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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하는 수령동지-325화 (325/350)

경애하는 수령동지 325화

그 말을 끝으로 정환은 그저 딸의 처분에 맡긴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혜인 역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동안 어두운 서기실에는 그저 침묵만이 감돌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먼저 입을 연 사람은 혜인이었다.

“……해외에 오래 체류하면서…… 이 공화국 밖의 여러 사람에게서 아버지에 대한 평가를 많이 들었어요. 제가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좋은 소리는 못 들었을 것 같지만, 한번 털어놔 봐라. 나는 무슨 소리를 듣든 이 나라에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했을 뿐이니까. 애초에 남의 평가 같은 건 별로 신경 쓰지도 않고.”

“그 반대예요. 냉혹한 독재자에 민주주의를 억압했다는 나쁜 평가도 물론 있었지만…… 그 누구보다 이 공화국에 가장 필요한 지도자였다는 평가도 만만치 않았어요. 체제 전환기에 흔히 나타나는 혼돈과 폭력을 억제하고 조국에 질서와 번영을, 나아가 한반도 전체에 대결적 구도를 종식시키고 평화와 안정을 가지고 왔다고요.”

“널 가르치던 가정교사들이 사상 교양이 투철한 동무들이었나 보구나. 하긴 그런 사람들로 뽑았으니까.”

“가정교사들이나 운전사 같은 사람뿐만이 아니에요. 머리가 좀 굳고 나서 만난 싱가포르 국제고등학교 선생들, 대학교수들, 경영학과에서 본 케이스 스터디 자료들, 외국 신문 기사들, 심지어 싱가포르에서 만난 한국인 유학생들까지…… 대부분 아버지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어요. 독재자이기는 하지만, 사리사욕과는 거리가 멀고 나름의 신념 아래 조국을 부국강병의 길로 이끈 유능한 지도자라고요.”

“…….”

“그리고…… 그런 평가들을 접하고 나서 어머니와 외할머니를 통해 그 김정환 총서기가 바로 제 아버지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을 때 제가 가장 처음으로 한 생각이 뭐였는지 아세요?”

참으로 드물게도, 정환은 잠시간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다행히 혜인은 오래 기다리지 않고 질문에 대한 답을 자기 입으로 말했다.

어머니를 똑 닮은, 흑옥처럼 크고 아름다운 그녀의 눈동자에 희미한 눈물을 글썽이면서.

“……아버지가 자랑스러웠어요. 아버지 딸이라는 것도 자랑스러웠고요.”

“……정말이냐?”

“네, 비록 어린 저를 해외로 도피시키고, 10여 년 동안이나 어머니와 떨어져 있게 만드셨지만…… 이제 그 모든 걸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금방 잊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최소한…… 아버지가 하신 그 모든 행동들, 선택들을 이해해요. 아버지를 용서해요.”

“…….”

“…….”

“……고맙다.”

정환은 오로지 그 탄식 같은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서로 가슴 속에 쌓인 말을 모두 토해낸 부녀는 잠시 서로를 어두운 방 안에서 하염없이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서로를 끌어안았다.

“아버지…….”

“정말로, 고마워, 그 말밖에는 할 수가 없겠어. 고맙다, 혜인아, 이 아버지를 이해해 줘서.”

“…….”

두 부녀는 한동안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그렇게 끌어안고 있었다.

가족이라는 것을, 피가 이어진 혈육 간의 정이라는 참으로 낯선 감정을 너무나 오랜만에 느껴보는 정환이었다.

그동안 그에게 가족이라는 것은 사실상 없는 것, 혹은 있어도 드러내지 못하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리고 두 부녀가 떨어진 것은 다시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른 후, 이번에도 먼저 입을 연 것은 혜인이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실 거에요? 저를 공화국으로 다시 불러들이셨다는 뜻은…….”

“맞춰보려무나. 넌 제법 똑똑하다고 들었다.”

