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애하는 수령동지-289화 (289/350)

경애하는 수령동지 289화

“……유감이군. 하지만 나도 조선로동당이라는 조직의 장으로서 당원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음을 이해해줬으면 하네. 특히나 사고가 일어난 지구가 은퇴한 노간부들의 가족이나 영예군인(상이군인)들이 다수 거주하는 지역이라 당내 여론이 안 좋아. 아무리 공화국이 20년 새 상전벽해로 바뀌었다지만 이제는 로동영웅 훈장이 돈 백만 원 가치도 없게 되었다는 한탄까지 나올 정도로.”

“제가……!!! 제가…… 다음번 석유공사 사장 자리를 노릴 수 있을 때까지는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정환 입장에서는 나름 위로라고 한 말이었겠지만, 꿈이 좌절된 충격에 이영박에게는 오히려 그를 조롱하는 것처럼 들릴 수밖에 없었다.

꿈이 무너진 좌절에 비틀거리다 간신히 몸을 곧추세운 이영박이 이를 악물며 묻자 정환은 달래는 어조로, 하지만 단정적으로 말해주었다.

“인민들이 이 일을 모두 잊을 때까지 그래도 10년은 걸리지 않겠나. 아마 그때는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이 공화국을 통치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 정도 시간은 들여야 가능할 걸세.”

그 말을 들은 순간부터 이영박은 정환을 배신하기로 마음먹었다.

왜냐하면 조선석유공사 사장,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자원의 수급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자리는 그가 조국을 남에서 북으로 바꾼 이후 반평생 동안 항상 오매불망 소중히 지켜왔던 꿈의 자리였으니까.

웬만한 사람 같으면 긴 시간을 기다리더라도 정환의 신뢰를 다시 얻거나, 그것도 아니면 평양 시장직에 보임된 것에 만족하고 사는 쪽을 택했을지도 모르지만 이영박은 그런 사람이 되지도 못했고, 그럴 생각도 전혀 없었다.

평생 동안 원하는 것, 직위든 돈이든 그 무엇을 쟁취하기 위해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불도저처럼 밀고 나가는 모습이 이영박이라는 인간의 본질이었기 때문이었다.

* * *

“기런 일이 있었군.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야.”

“그렇소. 거 총서기 동지도 리 서기에게 참 너무하셨구만 기래. 하여튼 우리 같은 진정한 애국자들과 함께하게 된 거이를 축하드리오.”

“하하하…… 이해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영박의 회상이 끝나자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맞장구를 쳤다.

그리고 이영박 역시도 자신에게 동조하는 재계 수장들, 관료들과 하나하나 악수를 하면서 눈도장을 찍고 얼굴을 익혔다.

언제나처럼 요직에 있는 사람과 친하게 지내는 게 인생 지름길이라는 평생의 신조에서 우러나온 행동이었다.

‘일단 총서기를 몰아내고 나면, 이들이 공화국의 실세가 될 테니까 말이지. 그리고 지금 기름을 잘 발라놔야 석유공사 사장 자리…… 아니, 어쩌면 그 위까지 올라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윽고 상호 소개가 끝나자 그들은 본격적으로 어떻게 현 총서기 체제를 약화시켜야 할지에 대한 토론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의견을 낸 것은, 당내 고위 간부도, 유수의 대기업 회장도 아닌 바로 이영박이었는데, 여기에는 다름 아닌 자신의 (이전) 고향, 한국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경험이 가장 주효했다.

“일단 정치 쪽에서 총서기를 공격해서는 안 됩니다. 그쪽은 우리가 쓸 수 있는 힘이 한정되어 있으니까요. 총서기, 그러니까 당이 경제적으로 더 이상 간섭을 못 하도록 손발을 묶어놓으면 돈맛을 알게 된 인민들의 민심이야 자연 우리 쪽으로 기울 겁니다. 돈 싫어하는 사람 있습니까?”

“기거 입바른 소리이기는 한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이오? 게다가 그런 일을 하려면 여기 있는 사람들과 리 서기 당내 위세만으로는 조금 부족하지 않갔소?”

