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애하는 수령동지 272화
그 말을 들은 정환은 잠시 얼굴이 굳어졌지만 이내 웃긴다는 듯이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스노든의 망명 사실이 윗선에 보고되고 대사가 국무부로 초치되어 항의를 듣는 데 걸린 시간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번갯불에 콩 구워 먹을 시간에 이런 강수를 둔 것이다.
“……그야말로 전광석화군. 하긴 발등에 불이 떨어졌으니 그럴 만도 하지. 도착 예정 시간은?”
“아직 미국 영공을 지나고 있다는 보고를 들었으니 아마 평양에 당도하기까지 10시간쯤 걸릴 겁네다. 막판에 미국 놈들이 눈치를 채고 스노든이 탄 동지 전용기 이륙 허가를 안 내주려고까지 했는데 외무성이 나서서 극력 항의를 한 덕에 간신히 이륙에 성공했다고 하지 않습네까.”
“내 전용기까지 보낸 보람이 있군. 계속 밀어붙이게. 혹시 저쪽에서 전투기라도 띄워서 착륙을 강요할지도 모르니 그때는 전용기는 날아다니는 영토나 다름없으며 이 전용기의 이착륙을 강제하는 행위는 명백한 주권 침해라는 사실을 주지시키고. 공해(公海)상으로 나올 때까지 멈추지도 속도를 줄이지도 말라고 단단히 이르게.”
“알갔습네다!”
‘드디어 본 게임 시작이군.’
이렇게 생각한 정환은 귓속말을 주고받는 자신을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보던 노윤현 한국 대통령에게 고개를 돌렸다.
귓속말이 들리지 않는 거리에 앉아 있었지만 무슨 일이 생겼다는 걸 바로 알아채고 벌써 정환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총서기님이 급히 가보셔야 할 일이 생기신 거 같군요.”
“그렇습니다. 이 기쁜 날에 오래 앉아서 역사에 남을 북남관계의 새로운 장을 계속 기념하고 싶었는데 힘들 것 같군요. 먼저 양해를 구하겠습니다.”
“아이고, 뭐 나랏일이라는 게 다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어서 가보십시오.”
“……무슨 일인지 묻지 않으시는 겁니까?”
정환이 살짝 의외라는 듯 그렇게 묻자 노윤현은 털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에이, 국가 간의 관례와 예의라는 게 있는데 제가 어찌 그러겠습니까? 그리고 뭐 총서기님이 급하게 달려가실 정도의 일이라면 뭐 늦든 빠르든 우리 남에서도 금방 알게 되겠지요? 혹시 제가 잘못 짚었습니까?”
“아니오, 맞습니다. 아마 조만간 소식 들으시면 깜짝 놀라게 되실 겁니다.”
노윤현의 너스레에 정환은 오늘 처음으로, 아니, 어쩌면 그를 만난 이래 처음으로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박금혜가 아니라 그를 한국 대통령이 되게 도와줬던 일이 어쩌면 헛수고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조금씩 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정환의 개인적인 감정 변화와는 별개로, 지금의 이 에드워드 스노든을 둘러싼 북미 간 분쟁에서 그가 상정한 만약의 사태가 터지기를 바라는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올해 있을 도쿄 G20 정상회의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천천히 일정을 즐기시다 가시지요.”
“그러겠습니다. 쯧, 처음 예정대로 G20 회의를 우리 한국 서울에서 유치했으면 총서기님도 오시기 편했을 텐데, 아쉽습니다. 일본인들 로비 실력, 재팬 머니가 워낙에 유명하지 않습니까. 미국 귀 옆에 꼭 붙어서 자기들 입장만 듣게 하고 있으니 우리 대한민국이 서러워서 원…….”
“……흠, 글쎄요, 뭐 언젠가 일본인들도 된통 당하는 날이 올 겁니다. 어쩌면 이미 당했을 수도 있고요. 그럼 이만.”
* * *
“자, 그럼 이제 내가 이 에드워드 스노든이라는 친구가 NSA에서 뭐하는 친구인지, 그리고 그 친구가 종사하던 프리즘(PRISM) 프로젝트라는 게 정확히 뭔지, 자세히 알아야 할 시간이 온 거 같군. 여러분, 그리고 무엇보다, 그 김정환이라는 친구는 대체 뭘 잘못 먹은 겁니까? 그 친구 친미주의자 아니었나? 아니, 그 이전에, 이거 납치인가, 망명인가?”