아버지의 가벼운 질문에 혜인은 잠시 눈을 반짝이며 손가락을 턱에 대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혜인 본인은 그 질문을 존경스러운 아버지가 내린 첫 시험 같은 것으로 받아들였는지 재기 넘치는 머리를 빠르게 굴려서 최대한 실망스럽지 않은 답을, 티 나지 않게 내놓으려고 전력을 다했다.

정작 정환 본인은 그저 딸의 그런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왠지 모를 만족감이 느껴졌지만.

그리고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좋은 머리를 증명하듯, 혜인이 정답을 내놓기까지 걸린 시간은 몇 초 되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동안 저를 중국의 위협과 제 배경으로 정치적 이득을 얻으려는 국내의 무리로부터 최대한 떨어트려 놓으려고 하셨죠. 세습 체제의 종결과 제 안전이 확실하게 확보될 때까지는 말이에요. 중국 쪽의 위협은 얼마 전 사실상 해소됐지만…… 승전으로 인민들에게 아버지의 지지율이 최고일 때 저를 국내로 들어오게 하는 리스크를 감수하셨다는 뜻은…… 설마…….”

“그 설마다. 이제 은퇴할 시기가 온 거지.”

“……언제쯤이요?”

“당장은 아니지만, 머지않아 준비가 될 거다. 네 엄마도 이미 알고 있지. 이제는 총서기 자리에서 내려와서 네 어머니의 남편이자 너의 아버지로서의 역할에만 충실할 날도 머지않았다.”

담담한 어조에 참으로 충격적인 내용이었기에, 그걸 듣는 혜인의 눈빛은 여러 차례 복잡하게 변했다.

하지만 머지않아 복잡하게 헝클어진 마음을 정리한 그녀는, 눈에 잠시 고인 눈물을 닦고 자리에서 일어나 당당한 어조로 선언했다.

“아까 아버지께 말씀드렸죠, 용서는 했지만 잊어버리기는 쉽지 않을 거라고. 자리에서 내려오시면 그동안 밀린 아버지 노릇을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서 갚으셔야 할 거예요. 저랑 어머니는…… 최소한 저는 아버지께 받아내고 싶은 게 아주 많으니까요.”

“각오한 일이다. 사실 개인적으로도 하루빨리 그런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기도 하고.”

처음으로 정환이 씨익 웃으며 그렇게 말하자, 혜인은 새침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더니 그대로 문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서기실의 문을 열고 막 밖으로 나가기 직전, 그녀는 마침 생각난 게 있다는 듯이 다시 고개를 정환에게로 돌려 물었다.

“아버지께 한 가지만 더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음, 사실 이거 말고도 아주 많기는 하지만 우선 이거 하나만으로 만족하죠 뭐. 하여튼, 대답해 주실 수 있죠?”

“뭐든 물어보거라.”

“제 할아버지…… 김일성 전 주석은 어떤 분이셨죠? 가정교사들도 그 분에 대해서 물어볼 때는 당황하면서 말을 얼버무리기만 해서…… 아버지에게는 어떤 의미를 가진 분이셨나요?”

물어보기 전에도 민감한 질문이라는 것을 이미 깨달고 있었는지 아버지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묻는 티가 역력한 혜인의 어조에, 정환은 피식 웃으며 김일성에 대한 자신의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감상 그대로를 솔직하게 말해주었다.

“김일성 말이냐? 난세라는 운때를 잘 만난 덕에 자기 능력 이상의, 가지지 말았어야 할 것을 지나치게 오래 가지고 누리지 말아야 할 것을 지나치게 오래 누렸던 범부(凡夫)였지. 여느 독재자의 말년에 붙여줄 법한 불쌍하다는 평조차 아까운 인간이랄까. 나는 그 인간을 내 아버지로 생각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너도 그러기를 바라고.”