“우선 언론 쪽부터 장악해야지요. 그리고 포털 사이트도…… 요즘 여론은 종이신문이 아니라 다 거기서 만들어지는 거나 다름없으니까 말입니다. 그리고 당내 협력자에 관해서라면…… 이미 제가 몇 사람을 만나 협력을 약속해 놨습니다.”

“몇 사람 정도 가지고는 부족하오. 리 서기를 못 믿는 거이는 아니지만, 우리는 지금 공화국의 최고 존엄에 대한 반역으로 읽힐 수도 있는 일을 모의하고 있는 거라는 점을 명심하시오. 리 서기가 당내 중앙위 고위급들하고도 면을 트고 지내는 사이라는 거이는 알지만, 웬만한 부부장급 관료 몇 명 데리고 일을 도모했다가는 돈 이전에 우리 모가지가 싹 다…….”

“걱정 마십시오. 여러분도 아시는 이름인데, 누군지 아시게 되면 불안이 싹 가실 겁니다. 대신 비밀은 꼭 지켜준다고 약조해 주시지요.”

이윽고 이영박의 입에서 한 사람의 이름이 나오자, 그때까지도 아직 불안해 보이던 좌중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리고 그 표정을 보면서 이제 이들 사이에서 자신의 존재감이 확실해졌을 거라고 생각하며 이영박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오오오오……!!!!”

“화, 확실히 그 동지라면……!!!”

“하하하……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확실한 분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당내 비공식적인 2인자가 도와주는 만큼 이번 일은 틀림없이 잘 진행될 겁니다.”

판돈을 올인한 판에서 비장의 히든 카드를 내보인 도박사의 심정이 이런 것일까?

이영박은 거의 1년도 전부터 이 인물과 관계를 맺고 이번 일에 끌어들이느라 큰 노고를 기울였다.

신중하기 그지없는 인물인지라 그를 자기편으로 만드는 데 고생을 장난 아니게 하기는 했지만, 반평생 쌓아온 언변과 로비 실력, 친화력을 십분 동원한 끝에 마침내 성공을 거두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인물의 이름이 언급되자마자 급격히 밝아진 분위기 속에서, 장내의 논의는 빠른 물살을 타듯 급진전되어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이르렀다.

“하하…… 이거이 미제 속담에 ‘사업가들 100명이 모이면 세상에 불법인 일이 없다’라고 하더니 그야말로 일사천리구만 기래. 이제 더이상 당에 지분 가지고 텃세 당할 일 없이 자유롭게 기업 활동에만 종사할 날도 머지않았어.”

“여부가 있겠습네까, 회장 동지. 그동안 저도 당에 몸담으면서 세계적 신자유주의 조류와 반대로 가는 공화국과 당의 체계 때문에 갑갑했는데, 막힌 속이 뻥 뚫리는 기분입네다.”

“모든 일이 다 끝나면 당에서 주도하는 공공사업을 민영화시키는 거이부터 해야 하는데, 그때가 되면 당 간부 동무들 도움이 절실할 걸세. 차후 우리 북명 그룹이 영리 병원 사업 허가를 따낼 수 있게 잘 도와만 주면 자네 은퇴 후에 우리 그룹 사외이사 자리는 맡아놓은 거나 다름 없지비. 하하.”

“투자은행과 상업 은행의 분리 규제 없애는 것도 잊지 마십쇼. 이거이 GDP 15위짜리 나라에 대형 투자은행이라고 있는 게 피오니 하나뿐이니 아귀판인 세계금융경쟁에서 공화국이 이길 수 있갔습네까?”

“자자, 이러지 말고 골 아픈 이야기도 끝났는데 거사의 성공을 기원하며 한잔 올립시다.”

“아 그거 좋디! 자, 다 같이 건배!”

“건배! 사업의 번창을 위하여!”

“건배! 기업이 자유로운 공화국을 위하여! 자유시장과 자유경쟁체제를 위하여!”

잔이 부딪치고 술이 넘쳐 흘렀다.

그렇게 탐욕과 야망과 이기심이 나라 걱정이라는 허울을 쓰고 무르익어가는 가운데, 평양의 마천루들은 날이 갈수록 높이와 그 아래의 그림자들을 더 길게 드리워 나갔다.

