국 대통령 집무실)에 앉아 있는 화면으로 넘어갔다.
금발에 은테 안경, 이지적인 풍모가 인상적인 그 노년 여성의 이름은 엘리자베스 워런(Elizabeth Warren), 현재 미합중국의 45대 대통령이었다.
“그나마 지금 백악관에 있는 사람이 민주당 워렌 대통령이라 다행이지. 당선 전에는 사회주의자, 당선과 판데믹 후에는 공화당을 중심으로 한 반대파로부터 파시스트, 공산주의자라는 터무니없는 비난 등등을 전부 감수하고 사회적 거리 두기, 전 국민 마스크 쓰기 캠페인을 적극적으로 벌였으니 말이야. 물론 그게 계속 지속될 수 있을지는 두 달 후에 결정되겠지만…….”
“……쳇, 터무니없다니요, 김 교수님. 그래도 현 워렌 대통령이 사회주의자라는 말은 맞는 거 아닌가요? 허구한 날 모든 악의 근원이 아마존이나 엑손 모빌 같은 대기업이고 전 국민은 의무적으로 의료보험에 가입해야 한다는 둥…….”
강의실 한구석에서 터져 나온 볼멘소리에 정환은 고개를 돌려 불만에 가득 찬 표정을 하고 있는 짧은 머리의 백인 남학생 한 명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어딘가 도전적인 눈빛으로 그런 자신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맞받는 그 남학생에 대한 신상정보를 정환은 머릿속에서 금방 떠올렸다.
브라이언 페리, 텍사스 오일 이사회 멤버이자 골수 공화당원인 아버지를 두고 있으며 도서관보다는 교내 농구장에 더 자주 출몰하는 타입.
진성 페미니스트, 민주당원인 여자친구 때문에 자기 성향을 열심히 숨기고는 있지만 정환에게 제출한 리포트에서 ‘성 소수자 탄압 국가에 인권 이슈로 압박을 가하는 일은 불필요한 내정 간섭이자 미국의 외교력 낭비’라는 평가를 내린 적 있음.
그밖에 교내 SNS에 BLM(Black Lives Matter :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 운동이 격화되던 중 시위대에게 약탈되어 불타는 상점 사진을 올렸다가 몇 분 만에 급하게 내린 적 있음 등등의 정보들이었다.
아마 정환이 조금 전 강의실을 좀더 자세히 둘러보았다면 브라이언이 미국의 코로나 판데믹 원인에 대해 설명하는 자신의 초반 강의에 불편한 표정을 지었던 몇 사람 중 하나였다는 사실도 알아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들을 전혀 티 내지 않고 정환은 차분한 어조로 다시 브라이언에게 물었다.
“아, 브라이언 군.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거 같은데 강의 주제 같은 건 신경 쓰지 말고 계속해 보게. 어서. 아시다시피 우리 수업의 본질은 토론이지. 그리고 애초에 정치학과 외교학에서 논쟁을 빼면 뭐가 남겠나?”
“뭐랄까…… 그냥 워렌 대통령의 정체가 너무 뻔하지 않느냐는 이야기예요. 그동안 의회에서 막아서 다행이지. 아마 거기서 조금만 더 나갔으면 지금쯤 실리콘 밸리도 국유화하자고 했을걸요? 거기에 자가격리라니, 파시스트나 할 법한 발상이에요.”
“흠, 좋아, 자, 이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 아, 거기, 사만사?”
“네! 방금 브라이언의 저 의견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해요! 파시스트라니, 참나. 그냥 솔직하게 ‘워렌은 사회주의자!’라고 처음 하고 싶었던 말 그대로 털어놓으시지그래, 브라이언? 너는 지난번 케이스 스터디 때도 그렇고, 탐욕스런 다국적 대기업들이 빈민들과 유색인종을 약탈하는 일을 조금이라도 방지하는 정책에는 그런 딱지를 붙여서 무조건 반대하잖아?”
사만사 질리브랜드, 캘리포니아 출신 장학생.
가디언, 버즈피드 애독자, 성적 우수, 뉴욕주 민주당 여성 상원의원의 재선 캠프에서 인턴으로 일하고 있으며 동성결혼 합법화를 축하하는 트윗을 여러 번 올린 적 있음.
자리에서 튕기듯 일어난 한 백인 여학생이 브라이언에게 정치적으로 민감한 단어를 동원해 가며 반박하자 강의실 분위기는 잠깐 얼어붙었다가도 교수인 정환이 별로 말릴 기색이 없어 보이자 이내 흥미롭게 지켜보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그리고 반격을 당한 브라이언은 진정하라는 듯 두 손을 휘휘 저으며 한 걸음 물러섰다.
