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애하는 수령동지 294화
102장. 인(人)의 장막
“어……. 음…… 감사합네다, 총서기 동지. 앞으로도 더더욱 분골쇄신하여…….”
“고맙군그래, 그런데 동무 딸 이야기 좀 더 해보지 그러나? 그런 일이 있었는데 왜 나에게 한 번도 알리지 않았나? 그리고 대체 그 병원을 짓는다는 건 무슨 이야기고? 아직 딸이 어린 줄로 아는데 의대 졸업하자마자 병원장부터 하고 싶다고 그러던가?”
우는 것도 아니고 웃는 것도 아닌 뭐라 형용할 수 없는 표정으로 말을 주워섬기는 최승일에게 정환은 그 이야기는 더 하지 말자는 듯 다른 주제로 옮겨갔다.
그리고 문제의 병원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최승일은 다시 씁쓸하다는 얼굴로 돌아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거이 아닙네다. 제 딸아이가 짓고 싶어 하던 병원은……. 일반 병원이 아니라 후천적 장애자를 위한 치료와 재활을 돕는 전문적인 요양병원입네다.”
“……요양병원?”
“저처럼 교화소에 끌려갔던 인민들을 위한 병원이디요. 아시갔지만 그……. 김일성 전 주석 김정일이 시절에 교화소 안에서 구타 가혹행위에 병환이나 영구적 장애를 얻은 인민들이 한둘이 아니디 않습네까. 단지 당내 사정으로 그 사실을 인정하기 힘들 뿐이디……!”
지친 듯 그렇게 중얼거리는 최승일의 말에 등을 돌리고 먼저 앞서서 걸어나가던 정환이 그 자리에서 우뚝 정지했다.
개혁개방 후 20여 년, 현재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교화소는 대부분 원뜻 그대로 감옥, 그러니까 살인, 강도 같은 진짜 ‘죄’를 지은 자들의 교화와 갱생이라는 목적에 충실하게 기능하고 있다.
자연히 북조선의 신세대들, 특히 80년대 이후 출생자들에게는 전 세계적으로 악명높았던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는 한국의 삼청교육대나 교련 수준으로 실감 나지 않는 과거의 유물이 되어버린 지 오래였다.
하지만 과거 그곳에 수감된 경험이 있는 수감자들에게는 전혀 다른 이야기라서, ‘혁명화 구역’, ‘15호 관리소(요덕 수용소)’로 다시 끌려가는 악몽을 꾸다가 식은땀을 흘리며 일어나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할 상처를 숨기며 가슴 졸이는 삶을 견디며 살아가고 있었다.
본인이 잠꼬대로 김정일에 대한 불평이라도 중얼거렸건, 아니면 연좌제로 가족의 죄를 뒤집어쓰고 끌려갔건,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들 중 대부분에게는 아직도 그들에게 교화소란 살아 있는 악몽 그 자체였으니까.
사실 정신적인 상처만 남은 정도면 그나마 양반이고 그곳에서 자행되었던 학대와 강제노동, 보안원들에게서, 혹은 같은 수감자들끼리 자행된 폭력으로 인해 영구적인 신체장애를 안게 된 경우는 교화소를 나와서도 일자리를 구하기 힘들어 정환이 취임 후 교화소를 닫아버린 후에도 하류계층으로 전락해 어렵게 살아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렇게 전 정권들의 정치범 수용소가 많은 인민들의 몸과 정신에 남겨놓은 상처는 지금도 길게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 상처를 치유하려는 노력과 지원은 아직도 미흡하기 그지없는 게 현실이었다.
개발도상국에서 막 탈피한 북조선의 미성숙한 사회복지 시스템 등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러한 인권 유린 행위를 공개적으로 인정할 경우 조선로동당이 져야 할 정치적 부담이었다.
정환 자신이야 김일성과 그의 이름 아래 저질러진 수많은 잔혹 행위와 개인숭배 시도들에 대해 찬동하기는커녕 지극히 역겹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지만, 사정을 알지 못하는 일반 인민들과 국제 사회 눈에는 그는 엄연히 아바디 김일성과 한 묶음이니까.
