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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하는 수령동지-328화 (328/350)

경애하는 수령동지 328화

물론,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라는 고사처럼, 이렇게 아무리 정환과 북조선 측에서 먼저 신호를 보낸다고 해도 한국 정부 측에서 그 신호에 응답해 주지 않으면 그저 응답 없는 부름일 뿐이었다.

당장 사과 회견 직후 조선로동당 내에서도 ‘그 콧대 높은 남조선 놈들이 이런 거 한다고 과연 얼마나 고마워하겠느냐, 중앙위 위원들이 총서기 동지를 잘못 보필했다’라는 불평이 나오고 있는 와중인 상황.

그 불평이라는 것은 사실 정환의 사과 회견에 대해 직접 불만을 표할 수는 없으니 ‘왜 총서기 동지께서는 사과회견이니 뭐니 긁어 부스럼을 만드느냐’라는 말을 돌리고 돌려서 말한 것이었지만.

그러나 그런 일부 세력들의 걱정 아닌 걱정(?)은 기우라는 것이 얼마 지나지 않아 밝혀졌다.

얼마 전의 청천벽력 같은 북조선 김정환 총서기의 역사적 사과 발표와 담화에 호응하듯, 한국의 전 대통령이 일종의 정치적 답사(答辭)를 보냈던 것이다.

그 답사가 무엇이냐 하면 바로 헌법을 고치는 것, 즉 10차 개헌의 발의였다.

-대한민국 헌법 제3조 :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

제7공화국의 막을 열어젖힌 2015년 10차 개헌에서 한반도 전체에 대한 대한민국 정부의 지배를 천명하는 해당 조항은, 말하자면 그때까지 남아 있었던 한국 안보 보수들의 마지막 집착이자, 일종의 흔적기관이었다.

사실상 남북한 국민들이 상시 서로의 영토를 거의 자유롭게 왕래하고 서울역 역사에서 백두산 직통 고속열차 티켓이, 평양에서는 경주 수학여행 상품이 판매되며 케이블 방송에서는 남북 합동 아이돌 서바이벌 프로그램, ‘PRODUCE 38’ 같은 게 방영 예정된 현시대에도 그 조항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 조항은 가끔 남북 간 정치경제적 갈등이 생겼을 때 혹은 ‘총서기 동지가 다 해주시는 데 선거 같은 게 무슨 필요냐’ 같은 ‘미개한’ 북조선 인민의 인터뷰가 한국 인터넷상에서 씹힐 때 단골로 언급되는 조항이자, 아직까지 양국 간에 정식 대사관이 존재하지 않는 이유이며 한국 소수 극렬 반북조선 인사들의 주된 레퍼토리였다.

하지만 이제는 거의 대부분의 남북한 인민들이 그 존재를 잊어버리고 법학자들까지도 사실상 사문이라고 단정해 버린 문제의 대한민국 헌법 제3조는, 10차 개헌에서 다음과 같이 바뀌게 되었다.

-대한민국 헌법 제3조 : 대한민국의 영토는 대한민국 국민이 선출한 정부가 행정력을 미치는 범위로 정한다.

역대 모든 한국 대통령들과 여당에 어지간히 지지율이 높지 않은 이상 개헌은 그 언급만으로도 항상 모험이었고, 진보 보수 양측의 고른 지지를 받아 취임한 집권 2년 차 전 대통령에게도 그것은 매한가지였지만 이번 개헌은 의외로 매끄럽게 진행되었는데, 그 이유는 이번에도 정환과 북조선에 존재했다.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다고, 종전 후 시간이 지나가면서 전쟁 기간 중 연변에 침투해 현지 상황을 실시간 중계한 종군 외신들을 시작으로 연변 내전에서의 한국군 참전 사실이 점차 수면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전승(戰勝)의 1차 소유권자라고 할 수 있는 북한 측에서도 그 사실을 ‘민간기업소 출신으로 참전한 일꾼들 중 남조선 출신이 있었던 것은 사실’ 하는 식으로 직접 부인하지 않으면서 한국군의 연변 내전 참전은 기정사실화되었다.