“각하. 이미 메모로 전달해 드렸지만 이 사안은 이 미국의 안보에 대단히 엄중한 위해를 끼칠 수도 있는 사안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지금 백악관이 해야 할 일은 이렇게 한가하게 회의나 하는 게 아니라 즉시 비행금지령을 내리시던가 영공을 봉쇄라도 해서 스노든이 미국 영토 밖으로 나가는 걸 막아야 합니다. 이미 스노든이 탄 북한 국적 비행기가 떴을 텐데……!!!”
“정확히 말하자면 북한 지도자 전용기지. 외교 관계 때문에 일단 보내주기는 했지만 북한이 갑자기 머리가 돌아서 20년 전 자기 아버지 시대로 돌아가고 싶은 게 아니라면 우리에게 다시 돌려줄 걸세. 그보다, 이 프리즘 프로젝트라는 것에 대해 자세히 말 좀 해보게. 왜 내가 자세한 보고를 못 받았지?”
그 시각, ‘세계에서 가장 고독한 장소’, 혹은 ‘자유세계 리더의 집무실’ 등의 명칭으로 불리는 백악관의 미국 대통령 집무실, 오벌 오피스(Oval Office)에서는 미합중국 대통령 존 맥케인을 필두로 긴급한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회의에 참석해서 방금 전 북한 대사 초치에 이은 추가적 조치를 맥케인에게 강력하게 권한 CIA, FBI, NSA 같은 미국의 정보공동체(United States Intelligence Community) 수장들은 프리즘 프로젝트라는 말이 나오자 입술을 씹으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미 해군 전쟁영웅 출신에 미 상원 정보 - 국방 분야 위원회에서 잔뼈가 굵은 존 맥케인은 분명히 보수 성향에 미국의 안보를 무엇보다 중요시 여기는 공화당원이다.
하지만 그만큼 미국인들이 그토록 좋아하는 개개인의 자유와 권리에 대해서 민감하고, 국가기관의 힘과 권한은 법의 범위 안에서 행사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이전부터 견지해온 정치인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런 맥케인에게, 자신들이 꽤 전부터(정확히는 중국이 미쳐 날뛸 때부터) 운용해 온 이 판도라의 상자, ‘프리즘 프로젝트’는 미국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불법적인 행위로 비치지나 않을까 그게 걱정이었던 것이다.
‘젠장, 아무리 그래도 타국 지도자가 우리 정보망의 가장 민감한 비밀에 접근한 친구를 우리 영토 내에서 채간 상황에 그놈의 인권 타령을 시작하지는 않겠지. 최대한 순화해서 말해야겠군.’
제발 ‘이건 미국의 신념과 가치관에 어긋난다’라는 둥, ‘이러한 행위는 미국이 다른 불량국가들과 차별되는 도덕적인 우위를 망가뜨린다’라는 둥, 대학 교수님처럼 현실을 모르는 소리나 해대지 않기를 바라며, 결국 이 문제의 당사자라고 할 수 있는 NSA 국장이 총대를 메고 설명을 시작했다.
“각하, NSA가 어떤 기관이고, 이 미합중국의 안보에 어떤 역할을 하시는지는 익히 아시지요?”
“신호 정보(SIGNT)를 수집, 분석해서 미국의 안보에 위해가 될만한 위협을 사전차단하는 거지. 나 같은 노땅은 컴퓨터 자판 두들겨서 뭔가 하는 일이라는 것밖에는 모르지만…… 요즘처럼 모든 게 인터넷으로 돌아가는 세상에서는 이 친구들이 CIA보다 훨씬 더 쓸 만한 정보를 물어오는 게 많지.”
“역시 잘 아시는군요! 지금 북한 최고지도자의 전용기에 실려 태평양 위를 날아가고 있는 이 에드워드 스노든이라는 친구는, 이 NSA에서 운용하던 프리즘 프로젝트의 선임 관리자였습니다. 보안등급이 대단히 높아서 프리즘 프로젝트뿐만 아니라 사실상 NSA 내의 온갖 민감한 정보수집 활동과 기밀들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지요. 그게 바로 그가 북한 지도자 김정환 손에 절대로 넘어가서는 안 되는 이유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스노든의 신분이 북한 정보당국에 노출됐는지, 대체 북한 지도자가 어떻게 그 친구만 꼭 집어서 납치할 수 있었는지 저는 그게 가장 의문입니다. NSA 직원들은 자기 직업을 가족들한테도 잘 안 알려주고, 암묵적으로 사내결혼을 권장할 정도란 말입니다! 우리 보안체계 어디서 구멍이 뚫린 건지…….”