“잠깐! 사만사. 나는 워렌이 파시스트라고 한 적 없어! 그냥…… 좀 심한 감기와 다를 바 없는 바이러스가 돌아다닌다고 연방정부에서 시민들의 이동의 자유를 제약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그런 정책에 워렌의 견해가 얼마나 영향을 끼쳤을지는 몰라도, 게다가 솔직히 그녀가 현 대통령인데 시민들의 헌법상 권리를 침해하는 정책에 제동을 걸지 않는다는 건…… 답이 뻔하잖아?”
“그런 식으로 따지면 초등학생들에게 쏴 제낄 자동소총을 들고 다니는 것도 헌법이 보장하는 자유고, 흑인과 동성애자, 무슬림을 비하하는 차별적 발언을 하는 것도 헌법이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겠네? 맙소사, 우리 나이대에도 너 같은 애들이 이렇게 많은데, 워렌이 공화당에게 발목 잡히지 않고 동성결혼을 합법화시킨 게 그야말로 기적이네.”
사만사와 브라이언 간의 논쟁에서 알 수 있듯이, 현 대통령 엘리자베스 워렌은 민주당 내에서도 알아주는, 아니, 미국 역사상 유례없는 진보 성향 대통령이었다.
월 스트리트를 비롯한 거대 투자은행에 대한 전면적이고 강력한 규제.
전 국민 공공 의료보험 강제 가입.
타국에 대한 선제 핵 공격을 헌법 차원에서 불가능하게 하는 법안 발의.
슈퍼팩으로 대표되는 현행 정치자금 제도 개혁에 소수인종에 대한 전폭적 지지 등…….
콘돌리자 라이스 퇴임 이후 사상 두 번째로, 연속해서 여성 대통령이 된 워렌의 정치 성향은 사회주의자(Socialist)라는 단어가 거의 반쯤(남부 공화당 주에서는 100%) 욕으로 통할 정도로 자유를 중요시하는 이 미국에서 당선된 것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진보적이었다.
아무리 민주당이라도 평상시라면 지나친 강경 진보 성향 때문에 경선에서 컷오프될 가능성이 컸을 워렌의 당선 이유에는 앨 고어 이후 무려 12년간 공화당 정권이 이어진 것에 대한 민주당 지지자들이 가진 일종의 ‘반동 심리’ 덕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였다.
두 명의 공화당 대통령들, 존 맥케인에 이어 콘돌리자 라이스라는 여성, 그것도 흑인 여성 대통령을 공화당에서 먼저 배출했다는 민주당의 일종의 트라우마가 폭발적 반동을 일으켜 이전 선거들보다 훨씬 더 강경 진보 성향을 가진 워렌을 대선에 내보내게 했던 것이다.
누구보다 진보적이고 양성평등, 인종 평등에 앞장서 왔다는 캐치 프레이즈는 그 전까지 민주당의 가장 큰 강점이었는데 그런 ‘세일즈 포인트’를 공화당에 몇 년 동안 빼앗겼으니 충격과 위기감이 안 들 수가 없었으니까.
그래서 찾은 게 바로 하버드 대 파산법 교수 출신의 엘리자베스 워렌이었다.
그야말로 전 민주당원이 합심하여 라이스의 재선을 저지하고 워렌을 당선시킨 4년 전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를 두고 미국 민주당의 ‘이념적 정통성 회복 매치’라고 평하는 사람까지 있었을 정도였다.
그리고 지난 4년간 워렌은 그녀의 발자취를 증명하듯 방금 전 사만사가 언급한 동성결혼 합법화 법안을 포함하여 수많은 진보성향 정책을 이끌었고, 지금 현재도 ‘현 코로나 사태도 의료보험 개혁안이 의회를 통과했다면 진작에 막았을 일’이라고 역설하며 국민들을 설득하고 있는 와중이었다.
또한 바로 올해 있을 자신의 재선을 판가름할 2020년 미국 대통령 선거를 위해서이기도 하고.
그리고 현재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워렌이 무난하게 현직 대통령 자리를 수성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었는데 왜냐하면 이 ‘현직 사회주의 대통령’ 워렌에 공화당이 대항마로 내세운 후보가 바로…….
“자, 둘 모두 잠시만 진정하고. 그럼 이쯤에서 브라이언과 사만사 뿐만 아니라 여기 여러분 모두에게 내가 중요한 질문을 하나만 던져야겠군. 이 강의의 주제하고도 연관이 밀접한 데다 현 시국에 이 조지 타운 대 교수로서 한 번쯤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질문이야.”
“하하!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흥미진진하기도 하고 말이죠, 김 교수님! 아마 미국 역사상 올해 같은 선거는 정말 보기 드물지 않을까요?”
“바로 그거지. 자 그럼 여러분. 지금부터 이 주제에 관하여 자유토론을 시작하지. 올해 2020년 11월에 있을 제58번째 대통령 선거에서, 과연 누가 당선될까? 현직 민주당 대통령 엘리자베스 워렌? 아니면 공화당의 돌연변이,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도널드 J 트럼프? 정답에 따라 여러분들의 학점이 갈릴 수도 있으니 신중하게 생각해서 대답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