비록 대한민국 정부 입장에서는 공식적으로 참전을 부인했고, 또 앞으로도 부인할 확률이 높지만 연변내전, 북만주 전쟁에서의 북한의 승리와 그 승리에 남측 파병군이 크게 기여했음이 여러 경로로 알려지면서 사실상 남북한은 공동승전을 거둔 셈이 되었다.

’승전 대통령’이라는 타이틀은, 특히나 군인 출신 대통령이라면 더더욱 지지율과 국정 수행 동력에 도움이 되는 법이다.

그리고 이러한 행정부 차원의 이해를 떠나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와 대북(對北) 국민감정 차원에서도 이 승전은 얼마 전 정환의 사과 회견과 함께 큰 영향을 주었다.

예나 지금이나 서로 사이가 나쁜 두 개인 내지는 세력을 화해시키는 가장 빠른 방법은 바로 ‘공통의 적’을 만들고 한 깃발 아래서 싸우게 만드는 것이니까.

그리고 그렇게 함께 싸워서 패전했다면 또 몰라도, 승전했다면 하루아침에 ‘철천지원수’가 ‘그래도 참고 봐줄 만한 놈들’로, ‘과거에 많이 껄끄러웠던 나라’가 ‘미래를 함께 설계해 나갈 수 있는 존재’로 바뀌는 것도 순식간이다.

-재적 299명, 찬성 221표, 반대 47표, 기권 31표로 제10차 개헌안이 통과되었음을 알리는 바입니다!

이러한 조건 아래서 한반도 북부에 대한 대한민국 정부의 영유권을 반쯤 포기하는 제10차 개헌안은 의외로 매끄럽게 국민투표를 거쳐 국회에서 통과되고, 제7공화국은 문을 열게 되었다.

너무나 깔끔하게 통과되어서 ‘만에 하나라도 통과되지 못하면 전 대통령의 정치적 자살’ 운운하던 한국 측 소수 반대 세력, 마찬가지로 ‘남조선 괴뢰 정부가 공화국 영토에 대한 침략 야욕을 포기할 리 없다’ 운운하던 북조선 측 소수 반대 세력 양쪽 모두가 한 방에 입을 다물 정도였다.

개헌 후 이제까지 양국 간의 대표부 역할을 하던 비자발급소, ‘남북(북남)사무교류협회’가 대사관으로 바뀌는 등 적지 않은 변화가 2015년이 반도 넘어가기도 전에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렇게 연이은 거대한 변화들이, 너무나 짧은 시간 안에 이루어지자 이제는 슬슬 남북 양쪽에서, 정확히는 남쪽에서는 국민과 언론들 모두가, 북쪽에서는 인민들을 중심으로 ‘그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김정환 취임 초기부터 나왔으나 그 직후 좌절되었고, 북남대타협 당시와 남북 공동 월드컵 등 역사의 고비고비마다 항상 희미한 기대감과 함께 등장했으나 그 등장만큼이나 빠르게 배신당하고는 했던 그 말.

-설마 통일이 우리 눈앞에 온 건가?

하지만 아직은 북남 정부 양쪽 어디에서도 공식적으로 통일 가능성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았다.

그것은 전 대통령과 김정환이라는 남북 양측의 지도자 간에 ‘급하게 삼키면 체한다’라는 무언의 공감대가 형성되어서였을 수도, 아니면 사실상 남북 어느 쪽도 흡수통일이 불가능해진 시대에서 합의통일이라는 인류 역사상 거의 전대미문의 길을 가야 한다는 낯섦 때문일 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면 그저 북남 간 대립과 불신의 세월이 파격적인 제스처 몇 번으로 메워지기에는 너무 길어서였을 수도 있다고 아직까지도 후세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박이삼, 유민중, 이현창, 노윤현 정권에 이르기까지 각자 방식은 달라도 그토록 오매불망 바라왔던 통일이 막상 눈앞에 왔음에도 이 ‘머뭇거림의 시기’ 당시 한국 정부와 국민들의 심리를 가장 잘 설명하는 이론은 아마도 다음과 같을 것이다.

-2015년 현재 한국은 의심할 여지 없는 민주주의 국가다. 그런데 통일되고 나면 독재자 김정환이는 대체 어떻게 되는 건가?

-그 독재자 김정환이가 곧 퇴임할지도 모른다는 징조는 최근에 있었지만, 막상 그 김정환이가 내려오면 그 후임도 통일을 바란다는 보장이 어디에 있나?