사실 노땅 운운하는 자기비하와는 달리, 존 맥케인은 NSA가 어떤 정보 기관이며 또 어느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대단히 잘 알고 있었다.
NSA.
National Security Agency, 즉 국가 안보국.
2차 세계대전부터 CIA, 중앙정보국의 하위부서로 구 일본군과 나치 독일의 암호를 해독하는 것으로 첫 활동을 시작한 이 기관은 ‘비공식적인 전 세계 최고의 암호해독 기관’이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비록 CIA의 하위부서로 시작했지만 암호해독 및 도감청을 통한 통신, 신호 정보 수집 능력에 있어서만큼은 그 모기관인 CIA를 한참 능가해서 ‘CIA가 풀었다고 주장한 적국의 암호는 사실 NSA가 10년 전에 이미 풀어놓고 알려주지 않은 암호’이라는 웃어넘기기 힘든 소문까지 있을 정도다.
하지만 단순히 하나의 정보기관을 넘어 암호학 및 슈퍼컴퓨터 분야에서도 그 어느 대학이나 연구기관보다 진보되었다는 신빙성 높은 추측까지 제기되는 이 무시무시한 기관도 한 가지 한계 아닌 한계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미국의 헌법이 규정하는 범위 안에서만 그 강력한 권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최소한 지금까지 맥캐인은 그렇게 알고 있었다.
“말만 들으니 이 프리즘 프로젝트라는 게 대단히 중요한 것처럼 들리는군.”
“그렇습니다. 요점만 말씀드리면, 이 프리즘 프로젝트는 전 세계에 퍼져있는 우리 IT 기업들, 구글, 페이스북, AT&T처럼 인터넷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체들의 서버에 직접 연결해서 미국의 안보에 위협이 되는 모든 정보들을 추출하는 계획입니다.”
“……흠, 그래 뭐…… 좋군. 요즘 전쟁은 미사일과 총알로 하는 게 아니라 컴퓨터로 한다고들 하니까. 하지만 물론 해외정보 감시법원의 영장을 받은 상태에서였겠지?”
“아…… 그게…… 법적, 행정적 절차의 복잡성과 거기에 드는 시간을 감안하면…… 언제 적국의 스파이가 해외로 튈지 모르는 상황에서 천년만년 영장이 나오기를 기다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위법적으로 집행한 적이 있다는 말이로군.”
“각하도 잘 아시겠지만 첩보전이라는 게 가끔은 초법적으로 행동해야 할 때가 있으니까 말이지요, 이번 경우처럼 말입니다.”
진땀을 흘리며 변명하는 정보기관장들을 맥케인은 잠시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날이 갈수록 중국과 보시라이 주석이 예측불허하게 나오고 있다는 것은 맥케인도 잘 알고 있었다.
현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을 제끼고 자신들이 세계 패권을 쥐겠다는 욕심으로 이전부터 미국 내에 수천, 어쩌면 수만 명의 중국 스파이들을 보내왔다는 걸 자신도 알고 있지 않은가.
지금은 사실상 제2의 냉전 중이고, 2년 전 금융 위기로 한바탕 고비를 겪은 미국으로서는 가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할 때도 있다는 걸 그도 이해했다.
그리고 이러한 활동들이 결국 궁극적으로 전 세계에 폭정과 억압을 확산하려는 중국에 맞서 자유와 미국식 민주주의를 지키는 일에 기여한다고 맥케인은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정보기관장들이 막 안도의 한숨을 쉬려는 그때, 맥케인이 눈을 빛내며 다시 물었다.
“그런데, ‘모든’ 정보들이라? 그 말은…… 국내의, 그러니까 미국 시민을 대상으로도 도감청을 행한 적이 있다는 뜻인가?”
“어디까지나 ‘미국의 안보에 위해가 될 가능성이 우려되는 시민’에 한해서입니다. 결코 미국인들의 사생활이나 개인정보 같은 헌법상의 권리를 침해하는 데 쓰이는 게 아닙니다!”
