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애하는 수령동지-330화 (완결) (330/350)

경애하는 수령동지 330화

에필로그 - 경애하는 수령동지

2018년 10월의 가을 하늘은 맑았다.

평양 김일성 광장, 아니, 한때 김일성 광장으로 불렸던 ‘대동문 광장’에 운집한 수십만 국내외 군중들에게는 좋은 신호였다.

공화국 역사상 처음인 최고 영도자의 생전(生前) 퇴임식을 하늘도 도와주는 듯했으니까.

그날 대동문 광장은 아침부터 그야말로 발 디딜 틈 없이 사람이 운집해 있었다.

퇴임식은 조선중앙방송을 통하여 공화국 전국은 물론 남조선 각지에까지 생중계되었다.

하지만 경애하는 최고지도자의 마지막 고별사를 직접 두 눈으로 보기 위하여 한 달 전부터, 그리고 퇴임식 당일에도 시시각각 각지에서 사람들이 평양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그날 질서 유지를 위해 평양의 공안과 기동대는 물론, 인근 수도권에서도 공안 병력을 차출해야 했을 정도였으니 그야말로 규모에서도 유례가 없을 정도였다.

아직 정확한 추산이 나온 것은 아니지만 무려 백만 명이 넘을지도 모른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으니, 열병식도 로력동원도 아닌, 대중 공개 형식으로 참가도 자유, 불참도 자유인 퇴임식에 모인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인파였다.

한편, 정작 이 대규모 인구 이동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당사자, 오늘로 조선로동당 총서기직을 그만두는 정환은 퇴임식이 열리는 대동문 광장과 좀 거리가 있는 곳에 있었다.

“자, 그럼 어머니께 문안 인사도 드렸으니 이제 은퇴하러 가보실까.”

“정말 공화국을 떠날 생각이세요?”

“잠깐인데 뭘. 그리고 당신도 해외여행 자유롭게 가본 지 오래됐잖아? 이제 공항 내릴 때마다 카메라 플래시를 맞닥뜨리는 일상은 지겨우니까.”

“……하긴 그건 동감이에요.”

정환이 조금 전까지 절을 올리던 무덤, 이번 생에서의 그의 또 다른 어머니라고 할 수 있는 김명애의 묘소에서 일어나 그렇게 말하자 그의 동행인, 유혜림도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평상시와 달리 유혜림 말고도 동행인이 한 명 더 있었다.

“……그리고 여기 미국에서 박사 과정 밟아야 하시는 자랑스러운 손녀도 있는데, 어머니도 잠시 우리를 못 보시는 것쯤은 이해하시겠지.”

“아직 결정 안 했어요. 그리고 아버지는 왜 저를 끌어들이세요? 사실 저나 엄마 때문이 아니라…… 마지막까지…….”

오늘 또 한 사람의 동행인, 유혜인은 처음에는 입을 삐죽거리면서도 뒤로 갈수록 말을 흐렸다.

정환이 오늘 퇴임식 이후로 잠시 공화국을 떠나있겠다는 결정을 내린 배경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청천벽력, 이라고 표현하기에는 이미 정환이 꽤 전부터 측근들에게 은퇴 의사를 밝히기는 했지만 공화국에 남는 게 아니라 은퇴 직후 잠시 외국, 정확히는 미국으로 떠나겠다는 계획은 이미 전부터 이 사실을 알고 있던 간부들에게도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동지! 아무리 기래도 기건……!!! 동지를 추앙해 마지않는 인민들의 심경을 조금만 헤아려 주시디요!

-아니, 김 총리. 이제 이 공화국과 로동당은 전적으로 현영숙 총서기와 김 총리, 백 차수가 책임지고 끌어나가게 될 걸세. 내가 계속 여기 남아 있으면 내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현 부장이든 인민들이든 은연중에 내 심기를 살피게 될 거야, 나는 상왕(上王) 노릇 같은 걸 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네.

-기럼 대체 어디로……. 아무리 동지 본인께서 원하신다고 하셔도 총서기께서 완전히 야인(野人)으로 물러나시면 당원들과 인민들이 저희 정치국원들을 가만히 놔두지 않을 겁네다!