* * *

“용환아, 너…… 나하고 관계 맺은 지 몇 년이나 됐냐? 나하고 한솥밥 먹은 지 몇 년이나 됐냐 이 말이다.”

“제가 다스 중공업 일 받아서 한 지가 군대 갔다 온 직후였으니까…… 올해로 10년 좀 넘었지 않았겠습네까, 리 사장님.”

“나 참, 이거 사장님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해야…… 지금은 시장님, 아니, 리 서기님이라고 부르랬지? 쯧, 하여간에 이래서 사람은 남이나 북이나 대학을 나와야 돼.”

비밀스러운 만남으로부터 며칠 후, 이영박은 자신의 눈앞에서 고개를 조아리는 젊은 청년을 보며 혀를 끌끌 찼다.

그의 마지막 말에 용환이라고 불린 청년은 어깨를 움찔하며 얼굴을 붉혔지만, 감히 뭐라 볼멘소리도 못하고 머리만 더욱 깊게 숙일 뿐이었다.

그리고 이런 모습이 익숙한지 이영박 본인도 별 신경 쓰지 않으며 그의 밑에서 오랫동안 지저분한 일을 맡겨왔던 청년, 리용환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나름 말쑥하게 정장을 차려입고 있었지만 눈썰미 있는 사람이라면 바지 밑단은 말려 올라가고 와이셔츠 소매는 자주 걷어붙여서 접힌 자국이 보이는 등, 이 청년이 옷차림새와는 달리 책상에서 펜대 굴리는 직종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랬는데, 용환은 이영박이 다스 중공업 시절부터 보상안에 합의해주지 않는 주민이나 철거민들을 협박하거나 입을 막을 때 쓰던 주먹들인 ‘평양 용길이 파’ 두목, 한마디로 용역 깡패였다.

계획경제에서 자유시장경제로 전환되던 과도기 유흥가와 건설판을 중심으로 잠시 대량 양산되었던 흔한 폭력조직이었지만, 현재는 당과 공안부의 단속과 등쌀에 못 이겨 해체되거나 몇몇 살아남은 조직들은 간판만 합법적 기업체로 바꿔 달고 다스 중공업 같은 건설 대기업의 하청 역할을 도맡아 하고 있었는데, 리용환도 그런 인간군상들 중 하나였다.

아무튼 이영박은 잠시 혀를 차다가도 이내 부하의 사기를 더 꺾는 건 좋지 않다는 생각에 다시 목소리를 좀 부드럽게 해서 다시 물었다.

배운 거 없고 빽도 없고 집안이 가난해 대학도 못 나온 녀석이지만, 원래 사람이란 다 각자의 맞는 쓰임새와 위치가 있는 법이니까.

“용환아, 너 내가 그동안 석유 공사 사장 자리 얼마나 애타게 바라왔는지 잘 알고 있지? 그리고 이번 프로젝트 잘 성공시키면 그 자리로 영전해서 너한테도 한몫 단단히 챙겨주겠다고 한 것도 말이다.”

“물론입네다, 리 사장…… 아니, 서기님. 항상 21세기에는 진짜 돈을 벌려면 자원을 쥐락펴락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지 않습네까.”

“안타깝지만 그거 못 하게 됐다. 한 몸 바쳐서 일했는데 헌신짝 버려지듯 버려졌어.”

“……네? 하지만 저번에는 분명히…….”

“내가 순진했어. 남의 텃밭에 그렇게 쉽게 좋은 목을 차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하지만 상관없다. 이번 일에서 전화위복, 오히려 든든한 동아줄을 잡았거든. 오히려 치고 올라가서 이 이영박이가 포기를 모르는 놈이라는 걸 만천하에 보여줘야지.”

자신의 소망 중 소망이었던 조선석유공사 사장 자리가 눈앞에서 날아간 걸 생각하면 아직도 이영박은 가슴이 쓰렸다.

석유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는 검은 황금, 현대 사회를 돌아가게 하는 원동력 등 사람마다 여러 비유가 나올 수 있지만 이십 대 초반부터 중동의 모래바람을 맞아가며 도로를 깔고 아스팔트와 콘크리트로 점철된 인생을 산 이영박에게는 단 한 가지를 의미했다.

황금, 돈, 부(富)의 원천이었다.

