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애하는 수령동지 327화
정환의 사죄는 형식적이거나 카메라를 의식한 퍼포먼스가 결코 아니었다.
그것을 보여주듯 그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카메라 앞에서 허리를 숙이고 있다가 기자들이 그 순간을 충분히 많이 사진에 담고 나서야 굽혔던 허리를 다시 세웠다.
당연히, 기다렸다는 듯이 기자들의 입에서 질문이 쏟아졌다.
“그럼 말씀드렸던 대로 지금부터 질문을 몇 가지만 받도록 하겠습니다. 네, 고려일보 김 기자님?”
“김 총서기님! 김 총서기님! 방금 전의 이러한…… 사태에는 한국 청와대 측과 뭔가 사전 교감이 있었습니까? 최근 한국의 전 대통령이 국회 동의를 받지 않고 연변 내전에 국군 특수전 부대를 파병한 것에 대하여 야당을 중심으로 대통령에 대한 해명 요구가 잇따르고 있는데, 방금 전 사죄 퍼포먼스가 이런 전 대통령의 정치적 위기와 어떠한 관련이 있습니까?”
“전혀 아닙니다. 이전부터 생각해 왔던 일이며, 오늘 사죄 표명은 저를 중심으로 한 조선로동당 전체의 총의를 대변한 것이라고 생각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거기 CNN 기자분?”
“세크러테리(General Secretary : 서기장) 킴! 최근 익명을 요구한 미 국무부 고위 정보원에 따르면 총서기님의 가까운 가족, 일설에 의하면 친자녀로 추정되는 여성이 싱가포르에서 미국으로 망명한 사실이 밝혀졌는데 이에 대하여 해주실 말씀 없으십니까? 혹시 해당 여성이 노쓰코리아의 차기 지도부에 들어갈 가능성이 있을까요?”
“개인적인 일이고, 오늘 회견의 목적과 무관계한 질문이므로 해당 질문에는 답하지 않겠습니다. 온겨레 신문 박 기자님?”
“방금 전 70년 남북 교류사에 대단히 큰 한 획을 그은 상징적인 행동을 하셨는데요! 취임 직후에는 일시적으로나마 통미봉남 스탠스를 취하셨던 총서기님이 이러한 전향적인 자세를 보이신 것은…… 그…… ‘그 일‘을 위한 사전 작업, 최소한 남측 정부에 보내는 어떠한 신호라고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차마 그 단어, 남북한 각자의 국가 체제 수립 이후 한반도 최대의 떡밥이나 다름없던 그 말을 벌써 꺼내기에는 아직 좀 김칫국 마시는 일이라 생각했는지 온겨레 기자는 그 말을 입에 담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하지만 질문을 받은 당사자인 정환은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글쎄요. 향후 북남관계에서 일어날 일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는 건 아직 시기적으로 이르다고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저는 전 대통령에 대해 개인적으로 믿고 있다, 이렇게는 말씀드릴 수 있겠군요. 오늘 기자회견은 여기까지입니다. 그럼…….”
“네? 그게 대체…… 총서기님! 총서기님! 잠시만요! 질문 하나만 더……!!”
기자들은 돌아가신 부모님들이라도 그렇게는 애절하게 부를 수 없을 만큼 멀어져 가는 정환의 등에 대고 그를 불렀지만, 정환은 그대로 돌아서서 기자실을 나가 버렸다.
당연하지만, 그 시각 직후부터 모든 뉴스 속보와 인터넷 실시간 검색어와 저녁 뉴스, 심지어 몇 주 후 저녁 뉴스까지도 ‘김정환 사과’, ‘북한 사과’, ‘육이오 사과’ 같은 키워드들로 도배되다시피 했다.
더욱더 신기한 사실은, 로동신문과 조선중앙방송 등 북조선 매체들까지도 적극적으로 보도하지는 않았지만 남조선 측 인터넷에서 건너온 총서기 동지의 사과 동영상이나 한국 전쟁 남침 인정 기사 같은 정보를 검열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예전 김정일 시대보다는 훨씬 자유로워졌어도 이런 뉴스는 가장 먼저 치워 버리고 유포자를 색출 처벌하던 선전선동부와 중앙검열위가 갑자기 태업이라도 한 듯했다.
그리고 물론 한국에서도 인터넷 네티즌부터 주류언론의 주필들, 논객들 등 입 가진 자들은 이 공전절후의 사태와 관련하여 떠드느라 날 새는 줄 몰랐다.
