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애하는 수령동지 283화
99장. 발은 현실에, 눈은 이상에
“전후 사정이라…… 어디부터 듣고 싶으신 겁니까?”
“……우선 미국 쪽에서 어떻게 총서기님의 파이브 아이즈 가맹이라는 상식 밖의 요구를 귀 기울여 듣게 되었는지 그것부터 알고 싶습니다. 저로서는, 아니 저뿐만 아니라 우리 쪽 외교 안보 라인 모두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서 말입니다.”
“죄송하지만 그건 알려 드릴 수 없겠습니다.”
“전 알아야 합니다. 대통령으로서, 만에 하나 북에서 나름 미국의 60년 우방인 우리를 이렇게 단번에 핵심 동맹국 순위에서 소외시킬 정도의 카드, 예를 들어 핵무기라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당연하지 않습니까? 미국과 마찬가지로, 저희 대한민국은 신뢰할 수 없는 상대와 기밀 정보를 공유할 수 없습니다.”
“제가 끝까지 비밀로 한다면 어쩌실 겁니까?”
“그렇다면 저는 98년 남북 대타협 이래 형성되어왔던 남북 간 상호 존재 인정이, 동시에 파이브 아이즈 가맹후보국으로서 정보 공유를 하게 될 잠재적 동맹국 사이에 가져야 할 최소한의 신뢰 관계가 깨어졌다고 판단하고 즉시 이 방을 나갈 겁니다. 그리고 이 대한민국의 모든 유무형 외교자산을 동원하여 북한이 파이브 아이즈에 가맹하는 것을 막을 겁니다.”
“……그렇다면 좋습니다. 하지만 대통령님을 포함해 남조선에서 해당 사실에 대해 아는 사람이 5명 이내로, 그러니까 최고 보안 사실로 다뤄주셔야 한다는 약속을 먼저 해주셔야 합니다.”
“물론입니다.”
노윤현의 약속을 듣고 나서야 정환은 자신과 대외정찰총국이 손정의와 소프트뱅크의 뒤를 봐줘 가면서 사실상 일본의 인터넷 전역을 도청했다는 것, 그리고 10여 년 동안 축적된 거대한 빅 데이터를 미국 NSA에 넘겨주고 앞으로도 기간망에 대한 액세스 권리를 조건으로 파이브 아이즈 가맹에 대한 동의를 받았다는 것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1억2천3백만의 인구를 가진 GDP 세계 3위 대국의 인터넷 백본 데이터라는 게 어느 정도의 가치를 가진 것인지 비전문가는 쉽게 이해하기 힘들 법도 했다
하지만, 노윤현은 (최초의 인터넷 정치인 팬 카페를 둔 사람답게) 이전부터 IT 기술에 제법 관심이 많았고 정환의 말을 이해하는 것이 그다지 어렵지는 않았다.
그리고 약 10분 정도 이어진 설명을 듣는 동안 노윤현의 표정은 처음에는 ‘?’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는 표정이다가 이내 창백해졌다가, 다시 침착해지는 등 여러 변화를 보였지만 최종적으로 그가 정환에게 보여준 감정은 탄식이었다.
정환의 설명이 끝나자 노윤현은 작은 한숨까지 내쉬며 입을 열었다.
“정말이지 국제사회란 눈 감으면 코 베어 가는 곳이군요. 이 대통령이라는 직위에 취임한 후로 미국을 비롯한 서방 강대국들과 열강들이 자신들의 헤게모니를 지키기 위해 어디까지 냉혹해질 수 있는지 잘 알고 있다고 자부했는데…… 이제 보니 전 우물 안 개구리였지 않습니까.”
이제까지 (여러모로 꼴 보기 싫은) 일본이 미국의 동맹국 리스트에서 최상단에 있다고 생각했고, 또 내심 그런 ‘지위’를 부러워하는 동시에 한국이나 일본이나 결국 누가 미국 주인님에게 사랑을 더 받는 신세인가 경쟁하는 꼴이라고 자조하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보니 그 일본도 미국에는 언제든 거래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대체 가능한 우방국이었다는 이야기 아닌가.
나름 동북아 균형자론 같은 걸 주창하며 미국 중심의 아시아 - 태평양 질서에서 벗어나 보려 했던 노윤현으로서는 허탈하면서도 열 받는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런 폐쇄적인 영미권 서방 강대국들의 이너서클에 감히 발을 들이려 하는, 그리고 실제로 성공에 거의 가까이 간 듯한 눈앞의 북한 총서기라는 인간의 선견지명과 대담함에 대해서 감탄을 금하지 않을 수 없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그 주인공인 정환은 지금 그런 인사치레보다는 당장 노윤현의 대답을 듣는 게 더 급했다.
