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애하는 수령동지 291화
은근한 축객령까지 담긴 마틴 방의 말을 듣자마자 최승일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지며 눈에서 빛이 번뜩였다.
지금까지 줄곧 호의적이다 못해 저자세로 보일 정도의 태도로 일관하던 마틴 방이 최승일의 면전에서 이런 말을 꺼내는 의도는 뻔했다.
나는 아쉬울 거 없으니 당장 결정할 거 아니면 다른 투자자를 알아보겠다 이 이야기 아닌가.
투자자와의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조급함으로 상대방의 판단력을 흐리기 위해 다른 투자자를 알아보고 있다고 떠벌리는 건 사업가들의 흔한 수법이다.
하지만 조급함에 쫓겨 투자를 결정해서도 안 되지만 망설임 때문에 눈앞에 찾아온 대어를 놓치는 것 역시도 투자자로서 반드시 피해야 할 일이었다.
세상에 리스크가 0%인 사업은 존재할 수가 없는 법이니까.
투자 실적 압박과 상대방에 대한 의심 사이에서 갈등하던 최승일은 결국 이렇게만 말하고 채광 현장을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시디요. 아마 온타리오 체류 일정 내에 가부간 답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으니 말입네다.”
* * *
“우선 그 중국투자공사 운운이 사실인지 아닌지부터 검증해 봐야디. 그쪽 사람과 마틴 방이 미팅한 거이는 사실이갔지?”
“네, 이미 주 카나다 공화국 대사관과 본사 토론토 출장소 동무들이 확인해준 사실입네다. 우리 쪽에서 투자를 받지 못하면 중국 쪽으로 넘어가는 거이는 사실로 보입네다.”
마틴 방과 헤어진 직후 호텔로 돌아온 최승일은 잠시 숨도 돌리지 않고 바로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관련 정보와 자료를 재검토하는 일에 착수했다.
그리고 비서 렴정훈이 방금 사방 팔방에 전화를 걸어 확인해 준 사실에 최승일은 이마의 주름살을 찌푸리며 고민에 빠졌다.
‘오랜 기간에 걸쳐서 공화국 기업과 거래해 온 사업 실적과 재무 구조도 검증되었고 지질 검사 결과도 50 : 50으로 나왔다. 설비와 회사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했고 중국 놈들 자본이 카나다에 손을 뻗치는 건 이미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일이지. 역시 내가 지나치게 신중한 것일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7억 달러 규모의 투자 집행을 결정하기에는 너무 숙고 기간이 짧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최승일의 머리에 떠오른 것은 마지막으로 확인을 한번 해보자는 생각이었다.
예전부터 자신이 이런 갈등의 순간에 직면했을 때 마지막 검증의 수단으로 간간이 애용하고는 했던 숨은 정보 소스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바로 위성 전화를 들고 태평양 건너편에 있는 홍콩으로 전화를 걸었다.
“맥나마라 씨. 나요, 미스터 최. 홍콩은 요즘도 덥소? 아, 별건 아니고 한 가지만 확인받고 싶은 사실이 있는데…… 이름? 레드 스타 마이닝. 최근에 온타리오 광산 채광을 위해 그쪽에서 투자를 받은 걸로 알고 있는데 확인 하나만 부탁드리오. 그걸 왜 알려줘야 하냐고? 이런, 동무. 우리가 아직도 그쪽의 치부를 명백한 증거물로 가지고 있다는 거이를 잊지 말기를 바라오. 인터폴과 미국 마약수사당국에 해당 자료를 넘기면 그쪽도 재미없을 텐데.”
열 받은 상대방이 이를 바득바득 가는 소리가 전화선 건너편에서 들리는 것 같았지만 최승일은 여전히 무표정하게 상대방의 답을 기다릴 뿐이었다.
그의 숨은 정보원이란 바로 홍콩 HSBC 은행의 한 고위 간부였는데, 과거 북조선이 전대 지도자들의 비자금 조성을 위해 마약을 포함한 여러 가지 음지의 사업을 벌일 때 그들의 손을 빌리면서 악연 아닌 악연을 맺게 된 사람들 중 하나였다.
비록 지금은 손 털고 양지로 나온 지 오래지만 조선로동당 39호실에서 비자금 조성과 돈세탁 작업의 핵심에 있었던 최승일은 당시 지저분한 사업에 연루되었던 각국 은행권 간부들의 약점을 잡아 필요할 때마다 이런 식으로 적절히 이용해 먹고 있었다.