-그건 걱정 말게. 몇 해 전 마거릿 대처 소장 선생이 타계하신 후로 동북아균형안보재단 소장 자리가 비어 있지 않나? 나처럼 은퇴한 정치인에게 딱 어울리는 한직이지. 그리고 어차피 전직 국가수반 예우 차원으로 경호고 뭐고 다 따라붙을 거 아닌가? 암살 걱정 같은 건 안 해도 되네.

-그건 그렇지만……. 동지. 정말로…….

-아무튼 재단은 외무성 관할이니까 월급이나 좀 올려서 책정해 주면 좋겠군. 아! 물론 그것 말고도 한 가지 부업도 알아보고 있으니 내 말년이 심심하지는 않을 걸세. 하하.

‘이런 형태일 줄은 몰라도 약속은 지켰습니다. 어머니.’

정환은 그렇게 생각하며 ‘부업’, 미국 워싱턴 조지 타운 대학교에서 보내준 외교학 석좌교수 임용장을 묘소의 제대(臍帶)에 올려놓으며 마음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엄연한 전직 독재자를 자유 민주주의 리더 국가인 미합중국의 정치 리더를 키우는 명문 대학교의 석좌교수로 임용하는 일은 뒷말이 좀 많았기에 솔직히 아슬아슬하기는 했다.

하지만 이제는 정환과 마찬가지로 전직 국가수반이 된 콘돌리자 라이스가 워싱턴 정가에 음으로 양으로 힘을 써준 덕에.

그리고 무엇보다 정환 본인이 지난 3년간 이루어낸 변화로 그에 대한 인식이 바뀐 덕에.

어머니 김명애에게 생전 한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된 것이다.

액자에 넣은 임용장을 조심스레 올려놓고 정환은 애국렬사릉 저 멀리로 보이는 평양의 전경을 바라보았다.

이제 이것으로 이 땅에서 할 일은 거의 끝났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제외하면.

“그만 가자, 혜인아, 그리고 여보, 오늘 공항 갈 때 말이야…….”

“네?”

“한 번만 더 나를 위해서 당신이 운전해 줄 수 있겠어? 예전처럼. 오늘따라 그 날이 유독 그립군.”

“…….”

‘예전처럼’이라는 말은 그들의 인연이 실질적으로 시작된 그 날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어느 공화국의 봄날, 인민대학습당에서 ‘김정환’과 유혜림이 만나게 된 그 날.

정환과 마찬가지로 금세 그 날을 떠올린 유혜림은 잔주름이 진 입가에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하지만 오늘이 마지막이에요. 총서기 동지.”

“고마워. 그럼 이제 가지. 작별인사를 하러 가야 하니까.”

* * *

“저기! 저기 나오신다!”

“동지! 총서기 동지!”

“동지! 공화국 밖으로 떠나가신다는 게 사실입네까?”

“총서기 동지! 부디 공화국에 남아서 저희 인민들을 계속 이끌어주십시오!”

대동문 광장에 도착한 정환이 방탄 차량에서 내리자마자, 카메라 플래시와 함께 벌써부터 그를 붙잡지 못해 안달 난 인민들의 아우성이 광장을 메아리쳤다.

비록 경호국 일꾼들의 엄중한 스크럼을 넘지 못해서 아우성은 말 그대로 아우성에 그쳤지만, 정환은 그 목소리에서도 벌써 그가 없는 북조선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 아쉬움. 그리고…… 희미한 공포까지도 읽어낼 수 있었다.

‘내 업적이지…… 아니, 내 업(業)이라고 표현해야 할지도.’

그의 가슴속에 그들에 대한 가여움, 자신의 시간과 역할이 다했다는 아쉬움, 자신의 또 다른 자식과도 같은 이 공화국에 대한 고마움 등 여러 감정이 복잡하게 휘몰아쳤다.

하지만 그럼에도 정환의 시간은 끝이 났다.

이제 인민들은, 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경애하는 최고지도자라는 어른의 도움 없이 홀로 서고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아이와 같았다.

그러나 한 가지 위안인 것은 그런 인민들의 여정을 함께해 줄, 이미 한 번 그 길을 걸어본 동반자, 동포들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총서기 동지! 동지!”