“너무 그러실 건 없습니다. 남조선도 이제는 극동아시아 내에서 무시 못 할 선진 지역 강국에는 충분히 들어간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적인 견해고, 그래서 이런 논의가 진행될 수 있었던 겁니다. 이제 이 문제에 대해서 남조선의 협조와 이해를 얻을 수 있다고 간주해도 될까요?”
“몇 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우선 북한과 보조를 맞춰 이 새롭게 결성될 정보공동체에 가입하게 되면 그 연맹체 내에서 우리 대한민국의 구체적인 지위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현재까지, 그러니까 맥케인 대통령이 의식불명 상태에 빠지기 전까지 논의된 바에 따르면 파이브 아이즈는 ‘태평양 정보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개명될 것이고 그 공동체는 기존 가맹국들에 더해서 우리 공화국과 남조선이 가맹하는 형태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름이야 뭔 상관이냐 할 수도 있겠지만, 혹시 있을지 모를 신규 가맹국들과 기존 가맹국 간 차별대우를 없애고 소속감을 높이기 위함이라고 NSA 국장이 제안하더군요.”
‘뭐 말이야 그렇게 해도 분명히 차별이 있겠지만.’
일부러 이름에서 파이브니 어쩌니 하는 숫자를 없애고 ‘공동체’라는 두루뭉술한 이름을 붙인 건 과연 약삭빠른 한 수라고 정환은 내심 입맛을 다셨다.
처음부터 ‘파이브 아이즈 + 1’ 같은 어정쩡한 형태를 제의하면 그 ‘1’인 북조선, 혹은 차후 추가될지 모를 n개 가맹국들의 불만이 나올 게 뻔하니 일단 숫자로 보이는 등급을 없애주겠다는 이야기 아닌가.
물론 눈에 보이는 등급은 없어져도 눈에 안 보이는 등급까지 같이 사라질 거라고 바로 믿을 정도로 정환은 순진하지 않았지만, 일단은 그 제의에 동의하는 척한 게 불과 한 달쯤 전이었다.
일단 ‘모든 가맹국들은 동등하다’ 조항이 명시된 협정안에 정상들이 서명을 하고 나면 각국 내부기준으로는 어쨌거나 서면으로 증명될 수 있는 구속력이 생기는 것이고,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기적적인 성과라고 스스로를 달랬던 것이다.
정작 개정된 UKUSA, 아니, 태평양 정보공동체 협정이 상원을 통과하기 전에 맥케인이 쓰러져 버리는 바람에 모든 게 일시정지 상태가 버렸지만.
그러니 정환으로서는 자신이 발생시킨 이 개정안의 동력이 상실되고 허공으로 유야무야 흩어지기 전에 최대한 빨리 상원을 지나치고 대통령의 책상에 개정안을 올려놔야만 했다.
“참고로 이 새로운 공동체가 세븐(Seven) 아이즈 같은 이름이 아닌 건 해당 정보 네트워크가 겨냥하는 나라들이 어디인지 명확히 하고 그 나라들에 안보를 위협받는 해당 지역 국가들의 차후 가맹 가능성을 열어두기 위해서입니다. 더 궁금한 게 있으십니까?”
“……콘돌리자 라이스 대통령 권한대행은 백악관 내에서 저와 한국 내의 반미 기류에 대해 우려하는 인사로 알고 있는데, 그 점이 뭔가 영향을 끼치지는 않겠습니까?”
“또 한 가지 더, 이 방 밖으로 나가지 말아야 할 비밀을 알려 드리자면, 그 점에 대해서는 제가 이미 핫라인을 통해 라이스 권한대행에게 양해를 구했습니다. 라이스 권한대행도 국외의 잠재적 반미주의자인 노 대통령님보다는 국내에서 자신을 괴롭히는 상원이 더 골칫거리인 모양이더군요.”
“……그럼 마지막 질문입니다. 사실 파이브 아이즈…… 아니, 총서기님 말씀대로라면 이 태평양 정보 공동체의 가입은 친미국가인 우리 대한민국으로서는 가능하기만 하다면 손뼉을 치고 기뻐해야 할 일인 게 사실입니다. 당장 국방부 장성들과 수석들이 이 대한민국의 국격과 위상이 한 단계 높아졌다고 얼싸안고 기뻐할 게 눈에 보이는군요, 하지만…….”