* * *
“네, 안녕하십니까. 모두에게 열린 공론장, 토론의 시작과 끝! KTBC 시사 문답, 오늘도 국내외 시사, 사회 현안들에 대하여 각계에서 모신 패널 분들과 함께 시청자 여러분들께 다양한 의견과 지식을 전달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주제는 모두가 짐작하실 수 있다시피 얼마 전 북한 김정환 조선로동당 총서기의 한국 전쟁 관련 남침 인정 및 사과 회견인데요. 이에 대해서 언제나와 같이 전문적인 식견을 제공해 주실 패널, 북한학 전문가, 김정환 총서기 관련 여러 저서들을 저술하신 문성환 박사님을 모셨습니다. 안녕하세요. 문 박사님.”
“안녕하십니까.”
서울에 위치한 한 종합 편성 채널 방송사의 스튜디오.
모셔온 패널이 인사를 대강 끝내자 사회자는 한시가 급하다는 듯이 재빨리 문답을 진행시켰다.
사실 오늘 토론 주제와 그 파급력을 생각해 보면, 편성 시간이 짧으면 짧았지 절대 길 수가 없는 것이다.
“네, 그럼 가장 먼저 현 시국…… 그러니까 김정환 총서기의 역사적인 사과 회견에 대한 평가가 진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문 박사님. 김 총서기의 이번 사과 회견에 어떤 의도가 담겨있을까요?”
“글쎄요, 저도 솔직히 그 방송을 실시간으로 보면서 대단히 많이 놀랐고…… 또 한마디로 정리하기는 힘들 것 같지만 최대한 노력해 본다면 이렇게 정리가 가능할 것 같군요. ‘오로지 김정환 총서기만이, 오로지 지금밖에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입니다.”
“오로지 김정환 총서기만이, 오로지 지금밖에 할 수 없는 일이요?”
“네. 사회자님, 정치인들이, 그러니까 남북한과 민주주의, 권위주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정치인들이 ‘두 번째로’ 하기 힘들고 싫어하는 말이 뭔지 아십니까?”
문성환의 뜬금없다면 뜬금없는 첫 질문에 사회자의 표정에 ‘?’ 하는 의문부호가 떠올랐다.
가장, 그러니까 ‘첫 번째로’ 하기 싫어하는 말도 아니고 두 번째로 하기 싫어하는 말?
“글쎄요……? 첫 번째로 싫어하는 말도 아니고 두 번째로 싫어하는 말이면…….”
“별로 어려운 게 아닙니다. 정답은 바로 ‘내가 잘못했다’지요. 즉 자기 죄과 인정.”
“……!!?! 여전히 잘 이해가…… 그게 두 번째면…… 첫 번째는 대체 뭔가요?”
“사실 그게 이 질문의 핵심입니다. 그건 바로 ‘우리가 잘못했다’거든요. 차이점이 뭔지 아시겠습니까?”
“……아!”
사회자가 드디어 뭔가를 깨달은 듯하자 문성환은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렇습니다. ‘내가 잘못했다’와, ‘우리가 잘못했다’……. 첫 번째는 개인으로서 잘못을 인정하는 말이고 두 번째는 집단의 대표로서 잘못을 인정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번 김정환 총서기의 사과 회견은 당연히 후자에 속하지요.”
“자기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북한, 그러니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장이라는 지위로서 남침과 한국전쟁이라는 잘못을 인정한 거군요.”
“그렇습니다. ‘내가 잘못했다’도 정치적 리스크가 크지만, ‘우리가 잘못했다’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큽니다. 특히나 국가 간 관계에서는 더더욱 그렇죠. 자기 혼자 책임지는 선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두고두고 상대국에 빌미를 주는 거니까.”
“일본 수상이나 정치인들이 한국과의 과거사 문제에 대해서 사과든 망언이든 일본 정부 차원에서는 끝까지 말을 아끼며 알쏭달쏭하게 입장을 표명하는 맥락하고도 비슷하군요?”
“네. 선출직은 물론 그 무소불위의 독재자 김정환 총서기도 지금처럼 지지율이 최고 상태가 아니면 대단한 모험입니다. 거의 자기 정치 생명을 걸고 해야 하는 일이니까요. 특히나 북한 같은 권위주의 국가일수록 이런 경향이 심한데…… 허 참…….”
