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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하는 수령동지-298화 (298/350)

경애하는 수령동지 298화

103장. 사냥이 끝나면 개를 삶는다

“다루는 데 조심하셔야 할 겁네다. 개방 후 올라온 남조선 출신 사기꾼한테 평생 모아온 사업 자금이랑 집을 모두 잃은 놈이라…… 남조선 말투만 들으면 발광을 하디요. 두 명이나 죽이고 잡혀왔습네다.”

“……특정 인물의 사진을 보여주고 기억하게 하면 그 인물로 대상을 한정시킬 수 있나?”

그의 옆에서 나름 조언이랍시고 말해주는 정신과 의사의 말에 남성은 눈도 돌리지 않고 격리실 문에 난 작은 창 안쪽에만 시선을 고정시켰다.

격리실 한가운데에 멍하니 누워있는 그 남성 환자의 몸에는 구속복이 감겨 있었고 그는 공허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정상적인 의사소통이나 자신이 저지른 행동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사람인 게 확실했다.

“글쎄요……. 아마 가능할 겁네다.”

“좋아, 이 동무로 하지. 간호원들 불러서 내가 타고 온 짐차에 집어넣게.”

“아, 알겠습네다.”

누가 봐도 상식 밖의 요구였지만 의사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남성의 요구에 복종했다.

그러나 남성은 아직 할 말을 다 한 게 아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의사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뭐, 뭐 공안부에서 더 저희 병원에 필요하신 거이라도…….”

“당연한 이야기지만 한 번 더 강조하지. 저 동무는 오늘 이 평성 정신병원에서 운동시간에 탈출한 것이니 그런 줄 알게. 나도 오늘 여기서 의사 동무를 만난 적이 없는 것이고. 잘 알겠나?”

“예, 예! 리 처장 동지!”

“조용. 그냥 알았다고만 대답해도 되네.”

“예, 예에…… 알겠습네다…….”

남자의 목소리는 나직하고 차분했지만 의사는 마치 저승사자라도 만난 듯이 연신 머리를 굽신거렸다.

그리고 남자, 공안부의 경제 범죄, 고위급 범죄 전문 수사부서이자 최근에는 전성기 시절 반부패수사국의 위상을 연상케 한다는 심화수사처의 처장인 리경수는 고갯짓으로 대기하고 있던 요원들에게 환자를 격리실에서 빼내라고 지시했다.

* * *

사위가 고요했다.

상가(喪家)의 어수선함과 곡소리는 이미 저 멀리 멀어져 주변에는 풀벌레 우는 소리밖에는 들리지 않았고 아무도 방금 정환이 나직하게 중얼거린 이야기를 들은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반부패수사국의 국장, 김영일에게 그 목소리는 마치 천둥 치는 것처럼 들렸다.

“발뺌할 생각은 말게. 이미 지금쯤은 수사국 외부 인원들이 내 직인이 찍힌 명령서를 들고 자네의 사무실을 뒤져서 모든 증거물들을 수집하고 있을 테니까. 무엇보다 동무, 아니 김영일이 자네는 나와 함께한 시간이 그렇게 짧은 사람이 아니지 않나?”

“…….”

정환은 언성을 높이지도 얼굴을 붉히지도 총을 빼 들어 겨눈 것도 아니었지만, 그 말에 김영일은 마치 화살을 맞은 사람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윽고 크게 한숨을 쉰 그는 이내 모든 걸 내려놓은 사람처럼 허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총서기 동지는 언제부터 저를 의심하셨습네까?”

“꽤 됐지. 하지만 확신을 얻게 된 건 얼마 전이었네. 우선 첫 번째 계기는 이 모든 사태 와중에도 군(軍)에 대한 접근이 감지된 적은 거의 전무했었다는 것이네. 정말로 누군가 나를 실각시키려고 진지하게 결심했다면 제일 먼저 군부터 장악했을 텐데 말이야.”

“하하…… 애초에 기런 건 생각도 안 했습네다. 백승철 차수가 저한테 넘어올 거 같지도 않았고…… 먼 옛날 기억을 떠올려 보면 백 차수는 동지에게서 신뢰를 못 받던 입장이고 저는 동지의 의형으로 김정일이의 가신들을 견제하라고 등용되었던 입장이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그 반대가 되어버렸다니…….”

지금도 자신의 처지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김영일은 공허한 너털웃음을 터뜨렸지만, 정환은 여전히 담담했다.

아니, 최소한 겉으로는 담담해 보였다.

“거기서부터 거꾸로 생각해보니 모든 것이 설명되더군. 자네는 수사국의 국장으로서 모든 기밀에 접근할 수 있었네. 렴정훈도 수사국의 조사를 받던 중에 사망했고, 당 내부의 내사(內査)를 위한 도청에서도 내가 직접 지시하지 않는 이상 감히 반부패 수사국장의 사무실을 도청할 간 큰놈은 이 공화국에는 없을 테고 말이야.”