한마디로 한국 입장에서는 역사상 유례없는 딜레마 두 개가 겹친 꼴이었다.

보통은 체제 안정과 자신의 권력 유지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독재자가 이례적으로 통일이라는 거대한 변화를 먼저 바라고 있는 듯한데, 막상 그 통일이 만들어내야 할 나라의 형태는 독재자는 물론 독재 정당의 존재가 절대로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그 독재자 보고 자리에서 내려오라니 막상 그 사람이 사실상 현재 통일의 주된 동력원이나 다름없으니 한국 정부 입장에서는 은밀한 기대감만을 가지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로 북한의 선제적인 행동을 바랄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마침 그때쯤 정환도 자신이 시작한 이 변화를 불가역적인 것으로 굳힐 행동에 착수했다.

북한 전 지역에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뽑는 절차, 그러니까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반세기만의 자유 선거를 실시한 것이다.

* * *

“뭐, 예상대로랄까. 물론 이런 게 금방 정착될 거라고는 나도 기대 안 했네.”

”……그래도 정말 동지의 결심이 확고하신 모양이군요.“

만수대 의사당, 보통은 최고인민회의의 의사당이자 대의원 회의가 열리는 공화국의 국회의사당은 평소와 사뭇 다른, 이색적인 열기로 끓어오르고 있었다.

물론 평상시에도 공화국의 국회의사당이라는 본연의 기능은 나름 하는 곳이지만, 그동안 1당 독재 국가인 북조선에서는 로동당과 그 당수 정환에게 말 그대로 박수 자판기 정도의 역할밖에 하지 않는 이곳이 평상시와 좀 다른 열기에 잠긴 이유는, 바로 선거였다.

처음으로 자유 선거, 그러니까 보위부원들이 옆에서 감시하며 당선이 내정된 대의원 이름이 사전에 적힌 투표용지에 찬성반대만 표하는 형식적 선거가 아니라, (일단은 제대로 된) 비밀 선거의 원칙을 지킨 선거로 뽑힌 대의원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여간에 마지막이 언제였는지 기억도 안 나는 이 실질적 자유 선거에서, 조선로동당은 여전히 전체 687석 중 82%인 564석을 차지하면서 압도적 제1당 지위를 지키게 되었다.

”하지만 시작이 반이라고. 언젠가는 우리 로동당이 이 공화국 영토에서 야당이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르네. 그러려면은 최소 20년은 있어야 할 거 같지만, 인민들을 무시하지 말게. 인간의 머릿속이라는 건 절대 안 바뀌는 것 같아도 의외로 빨리 바뀌니까. 특히 요즘 같은 정보화 시대에서는 더욱더.”

“……앞으로는 이전보다 더욱더 위기감을 가지고 정치투쟁에 임하라는 교시로 알아듣겠어요.”

대의원들이 운집한 의사당의 단상 바로 뒤에서, 현영숙은 안색이 조금 굳은 채로 그렇게 어깨를 으쓱하는 정환의 얼굴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정환은 이상주의자가 아니므로, 그사이에 사회주의 헌법을 살짝 고쳐서 선출된 대의원이 아니더라도 여당(그러니까 로동당)의 당수이자 최고지도자로 지명받을 수 있게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마련해 놨지만, 그럼에도 이번 선거 결과는 그녀에게도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북만주 전쟁 승전 후 어느 때보다도 로동당과 최고지도자 정환의 지지율이 높은 시점에서 선거를 치뤘음에도 신생 제1야당 ‘민족제일당’과 제2야당 ‘조선민주사회당’ 등 야당들이 각각 70여 석과 40여 석을 조선로동당에게 빼앗아오면서 나름의 약진을 이뤄냈던 것이다.

사실 그 야당들도 전부 약속이라도 한 듯 조선로동당과의 연계 및 적극 협조를 공약으로 내세워 당선되기는 했지만, 지난 30년간 이루어진 물질적, 정신적 개방의 파도를 맞으며 인민들의 의식이 천천히, 하지만 분명히 변화해 왔다는 증거였다.

“……그런데, 정말 제가 발표해도 괜찮을까요?”