솔직히 정환 본인도 그 사실에 대해서는 자신도 어떤 의미에서는 연좌제의 피해자라고 씁쓸하게 자조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무리 수령이 바뀌어도 로동당은 로동당 아닙네까. 결단코 원망하거나 하는 거이는 아니지만, 동지께서도 일단은 전 주석 동지의 아드님이신데…….”
“……잘 알고말고. 그래서 동무 딸이 나선 거군. 당이 나서기 힘드니 자기 힘으로라도 어떻게 해보려고 말이야. 대견하군. 최 사장 동무는 말년에 좋은 딸을 얻었어.”
“사실 그 아이도 예전 교화소에서 만난 동무의 딸입네다. 그 동무와 안해(아내)는 결국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었습네다만…… 천운이 닿아 먼저 빠져나가는 쪽이 다른 쪽의 피붙이들을 돌봐주겠다고 약조했디요. 그동안은 후견인 노릇만 하다가 정식으로 호적에 넣은 건 몇 년 전입네다만…… 이제 저에게는 세상 무엇보다 소중한 아이입네다.”
“……!”
좀처럼 감정 표현을 않는 메마른 성격의 최승일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며 정환은 미묘하게 표정을 바꾸며 눈을 빛냈다.
그리고 최승일 역시 자신이 이런 말을 하는 게 자신도 겸연쩍다는 듯 벌써 흰머리가 덮기 시작한 옆머리를 긁으며 드물게 어색한 어조로 자신의 계획에 대해 털어놓았다.
“사실 제 딸아이가 의사가 되기로 결심한 이유도 저와 친부모들이 교화소에서 겪은 거이 때문입네다. 당이 못 나선다면 자신이라도 나서서 그 상처를 보듬어 보겠다고요. 원산처럼 경치 좋은 땅에 요양소를 짓고, 심리상담사나 재활치료사 같은 전문 일꾼들도 많이 고용해서 장기적으로 치료가 가능하게…….”
“……참으로 그 마음 씀씀이가 대단하군. 이제 스무 살 조금 넘은 걸로 알고 있는데 로동당의 수반이랍시고 앉아만 있던 내가 다 부끄러워질 정도야.”
“카나다가 이런 쪽에는 또 매우 앞선 나라라 유학지도 거기로 정했다고 합네다. 하는 꼴이 대견해서 저도 자그마한 보탬이나 될까 하고 달품(월급)을 모으고 있었습네다. 기런데 이런 일이 생기는 바람에 참으로 당황스럽습네다만…….”
“아니, 앞으로 그 요양병원 건립은 걱정 말게. 그건 내가 손 써보지.”
“……네? 동지?”
정환의 장담에 최승일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둥그렇게 떴지만, 정환은 걱정 말라는 듯 다시 한번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진심일세. 이제 당도 과거사에 대해서 전향적인 자세를 취할 때도 되었지. 수령 무오(無汚)설 같은 거야 어차피 인민들 중에서 이제 진심으로 믿는 자들도 없을 것이고, 무엇보다 이제 이 공화국은 과거 인민들에게 저지른 잘못을 직시할 수 있을 정도의 역량을 갖추었으니까.”
“……차, 참말이십네까, 총서기 동지? 하지만 기걸 인정하는 것에 대해 당내에서 분명히 반대가 있을…….”
“그래, 있겠지. 하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네. 최 사장 동무가 건립할 요양병원을 시작으로 당시 억울하게 관리소나 교화소에 끌려가 피해를 입은 인민들에 대해서 전면적인 재조사와 보상, 당 차원의 치료비 지원과 사과가 반드시 이루어질 걸세. 총서기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지.”
“……감사합네다.”
단지 짧은 한마디였지만 최승일의 그 말은 도저히 표현하기 힘든 복잡한 감정의 소용돌이가 가슴 속에서부터 복받쳐 나온 말이었다.
오늘 또 공화국은 다시 한번, 어찌 보면 경제적 발전이나 체제의 전환보다 더욱 큰 변화를 이루어낸 것이다.
그것도 바로 자신과 자신의 딸로 인해서.
