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애하는 수령동지 274화
“…….”
정환의 요구에 전화기 너머 맥케인은 잠시간 침묵을 지켰다.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는 미국 대통령의 반응에 동석해 있던 당 간부들은 긴장과 당황이 역력한 표정으로 안절부절못했지만, 정환은 이미 맥케인이 뭐라고 대답할지 알고 있다는 듯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마침내 맥케인이 정환의 요청에 대한 답을 주었다.
그리고 그 답은 정환 본인이 당연히 예상한 대답이었다.
“……지금 그 말이, 그러니까 파이브 아이즈에 가입하고 싶다는 것이 북조선이 에드워드 스노든의 망명을 받아주신 이유입니까? 총서기님? 우리와의 협상에서 압박수단으로 쓰기 위해서?”
“말하자면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더 들어보시면…….”
“들어볼 것도 없겠군요. 이건 각료나 보좌관들과 논의할 것도 없이 이 자리에서 바로 답을 드릴 수 있습니다. 대답은 NO입니다.”
“……!!”
단호한 맥케인의 선언에 간부들의 얼굴이 일제히 굳어졌고 정환도 잠시 입을 다물었다.
저쪽에서 끝까지 들어보지도 않고 협상의 끈을 잘라버린 것이다.
“국가 간의 동맹이란, 특히 공동의 적을 둔 동맹이란 긴 시간에 걸쳐 쌓아온 신뢰와 공유할 수 있는 가치관, 그리고 무엇보다 공통의 이해관계와 국익을 바탕에 두고 이루어지는 것이 외교의 기본입니다. 지금 북조선과 총서기님이 저희에게 보여주는 행동은 그러한 덕목과는 전혀 거리가 멀군요.”
“…….”
“무엇보다 저희 미합중국은 인질을 잡고 저급한 협박질이나 해대는 국가와는 결코 동맹을 맺지 않습니다. 정보 공유는 말할 것도 없고 말입니다. 솔직히, 세기의 리더인 동시에 투자자라는 평을 세간에서 듣고 계시는 김 총서기님이 어쩌다 이런 잠꼬대 같은 생각을 해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더 생각할 가치도 없다는 투로 거절의 이유를 말하는 맥케인의 말은 누가 들어도 지당한 것이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동석해 있는 간부들 대부분은, 심지어 대외경제성 부부장 장성택까지도 이번만큼은 정환이 도무지 납득하기 힘든 무리수를 던졌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파이브 아이즈란 단순히 미국의 동맹국이라는 단어로 요약될 수 있는 국가들의 모임이 아니었다.
파이브 아이즈는 단순히 국익이나 이해관계의 일치를 기반에 둔 일시적 동맹이 아닌, 영어권 - 기독교 - 앵글로 색슨이라는 언어적, 문화적, 민족적 배경에서 미국과 완벽하게 함께할 수 있는, 운명공동체라는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닌 국가들만의 모임인 것이다.
말 그대로 미국의 세계 패권을 보조하며 때로는 그 일각을 담당할 수 있는 혈맹 중의 혈맹.
그러한 국가들의 모임이 파이브 아이즈이며 한국전쟁부터 베트남 전쟁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가장 든든한 우방이라는 외교적 위치를 자처하고 내심 소망하는 한국도 엄두를 못 내는 위치인데, 하물며 북조선은 미국과 관계를 복원한 지 이제 겨우 20년이 될까 말까 하다.
물론 날이 갈수록 커져 가는 중국 견제에 가장 주요한 위치라는 필요성과 걸프전에서 함께 싸웠다는 최소한의 역사적 유대가 있기는 해도, 북조선이 파이브 아이즈에 가입하겠다는 것은 누가 봐도 어불성설, 무지의 소치 아닌가.
그리고 이러한 감상은 맥케인도 마찬가지였는지 이제 그의 목소리에는 어린아이를 훈계하는 듯한 조롱조마저 담겨 있었다.
“부끄러운 줄 아시지요, 총서기님. 동맹국의 약점을 잡고 같잖은 협박이나 하면서 더 나은 외교적 대우와 우선순위를 바란다니, 시카고 뒷골목 갱스터들도 이런 짓은 안 할 겁니다. 아니, 이 행위의 도덕성을 떠나서 이런 수작이 정말로 통할 거라고 판단하신 겁니까? 솔직히 말해 총서기님의 도덕성과 현실 인식 능력 중 어느 쪽이 더 심각한지 헷갈릴 지경…….”
“하하,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그쪽 아닙니까, 맥케인 대통령님? 겉으로는 미국은 세계 자유와 민주의 수호자니, 중국과 러시아를 보고 인권탄압국이니 온갖 비난을 하시면서, 정작 미국 정보기관들은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불법적인 도감청을 일삼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지금 그런 국가의 수장께서 저에게 도덕에 대해 한 수 가르치시겠다는 겁니까?”
“……!!”
