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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하는 수령동지-323화 (323/350)

경애하는 수령동지 323화

111장. 박수를 받으며

여기서 잠시 중화인민공화국의 최고 영도인 보시라이가 축출되고 바지사장쯤으로 취급되던 후진타오가 그 자리에 앉게 된 경위를 살펴보자면, 역사의 아이러니인지 인과응보인지 몰라도 그 과정은 보시라이가 시진핑을 축출하던 때와 놀랄 만큼 비슷했다.

안도현에서 선양 군구가 조선인민군에게 패퇴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마자 보시라이는 별 고민도 하지 않고 추가 파병을 결정했고, 파병을 위해 연변에서 가까운 베이징 군구의 병력이 가장 먼저 동원되었으나 그것이 그동안 몸을 낮추고 있던 후진타오의 기회였다.

어차피 가만히 있어봐야 보시라이에게 언제고 숙청될 게 뻔했고, 이판사판의 심정이 된 후진타오는 자신에게 동조하는 베이징 군구 인민해방군 장령들을 포섭했다.

그리고 지금 보시라이는 자신이 숙청했던 시진핑과 똑같이, 전임자의 뒤를 따라 베이징 친청(秦城) 교도소에 유폐되어 기소를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자신이 저지른 짓이 있다 보니) 보시라이는 수도 베이징을 방어하는 군구는 웬만해서는 움직이지 못하게 묶어놓고 항상 예의주시했는데, 연변에서 벌어진 충돌 탓에 베이징 군구의 군사행동과 이동에 대한 감시, 제한이 느슨해졌고, 후진타오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은 것이다.

즉 어떻게 보면 김정환과 조선인민군의 승전이 지금 후진타오로 하여금 보시라이를 몰아내고 주석 자리에 앉혀준 일등 공신이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임 주석 후진타오의 첫 결정인 연변 자치공화국의 존재를 인정하자는, 한마디로 연변을 북조선에 떼어서 줘버리자는 사실상의 패배 선언에 대해서 상무회의 내에서 반발이 없었던 게 아니었다.

사실 반발이 있었다 정도가 아니라 거의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절반 정도가 ‘아무리 그래도 그건 불가하다’라는 태도를 들고나오면서 후진타오의 주장에 동조하는 나머지 절반 정도와 팽팽히 맞섰다.

하지만 후진타오는 2014년 가을, 내전이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든 어느 날 베이다이허에서 열린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회의에서 그런 반대자들을 이렇게 타일렀다.

“동지들, 생각해 보시오. 지금 우리 중화인민공화국이 어떤 어려움에 처해 있는지 객관적으로 돌이켜 보란 말이오.”

“……!!!”

“남쪽 홍콩에서는 시위가, 서쪽 아프간에서는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그리고 이번에 동쪽 연변에서는 전쟁까지 치렀소. 동서남북 거의 전 새외(塞外)에서 불길이 치솟고 있단 말이오. 과거 고대 전제 왕조들이 망할 때 정확히 이런 징후들이 나타났었지. 그렇지 않소?”

후진타오의 나직하지만 명백한 위기감이 드러나는 말에 몇몇 상무위원들이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듯 눈살을 찌푸렸다.

모든 중국인들, 특히 지도층에게 있어서 중원 대륙을 넘보는 오랑캐들의 준동은 거의 역사적 트라우마에 가깝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증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반동, 소수민족의 분리독립과 뒤이어 이어질(최소한 이어진다고 생각되는) 약소국화에 대한 히스테리컬한 반응은 그렇게 쉽게 설득될 만한 것이 아니었다.

물론 후진타오 역시도 그걸 잘 알고 있었다.

“이번 전쟁을 처음부터 반대했던 동지들도 있으니 알겠지만, 전선을 여러 개로 늘리는 나라는 아무리 강대국이라도 빠른 시일 내에 망하는 법이오. 최소한 그 상태로 패권 다툼 같은 것은 꿈도 못 꾸지. 게다가 이번 안도현 전투에서 올라온 전후 보고들에 대해서는 이미 다들 아시리라 믿소. 패배는 둘째 치고 졸전도 이런 졸전이 없지 않소.”

“어흠, 흠…… 흠……!!”

“아무리 급박한 상황이었다지만 아군 머리 위에 미사일을 떨어뜨리고, 북조선군 공격으로 죽은 장병들보다 보 전 주석이 지시한 미사일 타격으로 죽은 인민해방군 장병들이 더 많다는 이야기까지 나올 지경이오! 빠르게 언론통제를 했으니 망정이지, 아니, 지금 시대는 천안문 사태가 일어나던 89년이 아니오. 그때도 열심히 인민들 입을 막았음에도 결국 알음알음 퍼져 나가 알 사람은 다 알게 되었는데…….”