‘거듭 느끼는 거지만 이 분이야말로 진정한 민족과 인민의 위인이시다. 단순히 경제적 령도력이나 정치적 력량에서 뿐만이 아니라. 그러고 보니 나도 운이 없지는 않은 모양이구나.’
하지만 곧 자신이 아직 주군에게 신뢰를 잃지 않았음이 확실해지고 감정이 정리되자, 이제 냉정을 찾은 최승일의 머릿속 한구석에서는 감동이 아닌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바로 이번 사태의 주모자와 그 목적에 관해서였다.
“……그나저나 설마 마틴 방에 이어 이 요양병원까지 엮어 넣을 줄은 저는 꿈에도 몰랐습네다. 뉘긴지는 몰라도 저를 아주 잘 알고…… 기러고 저를 반드시 쳐내기 위해서 혈안이 된 동무가 있나 보군요. 동지께서 저를 끝까지 믿어주시지 않았더라면 까닭도 모르고 꼼짝없이 당할 뻔 했습네다.”
“동무도 이미 이번 일이 동무 혼자만을 노린 게 아니라는 것쯤은 짐작하고 있지 않나? 이건 바로 나를 향한 공격일세. 그리고 그 첫 번째 순서로 내 가장 가까운 수족 중 하나인 최 사장 동무를 쳐내고 피오니 홀딩스에 대한 내 영향력을 약화시키려고 한 거지.”
“역시 기렇갔지요. 배후는 누구라고 생각하십네까?”
‘그리고 어떻게 대응하실 작정이십니까?’라는 뒷말이 생략된 물음이었다.
정환은 그 말에 답하는 대신 수사국 국원들에게 이끌려 밖으로 끌려 나가는 최승일의 비서, 아니, 전(前) 비서 렴정훈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건 저 동무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느냐에 달려 있지. 사실 나는 안 들어도 벌써부터 대강 짐작은 가지만, 증인이라는 건 언제나 중요하니까 말일세.”
* * *
“최승일이는 멀쩡하다고 하지 않소! 아니, 멀쩡하다 정도가 아니라 우리가 최승일이 옆에 심어놨던 우리 쪽 일꾼만 잡혀가디 않았소! 이제 어쩔 작정이오, 대체!”
“그렇소! 렴정훈이 입에서 우리 이름이 나오면 이 자리에 있는 우리는 모두 끝장이오! 로동교화형 30년형……. 아니디, 기건 그나마 운이 극히 좋은 경우고, 수틀리면 쥐도 새도 모르게 일가족 전체 싹 모가지가 따여서 사고사로 처리될 수도…….”
“예전 김일성이의 갑산파 숙청은 비교도 안 되게 피바다가 될 수도 있소. 젠장, 지금이라도 당장 전용기로 달려가서 어디 스위스쯤으로 날아가야 하는 거이 아니오? 국적이야 돈만 주면 언제라도 살 수 있고, 비밀 계좌도 준비해 놨으니…….”
“리영박 서기! 대답 좀 해보라우요! 이 상황에 대해서 뭐라 말이라도……!!!”
“아! 알겠습니다. 회장님들! 간부 동지들! 저도 다 생각이 있으니까 경망 떨지 마시고 일단 그 입 좀 다물어 보란 말입니다!”
‘이런 빌어먹을, 그래도 한 기업을 일으켰다는 작자들이 뭐 이리 담이 작아? 이래가지고 나라를 도모하는 게 가능하겠어? 이놈들과 한배를 타지 말았어야 했나? 아니야, 침착하자. 어차피 4대 개발 과업이 끝나기 전까지는 총서기는 나를 함부로 숙청하지 못해.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살아남을 수 있다. 그건 확실해.’
이영박은 벌 떼 같이 아우성치는 ‘동지’들을 애써 달래면서도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쯤 자신들이 파놓은 함정에 빠져 교화소에 처넣어졌어야 할 최승일이 멀쩡하게 복직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영박과 템즈강 줄기 출신 간부들, 북조선 재계 수뇌들은 그야말로 패닉에 빠졌다.