물론 이런 방법이 항상 가능한 건 아니었지만, 마침 운이 좋게도 레드 스타 마이닝이 사업 초기 대출을 받은 곳이 자신과 끈이 있는 HSBC였던 것이 행운이었다.
“굳이 서류를 보내줄 필요는 없소. 나도 이런 일에 물적 증거를 남기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냥 말로 확인만 해주면 되오. 음…… 흠, 그렇군. 알았소. 정말 고맙군. 다음에 또 뵙도록 하겠소. 응?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할 필요는 없는 거 같은데……. 하여간 그럼 이만.”
“……어떻게 됐습네까?”
듣지 않고도 이미 최승일의 통화 상대를 짐작한 듯한 렴정훈이 조심스레 묻자 최승일은 평상시와 다를 바 없이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 어딘가에는 마지막 한 줄기 의심을 떨쳐낸 후련함이 깃들어 있었다.
“내일 마틴 방을 만나도록 다시 약속을 잡지. 그리고 곧 평양 본사에도 한번 와보라고 하는 거이 좋갔군.”
“아! 그 말씀은……”
“확인한 게 맞네. 저쪽에서도 사업성이 확실하다고 생각해서 12억 달러나 대출을 해줬더군. 물론 신뢰할 만한 보증인과 담보도 있고. 진행해도 좋을 거 같네.”
“즉시 계약서 세부사항 작성에 착수하도록 하갔습네다!”
뛸 듯이 기뻐하며 렴정훈이 객실 밖으로 뛰쳐나가자, 그걸 지켜보는 최승일의 입가에도 드디어 후련함이 섞인 희미한 미소가 그려졌다.
이걸로 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인민의 국부(國富)가 조금 더 늘어나게 된 것이다.
또한 그의 주군(主君)이자 은인인 총서기께서도 다시 한번 그의 능력에 대한 신뢰를 재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최승일의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해소되지 못한 불안이 눈곱만큼 남아 있었다.
어떤 경우에도 항상 최악의 상황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상정해 보고는 하는 그의 고질병이자 의심병 내지는 극단적인 신중함이 다시 도진 것이다.
-혹시라도 이 모든 것이 내가 알지 못했던 신종 사기라면? 만약 내가 판단의 근거로 삼았던 모든 정보가 전부 가짜일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런 건강한 의심의 발로에 최승일은 지금이라도 뛰쳐나간 자신의 비서를 붙잡고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고 설득해야 하는 거 아닌가 아주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그는 괜한 생각이라고 고개를 저었다.
방금 전 HSBC의 정보원이 사진으로 찍어 보내준 내부 문서(물론 확인한 직후 하드디스크 레벨에서 삭제해 버렸지만)에 따르면 레드 스타 마이닝인 분명히 사업 초기 투자 비용과 설비를 위하여 12억 달러라는 거액을 대출받았고, 서명란에 HSBC은행장의 서명까지 그가 두 눈으로 확인했다.
하늘이 두 쪽 나도 이건 바뀔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가 방금 결정한 피오니 홀딩스의 레드스타 마이닝에 대한 선행 투자 집행 금액은 7억 달러, 2차 투자는 사업 진행 진척도를 보고 결정하는 게 계약서에 명시되어 있다.
이미 레드스타 마이닝과 마틴 방은 코발트 광산 사업을 위해 12억 달러를 대출받아 지출했고, 이 원금에 이자까지 합한다면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수지가 안 맞아도 한참 안 맞는 사기일 수밖에 없었다.
HSBC는 담보나 지불보증도 확실하지 않은 동네 어중이떠중이한테 10억 달러 넘는 금액을 대출해 줄 만큼 만만한 은행이 아니다.
자기들이 보기에 사업성이 확실하고 최악의 경우에도 원금을 회수할 자신이 있으니까 돈을 빌려준 것일 게다.
게다가 일반적인 사람들의 편견과는 달리, 모든 사기꾼들은 지극히 계산적인 마인드로 사고하고 행동한다는 것을 최승일은 잘 알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7억 달러 투자금을 끌어내기 위해서 12억 달러를 대출받는 골에 설탕물 들어찬 사기꾼들이 있지 않고서야 말이지!’
그렇게 생각하며 최승일은 자신도 나이가 들어 괜한 걱정이 많아진 게 하고 호텔 객실 소파에 몸을 기대며 마지막 남은 의심을 떨쳐 버렸다.
이미 공무도 대강 마무리됐고, 투자 계약서에 서명만 받고 나면 남은 기간은 카나다 관광이나 하면서 자신은 생전 누려보지 못했던 농땡이나 좀 쳐볼까 하고 생각하며 최승일은 간만에 두 번째 미소를 입에 머금었다.