“…….”

“무엇보다 내 신경에 걸린 것은 이번 수사 자체가 너무 느리게 진행되고 자네가 이끄는 수사국이 이전과 같은 조직이 맞나 싶을 정도로 무능한 모습을 보여줬다는 것이었네. 그동안 내가 아는 김영일이라는 동무는 오로지 당무(黨務)에만 미쳐 있어서 그런 무능을 용납하는 동무가 아니었는데 말이야.”

“저도 사람입네다, 동지. 아까 하신 말씀처럼 물은 고이면 썩고 사람도 변하게 마련인데 저라는 인간을 너무 과대평가하신 거이지요……. 그런 점에서는 그 리영박 서기가 총서기 동지보다 라는 인간을 정확하게 본 거 같군요.”

한탄 같기도, 변명 같기도 한 그 말에 정환은 처음으로 표정을 바꾸며 물었다.

이제까지 애써 숨겨왔던 김영일에 대한 배신감과 분노가 아주 일단이나마 그 물음 속에 배어 나오는 것 같았다.

“대체 이런 짓을 저지른 목적이 뭔가? 총서기 자리가 탐나서 같은 변명은 부탁인데 집어치우게. 나는 동무가 그런 유형이 아닌 걸 아주 잘 아니까. 차라리 아예 다른 이유라면 모를까, 최소한 동무는 권력욕 때문에 되지도 않는 반역을 기획할 사람이 아니야.”

“……혹시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네다만, 제게도 가족이 있습네다. 간부집은 아니어도 아직 젊고 막 총서기께 중책을 받았을 때부터 함께 고생해온 안해(아내)…… 아들놈 하나와 아직 보통중학교를 다니는 딸, 기러고 오늘 돌아가신 김명애 동지 같은 오마니가 아직 생존해 계시디요.”

갑자기 딴소리를 하는 김영일에게 정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의 넋두리를 들어주었다.

크게 실감한 적은 없었지만, 그가 자신의 배다른 형이며, 오늘 장례식을 치른 그의 어머니 김명애 같은 김일성의 정부들 중 한 명에게서 태어난 ‘백두혈통’ 중 하나라는 사실이 새삼 떠올랐던 것이다.

“기런데 어느 날 제 딸이 학교에서 돌아오더니 울음을 터뜨리더군요. 왜 기런가 하고 물어보니 같은 평양 내 중학교를 다니는 제 주변 아이들은 전부 어릴 적부터 외산 명품을 걸치고 다니는데, 저는 그러지를 못해서 정말 당에서 내놓으라 하는 간부 집 딸이 맞냐고 동무들에게 놀림을 들었다더군요. 그때 실감한 거이 무엇이었는 줄 아십네까? 이 김영일이, 한 평생 동안 참으로 청렴하게 살았다고 말입네다. 거의 바보스러울 정도로 말이디요.”

“……그래서, 결국은 그거였나? 돈? 고작 그런 이유 때문에 25년간 함께 해왔던 내 신뢰를 저버리고 이런 배신을 저질렀다고 말하는 건가?”

“물론 처음부터 그런 거이는 아니었습네다. 처음 변방에 있던 저를 등용하여 당무를 맡겨주신 젊었을 적, 25년 전에는 그저 당의 일과 총서기 동지의 신뢰에 보답하는 거이 최고였디요. 맡겨주신 권력을 휘둘러서 저를 핍박했던 놈들 모가지를 날리는 일도 즐거웠고 말입네다.”

“그런데 왜…….”

“하지만 기렇게 하루가 어떻게 가는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10년, 20년이 지나고 보니…… 어느새인가 시간이 남아돌기 시작하더군요. 기러더니 조금씩 이러고 살아도 되나 싶은 딴생각이 들었습네다. 미래에 대한 생각, ……이 수사국장 자리에서 은퇴한 후를 말이디요.”

어이없을 정도로 단순한 김영일의 대답에 정환은 다시 화를 내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김영일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그가 그동안 겪었던 심경의 변화가 어떤 것이었는지 조금씩 짐작이 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개혁개방 후 25년, 이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이전과는 차원이 다르게 부유해졌다.

