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애하는 수령동지 275화
96장. 보이지 않는 전쟁
정환의 짧지만 간결한 대답은 모든 사람이 예상할 수 있는 것이었지만, 예상외로 김용건은 바로 고개를 끄덕이지 않고 비서로부터 급하게 몇 마디를 더 전달받더니 이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머뭇거렸다.
그 표정을 본 정환은 그가 다음에 할 말도 바로 눈치챘다.
“아무래도 순순히 물러나지 않을 모양인가 보군.”
“……그렇습네다. 폭로가 베이다이허에 전해지자마자 무려 보시라이 주석이 직접 이 일에 대해서 지시했다고 하더군요. 미국의 압력에 맞서기 힘들다면 혈맹으로서 국제무대에서 외교적으로 편을 들어줄 의향이 있다고…… 하지만 거기에는 필수적인 조건이 있는데…….”
“스노든의 신병을 넘겨받아 자신들이 관리하겠다는 것이겠지. 그리고 일단 한 번 국경을 넘어가면, 스노든 씨는 두 번 다시 중국 밖으로 나갈 수 없을 테고 말이야.”
훤히 보인다는 투로 이야기하는 정환의 말에 서기실이 일제히 은밀한 불만과 분노로 가득 찼다.
이전부터 북조선을 대하는 중국 공산당 측의 태도가 거만하기는 했지만, 외교의 장에서는 그래도 혈맹이랍시고 어느 정도 대등하게 체면치레를 해주었는데, 김용건의 지금 말에 따르면 이건 그야말로 노골적인 양보 요구였던 것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믿고 국가원수인 총서기가 보증까지 서주며 망명 온 사람을 맥없이 넘겨준다면, 그야말로 위성국가 인증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그리고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는 김용건은 이런 정환의 짐작이 맞다는 것을 확인해 주었다.
“……직접적으로 요구해오지는 않았지만 중국 대사 말을 들어보면 대단히 노골적으로 암시를 하고 있습네다. 아무래도 보시라이 주석의 전매 특허인 대미(對美) 프로파간다에 동원하려는 듯 합네다만…….”
말끝을 흐리는 김용건이 끝내지 못한 문장 끝에는 ‘아무래도 딱 잘라 거절하는 거이는 좀 더 생각해 보심이……’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음은 누구라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때, 서기실에서 일련의 답답한 대화를 듣고 있던 한 사람이 일어나더니 비지땀을 흘리며 정환에게 말을 건넸다.
머뭇거리며 입을 연 그 사람은 바로 현재 이 모든 국제적 분규의 시발점이 된 폭풍의 눈, 에드워드 스노든이었다.
미국 대통령에게 전화가 왔다는 말을 관용차에서 듣고는, 안전가옥으로 바로 향하지 않고 옆에서 듣고 싶다며 강력하게 주장한 끝에 지금 이 자리에 있게 된 것이다.
그는 두려움과 불안에 입술을 조금씩 떨면서도 힘들게 말을 꺼냈다.
“……초, 총서기님. 제, 제가 망명 당시 제시했던 조건은 기억하십니까? 제가 이 폭로를 결정했을 때 그 장소를 홍콩이나 스위스가 아닌 북조선 평양으로 정한 이유는…….”
“물론 기억합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다시 한번 약속드리겠습니다, 스노든 씨. 저는 스노든 씨의 폭로를 미국 국민이나 혹은 타국의 무고한 시민의 자유나 생명을 침해할 의도로 이용하지 않을 겁니다.”
아직도 그를 완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목소리를 떨며 정환에게 다시 한번 확인을 받는 스노든을 정환은 다시 한번 안심시켰다.
스노든은 메릴랜드에서 북조선으로 망명하기 전 그에게 접촉한 대외정찰총국 요원에게 단순하지만 명백한 조건을 내걸었다.
어찌 보면 지켜질 거라 기대하기 어려운, 한편으로는 세상 물정에 어두운 사람이나 생각할 수 있는 순진하기 그지없는 조건들이었지만, 당시의 스노든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라고 정환은 생각했다.
그 조건들이란 다음과 같았다.