“그런데 가장 중요한 점은…… 대체 왜 김 총서기는 이런 퍼포먼스를, 어떤 의도에서 한 일이냐 하는 겁니다. 이 점에 대해서 고견을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문 박사님?”
“흠, 사실 여기서부터는 반쯤 제 추측인데…… 제 의견으로는 과거 동서독 간에 일어났던 그…… 일을 김 총서기가 심중에 품고 있는지는 좀 더 봐야겠지만 최소한 이거 하나는 확언할 수 있습니다. 김정환 총서기는 현재 퇴임을 준비 중인 겁니다.”
“퇴임이요?”
문성환의 단언에 이제까지 비교적 침착을 지켰던 사회자는 ‘그 일’이라는 게 뭐냐, 라고 묻는 것도 까먹고 정말로 경악하면서 깜짝 놀랐다.
이제까지, 지난 88 서울 올림픽과 함께 총서기에 취임한 이후 한국 국민들에게 북한이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란 곧 김정환이었다.
북한이 김정환이고, 김정환이 곧 북한이었는데, 이렇게 뜬금없이 그 김정환이 퇴임이라니.
“네, 저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전문가들도 대부분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사회자님. 방금 제가 말씀드렸다시피 집단의 장으로서 잘못 인정은 개인으로서의 그것보다 훨씬 정치적 리스크가 큽니다. 아까 말씀드린 빌리 브란트도 무릎 꿇기 직후 자국 내 우익 세력으로부터 비난을 많이 받았지요.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이번 김 총서기의 사과 회견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말씀…….”
“자신의 뒤에 올, 후임자를 위한 정치적 장애물을 치워준다고 말입니다. 한 마디로 자기가 다 짊어지고 내려오겠다 그거지요. 예전 우리 역사적인 남북 대타협 당시 박이삼 대통령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아! 그건 금방 알겠습니다. 우리 입장에서야 육이오는 명백한 남침, 침략전쟁이지만 북한 입장에서 그 사실을 공개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자국이 침략국가였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니 그걸 후대의 누가 하든 정치적 부담이 대단히 크다는 말씀이군요.”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알아듣는 학생처럼 사회자가 얼굴에 열기를 띠면서 맞장구를 치자, 문성환은 눈을 빛내며 논평에 한층 박차를 가했다.
“현재 모든 평양 주재원들에게 물어보면, 김정환 총서기의 북한 내 지지율, 아니, 숭배도는 이견 없이 사상 최고입니다. 북만주 전쟁에 참전, 그러니까 사실상 참전한 북한이 중국에 통쾌한 승리를 거두고, 이 21세기에 영토까지 넓히면서 사실상 자기 아버지 김일성의 권위를 뛰어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이제 북한, 그리고 조선로동당은 ‘김일성 주석의 당’이 아니라 ‘김정환 총서기의 당’인 겁니다.“
“그렇죠. 물론 이제까지도 인민들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지만 그걸 넘어서, 지금은 종신집권까지도 무난하게 가능한 상황이라는 관측까지 나오고 있는 형편이니.”
“그 말인즉슨 아직 다음 대 총서기, 북한의 최고지도자가 누가 될지는 몰라도 김정환보다는 그 권위가 떨어질 게 뻔하지 않습니까? 그다음 대가 누군지는 몰라도 이번과 같은 사과 회견을 하려면 본인 생각과는 무관하게 대단히 큰 정치적 도박인데, 그걸 역대 가장 인민들의 지지를 받은 북한 지도자가 미리 해버린 겁니다.”
“정말 승전 직후가 아니면 하기 힘든 회견이겠군요. 그럼 문 박사님. 여기서 가장 중요한…… 그 김 총서기의 후임자가 대체 누구일까요? 혹시 이번 회견 자리에서도 제기되었던, 싱가포르에 망명 중이던 그 의문의 여성이 혹시…….”
“아뇨, 그건 가능성이 낮을 겁니다.”
“네? 아니 어째서…….”
드디어 고대하던 ‘핫 토픽’으로 주제를 바꾸기 직전 문성환이 단호할 정도로 빠르게 대화의 맥을 끊어버리자 사회자는 아쉬우면서도 얼떨떨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원래 예나 지금이나 군주의 후사 문제는 잘못 언급하면 목이 날아가는 금단의 열매인 동시에 그걸 알면서도 뒷말이 끊이지 않는 동서고금 공통의 가십이었다.