“사랑하고 존경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인민 동지 여러분.”

“……허엇!!!”

“……읍!”

“……그리고 오늘 이 자리에 내방해 주신 수많은 내외빈 여러분. 저는 오늘로부터 30여 년 전 제 자신과. 그리고 지금은 이 자리에 없는 제 친구에게 한 가지 약속을 했습니다. 비록 그 약속의 상세한 내용은 밝힐 수 없지만, 드디어 그 약속을 지킬 때가 온 것 같습니다.”

드디어 정환이 단상에 서서 마이크에 대고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떼자 조금 전까지 소음으로 가득 찼던 대동문 광장이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이제 광장에는 이 공화국을 지난 30년간 이끌어온 총서기 동지의 마지막 고별사(告別辭)에만 귀를 기울이는 인민들의 숨죽인 신음만이 들렸다.

“……오늘부로 저는 지난 30년간 봉직해 왔던 조선로동당의 총서기 자리를 포함한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 후에는 그저 여러분들과 똑같은 한 명의 인민, 국민이 되어 지금 여러분의 자리에서 다음 세대들이 이 조국을 이끌어가는 것을 조용히 바라볼 것입니다.”

“…….”

“하지만 퇴임하기 전 노파심에서 마지막 몇 마디만 덧붙이고자 하니 부디 귀 기울여 들어주십시오. 그동안 이 공화국은 너무나 많은 파도를 넘어왔지만, 앞으로도 많은 파도를 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파도는 이제까지의 그것들보다 엄혹하면 엄혹했지 절대로 덜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차분하지만 단호한 정환의 경고에 광장은 이제 숨죽인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이곳, 평양의 대동문 광장은 물론 수백여 킬로미터 밖 서울에서도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정환이 말한 파도가 무엇일지 입을 다물고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물론, 그동안 성과도 있었습니다. 제가 역사적인 남침 인정 회견을 발표한 직후 결성된 북남제헌평의회는 3년에 걸친 협의 끝에 통일 헌법을 제정하였으며, 이 새로운 헌법 아래 북남은 각각 8년, 12년으로 이루어진 두 단계를 거쳐 최종적으로 현재의 1국가 2정부 시대를 넘어 하나의 민주주의 국가로 거듭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심각해져 가는 북남의 공통 과제인 실업, 양극화는 더 이상 인민들을 사상이나 이념이 아닌 부와 기회의 편중으로 갈라놓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북조선 로동자와 남조선 로동자가 정규직 일자리를 두고 경쟁해야 했다면, 이제는 우리의 새로운 국민이 된 지 3년이 지난 3백만 연변 동포들도 그러한 경쟁에 내몰리고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국내 각 지역 간의 문제는 아직 해소되지 못한 지난 60여 년간의 체제의 차이와 복합적으로 겹쳐 여전히 북남, 그리고 연변특별자치주 인민들 간 적지 않은 차이와 불신, 위화감을 심화시키고 있습니다. 이미 사이버 공간에서는 세 지역 인민들 간에 서로에 대한 혐오와 조롱이 날이 갈수록 위험수위를 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제가 당부드릴 말씀은 한 가지입니다. ……서로의 손을 잡아주십시오, 동무들. 그리고 국민 여러분. 그리고 저는 여러분들이 서로에게 충분한 관용과 이해심을 베풀어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을 믿습니다. 또한 여러분들의 잠재력을 믿습니다.”

“지난 3년간 북남이 공동의 헌법을 제정하고 교류를 늘려가며 거둔 다방면의 성과들은 이러한 제 믿음을 굳어지게 했습니다. 조선석유공사는 셰일가스 혁명을 통하여 명실상부한 세계 석유 메이저 중 하나로 거듭났습니다. 사리원의 남북 공동 입자물리학 연구소가 거둔 성과는 한민족 사상 최초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는 위업을 이루었습니다.”

”북남 경제 교류사의 산증인이라고 할 수 있는 근대, 쌍우 자동차는 자율주행 차량 업계를 선도하는 중입니다. 남의 성삼 전자와 북의 유니온은 전 세계에 인공지능, 5G 혁명을 일으켰고, 스페이스 X와의 협력 아래 전 지구적 규모의 위성 인터넷망, 우주 인터넷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작년 연변에서는 2017 세계 하계 유니버시아드가 성공적으로 개최되고 북남 공동 고구려-발해 유물 탐사 작업으로 역사 교과서가 새롭게 쓰이고 있습니다.”