-자신은 프리즘 프로그램과 그 전모에 대해서 폭로하기 위해 망명하는 것이며, 결코 사랑하는 조국인 미국을 배반하거나 반역을 저지르기 위해 이러한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폭로는 미국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는 연방정부가 자신의 폭로를 차단하거나 혹은 자신을 암살해 버리는 사태를 막기 위해 그 장소를 평양으로 잡은 것뿐이지, 독재자에게 정치적으로 이용당할 생각은 전혀 없다. 따라서 모든 일이 해결된다면 언제고 미국으로 돌아갈 것이다.
-이러한 조건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자신은 미디어에 자신이 협박당하고 있음을 알릴 것이며 북조선 측의 어떠한 협력 요구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내심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건, 정환은 스노든의 이러한 조건들을 수락했고, 그 결과 스노든은 납치가 아닌 자발적인 망명이라는 형태로 근처의 공항에 대기하고 있던 북조선의 총서기 전용기에 자기 발로 몸을 실은 것이다.
그리고 스노든이 불과 몇 시간 전 평양 인근의 군 공항에 내려서자마자, 그는 사전에 약속받았던 조건 중 하나인 전 세계 언론에의 즉각적인 폭로를 제공받았다.
그게 바로 방금 전 맥케인으로 하여금 분노에 가득 찬 핫라인을 평양 서기실로 걸게끔 만든 프리즘 프로그램의 불법적 국내도청에 관한 1차 폭로였다.
“스노든 씨, 약속합니다. 나는 당신이 어떤 인신 상의 위해나 협박, 기소나 감옥행의 위협 없이 당신의 신념인 개인정보와 사생활의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를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겠습니다. 당연히 스노든 씨를 중국이나 기타 다른 국가에 넘기지도 않을 것이고 말입니다. 스노든 씨 본인이 원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물론입니다.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키겠습니다. 하지만 그러려면은 일단 지금 당장은 스노든 씨도 제 요구에 어느 정도 따라주셔야 합니다. 지금 당신을 미국에 넘겨주면 당신에게는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45년 형을 받는 것 외에는 다른 결말이 없을 테니까요. 안 그렇습니까?”
“그, 그렇지요……. 알겠습니다. 총서기님이 요구하신 대로 우방국 정상 도청에 관한 2차 폭로는 일단 어느 정도 유예를 두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모든 일이 잘 풀리면 스노든 씨는 망명지를 불안하게 전전하는 신세가 아니라, 어떤 신변의 위협 없이 염원하던 대로 시민 자유를 위하여 발언할 기회를 얻게 되실 겁니다. 외국에서가 아니라, 조국인 미국에서 말입니다.”
“가, 감사합니다…….”
“그럼 일단 지금은 안가로 가시지요. 지금은 스노든 씨의 심신의 안정과 보호가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합니다. ……동무들, 스노든 씨를 데리고 나가게. 김 총리는 여기 남고.”
곧 에드워드 스노든과 다른 간부들이 서기실에서 우르르 나가자, 방 안에는 김용건과 정환 둘만이 남았다.
문이 닫히자마자 김용건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정환에게 물었다.
“중국 쪽 일…… 정말로 밀고 나가시갔습네까? 로씨야는 미국의 반발을 우려해서 한 발 빼는 듯하지만…… 보시라이 주석에게 스노든 같은 좋은 먹잇감을 결코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겁네다. 자국 내 불만을 정당하게 외부로 돌리고 국제사회에서 비난받아 왔던 중국 공산당의 검열을 정당화시킬 좋은 기회니까 말입네다.”
안 그래도 시진핑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워 무력으로 몰아내고 슬슬 자리를 잡아가는 보시라이 체제의 첫 대외 영향력 투사 대상이 되지 않을까 김용건은 근심이 가득한 듯했지만, 다행히 정환에게는 이미 대답이 준비되어 있었다.
“조만간 스노든에게 기자 회견을 시켜서 자신은 미국 연방정부가 이러한 자국 내 불법 도청 프로그램에 대해 전면적으로 재검토하지 않으면 북조선을 제외한 그 어느 곳으로도 가지 않을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하게 만들 걸세. 우리 당 외무성이 아니라, 스노든 자신의 입으로 말이지. 그럼 일단 대강 면피는 될 걸세.”
“……확실히 기건 기렇겠군요.”
