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애하는 수령동지 334화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이런 민족당, 고구려의 후예(이하 후예당) 같은 소수 정당들의 약진은 2015년 이후 국제적으로 불어닥친 우파 정당들의 성장세의 일부로 해석하는 시선도 있다는 것이다.
그 시대쯤 더 이상 북한은 과거처럼 폐쇄된 돌연변이 공산주의 별종 국가가 아니었으며, 독재와 분단이라는 특이점을 제외하면 유가 상승과 달러 환율 등락에 울고 웃는 평범한(?) 아시아 신흥 선진국 중 하나였으므로 국외 정세 변화에 국내 정치가 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민족당이나 후예당과 같은 우파 정당, 정치인들의 성장세와 그 맥락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술한 국제적 요인과 북조선 내부의 국내적 요인을 복합적으로 고려해야만 한다는 것이 본 연구원의 견해이다.
그 첫 번째 요인이라고 할 수 있는 국제정세를 돌이켜 보면, 본 보고서는 잠시 원 주제에서 벗어나 2020년 현재까지도 내전이 지속 중인 이라크와 그 주요 동인인 이슬람 근본주의, 그리고 거기에 맞서는 이라크 세속의 수호자이자 철권을 휘두르고 있는 또 다른 독재자, 사담 후세인을 먼저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3. 1. 국외적 요인 : 지난 10년간의 국제정세 변화와 불안정성 증가가 미친 영향
중년의 한국 국민들이라면 불타는 쿠웨이트 유전을 배경으로 인공기를 단 장갑차와 성조기를 탄 장갑차가 나란히 달리는 충격적인 이미지로 뇌리에 남아 있을 걸프전에서의 비참한 패전도 잠시, 2015년대까지만 해도 사담 후세인은 누가 뭐래도 중동에서 가장 안정적인 권력 기반을 보유한 독재자였다.
경제 불안정과 고실업율로 촉발되어 중동 – 북아프리카 독재자들을 대거 몰락시킨 2010년대 초반 ‘아랍의 봄’ 당시에도 국영 석유공사와 재건한 공화국 수비대라는 경제 군사 양면의 권력을 틀어쥔 사담 후세인에게는 남의 일이었다.
관계는 안 좋아도 세습 독재자가 통치하는 중동 이슬람 국가라는 여러 점에서 비슷한 시리아에서 번진 혁명의 불길이 좀 번졌을 때도 또 한 차례의 유혈 진압과 대규모 체포, 암살만이 이어졌을 뿐, 40년 가까이 이어온 후세인의 이라크 왕국은 영원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2015년 북만주 내전에서 북조선의 승전, 좀 더 정확히는 중국의 패전과 정권 교체와 이어진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독립은 김정환보다 더 오래 집권한 이 독재자의 체제를 뒤흔들어 놓기 시작했다.
중국 공산당을 비롯한 여러 권위주의 정권들이 자국 내 소수민족들의 독립에 거의 히스테리컬할 정도로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한 소수민족의 독립을 허용하면 여타 다른 민족들이 그 선례를 배워 도미노식 독립운동, 그리고 분리주의 내전으로 이어지기 쉽기 때문이다.
그리고 2015년 그러한 가정이 사실로 나타난 예시, 조선족이라는 소수민족들이 사상 처음으로 중국에서 독립하고 역대 모든 중국 정권 가운데서도 가장 정통성이 결여되고 폭압적이었던 보시라이 정권의 퇴진.
그러니까 표면상 ‘소수민족이 거대하고 억압적인 정부에 맞서 자유 독립을 쟁취한 사례’는 SNS 등 발달한 매체를 타고 중동 전역에 다시 한번 불을 댕겼다.
연변 내전에서의 패전 직후, 신임 총서기 후진타오가 이끄는 신(新) 중국 지도부는 끝이 없을 것 같던 확장 정책을 자제하고 ‘덩샤오핑 시대의 도광양회 전략으로 회귀’로 요약될 수 있는 내치 우선 정책에 돌입했다.
제국의 삼면(三面) 중 동부라고 할 수 있는 연변에서는 이미 패퇴했으니, 남은 양면, 서부 아프간 – 위구르 지역과 남부 홍콩 사이에서 중국(과 공산당)의 생존과 이익에 필수적인 순으로 우선순위를 정한 후 그곳의 안정화에 현재의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는 게 판단에서였다.