“앞으로 이 민족이 다시 하나가 되어가는 길에 얼마나 더 많은 성과들을 거둘지 저는 벌써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을 수 없군요. 이제 북남은 다르지 않으며 하나의 깃발 아래 다시 재회하게 되었습니다. 양쪽 모두 어느 쪽보다 못하지 않으며 서로에게 배울 점이 있습니다.”

“북조선 인민들은 한국 국민들에게 독립된 인격체로서 자유로운 개개인에 대한 존중을, 한국 국민들은 북조선 인민들의 적법한 지도자와 집단에 대한 신뢰를 배워야만 합니다. 북남이 서로의 장점만을 내세우다가는 북조선은 개인의 존재가 말살된 전체주의에, 남조선은 모든 공동체적 가치관에 대한 극단적 냉소와 혐오라는 각각의 함정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제 첫 번째 당부입니다.”

여기까지 말한 정환은 잠시 숨을 고르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사위는 여전히 고요했고 수많은 눈들만이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시선들을 한 몸에 받으며 정환은 연설의 첫 번째 부분 만큼이나 역사에 길이 남을, 그리고 인구에 훨씬 더 회자되는 두 번째 부분을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두 번째로는, 제 개인과 30년에 걸친 제 집권 기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한때 이 공화국은 권위주의 국가였습니다. 인권을 무시하고 개인숭배에 몰두한 제 이복형과 아버지가 처음 만들었지만, 저 역시도 그 체제의 일부였으며 필요에 의해 상당히 긴 시간 동안 그 상태를 존속시켰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군요.”

“……허억……!!”

이번에는 광장 전체에 얕은 신음 소리가 한 바퀴 돌았다.

평양뿐만 아니라, 서울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독재자의 고백에 손으로 입을 막으며 경악했다.

하지만 정환은 차분했으며, 동시에 당당했다.

“변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분명히 타 국가들처럼 민주주의를 더 일찍 시작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그 당시 제가 이 국가를 바꾸기 위한 수단과 힘을 획득하고 유지하기 위하여 그 시기를 일부러 늦췄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저는 지금 다시 그 시대, 그 입장으로 돌아가도 똑같은 선택을 할 것입니다.”

“‘역사상 모든 독재자들은 자기만은 잘 대비해서 다른 독재자들의 전철을 밟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결국은 전철을 밟거나 역사의 가혹한 심판을 받는다’라는 유민중 전 대통령님의 명언이 있지요. 전 제가 다른 독재자들과 다른 길을 걸었던 인간이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한때나마 저도 다른 독재자들처럼 제가 다른 인간들보다 뛰어나며, 그렇게 저처럼 뛰어난 인간들을 선별해 권력을 물려주겠다는 자만심에 취한 거만하고 시건방진 애송이였으니까요.”

“하지만 그러한 미몽(迷夢)에서 깨어난 후에도 소위 역사라는 것의 심판을 받을 생각은 여전히 전혀 들지 않는군요. 역사는 지극히 불공평하고 잔혹하며, 약자에게 냉정합니다. 역사는 어떤 민족에게는 강대국이 되지 않는 게 더 힘든 천부적인 지리적 이점을 선물합니다. 그런데 어떤 민족에게는 자연의 도전, 고난과 외침, 가끔은 이유 없는 분단 등 그야말로 재난만이 가득한 가혹한 역사를 던져주죠. 그런데 대체 왜 그런 불공정한 재판관에게 제 판결을 맡겨야만 합니까?”

“……제가 만약 심판을 받아야 한다면, 그것은 오로지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들에 의해서여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여러분, 삼천육백만 명의 구(舊)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들에게 말입니다. 인민 여러분. 저는 이 자리에서 여러분들에게 사과하겠습니다. 3년 전 한국 국민들에게 남침에 대하여 사과했듯이, 이번에는 여러분들에게 머리를 숙이겠습니다. 사죄드립니다.”