예전처럼 살림집에 텔레비죤이 있는냐 없느냐로 얼마 안 되는 빈부를 가르던 예전과는 달리, 중산층 인민들도 자기 차를 가지고 해외 여행을 떠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물론 그 변화의 와중에는 주로 당 간부에 의해 저질러진 수많은 부패와 비리 사건 등이 있었지만, 개방 초반에 수사국이라는 초법적 기관과 그 기관을 지휘하는 백두혈통 출신 국장의 단속에 의해서 소련 붕괴 후 러시아처럼 부패가 사방에 만연하는 전철은 한참 전에 회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세월이 흐르며 점차 아무도 감히 수사국의 눈을 피해 부정을 저지를 생각을 않다 보니, 수사국의 업무는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고 그 권한 범위 역시 초창기의 고위층 부패보다는 좀 더 생활밀착형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리고 칼날 같았던 김영일의 마음에도 녹이 슬기 시작한 것이 바로 그때부터였다.

“예전 공화국, 기러니까 총서기 동지와 제가 젊었던 시절에는, 다 같이 가난했으니 부패라고 해봐야 미제 달러를 꿍쳐두거나 도이췰란트제 자동차를 수입해서 몰래 타고 다니거나 하는 정도였는데…… 요즘 공화국과 남조선을 포함한 거의 모든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자식과 손자의 미래까지 돈을 얼마나 투자하느냐로 결정되더군요.”

“…….”

“제 대(代)는 총서기 동지께 신임을 받고 있으니 제 한 몸은 평생 걱정 없다 할지라도, 제 자식들과 그 자식의 자식들 대는 뭐에 기대어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습네다. 제가 죽고 나면, 아니 자리에서 물러나고 나면 제게 원한 품은 놈들이 무슨 해꼬지라도 하디 않을까. 그거이 아니더라도 한 때 제 앞에서 벌벌 떨던 재계 돈주들 나부랭이들 기업소에서 자리 하나 얻으려고 제 핏줄들이 고생할 모습을 상상하니 별안간 자신이 너무 바보스럽게 느껴질 정도였습네다. 도대체 그동안 한 재산 안 챙겨 놓고 뭐 했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디요, 하하…….”

바로 그때부터였다.

모든 사람이 그렇겠지만 처음 한 번은 아주 쉬웠다.

아무도, 심지어 정환까지도 김영일이 부패할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을 하지 않았으니 김영일의 머릿속에는 금방 자신이 조금 해먹어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거라는 확신이 자라났다.

그리고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두 번이 세 번, 네 번, 그리고 그 이상으로 발전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결국은 작은 실수로 인하여 단서가 누군가의 귀에 들어갔고, 그 누군가는 마치 이런 일에 아주 많은 경험이 있는 양 각종 유령 회사들과 인맥과 차명계좌의 끈을 역추적해서,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김영일의 사무실에 나타나기에 이르렀다.

그 누군가는 바로 이영박이었다.

“제가 최승일 동지에 대한 수사를 했을 적 드렸던 말씀 기억하십네까……. 돈 앞에서는 장사 없다고 말입네다. 리영박이는 그 진리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네다. 아니, 어쩌면 그냥 사람의 본성을 꿰뚫어 보는 눈을 가지고 있었을지도요…….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제가 젊은 시절 기렇게 혐오하던 기런 리영박 같은 자와 술잔을 기울이고 있더군요.”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는 동무가 이영박을 얼굴마담으로 선택한 게 아니라…….”

“리영박이가 저를 뒷배로 선택한 거이지요. 뭐 그 동무는 저보다는 큰돈을 자주 만져본 동무라 몇억 달러 정도가 아니라 훨씬 크게 해먹을 궁리를 하고 있었기에 저도 그에 동조하는 척하며 나중에는 총서기를 뒷방으로 물러나게 하고 우리가 실권을 잡자느니 하며 큰소리를 쳤습네다만…… 이제 와서는 이런 변명도 아무 소용 없갔지만 말입네다.”

고개를 푹 숙이고 탄식하는 김영일을 바라보며 정환은 내심 침음했다.

인민군과 군 인사들에 대한 접근이 거의 없었던 시점에서부터 눈치를 어느 정도 챈 사실이었지만, 사실은 정환 본인도 음모자들 사이에서 목적이 서로 다른 누군가가 섞여 있는 게 아닐까 의심하고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은 결국 총구에서부터 나오는 법인데, 아무리 템즈강 줄기라는 당내 분파를 끌어들인다고 해도 군은 여전히 절대적으로 그의 편인데, 만에 하나라도 정환이 공화국을 피바다로 만들 각오를 하고 군을 동원해서 끝까지 버틴다면 그들로서는 손쓸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김영일의 의도대로 하마터면 중국과 친한 장성택이 정말 범인이 아닐까 깜빡 속을 뻔하기도 했지만, 자신이 따로 내사한 결과보다 확연하게 편향된 수사국의 보고서를 읽고 정환은 누군가가 노골적으로 장성택을 모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거기서부터 정환은 사실 이영박의 동기는, 최소한 당내에서 그 뒤를 봐주고 있는 누군가의 동기는 체제 전복 같은 거창한 게 아니라 훨씬 소박한 무언가가 아닐까 의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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