“후, 후 주석 동지. 그 사건에 대해서 언급하시는 건 좀 자제를…….”

“……하물며 지금 2014년에 인민들에 대한 완벽한 언론통제는 아무리 광전총국에서 힘을 쓴다고 해도, 이 중국에서조차 불가능하다는 점을 여기 있는 모든 동지들이 잘 알 거요. 게다가 일반 인민들도 아니고, 우리 당을 수호해야 할 당군, 인민해방군 장병들이 전 주석과 사령원들의 직통 명령에 의한 진 내 사격으로 죽었다는 게 알려지면, 군내에 불어닥칠 수뇌부와 당에 대한 불신과 분노의 여파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셨소들?”

“…….”

“이번 사태에 대해서는 아무리 주석이라도 책임을 물어야 하오. 그래서 내가 거사를 결행한 거지. 보시라이 주석은 최소 10년은 친청 교도소에 있어야 할 거요.”

한마디로 이번 연변 내전의 패전과 그 여파에 대한 모든 책임을 보시라이에게 떠넘기겠다는 무언의 선언이었다.

동시에, 그건 보시라이 선에서 모든 추궁을 끝내겠다는 뜻이기도 해서, 한때 보시라이의 결정에 동조했던 몇몇 상무위원들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들의 그러한 반응은 후진타오가 의도한 것이기도 했다.

“물론 연변 자치주 독립에 대해서 일부 동지들이 우려하는 바에 대해서는 나도 잘 알고 있소. 하지만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시오. 지금 우리가 연변을 독립시켜 주지 않고 계속 우리 영토 내에 붙잡고 있으면, 우리 당의 영도와 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해 불만을 갖는 300만 명의 잠재적인 불만 분자들을 항상 내재하고 있는 것이오. 사실상의 시한폭탄이지.”

“……으음……!!!!”

“이미 이번 사태로 인해 연변 자치주의 320만 조선족들과 우리 중앙당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소. 전 주석이 지시한 시가전 소탕 와중에 죽은 조선족들이 몇이며, 우리 군의 ‘협조요청’ 아래 지뢰 매설을 하다가 죽은 조선족 민간인들은 또 몇이겠소. 티베트나 위구르하고도 경우가 다르지. 그들은 등 뒤에 북조선이라는 든든한 후원국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지금 그 후원국 뒤에는 태평양 정보공동체와 미국이 있고.”

미국이라는 말이 나오자 이제까지 듣고만 있던 상무위원들 사이에 희미한 분노의 빛이 보였다.

북조선과 한국을 꼭두각시로 내세워 그들의 뺨을 날린 미국에 대한 그런 그들의 감정 자체는 후진타오도 십분 공감하는 바였지만, 지금 그가 상무위원들의 눈에서 또 발견한 것은 분노를 제외한 다른 감정이었다.

두려움, 그리고 체념.

“동지들…… 이미 날이 가면 갈수록 국제 여론은 우리에게 불리해지고 있소. 이미 대만 국내에서는 이번 사태를 목격하고 그동안 진전시켜온 양안(兩岸) 관계를 원점으로 되돌리고 미군기지를 자국에 들이자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는 와중이오. ……지금 협상하지 않으면 나중에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안 좋은 조건으로 협상해야 할 거요.”

그리고 그것으로 연변 조선족 자치주, 아니, 연변 자치공화국에 대한 중국 공산당의 방침은 정해졌다.

제네바에서 열린 휴전 회담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 총리 김용건과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총리 리커창(李克强)은 미국 대통령 콘돌리자 라이스의 중재 아래 각각 그 자리에 참석하지 않은 국가 수반들을 대신하여 다음과 같은 휴전 합의문에 서명했다.

-중국과 북조선 양국은 서로에 대한 군사행동과 적대적 행위를 지금 즉시 중단한다.

-중국은 연변 조선족 자치주 거주민 320만의 총의(總意)에 근거하여 세워진 연변자치공화국 정부의 자주독립을 인정한다.

-연변자치공화국의 임시 총리는 현재 과도정부 수반인 이섭기 총리로 정하며 선거를 통하여 독립적인 헌법 제정 혹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의 편입을 결정하게 된다.

연변자치공화국, 연변 공화국의 국경선 정립은 양국 간, 그리고 중재를 맡은 미국 간 가장 첨예한 갈등이 오간 부분이었다.

현재 조선인민의용군이 점령하고 지배력을 행사하는 지역은 자치주 내 안도현까지였고 연변에서 남은 인구 밀집 지역 중 중국군이 주둔하고 있는 곳은 한족 비중이 95%가 넘어가는 돈화(敦化) 시뿐이었다.

연변 과도 정부는 수반인 이섭기를 포함해 중국 당국에 등록된 현재 자치주 행정구역 전체를 영토로 넘겨받아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지만, 후진타오는 물론 중국 공산당 내 온건파들도 여기서 한치라도 더 양보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는 입장이었다.