그렇게 말하며 정환은 단상에서 잠시 나와 광장에 운집한 수십만 명의 인민들에게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총서기가 인민들에게 허리를 숙이고 있는 10여 초간 전 공화국은, 아니, 전 한반도의 전파가 닿는 모든 지역은 문자 그대로 멈춰 섰다.

이내 정환은 다시 허리를 펴고 말을 이었다.

“저는 오늘부로 이 공화국을 잠시 떠납니다만, 차후 인민에 의해 선출된 정부가 제 죄를 묻기 위해 저를 소환한다면, 언제라도 응할 것입니다. 앞으로 이 공화국은 시간이 갈수록 그 누구도 자유로운 인민의 합의에 의하여 제정된 법 위에 있지 못하는 나라, 이름만 인민 공화국이 아닌 진정으로 인민(人民, People)을 위한 공화국에 가까워져 갈 테니까 말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나라의 출현을 빨리 앞당길 수도, 더 늦출 수도 있는 주체는 제 뒤를 이을 새 총서기 현영숙 동지도, 조선로동당도, 저도 아닌 여러분 자신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그 길을 한걸음 한 걸음 나아갈수록, 이미 먼저 그 길을 걸은 한국 ‘인민’들과의 간격도 한층 더 빠르게 메워져 갈 것입니다.”

“더 이상 이 나라에는 주석도, 장군님도, 최고 지도자도 없을 것입니다. 백두혈통이니 반동분자니 하는 말도 사라질 것입니다. 오로지 여러분, 인민의 손으로 정한 대리인들, 당직자와 총서기만이 법규에 따라 그 정해진 직무를 수행할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더 시간이 지나면, 몽상가들과 기회주의자들의 농간으로 ‘인민’이라는 단어에 덧씌워진 부정적인 인상이 북과 남, 그리고 전 세계에서 벗겨지고 오로지 민중을 뜻하는 처음의 그 순수한 뜻으로만 남아 쓰이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느 쪽이건 이제 제가 해야 할 말은 다 한 듯싶군요. 이 땅의 주인 된 자유로운 인민, 더 이상 북도 남도 조선족도 아닌 오로지 통일된 조국의 국민이자 인민인 한반도와 북만주의 구천만 동포 여러분. 그럼 저, ‘인민 김정환’은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그렇게 고별사를 끝낸 후 정환은 홀가분한 표정으로 단상에서 내려왔다.

하지만 여전히 광장의 누구도 감히 입을 열지 못하고 죽음 같은 침묵만이 흐르는 가운데, 정환은 눈물이 살짝 맺힌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유혜림의 포옹을 받고 준비된 차량으로 향했다.

엄숙한 표정의 운전기사가 이미 시동을 걸어놓은 차는 공항으로 직행이 예정되어 있었지만, 정환이 그에게 괜찮으니 가보라고 말하려던 찰나, 갑자기 혜인이 운전석 쪽으로 저벅저벅 걸어가더니 얼떨떨해하는 운전기사를 부드럽게 내보낸 후 자신이 운전석에 앉아버렸다.

그 광경을 보며 정환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뭐냐, 딸아. 벌써 반항기냐?”

“……반항기는 한참 전에 지나갔고요. 이제는 더 이상 총서기도 아닌데 어머니를 운전기사로 부려먹으려는 게 괘씸해서, 한 번쯤은 제가 운전해 드리려고요.”

“……정말이냐?”

“그럼 아버지 은퇴하는 날 거짓말을 하는 딸이 있을까 봐요? 그동안 헌법 만들고 조국 통일하신다고 뛰어다니시느라 모르셨겠지만 그새 공화국 운전면허도 땄으니 걱정 마세요. 뭐 하세요? 안 타시고.”

“허……!!”

정환은 잠시 그렇게 멍하게 서 있다가 이내 씨익 미소를 지으며 차 문을 열었다.

“그래, 딸이 참으로 간만에 효도해 준다는데 받아야겠지. 공항 가는 길은 알지?”

“흥, 그럼요. 아버지 덕분에 어릴 때부터 비행기는 이골이 나게 타서요.”

정환과 유혜림은 뒷좌석에 앉자 전진기어가 넣어졌다.