그리고 모두가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시피 서부 아프간과 남부 홍콩 중 1순위는 우산시위가 흐지부지된 것도 잠시, 중국 공산당의 시한폭탄이 될 수 있는 홍콩이었다.
이 지역은 세계적인 금융중심지라는 자체적인 중요성, 아편전쟁이라는 굴욕적 역사 극복이라는 의미 외에도 남중국해의 패권과, 그리고 무엇보다 대만과의 양안 관계의 주도권을 쥐기 위해서라도 중국 공산당에게 있어서 반드시 틀어쥐고 있어야만 하는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인민해방군이 아프간에서 군정을 종식 시키고 친중 온건파로 구성된 민간 자치정부에 공을 넘기자마자 이를 ‘패배’의 신호로 받아들인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이 아프간은 물론, 저 멀리 이라크와 중동 전역에서 일어난 것이다.
-딱 중공 지도부의 예상과 두려움 대로, ‘이제 중국은, 공산당은 끝이다! 이미 공산당은 대다수 인민들로부터 지지를 잃었고 여기서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우리도 승전을, 나아가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라는 신호로 받아들인 거지요. 뭐 이런 소수 극단주의자들이 흔히 생각할 법한 클리셰이기는 합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자기들이 대안 세력이 될 수 있는 역량과 국제사회로부터의 지원을 받아낼 수 있을 때의 얘기지만…….
(정보원과의 인터뷰에서 발췌)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은 사우디부터 터키에, 북아프리카 시리아에 이르기까지 아랍 전역에 퍼져 있는데 이라크만 특별히 연변 내전과 연관되어 언급되는 이유는, 모두가 잘 알다시피 이라크의 독재자 사담 후세인과 중국은 밀월 관계였기 때문이다.
덩샤오핑 시절 걸프전에서의 외면도 잠시, 장쩌민이 집권하자마자 중국 공산당은 지난 전쟁에서의 일방적인 외면을 모조리 강제 은퇴당한 덩샤오핑의 책임으로 돌려버리고 사담 후세인과의 관계 개선을 시도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당시 한창 경제 성장기였던 중국은 석유 공급원을 확보하기 위해 중동에서 미국이 아닌 자국 편을 들어줄 국가가 필요했고, 사담 후세인도 개인적인 감정이야 어쨌건 민주주의라는 귀찮은 이념에 얽매이지 않고 실리를 추구하는 중국이라는 우방국의 존재가 나쁠 게 없었다.
이렇게 이라크와 중국, 두 독재 국가는 중동 패권과 반미(反美)라는 명분하에 하나로 뭉쳐 지난 20여 년간 국제적으로 연대해 왔고, 2001년 상하이 테러 당시에도 사담 후세인은 (아프간 이슬람 극단주의자 견제라는 목표도 겸해서) 중국을 적극적으로 비호한 몇 안 되는 국가 수반 중 하나였다.
물론 이런 행보가 아무리 종파와 민족이 다르다고 해도 이라크 국내의 반(反) 후세인 이슬람 근본주의자(주로 시아파)들에게 그다지 좋게 비추어졌을 리는 없고, 이런 정책은 그들로 하여금 후세인은 ‘알라를 배반하고 타국에 나라를 팔아먹는 독재자’로 선전하는 데 도움을 줬을 뿐이었다.
-중국의 개 사담 후세인은 꺼져라! 우리에게 쿠란을 돌려달라!
2015년까지만 해도 후세인은 이러한 국내의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을 (유혈진압과 암살로) 잘 억누르고 중동에서 터키와 함께 종교적 극단주의에 물들지 않은 세속국가라는 타이틀을 꾸준히 지켜나가는 듯했다.
그러나 모든 정치적 변화들이 그렇듯이 중국의 패전이라는 단일 변수만이 이런 수십 년 굳건하던 후세인 정권을 뿌리부터 뒤흔든 유일한 요인은 아니었다.