“스노든 씨의 말에 의하면 저희 조선인민공화국도, 특히 제 서기실도 프리즘 프로그램의 도청 대상에 들어가 있던 걸로 아는데, 물론 한 번도 성공하지는 못했다고 하지만, 그 말이 사실이라면 맥케인 대통령님이 이 전화를 받자마자 저에게 드려야 할 말씀은 죄인을 대하는 듯한 추궁이 아니라 사과의 말이어야 하지 않습니까?”
오히려 정환이 목소리를 높이자 장성택을 대표로 해서 당 간부들의 얼굴은 창백하다 못해 하얗게 질려버렸다.
이 건방진 행동에 대해 분노한 최강대국의 지도자에게 극구 사죄하고 스노든을 당장 날틀에 태워 돌려보내겠다고 약조해도 모자랄 판에 지금 저게 뭐하는 짓이란 말인가.
아니, 말이야 맞는 말이지만 지금 이 판국에 미국 대통령이 저런 세상 물정 모르는 탄원을 받아들일 거라고 진심으로 생각하는 건가?
설마 이왕 파탄 난 대미 관계, 이제는 아예 될 대로 되라 상태인 건가?
혹시 그들의 최고 존엄은 나이가 들면서 갑자기 비현실적인 반미주의자가 되어버리기라도 한 거 아닌가?
이런 근심에 휩싸여 있다가 문득 옆을 돌아본 장성택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을 발견하고는 표정을 바꾸었다.
그 예상치 못한 것이란 바로 내각 총리 김용건의 표정이었는데, 너무나도 평온하기 그지없는 그 표정에 장성택은 머릿속은 온통 의문부호로 가득 차지 않을 수 없었다.
외교 부문의 최고 책임자라고 할 수 있는 김용건이 이 재앙적 사태를 맞아 가장 안절부절못할 줄 알았는데, 대체 왜 저렇게 침착한지 장성택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혹시 자신이 모르는 뭔가가 있는 건가?
하지만 이러한 장성택의 생각과는 무관하게, 맥케인은 의외로 정환의 비난에 잠시 아무 말도 못 하고 유구무언 상태였다.
지금 평양의 서기실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알 리는 없었지만, 방금 전 정환의 발언은 지난번부터 내심 위법적인 도청 프로그램인 프리즘 프로그램에 대해 맥케인이 가지고 있던 감정적 반감을 순간적으로나마 자극했던 것이다.
‘미국인의’ 권리 수호와 자유에 대해 누구보다도 민감한 맥케인에게는 정환의 말이 다음과 같은 따가운 비난으로 들렸기 때문이었다.
-당신들은 입만 열면 허구한 날 자유, 자유라고 외치며 러시아와 중국, 북조선까지도 국민의 권리가 없는 인권침해국이라고 비난해오다가, 뒤로는 전 세계와 우방국 정상, 심지어는 자국민까지 대상으로 한 불법 도청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또 그걸 폭로하려는 스노든을 지켜주는 우리를 비도덕적이라고 비난할 자격이 있느냐?
“그리고 저와 저희 북조선뿐만 아니라, 스노든 씨 말로는 프랑스나 독일, 그리고 한국 같은 타국 정상들도 이 프리즘 프로그램의 마수를 피하지 못한 거 같은데, 그들도 이 사실을 알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
“다음 2차 폭로에는 이런 우방국에 대한 배신행위를 폭로하는 내용이 담길 텐데, 저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이 프리즘 프로그램의 피해당사국으로서 그 증인이자 자발적으로 정치적 망명을 요청한 선량한 인민인 에드워드 스노든 씨를 받아준 것뿐입니다. 아까 우방국에 대한 뒤통수를 언급하셨는데, 대체 그 뒤통수를 먼저 때린 쪽이 누구인지 스스로에게 한 번 질문해보시기 바랍니다, 대통령님.”
정환의 추궁에 다시 한번 태평양을 사이에 둔 핫라인에 침묵이 감돌았다.
장성택을 비롯한 당 간부들은 ‘왜 현실주의자인 총서기께서 갑자기 저런 고지식한 도덕 운운을 언급하시는지 모르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정작 맥케인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좀 더 뻔뻔한 정치인이라면 철저하게 힘의 논리로 돌아가는 엄혹한 국제사회의 현실을 모르는 백면서생 같은 소리라고 코웃음을 칠 법도 했지만, 여전히 맥케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30여 초 가까이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마침내, 미합중국 44대 대통령 존 맥케인은 흥분과 분노를 가라앉힌 어투로, 그리고 조금 전보다 훨씬 무거워진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분명히 총서기님의 그러한 비난에는 분명히 우리가 잘못한 측면이 있군요. 사과드리겠습니다.”
“그건 미국 정부 차원의 공식적인 사과입니까? 아니면 맥케인 대통령님 개인적인 차원의 사과입니까?”
“……하지만 변명을 하자면, 총서기님. 이런 정보 수집행위를 안 하는 나라도 있습니까? 장담하는데 피해 당사국인 나라들도, 프랑스, 독일, 한국, 이스라엘…… 이런 저희 우방국들도 능력이 없을 뿐이지 그럴 의도는 차고 넘칠 겁니다. 타국 지도자의 집무실에서 일어나는 일과 오가는 이야기를 훤히 들여다보고 정보 우위를 차지해서 장단기적 국익을 도모할 수 있는 능력이 분명히 있는데, 이를 도덕 때문에 포기한다는 것은 지도자로서 실격입니다. ……최소한 현실 세계의 지도자로서는 말입니다.”