양국 외교관들 간에 다시 삿대질과 고성이 오가고 애써 작성한 합의문이 무용지물이 되어버릴 뻔한 순간, 타협책을 제시한 것은 김용건이었다.

-현재 의용군이 점령하고 있는 안도현과 돈화 시 사이에는 수십 킬로미터의 거리가 있고 애초에 이섭기 총리 동지의 거사 이유부터가 조선 민족 동포의 자주 독립이었으니 한족이 인구 대부분을 차지하는 돈화 시 서쪽까지 영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조금 무리가 있구려.

-돈화 시를 지금의 단둥처럼 국경 도시로 만든 후, 시 중간을 지나는 무단장(牡丹江) 강의 지류를 경계로 동쪽은 연변 공화국이, 서쪽은 지금처럼 중국이 영유를 주장하는 것이 어떻겠소?

-그거 좋은 생각이구려.

-다만, 면적상으로 볼 때 연변 공화국이 원래 행정구역보다 손해를 보는 것은 확실하니 한 가지 조건을 내걸고 싶소.

-그것이 무엇이오?

-연변 자치주 행정구역 밖의 영토 일부를 받고 싶다는 것이오. 현재 중국과 조선…… 기러니까 차후에는 연변 공화국과 중국, 조선 삼국의 영토가 겹치게 될 장백산, 즉 백두산 전체를 연변 공화국에 넘겨주시오.

이 점에 있어서도 다시 몇 달간 길고 긴 토론, 찬반 논쟁, 연구, 양보, 논의가 있었지만, 결국 양국, 아니 공식적으로 삼국(三國)은 합의에 도달하는 데 성공했다.

중국 입장에서는 안 그래도 사실상 패전, 영토상실의 좌절과 당에 대한 불신에 빠진 자국 인민들에게 한 치의 영토라도 덜 양보했다는 명분이 필요했다.

연변 자치공화국과 그 수반인 이섭기 입장에서는 애초에 민족주의 운동으로 시작한 분리독립 시도인 만큼, 조선 민족의 성산(星山)인 백두산 전체를 영토에 편입시킨다는 것은 단순한 면적 이상의 지대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후진타오 주석은 이런 김용건의 조건을 받아들이는 대신에, 한 가지 체면치레라고도 볼 수 있고 정권 안정용이라고 볼 수 있는 조항을 추가했다.

-합의문에 명시된 연변자치공화국의 국경선에 대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은 이에 ‘반대하지 않는다’.

‘인정한다’가 아닌, ‘반대하지 않는다’.

이런 모호한 표현이 들어간 것은 드넓은 대륙과 다민족으로 이루어진 14억 인민을 영도해야 할 중국 공산당이, 사실상 전쟁으로 인해 영토를 탈취, 적어도 소수민족의 분리독립을 용인했다는 불리한 선례를 남길 수 없다는 중국 측의 비공식적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참 덩치는 큰 놈들이 가끔 보면 자존심만 센 일곱 살짜리 어린아이 같다고 김용건은 속으로 냉소했지만, 원래 국제외교라는 게 그런 거라는 걸 그도 모르지는 않았다.

게다가 북조선 입장에서도 연변 공화국의 독립을 용인하는 후진타오 정권의 국내 체면을 세워줘서 나쁠 건 없었다.

어쨌거나 이번 패전과 독립 이후 중국은 이전보다 훨씬 절치부심할 것이며, 당분간 대내 혼란 수습에 집중하고 나면 다시 그 눈을 해외로 돌릴 것은 필연적이니까.

공룡에게 한 번 칼침을 놓아 다리 하나를 자르는 데 성공했다고 해서, 기고만장하다가 공룡의 분노를 다시 불러일으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이것으로 삼국 간에 다시 평화가 찾아왔소 기래. 서로 악수하고 밝은 미래를 빌어줍시다.”

각각 대표자들의 이름 밑에 사인이 써넣어지고, 카메라 플래시와 함께 악수가 오갔다.

그리고 휴전합의 성립 3개월 후, 연변자치 공화국은 ‘고도의 자치권을 유지한 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의 편입’을 의제로 한 국민 총선거를 치렀다.

그 결과는 물론 ‘편입 찬성’이었고, 국가 수립 불과 3개월 만에 연변자치 공화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연변 특별자치주’로 편입되어 짧은 수명을 마감했다.

그리고 연변이 북조선의 품에 안겨 북조선이 8도(道) 1주(州)의 새로운 영토로 개편된 2015년 1월, 조선로동당은 그 날을 새로운 국경일로 선포하고 조선인민군 주관의 열병식과 축제를 벌였다.