어떤 일이 있어도 스노든의 신병을 중국에 인도하지 않겠다는 거부 의사를 직접 밝히는 게 아니라 ‘스노든 본인이 싫다니 우리도 어쩔 수 없다’라는 핑곗거리를 만들겠다는 정환의 생각은 확실히 효과적이었지만, 여전히 김용건의 얼굴에서는 근심이 가시지 않았다.
그도 외교 최고 책임자로서 총서기의 현 계획을 전부터 알고 있었던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지만, 사안이 사안이다 보니 미국 쪽에만 신경 쓰다가 중국 쪽 압력이 이렇게 강할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하기야 수십 년을 이어온 중국의 집단지도체제가 무력화되고 보시라이 같은 무모하고 포퓰리즘적인 지도자가 중국의 전권을 잡을 것이라고 누가 예측할 수 있었겠느냐만은.
“……기건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이라는 걸 잘 아시지 않습네까. 중국인들에게는 사실상 눈 가리고 아웅이나 다름없습네다. 스노든이라는 큰 고기가 그물망에 제 발로 들어왔는데, 그걸 저희 공화국 혼자 먹겠다고 하니 배알이 안 꼴릴 수 없지 않갔습네까.”
“나도 아네. 하지만 스노든은 현재 우리 공화국이 미국과의 이번 협상에서 써먹을 수 있는 유일한 ‘채찍’일세. 이미 1차 폭로로 공포탄은 쐈고, 2차 폭로로 진짜 실탄을 쏘기 전에 ‘당근’을 제시해야 우리가 원하는 걸 얻어낼 수 있네. 하지만 그전까지는 스노든이라는 채찍을 들고 있어야 해. 잘못하다가는 당근만 빼앗기고 빈손으로 나앉을 테니까.”
“……아까 스노든 동무에게 하신 약속, 참말이십네까?”
“날 믿게. 아까 전화통화에서도 맥케인은 자국민을 대상으로 벌어지는 이런 불법 도감청에 대해서 분명히 불쾌해하는 눈치였어. 대통령이라는 입장과 우리가 한 짓이 있으니 겉으로 티는 못 냈겠지만. 하여간 스노든과 그가 가진 정보는 현재 우리가 가진 두 가지 협상 카드 중 하나일세. 만에 하나 2차 폭로까지 발표되는 일이 생기면 미국 정보당국은 괘씸죄 때문에서라도 무슨 수를 써서든 그를 감옥에 처넣으려 할 테니 평생 고국으로 돌아갈 생각은 접어야겠지만 그 경우에는…….”
“……그 경우에는 우리 공화국의 대미 관계도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파탄 날 거이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성공시켜야 하겠디요.”
정환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김용건은 어깨가 무겁다는 듯 작게 한숨을 쉬었다.
양대 강대국 사이에 끼어 생존을 도모해야 하는 국가의 숙명이라고는 하지만 참으로 위험하기 짝이 없는 도박이라는 게 새삼 실감이 나서였다.
그리고 말은 하지 않아도 이런 감상은 정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이 정도로 대놓고 압력을 가해온 건 확실히 예상 밖이다. 정권 탈취 후 고작 1년 지났는데 설마 그사이 내부 정리를 다 끝내고 미국하고 각을 세우겠다는 건가? 아니, 그건 아니겠군. 김 총리 말대로 국내 불만 세력을 미국과의 갈등으로 침묵시키겠다는 거겠지. 보시라이가 아니라 시진핑이 그 자리에 있었을 때도 그랬고 말이야.‘
정환은 내심 침음하면서 겉으로는 씁쓸한 웃음을 입에 머금지 않을 수 없었다.
유력한 경쟁자였던 시진핑을 실각시키고 고작 1년, 보시라이가 내부 정리를 다 끝내고 북조선의 친미 행보에 본격적으로 압력을 가해올 때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테니 그전에 확실한 안전보장 조약을 미국과 체결해놓자는 심산이었는데…… 그 계산이 빗나간 것이다.
최근 들어 자신이 자꾸 틀리는 일이 늘어간다는 생각에 가슴 한구석에서 불안감이 스멀스멀 기어왔지만 정환은 마음을 다잡았다.
어차피 자신이 알고 있는 세계와 현재의 세계는 이미 달라질 대로 달라졌고, 그러니 자신이 모르는 일이나 예상 밖의 변수가 출현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무엇보다, 이미 호랑이 등에 올라탄 거나 다름없는 현 상황에서 흔들리거나 망설이면 그대로 끝이었다.