후세인 정권에 대한 대대적인 저항이 일어나기 시작한 2016년 북조선과 미국이 주도한 셰일 가스 혁명이 바로 그러한 복합적 요인들 중 하나였는데,
전 세계 유가가 급격하게 낮아지자 기존 중동 산유국들의 지위는 약화되었고, 이는 다른 중동 국가들과 비슷하게 석유 의존적인 경제였던 이라크의 경제 상황 역시 악화시켰다.
그리고 앙숙 이란과 같은 신정국가에서 탈피한 세속주의 국가화 정책의 가장 큰 재원이었던 국영 석유 사업의 수익성 악화와 중국의 패전은 상승작용을 일으켜, 그동안 억눌려왔던 민중과 시아파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불만을 폭발시켰다.
-일자리와 빵을 달라! 민중은 배고프다! 우리는 종교의 자유와 빵을 원한다!
-이교도의 법은 필요 없다! 서방의 문물도 필요 없다! 알라를 배반하고 타국에 붙은 타락한 배교자이자 독재자, 사담 후세인은 사형대로!
-중국 꺼져라! 미국 꺼져라! 이교도는 전부 지옥으로! 신은 오로지 한 분이다!
그리고 이렇게 일어난 반 독재세력은 이미 그 전 아랍의 봄 즈음부터 비슷한 처지에서 자국 독재자인 바샤르 알 아사드에게 대항하다가 이라크로 유입된 시리아 반군들 일부와 연계하여 이라크 전역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또한 안타깝게도, 현재로써는 이라크 내전 역시 앞선 시리아 내전과 비슷하게 극단주의자들과 독재자를 추종하는 정부군 간, 악(惡) 대 악의 최종결전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며, 이는 2017년도 초반부터 유럽과 남아시아로의 대규모 중동 난민 사태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중동 난민들 수용은 남의 일이라고만 생각했던 남북한 등 동아시아 국가들에까지 예멘과 시리아 등의 보트 피플이 도착하며 국제기구에서도 슬슬 남북한에도 난민수용이라는 국제적 고통 분담에 동조하라는 압력을 가할 기세다.
특히나 아직도 배타적 민족주의자가 주류인 북측에서는, 얼마 전 SNS상에서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조선 땅 더럽히는 중동산 인간 오물들 평양 출입 금지’ 팻말 등의 사례에서 볼 수 있다시피 적지 않은 히스테리 반응을 일으키고 있으며, 이는 민족당, 후예당과 같은 극우 정당의 약진에 사상적 밑거름이 되어주고 있다는 것에 전문가들의 분석이 일치한다.
3. 2. 국내적 요인 : 북조선의 경제 산업구조와 높아진 실업률, 그리고 이로 인한 사회 불만.
그렇다면 이번에는 중동의 정세 불안정과 난민 사태, 그리고 이로 인한 전세계적 극우 정당의 약진 현상의 국내적 요인을 찾아보자.
북한의 경제 구조와 그 발전상에 대해서는, 20세기가 다 끝나갈 무렵 남북대타협 당시 전 총서기 김정환이 1999년 당 중앙위 확대 회의에서 한, 지금은 여러 매체들을 통하여 남측 국민들에게도 유명해진 발언으로 요약될 수 있다.
-냉정하게 말해서 지금까지 우리 공화국은 석유 외에는 들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졸부 신세였지. 하지만 이번에 우리 공화국에 뿌리를 내릴 남측 기업들의 설비와 기술 등 생산자원을 흡수하고 소화한 후에는 사정이 전혀 달라질 테지.
-그러니 앞으로 20년 동안 우리 당의 목표는 단순하오. 군사적으로는 폴란드군을, 경제적으로는 캐나다와 대만의 혼합 구조를, 정치적으로는 싱가포르 모델을 따라가는 것이오.
이 유명한 김정환 총서기의 발언은 매체와 인용자마다 그 맥락은 약간씩 달라져도 대체로 그 인용목적은 대동소이한데, 주로 국가지도자가 자국의 상황을 냉정하게 파악하는 것, 그리고 그에 맞춰 현실적인 목표와 롤 모델을 설정하는 것이 국가 산업발전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두 요소인지를 깨우치는 용도로 인용된다.
일부 (현재로써는 남북을 가리지 않고 산재한) 김정환 찬양론자들은 세 번째 요소로 ‘그 지도자로 하여금 자신의 비전을 장기적으로 추진하게 해줄 수 있는 독재적 권력 확보의 중요성’까지 꼽는 경우가 있어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지만.