그리고 차 문이 닫히고 바퀴가 구르며 차가 광장을 막 빠져나가려는 순간, 어떤 폭발 같은 것이 일어났다.

잠시 후에야 차에 탄 사람들은, 정환은 그 폭발이 진짜 폭발이 아니라 폭음, 거의 폭음처럼 들리는 박수와 환호성임을 깨달았다.

짝짝짝짝짝……!!!!!!

“고맙습니다! 총서기 동지! 감사합네다!”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네다! 자유를 주셔서 감사합네다!”

“안녕히 가십시오! 총서기 동지! 잊지 않갔습네다! 수령이시여!”

“잘 가시오! 김 총서기! 당신은 한국 국민들에게도 당신의 아비나 할애비 따위와는 차원이 다른 지도자였소!”

“말씀하신 것을 절대 잊지 않갔습네다! 부디 다시 돌아오셔서 교시…… 아니지, 당부의 결과를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 주십시오! 총서기 동지! 최고 지도자 동지!”

차가 광장을 벗어나 대로로 나아간 후에도, 대로를 지나 평양 외곽에 접어든 후에도 우레와 같은 박수와 환호성은 멈출 줄을 몰랐다.

TV로, 인터넷으로, 지능형 손전화로, 퇴임식 생방송 중계를 보던 전 공민들이 평양시고 어디고 다 정환이 탄 차량이 지나가는 대로변으로 뛰쳐나와 환송에 참여한 것이다.

그리고 어느 집이나, 빌딩이나, 길거리나, 모든 인민들은 한 칭호를 절대 빼먹지 않았다.

자기 손으로 버린 후에나 진정으로 소유하게 된 그 칭호.

““경애하는 우리의 수령동지!!””

그들이 지나가는 곳마다 모든 차량과 교통수단이 물러섰고 지나가는 길거리의 모든 문과 창문과 차창으로 몸을 내민 인민들이 눈물을 쏟으며 그들의 전(前) 총서기에게 박수를 보내고 예우를 표하고 있었다.

양쪽 차창 어디를 내다보나 그에게 손을 흔들고 환호하는 인민들로 가득 차지 않은 곳이 없었다.

마치 기쁨에 찬 인파로 이루어진 홍해를 가르며 나아가는 듯한 광경.

역사가 아닌, 인민의 손으로 자신을 심판해 달라는 정환의 연설에 대한 인민들의 대답이었다.

“……나 참. 이제 수령 같은 거 없다니까 그러네.”

“제 생애 본 가장 멋진 광경이에요……. 여보…….”

“……그래, 그건 나도 동의해.”

정환은 그렇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저 조용히 두 손으로 아내의 어깨를 감쌌다.

그리고 곧 그들이 탄 차는 시원한 평양의 하늘 저 멀리 지평선으로 사라져 모습을 감췄다.

* * *

총서기의 고별사가 끝난 후에도 그 날 대동문 광장에 운집한 백만 명이 넘는 남북의 인민들은 한동안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총서기 만세, 통일 조국 만세, 인민, 민주주의 만세를 외치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해산했다.

겉으로 보기에 그들의 모습은 발그레해진 뺨과 흐트러진 머리만 제외하면 바뀐 것이 아무것도 없는 듯 보였다.

그러나 그 광장에 들어서기 전, 정확히는 정환의 연설을 듣기 전과 비교해서 그들은 어딘가 분명히 달라져 있었다.

이 공화국에 항상 변화를 가져온 그들의 총서기는, 정환은 마지막까지 그들을 바꿔놓고 갔기 때문이었다.

비록 지금 당장은 그 변화를 실감하지는 못할지라도, 광장을 나서는 수십만의 인민들은 그 광장에 들어서기 전과 전혀 다른 시선으로 인민 자신들과 자신들의 공화국을,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미 민주주의와 그 한계를 접하고 조금씩 피로와 냉소에 찌들어 가던 한국인들까지도.

파란 가을 하늘 아래 새로운 나라, 새로운 ‘인민’들의 새로운 발걸음이 조금씩, 점점이 퍼져 나가고 있었다.

경애하는 수령동지 완(完)

#작가 후기

네, 이것으로 ‘경애하는 수령동지’ 본편은 완결이 되었습니다.