자신도, 자신이 만들어온 것이나 다름없는 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김 총리, 주성환 유니온 사장을 서기실로 부르게.”
“주 사장 동무라 하시면……?”
“이번 G20 정상회의에 참석할 때 동행시킬 생각일세. 그전에 이번 유니온에서 런칭할 최신 서비스에 대해 브리핑을 듣고 싶군.”
* * *
“스노든을 넘기길 거부했다고? 김정환 총서기가? 이 내가 직접 지시한 일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전달받고도 말인가?”
“그, 그렇습니다. 주석님. 돌려서 말하기는 했지만…… 사실상 스노든의 입을 통해서 싫다고 말한 거나 다름없다는 것이 외교부의 분석입니다.”
“……조선의 동지들이 요즘 조금씩 재미없게 논다 싶었는데 이제 선을 조금씩 넘기 시작하는군. 아무래도 근래 경제 발전을 좀 하더니 어느 쪽이 상국(上國)인지 잊어버리기 시작한 모양이군 그래.”
그로부터 일주일 후, 평양의 서기실로부터 멀리 떨어진 중국의 중난하이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가 주석이자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보시라이는 자신의 이태리 수제 양복 소맷자락에 묻은 먼지를 떨어내며 가소롭다는 듯 그렇게 중얼거렸다.
평상시 인민들 앞에 설 때는 카메라를 의식하느라 중국 국산 브랜드만 입고 또 그걸 열심히 선전하지만, 무대 아래로 내려온 보시라이의 모습은 그런 소탈한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는 걸 측근들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 중 그 누구도 그런 사실을 입에 올리거나 하다못해 불평을 할 생각조차 못 했다.
보시라이라는 사람은, 자신에게 수십 년 충성을 바쳐온 측근도 내다 버리는 데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인간이었고, 또 젊은 시절부터 그것이 권력을 잡는 비결이라고 믿으며 자라온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그로서도 지금 이 북조선이라는 허울 좋은 혈맹이 보여주는 단독 플레이는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물론 그 국가수반인 김정환의 머릿속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군. 동지 여러분, 우리 없이는 미국 양키들이 미쳐 날뛰는 후폭풍을 감당할 수 없을 거요. 아니, 그전에 대체 스노든 같은 대어를 어떻게 감지하고 미국에서 빼돌린 거겠소?”
“최근 조선 동무들이 연변 자치주까지 저들 집인 양 드나들더니, 이제 점점 간덩이가 커지나 봅니다. 머지않아 강력한 경고를 보내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상무위원 중 보시라이의 측근 한 명이 다분히 감정 섞인 조언을 올렸지만 다른 상무위원들도 ‘일단 침착하고 외교적으로 풀자’라는 온건책을 제시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대부분의 인사들이 서로 고개를 주억거리며 최근 북조선이 점점 따로 놀고 있음에 찬성하며 그 말에 동조했다.
지난 20여 년간 이루어져 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연변에 대한 종속화가 중국 최상층부에까지 조금씩 위기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물론 그들 중에서 최고 권력자 보시라이에게 면전에서 다른 방책을 제시할 만큼 간덩이가 큰 사람이 없다는 방증이기도 했지만.
그리고 그 광경을 보며 보시라이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결론을 내렸다.
“곧 G20 회담이오. 그 자리에서 김 총서기에게 내가 우회적으로, 하지만 단단히 경고를 줘야겠소. 혈맹의 정리와 은혜를 잊지 말라고, 좀 더 직접적으로 표현하면…….”
“표현하면……?”
“우리 중국과 미국 중 어느 쪽의 친구가 될 것인지 언제나 태도를 확실히 하라는 것이지! 그리고 이번처럼 이상한 수작을 도모했다가는 양국 모두에게 버림받을 거라는 점도. 동무들, 다음 해 춘절이 되기 전에 스노든은 베이징에 들어오게 될 거요. 그를 인민일보에 세워놓고 양키들의 위선을 폭로하게 될 날이 벌써부터 기다려지는군.”
이러한 각국과 각 지도자 간의 이해관계가 얽히고설킨 와중, 그리고 동시에 에드워드 스노든이 폭로한 프리즘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기 시작한 이때, 마침내 파란의 G20 정상회의가 일본 도쿄에서 개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