“……이보게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우리가 지키려는 건 바로 그 미국인들의 자유와 권리 아닌가, 그걸 우리 스스로 침해해서야 자가당착…….”
“각하! 이 프리즘 프로젝트의 운용으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중국…… 그러니까 적성 국가들의 미국 기업, 정부 기관 그리고 그 구성원들을 대상으로 한 사이버 공격과 포섭 시도를 막아냈는지 아시면 저희의 진실함을 충분히 이해하실 겁니다! 물론 우리가 먼저 공격을 한 적도 있지만…… 하여간, 데이터가 많으면 많을수록, 감시망이 넓으면 넓을수록 이 미국은 더더욱 안전해지는 겁니다.”
“…….”
“만약 스노든이 카메라 앞에서 입을 열게 되면, 저희뿐만 아니라 이 프리즘 프로젝트를 공동 운용한 영국, 캐나다 같은 동맹국들의 안보에도 막심한 손해를 입게 됩니다! 믿을 수 있는 동맹국들과 정보망을 더 확충해서 전 세계적인 감시체계를 구축해도 모자랄 판에, 이런 잠재적인 반역자 하나 제대로 감옥에 못 처넣어서야 미국이 자유세계의 리더 역할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일단 이 프로젝트의 위법성에 대해서는 나중에 논의하도록 하지. 지금 중요한 건 북한과 그 지도자 김정환의 속내일세. 강제적인 납치인지 자발적인 망명 혹은 변절인지부터 분명히 해야겠군. 전자라면 당장에 쓴맛을 보여줘야겠지만, 후자라면…….”
“어느 쪽이든 상관없습니다. 스노든의 입이 열리고 프리즘 프로젝트가 세상에 폭로되는 것만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합니다. 특히 저희가 우방국들, 그러니까 프랑스, 독일, 이스라엘, 한국까지 도청했다는 사실이 새어나가면, 이는 미국의 외교 관계에 재앙적인 사태가 일어날 겁니다.”
하나씩 터져 나오는 프리즘 프로젝트의 치부에 맥케인은 기분이 상한 얼굴로 더 뭐라 말을 하려고 했지만 이내 속으로 삼켜 버렸다.
방금 말했던 대로 지금 중요한 건 어떻게든 스노든을 김정환의 손아귀에서 조용히 빼내서 이 일을 시끄럽지 않게 마무리 짓는 일이지 자기 참모들과 싸우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그때였다.
“전용기를 멈춰 세울 수는 없어도 빨리 움직이면 프로젝트의 전모가 공개되기 전에 물밑에서 수습이 가능합니다. 일단 북한 지도자랑 통화를 해보시고 북한에 들어간 미국 민간 자본을 전부 철수시킬 수도 있다고 압박을 넣으시죠. 그리고…….”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대통령님? 지금 CNN을 틀어보셔야 할 거 같은데요.”
오벌 오피스 문을 조용히 열고 들어온 보좌관 하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전해준 말에 둘러앉아 있던 정보기관장들의 얼굴이 푸르딩딩하게 굳었다.
NSA 국장이 떨리는 손으로 리모컨을 들어 오벌 오피스에 걸려 있는 TV를 켜자, CNN 로고 밑에 생방송을 뜻하는 ‘LIVE’ 글자가 붙은 채로 은테 안경을 쓴 한 백인 남성이 쏟아지는 카메라 플래시를 맞으며 말을 하고 있었다.
자막에는 ‘NSA 선임 분석가 에드워드 스노든, 충격의 폭로 - 미국 정부의 불법적인 국내 도감청 및 민간인 사찰! 노쓰 코리아 평양에서 생중계’라고 적혀 있었다.
-이 자리에서 분명히 밝히겠습니다. 저, 에드워드 조지프 스노든, 저는 반역자가 아닙니다. 저는 중국이나 러시아의 스파이도 아닙니다. 저는 오로지 인간을 억압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려는 미국인일 뿐입니다. 지금부터 미국 정부가 어떻게 여러분의 이메일과 신용카드 결제기록을 불법적으로 열어보는지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프로젝트의 이름은 프리즘이라고 불리는…….
“……이보게들.”
“네, 대통령 각하?”
“지금 당장 핫라인으로 평양 서기실에 연결하게. 김정환이가 대체 뭘 위해서 이 개짓거리로 우리를 도발하며 미쳐 날뛰는지 그것부터 알아내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