참 새로고침 버튼 눌러가며 선호작품 수 늘어가는 광경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게 불과 어제 같은데, 어느새 독자분들의 과분한 사랑을 받아 무려 330화 본편 완결이라는 혁명과업을 이룩하게 되었습네다, 아니, 되었습니다.

시원하기도, 섭섭하기도, 후련하기도 하지만 역시 아쉬운 마음이 가장 큽니다.

메인 플롯에서 벗어날까 봐 못했던 이야기들, 더 잘 풀어나갈 수 있었던 이야기들, 줄였어야 했던 이야기들, 늘였어야 했던 이야기들,

살리지 못했던 캐릭터들, 죽였어야 했던 캐릭터들 등등…….

많고 많지만 몇 가지만 예를 들어보자면 현영숙은 초반부터 주인공과의 연애 노선이 어느 정도 있었던 캐릭터였습니다.

원래 북한 내에서 만연했던 남성 우월주의와 김씨 일가의 기쁨조 성범죄, 북한판 채홍사, 그리고 그런 소재들을 통해 최종적으로 조선로동당 체제의 막장성과 그 부역자 장성택의 쓰레기성을 부각할 에피소드가 준비되어 있었는데…….

왜 이렇게 불필요한 여성 외모 묘사가 많이 나오느냐고 불쾌해하신 분들도 계셨고 수위도 아슬아슬한 데다 무엇보다 메인 플롯에서 너무 벗어난다고 느껴져서 제외시켜 버렸습니다.

게다가 극초반부터 따라오신 독자분들(몇 분이나 남아 있으시려나…….)은 아시겠지만 김정환이라는 인간도 원래 지금과 많이 다른 캐릭터였고 그런 캐릭터가 바뀌어 가는 갈등을 통해 유혜림이라는 반려자 겸 대립자의 존재도 부각시킬 예정이었는데…….

정환의 캐릭터성 자체가 수정되면서 함께 유혜림의 분량도 많이 잘렸습니다. 흑흑.

그리고 무엇보다 리용환이.

참 지금도 아쉬운 게 평범한 아이에 불과했던 존재가 북한판 자낳괴의 탄생과 성장, 그리고 그걸 통해 급속 경제 성장이 가져온 이면을 보여주려고 100화 근방부터 배치시켜서 키워(?)놨는데 특정 인물의 배신에 좀 더 스포트라이트를 주려고 가슴 아프게 손절했습니다.

그 밖에도 유니온을 대표로 하는 토종 북조선 기업들의 약진, 그걸 통한 자본가들의 성장과 그렇게 자라난 신흥 자본권력과 로동당이라는 정치권력과의 대립 등등…….

아쉽지만 결국 글쟁이로서 제 역량과 준비가 안 따라준 탓이니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하든 다 변명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그럼 여기서 작가 후기를 쓰게 된 주요 이유 중의 하나로 들어가자면, 이제 후일담과 외전을 집필하기에 앞서, 여기까지 저를 응원해 주신 독자 여러분들이 듣고 싶은 ‘경애하는 수령동지’의 뒷이야기를 받아보고자 합니다.

이미 외전 일부의 주제와 경애하는 수령동지와 정환이 이야기의 진짜 마지막이 될 후일담 상당 부분은 이미 써놨지만, 그 외의 아직 많은 부분이 정해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런 와중에 외전을 길게 써달라는 요청을 받아 제 능력과 아이디어가 닿는 대로 독자 여러분들이 더 듣고 싶은 경애하는 수령동지 세계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이 후기나 본편 마지막 편의 댓글로, 제 개인 쪽지로 무엇이든 좋으니 뒷이야기를 듣고 싶은 캐릭터와 주제를 보내주시면 최대한 재밌게 이야기를 전개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비록 어디까지나 제 상상 속의 소설이었지만, 이 소설에서 일어난 일들의 십 분의 일이나마 현실의 남북관계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이만 작가 후기 가장 처음에 드리려 했던 인사를 드리며 물러가겠습니다.

그동안 저와 경애하는 수령동지를 응원해 주셔서 정말로, 정말로,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곧 외전으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괄목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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