존 시드니 맥케인 3세는 분명히 미국의 국익과 가치관을 가장 우선시하며 이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극단주의자에 대한 암살 같은 좀 비도덕적인 수단도 용인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현실주의적 공화당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적국이면 모를까 우방국 정상에 대한 도감청 시도에 대해 부끄러움을 전혀 느끼지 못할 정도로 뻔뻔하거나 이러한 행위가 미국 공화당이 그렇게 좋아하는 ‘자유’와 ‘미국적 가치’를 거스르는 자가당착이라는 걸 일부러 외면할 정도로 위선적인 인간 역시 아니었다.
즉 지금 그는, 자신이 방금 전 말했던 대로 정환에게 ‘변명’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저는 이 대통령직에 취임할 때, 제 개인적인 도덕률보다는 국익을 우선시하겠다는 맹세를 했습니다. 무엇보다 국제사회에서는 적도, 친구도, 혈맹도 결코 영원하지 않다는 걸 잘 아시지 않습니까. 저는 그들이 무슨 속셈을 품고 있는지, 언제 미합중국에 대한 배신과 음모를 꾸미는지 알 수 있다면 전부 알아내야만 합니다.”
“…….”
“자기합리화처럼 들리신다면 어쩔 수 없습니다. 하지만 김 총서기님도 제 입장에 있으셨다면 저와, 또한 이 프리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지시한 전 대통령들과 똑같은 결정을 내렸을 겁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미리 말씀드리지만, 저희 미합중국과 파이브 아이즈 동맹국들은 도덕 때문에 그러한 전략적 우위를 포기할 마음이 조금도 없습니다.”
“그 말씀은…….”
“프리즘 프로그램을 포함한 NSA의 신호 정보 수집 체계는 계속 운영될 것입니다. 또한 그 프로그램의 운영을 방해하거나, 폭로하거나, 비난하거나, 그밖에 어떤 식으로든 저희 미국 정보공동체의 정보 수집 활동에 지장을 일으키는 자는 그에 상응하는 대응을 마주할 것입니다. 이것이 제 미합중국 대통령으로서의 공식적 입장입니다.”
“환영합니다. 제가 듣고 싶은 대답이었습니다.”
“……!?”
뚱딴지 같은 정환의 대답에 맥케인은 물론, 서기실에 모여 있던 대다수의 간부들도 해연이 놀라 버렸다.
이제 정환의 표정에는 숫제 희미한 미소까지 떠오르고 있었다.
“맥케인 대통령님의 뜻에 십분 공감합니다. 그런 능력이 없으면 모를까, 있으면 써먹어야죠. 안 그렇습니까? 저희 공화국이 파이브 아이즈에 가입하려는 이유도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총서기님, 좀전에도 말씀드렸지만, 그건 터무니없을뿐더러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설령 천에 하나, 만에 하나라도 제가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상원 정보위원회, 아니, 당장 제 보좌관들과 각료들부터 제 판단 능력을 의심할…….”
“걱정 마십시오, 대통령님. 곧 저희 조선인민공화국이 파이브 아이즈에 가입할 만한 자격을 갖췄다는 증거를 곧 있을 도쿄 G20 회의에서 보여드릴 생각이니까 말입니다. 그리고 저도 이번 일은 장담 드릴 수 있는데, 저희가 제시하는 조건을 들어보시면 대통령님도 마음이 움직이실 겁니다.”
“대체…….”
“몇 달 후면 자연히 알게 되실 겁니다. 그럼 거기서 뵙겠습니다.”
거의 가볍기까지 한 어투로 맥케인과의 통화를 종료한 정환은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생각했다.
채찍은 때릴 만큼 때렸으니, 이제 당근을 쥐여주고 구슬릴 차례로군.
그리고 정환이 수화기를 내려놓은 직후, 김용건이 서기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비서 중 한 명으로부터 급히 몇 마디를 전달받더니, 정환에게 다가와 해당 내용을 보고했다.
“총서기 동지, 방금 베이징에서 연락이 왔습네다. 스노든 동무의 폭로를 본 모양입네다.“
“대강 짐작은 되지만 말해 보게. 뭐라던가?”
“우리 중화인민공화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오랜 혈맹으로서 인민의 사이버 공간에서의 자유와 익명성을 수호하기 위해 투쟁하는 전선의 동지이기도 하며…… 어쩌고 저쩌고……. 기러니까 요약하면 자기들도 이번 일에 한 몫 끼어보고 싶다는 것 같습네다. 중국 대사가 스노든을 베이징으로 초청하고 싶다고 아주 강력하게 요청해 왔다는군요.”
“예상대로군. 내 대답은 간단하네. ‘일 없으니 숟가락 얹지 말라’고 분명하게 전해주도록. 물론 잘 돌려서 말해야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