이 국경일의 공식명칭은 대중 관계를 고려해 ‘동포가 고향으로 돌아왔다’라는 의미의 ‘귀향절(歸鄕節)’로 정해졌지만, 그 해 첫 귀향절은 거의 대부분의 인민이, 당군민을 막론하고 다음과 같은 비공식적인 명칭으로 불렀다.

21세기가 오기도 전에 은근슬쩍 역사 속으로 사라진 기념일들인 김일성 생일 태양절이나 그 아들의 생일 광명성절처럼 허황된 기념일과는 달리 그해 전 인민이, 하나가 되어 축하했던 이 국경일의 비공식적 명칭은, ‘전승절(戰勝節)’, 즉 ‘승리 기념일’이었다.

* * *

“축하드려요. 동지 임기 내에만 두 번째 승전이네요.”

“엄밀히 말하면 첫 번째야, 유 소좌. 사실 페르샤 만 전쟁 때는 우리 군이 한 게 거의 없으니까. 요즘은 인민들 대부분도 입 밖으로 못 낼 뿐이지 대충 다 알고 있는 거 같던데.”

서기실 밖은 여전히 시끌벅적했다.

모든 살림집마다, 평양 지방 가릴 것 없이 모든 집집마다 인공기가 걸렸다.

이제는 ‘북만주 105 사단’이라는 이름으로 명예롭게 개명한 전 류경수 제105 땅크 사단이 선두에 선 조선인민의용군의 시가지 퍼레이드와 하늘에 날리는 색종이들, 거리마다 조선 만세, 공화국 만세, 김정환 총서기 동지 만세를 외치는 사람들의 흥분은 쉽게 가라앉을 줄 몰랐다.

축제의 낮이 지나고 밤이 찾아왔음에도, 불꽃놀이를 비롯한 각종 행사들의 소음은 서기실 창문에 쳐진 두꺼운 커튼까지 뚫고 정환의 귀에까지 들릴 정도였다.

“그것과는 상관없이 동지 이름은 앞으로 로동당의 당사(黨史)와 이 땅의 역사에 영원히 아로새겨지게 될 거에요. 물론 인민들의 마음속에도.”

“…….”

정환은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눈앞의 사람, 유혜림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들이 앉아 있는 서기실은 조명이 꺼져 어두웠지만, 정환은 문득 그렇게 말하는 유혜림의 얼굴에서 적지 않은 세월의 흔적을 발견했던 것이다.

아직 젊은 시절의 미모가 드문드문 남아 있었지만, 그녀의 고왔던 눈가에는 잔주름이 지고 머리카락에는 조금씩 흰머리가 보였다.

그리고 아마 그 자신은 인지하지 못했어도, 정환 본인의 얼굴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그는 새삼 세월이 많이 흘렀음을 절감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정환은 마침내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오래전에 했어야 할 말을 할 용기, 그리고 오랫동안 미뤘던 일을 대면할 용기였다.

“당신에게 항상 말하고 싶은 게 있었지……. 이미 여러 번 말한 거지만…….”

“…….”

“고마워. 항상. 그리고 미안해.”

“저도 항상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오늘 당신이 그 말을 할 대상은 제가 아니에요.”

“……나도 알아.”

그 말을 끝으로 유혜림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서서 문밖으로 나갔다.

정환 역시 의자에 앉아 드문드문 서기실을 밝히는 창문 밖의 불꽃놀이에만 시선을 고정했다.

유혜림이 나감과 동시에 누군가가 들어오고, 그리고 그 사람이 어두운 서기실 한가운데 서서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한 후에도 정환은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잠시간의 침묵이 흐른 후, 그 사람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동안…… 드리고 싶은 질문이 너무나 많았어요. 그런데 막상 이렇게 눈앞에서 뵙게 되니 한 가지 밖에 머리에 안 남네요.”

“말해보거라.”

“……정말 저와 어머니에게 그렇게 모질게 구셔야만 하셨어요? 정말로 다른 선택지는 없었나요? 그냥…….”

잠시 목이 메었는지 그 사람은 잠시 말을 멈추고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이내 용기를 냈는지 다시 입을 열고 질문을 계속했다.

“……그냥 저를 여기 고향에 남겨 키우실 수도 있었잖아요. 제 존재를 당에 숨겨도 좋고, 총서기 자리를 물려주지 않아도 좋아요. 정말로 경애하는 총서기 동지께서, 공화국 전 인민의 추앙을 받는 수령께서 고작 그 정도도 하실 수 없었나요?”

“…….”

그 말에 정환은 창문 밖에서 시선을 떼고 그 사람에게 눈을 돌렸다.

어두운 서기실 중앙에, 유혜림을 똑 닮은, 하지만 훨씬 젊은 20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이지적이면서도 당찬 미모의 여성 한 명이 두 주먹을 꼭 움켜쥔 채로 정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딸, 유혜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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