“하지만……?”
“……동시에 그 친구들이 얼싸안다 말고 심각하게 물어올 질문을 저도 안 하지 않을 수 없군요. 늦든 빠르든 이 사실을 알게 될 중국의 반발은 어떻게 대처하실 생각이십니까, 총서기님?”
“…….”
걱정스러운 노윤현의 질문에 드디어 예상하던 질문이 나왔다고 정환은 생각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자신의 대답 역시 준비되어 있었다.
10여 년 전부터, 정확히는 89년 천안문 학살 때부터 설명하기 힘든 예감에서 근거 있는 예측으로, 그리고 예측에서 확신이 되어버린 정환의 이러한 진의는 김용건을 비롯한 당정의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었다.
그러한 일을 처음으로 털어놓게 된 유일한 사람이 지금 잠재적 적대국 내지는 경쟁국이라 할 수 있는 남조선의 지도자인 노윤현이라는 건 참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대충 얼버무리거나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가슴을 열어 심장까지 보여줘야 할 순간이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 아닌 밤중의 홍두깨 같은 협조 요청을 노윤현과 한국 정부에 납득시킬 수 있는 길이 최소한 정환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공화국의 파이브 아이즈 가맹 사실이 중국에 알려질 경우, 조중 관계는 신속하게 악화될 겁니다. 두 번 다시 가맹 이전으로는 돌아가지 못할 만큼.”
“그러니까 총서기님이라면 그러한 리스크에 대한 대책이…….”
당연히 대책이 있을 거라고 믿는 눈으로 정환에게 묻는 노윤현에게 정환은 고개를 저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정도 수준의 외교 노선 전향에 대한 중국의 반발을 상쇄할 수 있는 근본적인 대책은…… 제가 아는 한 존재하지 않습니다.”
“……네?”
“물론 미봉책이라면 있습니다. 물론 시간을 들여 수습하고 친서와 외교적 수사와 온갖 변명이 오가겠지만…… 최소한 가맹 이전의 ‘혈맹’ 관계로는 영영 돌아가지 못할 겁니다. 중국 공산당은 멍청이가 아니니까요.”
“아니, 그럼 대체 왜……?”
‘왜 그럭저럭 친하게 지내던 중국과의 관계를 파탄 낼지도 모르는 위협을 무릅쓰고 이런 일을 벌였느냐’라고 노윤현이 말하려던 찰나, 정환은 자신도 다 안다는 듯 정중하게 손을 들어 그의 말을 잠시 가로막았다.
“저도 압니다. 경제적인 보복은 당연하고, 자칫하다가는 전쟁 날지도 모르는 위험한 일이지요. 뭐 저쪽에서 정말로 무력을 동원할 생각이라면 공화국을 식민화하는 게 아니라 꼭두각시를 하나 내세워서 위성국가화를 시키려 하겠지만…… 하여간 노 대통령님이 방금 전 물으셨어야 했던 질문은, ‘어떻게 중국의 반발을 수습할 거냐’가 아니라, ‘그런 반발이 있을 것을 알면서 왜 이런 미친 짓을 무릅쓰느냐’가 되어야 하겠죠.”
“그렇습니다만…….”
“요약하면, 제 개인의 5년 후의 미래보다 공화국의 20년 후를 생각하기 때문이랄까요.”
정환은 자신이 총서기가 된 이래, 아니, 25년 전 북조선 땅에 발을 디딘 이래 처음으로 ‘현실’이 아닌 ‘이상(理想)’을 입에 담았다.
그는 이제까지 항상 현실주의자였고, 또 학총련이나 리경수처럼 현실을 외면하고 이상만을 좇는 바보들을 항상 비웃어왔으며 지금도 그러한 철학에는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정치에는, 그리고 국가운영에 있어서는 이상이란 서푼의 값어치도 없다고 단정 짓는 냉소주의자라는 뜻 역시 아니었다.
단지 그 자신의 입에 담을 그 이상과 목표가 결코 일개 호사가의 헛소리쯤으로 끝나게 두고 싶지 않아서 지난 25년간 그 이상을 현실에 가까워질 수 있도록 피땀을 흘려 준비한 것이다.