그것도 남한, 한국에서는 결코 손에 넣을 수 없는.

뼈 빠지게 사막에서 횃불 켜놓고 밤새도록 공구리 쳐서 건설업, 제조업 해봐야 땅속에서 돈을 퍼 올리는 중동 왕족들 주머닛돈의 극히 일부를 받아가는 거나 다름없다는 한탄, 회의감 내지 씁쓸함은 중년의 나이에 이른 현재까지도 이영박의 가슴 속 깊은 곳에 남아 있었다.

먹고 죽으려고 해도 자원이 없는 한국은, 그리고 그 한국에서 태어난 자신은 죽어라 일해봐야 첩 수십 명 끼고 한평생 손에 먼지 한번 묻혀본 적 없는 아랍 놈들 석유 판 돈의 수십 분의 일밖에 안 되는 돈밖에 벌지 못했다.

그런데 북한에서 바로 그 석유가 난다는, 그리고 북한이 이제 곧 개혁개방을 해서 기업들에게 그 문을 활짝 열 거라는 꿈의 정보는 이영박으로 하여금 반평생을 보낸 한국을 버리고 물 낯선 북조선으로 오게 만든 결단을 내리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그리고 그 꿈을 눈앞에서 놓쳤지만, 이영박은 여전히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지금 눈앞의 리용환과 자신은 어떤 의미에서 닮은 점이 있었다.

밑바닥에서 아등바등 아귀처럼 다퉈가며 끝끝내 자신의 밥그릇을 쟁취해낸다는 점, 그리고 그러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고 누구하고든 싸울 수 있을 거라는 점에서 말이다.

저 멀리 마침내 주먹패나 하던 이 녀석을 이토록 오래 부려먹고 있는 것도 어쩌면 그런 동질감 때문에서였을지도 몰랐다.

“용환아, 잘 들어봐라, 이번에 내가 서기실 줄은 못 잡았지만 대신에 그만큼, 아니, 어쩌면 그보다도 더 든든한 줄을 잡았다.”

“그, 그러십네까?”

“그렇지. 그런데 그 줄을 타고 이 공화국 맨 윗줄까지 올라가려면 네가 이 나를 한 몸 바쳐서 잘 도와줘야 돼. 그리고 그때가 되면, 너는 내 심복으로서 어딜 가도 떵떵거리면서 김대 나온 놈들 네 운전수로 부리면서 잘 먹고 잘살 수 있을 거다. 내 말 믿지?”

“여부가 있겠습네까, 서기님. 이 리용환이, 함경도 끝자락에서 태어나 배운 거 없고 시장 바닥에서 짝퉁장사, 주먹패 따라지나 하다가 공안부 교화소에서 끝장날 뻔한 거이, 서기님께서 주워다가 잘 써주셨는데 그 은혜를 갚아야 하지 않겠습네까?”

“그렇지. 그러니까 지금부터 내 말만 믿고 잘 따라와야 한다, 잘만 하면 너나 나나 이 공화국에서 백두혈통 부럽지 않게 살 수 있어. 백두혈통이 별거냐? 응?”

“그렇디요. 총서기나 돌아가신 주석님이나 결국 때 기회 시기를 잘 잡아서 최고존엄이고 뭐고 다 해먹는 거이 아니갔습네까. 서기님도 그러지 말란 법 있습네까?”

그렇게 자신을 꼬이는 이영박을 보면서 리영환은 거듭 고개를 숙이며 그렇게 아부를 거듭했다.

사실 단순히 아부라고 하기에는 리영환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백두혈통이 별거고 왕후장상의 씨가 별거란 말인가.

어차피 이놈의 조선땅은 공부를 잘해서 성공하는 놈 아니면 기회와 사람을 잘 타서 성공하는 수밖에 없다.

특히나 자신처럼 배운 거도 가진 거도, 총서기나 간부들처럼 아버지를 잘 만난 것도 아닌 놈은 더더욱.

한때 그 흔한 맥도날드도 못 들어가서 문간에서 쭈뼛거리다가 아주마이에게 동정이나 사는 그런 꼴은, 최소한 자기 아들 대에서는 당하지 않게 하겠다고 리용환은 굳게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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