* * *
“기래, 기래……. 잘 풀렸다니 다행이다. 기럼 나중에 또 연락하도록 해라. 나는 걱정하디 말고……. 그럼 끊는다.”
딸칵.
카나다에서 돌아온 지 두 달 후, 최승일은 그날도 평양시 중심부에 위치한 피오니 홀딩스 사옥 40층 사장 집무실에서 업무에 여념이 없었다.
잠시 개인적인 전화를 처리한 최승일은 레드 스타 마이닝이 보유한 코발트 광산에 대한 피오니 홀딩스의 투자 계약을 마지막으로 점검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미 마틴 방은 2주일쯤 전 평양으로 날아와서 투자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그와 샴페인을 기울이며 사진까지 찍고 카나다로 돌아갔다.
이제 채광을 본격적으로 시작해서 정제한 코발트를 팔아서 수익을 올리기만 기대하면 되는 상황, 이걸 계기로 우크라이나의 니켈 광산이나 구리 같은 다른 원자재 분야에도 투자를 해볼까 하는 생각을 하던 찰나, 그의 사장실 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가 뛰어들어왔다.
그의 비서 렴정훈이었다.
“사, 사, 사……. 사장님! 최 사장님! 소식 들으셨습네까?”
“무슨 일인가? 무슨 일이 터졌길래 이리 경거망동이디? 일단 진정하고 천천히 설명을 해보게.”
“지, 지금 그거이 중요한 거이 아닙네다! 레, 레드스타 마이닝이 없어졌습네다!”
“뭐이야?”
순간 최승일의 얼굴이 약간 창백해졌지만, 그는 이내 이를 악물고 냉정을 회복한 후 렴정훈에게 빠르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꽉 붙잡고 물었다.
“똑바로 이야기하게. 레드스타 마이닝이라면 카나다의 그 코발트 광산 사업자 말하는 거이지? 공화국 대기업들과의 거래 실적이 몇 년이 넘는 기업소가 하루아침에 사라졌다니 그거이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우리가 속았단 말입네다! 레드 스타 마이닝이라는 기업은 빈 껍데기입네다! 마틴 방이라는 동무도 우리가 알았던 모든 것이 거짓이었습네다! 그 코발트 광산도 사실상 흙더미지 아무런 가치가 없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합네다! 이거를 중앙위와 서기실에 대체 어찌 소명해야 좋을지…….”
“……!!!!”
렴정훈의 횡설수설에 순식간에 최승일의 얼굴이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하지만 그가 더 뭐라고 입을 열려던 찰나, 방금 전 렴정훈이 뛰어들어온 문을 통해서 일단의 험상궂은 사내들이 들이닥쳤다.
“……그쪽은 누구시오? 미안하지만 지금은 공무가 다망한 시점이니 면담이라면 나중에 일정을 잡고…….”
“피오니 홀딩스 사장급 지도일꾼, 최승일 동지 맞소?”
“……내가 최승일이오만.”
“우리는 반부패 수사국에서 나왔소! 동지에 대한 고발이 신빙성 있는 증거와 함께 본 수사국에 접수되었으니 잠시 우리와 동행해 주셔야 하갔소. 저항하지 말고 순순히 따라오는 거이 좋을 거이요.”
“그 고발 혐의가 뭐이요? 좀 알고서나 따라갑시다.”
뭔가 심하게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에 최승일이 이를 악물며 묻자 들이닥친 수사국 성원들은 그가 몇 초 전부터 예상했던, 하지만 절대 듣고 싶지는 않았던 답을 내놓았다.
“피오니 홀딩스의 지도일꾼이라는 본인의 지위를 이용, 카나다의 레드 스타 마이닝이라는 페이퍼 컴퍼니를 통한 의도적 배임 및 공금 횡령, 나아가 착복의 혐의요. 참고로 당 중앙위에서는 레드 스타 마이닝이라는 기업소의 대표인 마틴 방이라는 동무가 최 사장 동지와 사전에 모의했음을 유력하게 의심하고 있으며 총서기 동지께서도 동무의 이런 극악무도한 배반에 대해 극히 실망하고 계시는 바임을 알려드리지. ……하기야 돈 앞에 장사 있갔소?”
#작가의 말
실제로 제대로 된 원자재 투자라면 작중 묘사된 것처럼 구렁이 담 넘어가듯 진행되지 않습니다. 작가의 전문지식 부족과 분량 및 페이스 조절을 위해 임의로 각색된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