사실, 정환이 처음으로 권력을 잡고 싶다고 생각한 계기부터가 이룰 수 없는 이상에 근거하기도 했고.
“단기적 지정학 관점으로 본다면, 외교적 친중(親中) 노선은 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게 옵션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사실 이 한반도 땅에 문명이 처음 들어선 이래 거의 모든 국가들은 대륙 세력의 피할 수 없는 간섭 내지는 영향력을 받으며 살아왔습니다. 자신들에게 반기를 드는 정권이 들어서면 대륙에서는 반드시 침략을 시도하거나, 최소한 정권을 교체시켜서 자신들에게 충성스러운 정권을 앉혀놓고 제국 주변부의 안정을 도모했습니다.”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지요. 사실 지금도 그렇고요.”
“……그러니 굴욕적이지만 따지고 보면 저에게 있어서는 그게 제일 현명한 길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독재자들은 모험하는 것을 매우 싫어합니다. 힘들여 손에 넣은 자신의 권력에 대한 불안정성을 초래하니까요. 사실 저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왜……?”
“저 하나는, 제 대(代)에는 그렇게 살아도 되겠지요. 제 일신의 안위와 권력 보전만 고려한다면, 적당히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친중 쪽으로 한발 걸쳐두고 남조선의 주한미군과 중국 국경 사이의 완충국 수장이라는 외교적 프리미엄을 누리며 죽을 때까지 안정적이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면서 떵떵거리며 사는 거 말입니다. 그렇게만 살면 중국 측에서는 최소한 저 하나는 절대 건드리지 않을 겁니다.”
여기까지 말한 후 정환은 잠시 입을 다물다가 이내 노윤현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결론을 내려주듯 말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그건 사실상의 영구분단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제까지 김 총서기님에 대한 한국과 세계 정치학자들의 평은 통일 같은 민족적 프로파간다에 관심 없는 현실적 정치인이라는 것이었는데…… 아무래도 그 평이 틀린 모양이군요.”
“사실 그건 지금도 그렇습니다. 저는 입만 열면 한민족의 재회니 민족의 숙원 달성 같은 감수성 짙은 구호를 외치는 이상적 통일주의자는 결코 아니고, 앞으로도 아닐 겁니다.”
“…….”
“……하지만 정치는, 그리고 정치인의 사명은 동서고금과 체제를 막론하고 역사의 진보에 기여해야 한다고 항상 믿어왔습니다. 그리고 그런 제 견지에서…… 남북이 영구분단을 유지하는 것은 진보도 변화도 아닌 퇴보의 일종이라고 볼 수밖에 없군요.”
두 사람 사이에는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하지만 이내 노윤현은 조심스럽게 다시 정환의 생각을 타진하듯 입을 열었다.
“……다른 방법은 생각 안 해 보셨습니까? 미중 양국과 근처 열강들에 외교적으로 통일에 대한 찬성을 얻어내서 통일을 이룬다는 것은…….”
“다른 국가는 몰라도 중국은 절대 불가능합니다. 중국은 기본적으로 자신들과 육지로 맞닿아 있는 곳에 또 다른 강대국, 내지는 강대국이 될 가능성이 있는 국가가 생기는 것을 전력으로 막을 것이고, 그렇기에 중국 입장에서 통일을 용인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본인들이 공화국을 내부적으로 통제할 방법이 전무할 게 확실한 상황에서의 마지막 선택지입니다. 예를 들어…….”
이 말을 하는 정환의 눈은 잠시 지금 이 서기실이 아니라 저 멀리 과거로 향하는 듯하다고 노윤현은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지금 짐작하는 과거와 정환이 지금 떠올리는 과거는 전혀 다른 종류라는 사실은 노윤현조차도 알지 못했다.
“……그러니까 김정일 김일성처럼 자신의 권력을 국가 존속보다 우선순위에 놓는 수령들이 본인들 이외의 모든 잠재적인 차기 공화국 지도자 후보들을 없애 버리고, 또 그러한 세습체제의 존속을 위해 다른 모든 국가적 역량과 경쟁력, 심지어 국가구성원들이 누려야 할 최소한의 생존권조차 기꺼이 포기한 상태라던가 말입니다. 사실 그런 경우에서조차 중국으로부터 통일에 대한 동의를 얻어내는 건 대단히 어려울 겁니다.”
이 부분은 내가 직접 봐서 아주 잘 알고 있지, 라고 정환은 마음속으로 이죽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