당장에라도 공안부 요원들이 문을 박차고 들어와 그들을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보내 버릴지도 모르는 상황.
일단 이들을 진정시키는 게 급선무라고 생각한 이영박은 다시 한번 자신의 뒤를 봐주는 그 사람의 존재를 상기시킬 수밖에 없었다.
“동지분들, 거 한 번 생각 좀 해보십시오. 여기 계신 분들은 자 이 공화국의 경제를 음으로 양으로 끌어가는 당과 민간의 엘리트 일꾼들이지 않습니까? 인민들과 국제 사회의 눈이 있는데 합당한 명분 없이 여러분들을 다 죽이거나 잡아 가두거나 하는 건 아무리 총서기라도 무리입니다. 요즘은 그런 세상 아니에요. 아시죠?”
“기, 기건 그렇소만……!!”
“그리고 여러분들의 이름이 새어나가는 것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그 동지에게 이미 확답을 받아놨습니다.”
“그, 그거이 정말이오? 확실한 사실이갔지?”
“확실합니다. 수사국 건물 내에서 일을 벌이는 건 그 동지에게도 리스크가 매우 크지만, 상황의 엄중함을 아시고 신속히 대처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이제 좀 안심이 되십니까?”
“기, 기렇다면야……!!”
‘한심한 새끼들. 사업가라는 양반들 배포가 저래서야……. 국가 지원받아서 돈 쉽게 번 인간들은 역시 어쩔 수 없구만.’
그제서야 마음을 가라앉히며 숨을 쉬는 그들을 보고 이영박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하지만 동시에 아무래도 이들 하나만 믿고 있다가는 언젠가 자신의 목도 위태로워질 것이라는 위기감이 들었다.
당장 지금 자신의 뒤를 봐주는 인사도 이영박 자신이 쓸모없다고 여겨지면 언제든 내쳐 버릴 인간인 만큼, 보험을 들어놓는 게 절실한 상황이었다.
‘사업가라면 모름지기 리스크 관리, 계란을 여러 바구니에 담아놔야 하는 법이지.‘
하지만 일단은 눈앞에 다가온 총알을 피하는 게 우선이었다.
아무리 자신이 4대 과업을 앞장서서 끌어가는 한, 정환이 자신을 직접적으로 건드리지 않을 확률이 높다고 해도, 세상에 절대라는 건 없는 법이니까.
지금은 증거가 없어서 그렇지 일단 정환이 마틴 방의 행적을 추적해 내서 그가 북명 그룹 계열사 부사장 한 명의 대학 후배였으며, 그 부사장이 이영박의 회사인 다스 중공업에서 몸담다 이직한 사람이며 지금 잡혀간 렴정훈도 그의 조카뻘이라는 것을 알면 분명히 수사망이 그에게도 미칠 것이다.
그러니 그 전에 손을 써야만 했다.
실제 이영박의 예상대로 실제로 그 시각, 렴정훈은 수사국 수사관들에게서 윗선을 털어놓으면 형량도 감해주고 교화소도 좋은 곳으로 보내주겠다는 협박 반 유혹 반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렴정훈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사법 거래에 응하기로 마음먹은 다음 날 아침, 정환에게 뜻밖에 안 좋은 소식이 전해졌다.
“어떤가, 불었나? 드디어 윗선을 알 수 있겠군. 그래, 이 건방진 짓을 감히 누가 사주했다고 하던가?”
“초, 총서기 동지……!! 드릴 말씀이 없습네다만 그 간나 새끼가 그거이…….”
“……뭐지?”
아침나절부터 헐레벌떡 서기실로 달려온 김영일에게 정환은 얼굴을 찌푸렸지만 이내 자초지종을 전해 듣고는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바로 증인, 렴정훈이 최승일에 대한 공작을 계획하고 피오니 홀딩스를 손에 넣으려 했던 윗선을 말해주기로 결심한 바로 그 날 아침, 아침 식사를 하다 말고 살해당해서 그 입이 영원히 닫혔다는 소식이었기 때문이었다.
누군가가 아침 식사에 혼입한 독극물에 의해서 독살당했다는 게 모든 수사관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