“……역시 그렇군요. 그럼 할머니는요? 아버지의 어머니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 말에 정환은 잠시 김일성을 언급할 때 입가에 어렸던 싸늘한 냉소를 거두고 침묵에 잠겼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을 때 김명애를 그리는 그의 표정에는 지우기 힘든 씁쓸함과 그리움이 묻어나고 있었다.

“……그리우면서도 항상 죄송스러운 분이지. 네 어머니 다음으로 내가 미안하게 생각하는 분이다. 별로 잘해드리지도 못했는데 너무 일찍 돌아가셨다. 그나마 말년에 네 얼굴을 직접 보여드릴 수 있어서 다행이었고.”

“그랬군요……. 하긴 저도 어린 시절에 흐릿하게 본 기억만으로도 참 따뜻한 분이셨던 걸로 기억해요. 싱가포르에서 저를 처음 보셨을 때도 한참 동안 저를 붙잡고 울기만 하셨는데…….”

“이 평양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그분의 묘소가 있다. 빠른 시일 내에 꼭 같이 너랑 가보고 싶구나.”

“네, 저도 기다리고 있을게요. ……이제 정말로 그만 나가 봐야겠어요. 오늘은 축제일인데 절 데려온 경호국 요원들을 너무 늦게까지 부려먹는 거 같네요.”

그렇게 말하며 혜인은 이 방에 들어와서, 아니, 정환 기억에는 사실상 처음으로 방긋 미소를 지었다.

그런 딸의 모습을 잠시 뭐라 말로 표현하기 힘든 눈빛으로 지켜보던 정환은 이번에는 정말로 문을 열고 서기실 밖으로 사라지려는 그녀를 다시 한번 붙잡았다.

“혜인아.”

“네, 아버지?”

“……옷 좀 두껍게 입고 다녀라. 급하게 입국하느라 옷을 구할 여유가 없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아직 1월이다. 이 공화국은 싱가포르와는 달리 추운 나라고.”

“……!!”

생전 처음 들어보는 정환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혜인은 잠시 놀란 토끼 눈으로 자신의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다시 밝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조금 전 닦아냈던 눈물이 다시 그녀의 눈가에 그렁거리는 것은 아마도 눈의 착각이 아니었을 것이다.

“네, 아버지. 곧 다시 봬요.”

* * *

그로부터 몇 주 후, 이제 새롭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영토가 된 연변 특별 자치주에 정환은 역사적인 첫 현지 지도를 나갔다.

불과 몇 달 전 이었던 내전, 아니, 독립전쟁의 전화가 크게 가시지 않은 터라 곳곳은 대형 타워크레인과 화물트럭들이 오가며 건물 잔해를 들어내고 임시 구조물을 설치하며 복구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나마 연변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였던 연길에서는 저강도 시가전만이 이어졌고 탄도 미사일이 소낙비처럼 떨어졌던 안도 현은 인구 밀집도가 낮은 농촌이었던 지라 북조선의 지원 아래 복구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는 게 위안이었다.

-……이제 이 연길에는, 나아가 연변 전체에는 조선민족도, 한족도 없습니다. 오로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이름 아래 하나 된 인민만이 있을 뿐입니다.

아직도 총알 구멍을 다 메우지 못한 연길 시청 앞에서 열린 조선로동당 차원의 인상적인 격려사는 외신을 포함한 많은 이들의 인구에 회자 되었다.

그리고 상당히 뜻밖에도, 대부분의 사람이 빠른 전후 복구쯤으로 예상했던 정환의 격려사는 한족과 조선족, 그리고 북조선 인민 간의 민족적 화합에 관한 것이었다.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 민족주의 정서를 불러일으켰고, 또 그런 이유로 전쟁까지 한판 벌였지만, 이제 한 국가 내에 속하게 된 이상 다시 일어날 수도 있는 민족주의에 의한 분규를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가장 급선무라는 정환의 생각에 의해서였다.