“되고말고. 자부심을 가지게. 이 공화국에서 최초로, 그러니까 1960년대 이후 최초로 선거를 통해 당선된 대의원 출신 조직지도부 부장이 동무 아닌가? 게다가 남조선 동무들에게도 다시 한번 신호를 줘야지. 등을 떠밀어 줘야 그쪽에서도 슬슬 우리가 진지하다는 것을 알아먹을 테니까 말이야.”

현영숙이 지금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머뭇거리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상술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거쳐 모두가 예상한 대로 압도적 여당이 된 조선로동당은 잽싸게 당 대회를 열어 선거 전과 거의 그대로 당수이자 총서기 정환은 물론, 모든 내각과 당직을 유임시켰다.

유일하게 선전선동부장이었던 현영숙만이 정환의 교시에 대의원 출마와 당선이라는 (형식적) 절차를 거쳐 조직지도부 부장으로 영전하였는데, 일단 선거는 선거였으니 현영숙 본인이 평양의 지역구에 출마해 선거를 치르기는 했다.

총서기의 의중을 ‘알아서’ 짐작한 다른 야당들이 해당 지역구에서 전부 자당 후보를 빼버리는 바람에 사실상 찬반투표가 된 데다 평양 공민들도 평상시 여러 매체를 통해 비교적 얼굴이 익은 전직 선전선동부장에게 표를 몰아줘서 무려 득표율 95%라는 헛웃음 나오는 결과가 나와 버리기는 했지만.

하지만 이렇게 ‘선거로’ 당선된 신임 조직지도부 부장 현영숙이 지금 최고인민회의 단상에 올라가지 않고 머뭇거리는 진짜 이유는, 바로 오늘 로동당 조직지도부 부장이자 오늘 이 자리에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 위원장을 유임할 김용건에 이어 부위원장으로 선출된 직후 발표할 내용 때문이었다.

총서기가 정통성 획득 차원에서 다음 대 총서기 자리를 물려줄 자신을 형식적이나마 대의원 선거에 내보낼 것은 이미 예상했지만, 이 최고인민회의 자리에서 정환 자신보다 먼저 단상에 올라서, 무려 남조선에 정상회담 제의 발표연설을 하라는 것까지는 예상 못 했던 그녀였다.

게다가, 그 정상회담의 주제는…….

“그거야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정상회담 제의와…… 북남통일 제안을 발표할 자리는 동지의 것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눙토히 말해 오늘 이 모든 일은 누가 봐도 동지의…….”

“그렇지. 하지만 동시에 내 것이 아니어야 하네. 왜 그래야 하는지는 현 부장 동지도 잘 알지 않나? 어서 가보게.”

“……!!”

그때서야 정환의 의중을 알아들은 듯한 현영숙은 그저 복잡미묘하면서도 아쉬운 표정만을 지으며 무대 뒤에서 단상 위로 나아갔다.

만수대 의사당에 운집한 공화당 전국 각지의 수많은 대의원들은 처음에는 경애하는 총서기 동지가 아닌 그녀가 먼저 등장했음에 잠시간 놀라는 듯했지만, 이내 열정적인 박수로 새로운 조직지도부장의 등장에 화답했다.

그리고 이내 정해진 표결 발표와 연설이 시작되는 모습을 조용히 단상 뒤의 그림자에 숨어 지켜보면서, 정환은 피식 웃으며 입맛을 다셨다.

“쯧, 그렇게 오랫동안 바라왔던 자리를 손에 쥐고 사상 최초 여성 총서기 자리도 내정되었는데, 막상 현 부장은 별로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군. 역시 내색은 안 해도 나 때보다는 권한이 줄어들 게 아쉬워서 그런 건가?”

“……아니요. 현 부장 동지 본인께서도 자신이 거인의 빈자리를 대체하기에 아직은 너무 버겁다는 거이를 잘 알아서 그러실 겁네다. 사실 지금은 이 공화국의 누구를 데려놔도 그렇기는 하겠지만 말입니다.”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정환은 뒤를 돌아보았다.

김영일의 뒤를 이은 현 반부패수사국장 겸 최연소 로동당 정치국 위원, 그리고 한때는 누구보다도 정환을 증오했을 사람, 리경수가 그 자리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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