일부 식견 있는 전문가들이야 4대 세습은 사실상 분단의 영구 고착화를 의미한다고 지적해도 현 김정환 총서기만큼의 입지와 인민들로부터의 지지도가 있는데 대대손손 안 해먹는 건 상식적으로 누구라도 불가능할 거라고 한국 국민들은 물론이고 북조선 인민들까지 은연중에 굳게 믿고 있지 않은가.
당장 남조선 재벌가들도 그 돈과 권력을 딴 놈한테 넘겨주기 싫어서 온갖 욕을 다 처먹으면서도 재벌 2세, 3세들이 출현하는 판에 김정환도 그럴 것이라는 게 자연스러운 사고의 흐름이었는데, 방금 문성환이 그걸 부정한 것이다.
그리고 문성환은 사회자와 방청객들, 시청자들의 이러한 의문에 대한 해답을 간단하게 내놓았다.
“방금 전 제가 설명해드린 연장선상에서 생각해 보면 간단하죠. 자기 아버지 김일성을 침략자, 민족의 배신자로 만들어 버렸지 않습니까? 그것도 김정환 본인 입으로.”
“그, 그렇죠.”
“그동안 김정환 총서기가 4대 세습, 그러니까 혈연에 의한 권력 승계를 별로 마음에 안 들어 한다는 징표는 그동안 저 같은 전문 연구자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습니다. 자기 입지가 충분히 탄탄해진 후에도 아버지 김일성이 그랬듯이 자녀에게 적절한 후계자 교육을 시키기는커녕, 현재까지 자녀의 존재, 심지어 기혼 여부조차 명확하지 않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사실 그 점이 신비감을 증폭시켜서 더더욱 사람들의 흥미를 자극하는 부분도 있고…….”
“물론 김정환 총서기 본인도 김정일에게 권력이 승계되던 와중 갑자기 나타난 인물이니만큼 말년에 어디 숨겨놓은 아들 같은 게 후계구도에 등판할 가능성도 꾸준히 제기되어 왔는데, 그럼에도 그동안 북한 국내에 얼굴조차 비치지 않다니 혹시 모른다는 의견이 그동안 소수나마 있었죠. 하지만 이번 사과 회견으로 저는 그 소수 의견을 확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무, 무슨 소수의견을 말씀입니까?“
”그 여성이 누구건, 김정환 총서기의 딸이건 누구건 간에 다음 북한 최고지도자는 김정환과 혈연이 없는 사람일 거라는 점입니다.”
“……!!!!”
이제 사회자는 맞장구치는 것조차 잊고 침만을 꿀꺽 삼키며 문성환의 입만을 들여다보았다.
사실 그뿐만이 아니라, 다른 방청객들은 물론 PD까지도 넋을 잃고 문성환의 설명에만 귀를 기울이고 있는 형편이었다.
“우리 당의 창립자 김일성 동지는 영웅이 아니고 같은 동포를 공격한 침략자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김정환 총서기는 비유하자면 이번 회견으로 자신의 혈연적 정통성을 내다 버린 겁니다. 이제까지 김 씨 3대, 김일성으로부터 시작되는 이 일가가 북한을 통치했던 기반은 상당 부분이 항일 독립투쟁부터 남조선 해방전쟁, 그러니까 한국전쟁의 위장된 전과(戰果)에 기인하는데, 이제 그게 송두리째 바뀌지 않았습니까?”
“그거야 그렇겠죠……. 자기 입으로 한국 전쟁이 남침, 침략전쟁이라고 인정해 버렸으니.”
“오직 김정환만이, 오직 지금밖에 할 수 없는 일인 동시에, 김정환의 입장에 있는 99%의 인간들은 절대로 하지 않을 일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이제까지 북한과 그 정권을 연구해왔던 제 입장에서는 직접 본 적도 없는 김정환이라는 인간에게 세게 한 방 먹은 느낌까지 드는군요. 아니, 탄복했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까요?”
“……타, 탄복이요?”
사회자가 ‘아무리 그래도 잠재적 적국의 독재자에게 너무 과한 칭찬 아니냐?’라는 떨떠름한 얼굴로 되물었지만 문성환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듯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설령 자기가 김정환 입장이라도 그렇게 할 자신이 없다는 표정이었다.