바로 얼마 전까지 민족과 혈통 때문에 총구까지 겨눴는데, ‘이제 여기는 조선 땅이니 너는 반(半)한족 천민, 나는 반 조선족 양반’ 운운하며 계층이 분화되는 일은 (정환 자신이 했던 그대로) 중국 측에 쓸데없는 빌미를 줄 수도 있으니 최대한 빠르게 갈등을 봉합해야만 했다.

-……이러한 법 앞에의 평등과 화합을 깨는 자들에게는 조선로동당의 이름 아래 준엄한 처벌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밝히는 바입니다. 오로지 하나 된 연변, 하나 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만이 다시 이 연변에 평화와 번영을 가져다줄 수 있을 것입니다.

축포가 터지고 얼마 전까지 친조선파 커뮤니티 지도자들, 친중파 커뮤니티 지도자들이었던 자들이 서로 어색한 악수를 나눴다.

그중에는 얼마 전 초대 연변특별자치주 주지사 자리에 오르게 된 이섭기도 포함되어 있었다.

“축하하오, 이 지사. 앞으로 모든 연변 인민들을 공평하게 대하는 진정한 조선로동당원으로서의 력량을 보여주기를 바라겠소.”

“초, 초, 총서기 동지……!! 이, 이렇게 기쁜 날이 제 살아생전에 오다니, 이, 이, 이게 다 총서기 동지의 령도력 덕분…….”

“이 지사가 수고해 준 덕이 더 크지. 하지만 노파심에서 하는 말인데, 앞으로 모든 연변 인민들에게 공평무사하게 대하기를 다시 한번 요청하는 바이오. 그래야 이 지사의 그 가슴에 달린 조선로동당 2중 영웅 훈장이 부끄럽지 않을 테니. 항상 평양에서 지켜보고 있겠소.”

“여, 여부가 있겠습네까! 모든 연변 주민들을 제 가족처럼 대하겠습네다! 머지않아 빠른 시일 내에 예전 고구려의 번영을 되찾은 연변을 총서기 동지께 보여드릴…….”

자신이 직접 매달아준 훈장이 흔들릴 정도로 크게 복창하며 감격에 눈물짓는 이섭기를 뒤로하고, 정환은 연길 시청으로 들어가 회의실의 상석에 앉았다.

이미 오늘 행사에 함께 참석한 당 정치국 간부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나같이 시청 회의실 조망창 밖으로 보이는 드넓은 만주의 풍경에 감탄하고 있는 모습들이었다.

“정말이지 이 연변이 우리 공화국의 영토가 되다니. 지금도 쉽게 믿어지지 않아요. 우리 선전부 정기간행물과 유튜브 채널 첫머리에 나오는 공화국 국경선이 이전과 바뀐 걸 보면서 아직도 가끔 간행이 잘못된 줄 알고 깜짝깜짝 놀란다니까요. 교과서도 어서 전부 새로 만들어야 하고…….”

“김대 사학과에서 벌써부터 연변 소재 고구려 유적지 발굴 허가를 신청하고 있다는 이야기 들었소, 현 부장? 우리 조상님들이 보시면 참으로 자랑스러워하갔지. 각국 주재한 우리 공화국 대사관 대사 집무실에서도 구(舊) 공화국 지도를 내리고 새롭게 그려진 신(新) 지도를 올리는데 그 광경을 보면서 어찌나 가슴이 벅차오르던지…….”

“저도 동의하는 바입네다, 김 외무상 동지. 비록 인민군 군관과 하전사들의 희생이 컸지만…… 이번 전쟁에서 희생된 공화국 전사들의 유해는 따로 렬사릉을 만들어 안장할 계획인데, 안장 당일 초대 손님에 미국을 비롯한 각국 퇴역 장령들을 부를 수 있도록 외무성에서 손을 좀 써줄 수 있을…….”

“난 몇 년 안에 총서기 자리에서 은퇴할 걸세. 그러니 동무들도 그렇게들 알고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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