그와는 별개로 김정환이라는 지도자가 당시 자국의 상황과 미래 비전에 대해 대단히 정확히 냉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부인할 수 없게도 그 지도자가 확고한 권력 기반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은 북한 인민들과 (지금에서야 증명된 바에 따르면) 한국이라는 국가에도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보통 독재국가에서 석유라는 안정적인 외화벌이 수단을 정권 핵심부, 또는 독재 개인이 확보하게 될 경우, 8할의 확률로 독재자와 그 주변인들의 개인적인 돈지갑 또는 국민들의 일시적인 불만 잠 재우기용 포퓰리즘 정치의 수입원으로 쓰이는 경우가 대단히 많은데,
실제로 북남 대타협 전 당시 여러 정부 문서를 보면 장차 북한이 사우디아라비아처럼 -석유라는 안정적인 경제적 기반으로 김정환이라는 왕과 그를 숭배하는 로동당 간부들이 일종의 귀족층을 이루어 인민들의 불만을 그때마다 선심성 돈 뿌리기로 무마하는- 될 거라고 우려하는 대목이 많다.
물론 당시 김 총서기가 전혀 그런 상태에 만족할 생각이 없었다는 건 지금에서야 모두가 잘 알게 되었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위의 ‘폴란드+대만+캐나다+싱가포르 모델’ 발언 좀 더 이전에도 김 총서기가 다음과 같은 발언을 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까지 10년은 낙후된 국가 기반을 바로잡고 외교 노선을 전환하며 경제에 경쟁 체제를 도입함으로써 도약의 기반을 다지는 데 썼지. 이제 앞으로 10년은 다른 국가들을 따라잡는데, 그리고 그다음 10년은 다른 국가들을 앞서나가는 데 투자해야 하오.
실제로 아무리 막 산유국 반열에 들었다고 해도 시장경제가 도입된 지 고작 10년이 지났던 당시 북한의 경제력, 또는 국가적인 생산능력은 일본과 미국 같은 선진국들은 물론 아랫동네 이웃 한국보다도 심하게 뒤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외환위기 당시 투자와 생산이 과잉된 상태에 유동 자금은 말라버린 데다 언어와 민족적으로 동일한 한국은, 당시 북한으로서는 더 찾기 힘들래야 찾기 힘들 만큼 적합한 파트너였다.
유일한 장애물이라면 당시까지도 아직 지속되고 있었으며 김정환 총서기 역시도 자신의 정치적 필요성에 따라 좀 더 연장시킨 남북 간 긴장감이었는데, 이는 (현재 본인의 자서전 등으로 접할 수 있는) 박세황 씨의 활약과 남북 지도자 간 현명하고 과감한 결단으로 해소될 수 있었다.
물론 그 이후에도 여러 경제적 함정, 예를 들어 롤모델로 설정한 국가들과 북한 실정과의 차이점 등이야 많았다.
대표적으로 북한이 제조업 모델로 삼은 국가인 대만은 중소기업들이 국가 경제를 꾸려 나가며 자체적인 고부가가치 제조업과 브랜드 밸류가 빈약한 데다 결정적으로 외부 변수에 취약하다는 단점이 있지만, 북한에는 대만이 가지지 못한 것이 있었다.
대만보다 50% 정도 많은 내수시장 인구, 석유, 중러와의 중계무역이 가능한 입지, 같은 민족적 배경을 공유하는 인구 5,000만짜리 또 하나의 시장인 한국, 그리고 무엇보다 이러한 요소들을 잘 조합해서 극대화시킬 줄 아는 김정환이라는 지도자였다.
-우리 공화국 경제의 3대 축은 정유업을 중심으로 한 광업, 금융업, 그리고 전자기기 제조업이다.
그리고 이러한 산업 발전 전략은 현대에 들어 크게 주효해서, 북측은 현재 고작 30여 년 만에 산업 전반의 첨단화와 고부가가치 산업 유치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미 남측에서도 증명되었다시피 ‘첨단산업화’의 다른 표현은 ‘자동화’이며, 이는 곧 사업장에서의 인력 수요 감축, 즉 실업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