“자기가 평생 쌓아 올린 업적을 기반으로 사랑하는 아들 혹은 딸에게 물려줄 수 있는 왕국의 왕좌, 그리고 거기서 파생되는 독재적 권력과 부의 세습 기회, 무엇보다 차후 만에 하나라도 있을지 모를 정치적 보복으로부터 안전한 본인의 퇴임! 이 모든 기회들을 자기 손으로 내버린 거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지금 세상에 어느 정치인이, 아니, 어떤 사람이 이런 결단을 내릴 수 있을까요? 사회자님이 김정환 입장이면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솔직히…… 힘들겠죠…….”
“지난 30년 동안 김정환 총서기는 자기 손으로 북한을 막 공산권에서 독립한 제3세계 국가에서, 전 세계에서 인정받는 중규모 강국으로 키워놨습니다. 얼마 전 북만주 전쟁에서도 이겼으니 차후 신흥 강대국의 반열에 오를지도 모르지요. 지도자라면, 아니, 사람이라면 이렇게 자기가 평생 모든 걸 바쳐서 이뤄낸 것들에 대하여 자부심, 그리고 소유욕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을 텐데, 정말이지 불교의 생불(生佛)이나 플라톤의 국가론에 나오는 철인 같은 게 아니고서야…….”
그때 카메라 밖에서 정신을 차린 PD가 시간 다 되어간다고 손짓하는 것을 보고 사회자가 화들짝 놀라 문성환에게 목소리를 낮추고 작게 속삭였다.
“어…… 박사님? 이제 슬슬 최종논평을 내려주셔야…….”
“음…… 솔직히 말씀드려서 남북관계라는 게 항상 그랬지만 이번 사과 회견도 언제 어떻게 뒤집힐지 모릅니다. 그동안 김정환 총서기도 한국에 우호적인 일만 해온 건 아니었고, 오히려 철저하게 정략적인 쪽이었으니까 말이지요. 하지만 만약에…… 정말 만약에 말입니다……. 이번 회견이 그러니까…… 김정환 총서기가 남북 간의 ‘그 일’에 대한 결단을 내린 증거라면…… 설령 아니라고 해도…….”
“아니라고 해도……?”
문성환은 잠시 고민했다.
이 논란의 소지가 다분한 단어를 말하는 게 좋을까?
혹시 나중에라도 극우단체 같은 곳에서 이 신성한 대한민국 공영방송 한복판에서 무슨 망발이냐고 살해 협박 같은 게 날아오지 않을까?
30년 전에 이 단어를 서울 한복판에서 입에 담았다면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갔을 것이다.
15년 전 유민중 정권이 들어섰을 때 했더라도 시대 바뀐 줄 모르는 NL이라는 비웃음을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으로부터 불과 몇 달 전, 사과 회견이 있기 전에 이 단어를 공공장소에서 언급했다면 대부분의 사람들로부터 ‘평양으로 이사 가려고 준비하느냐?’라는 차가운 무시와 조롱을 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고민하던 문성환은 끝내 자신이 얼마 전 사과 회견의 내용을 듣고 이해하자마자 김정환이라는 인간에 대하여 머릿속에 가장 처음 떠올린 솔직한 감상을 말하기로 결정했다.
사실 그 고민되는 마지막 순간 문성환의 의사를 결정지은 것은 될 대로 되라 하는 반발심 내지 저항심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이 21세기 자유 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에서, 하고 싶은 말도 자유롭게 못 하냐?
“……아니라고 해도, 최소한 이번 회견은 한국전쟁 유가족들과 그 모든 역사의 피해자들의 마음에 맺힌 응어리를 풀고, 이 시대에조차 아직 남북 간에 남아 있는 가장 큰, 70년 동안의 깊은 고랑을 메운 일대 사건, 세기의 영단(英斷)이라고 평해야겠습니다. 최소한 그동안 역사에 끊임없이 고통받아온 우리 평범한 한국인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습니까?”
“네, 그건 저도 동의합니다.”
“……그리고 그런 한국인의 한 사람으로서 사회자님. 저는 이 최종논평 자리를 빌려 오늘 하루만이라도 김정환 조선로동당 총서기를 이 서울 한복판에서, 이렇게 존칭하겠습니다. ‘경애하는 우리의 수령동지’라고 말입니다. 물론 누군가에게 강요나 억압되어서가 아닌, 순전히 제 자유의사로요. 참 아이러니한 일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