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애하는 수령동지 268화
94장. 분단
-환영합니다. 근대 전자의 성공이 곧 연길의 성공입니다.
“이거 조감도로만 보다가 직접 보니 크기가 실감나는군. 총 부지 면적이 몇 평이라고?”
조선어와 중국어 간체, 영어의 3개 국어로 적힌 큰 활자의 환영 플래카드가 (트레일러 5대가 나란히 지나갈 정도로 거대한) 공단 입구를 쓸고 지나가는 바람에 나부끼자 그 플래카드를 유심히 보고 있던 중장년 남성이 비서로 추정되는 옆의 젊은 남성에게 물었다.
상관의 질문에 비서는 고개를 조아리며 거의 완벽한 한국 서울 말씨로, 하지만 희미하게 함경도 어투를 섞어서 대답했다.
“오십 제곱 킬로미터, 약 70만 평입네다. 정 사장님.”
“허허, 정말 크긴 크군.”
부지 내 관리동 꼭대기 층에서 공장 임원들에게 안내를 기동 시작 한 달째의 생산량을 보고 받던 정양헌은 혀를 내둘렀다.
2009년 9월, 중국 조선족 자치주 외곽에 건설된 근대 전자 연길 사업장은 정양헌의 말처럼 실제로 광활했다.
물론 크기만 큰 게 아니라 그 생산능력과 투자액도 막대해서, 1년에 핸드폰을 2천만 대, 그 핸드폰에 사용될 모바일 디스플레이, 로봇 청소기에 세탁기도 그와 비슷하게 생산할 수 있었다.
근대 전자에서 이 공장을 짓기 위해 연길에 투자한 금액은 20억 달러, 고용 인원은 무려 3만 명.
길림 성은 물론이고 동북 3성 내에서도 이와 비견되는 규모의 공단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을 정도라, 연변 자치주의 경제와 고용은 이 공단의 정상 가동 여부에 따라 오르락내리락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요즘처럼 부동산 붕괴로 중국 내 경제가 시원치 않은 시국에는 더더욱 그렇고 말이다.
그리고 이런 호사가들의 말을 증명하듯 이 공단의 가동식 때에는 정양헌 사장뿐만 아니라, 연길 시장부터 길림 성 성장에 연변에서 방귀 좀 뀐다 하는 주요 인사들은 전부 참석하여 테이프를 끊었다.
“돌아가신 아버님이 오래 사셔서 이 광경을 보셨어야 했는데…… 그분이 내린 결정이 오늘날 이렇게 꽃을 피워 열매를 맺었으니 말이야.”
비서의 대답에 올해로 환갑을 넘긴 근대 전자 사장, 정양헌은 그렇게 죽은 자신의 아버지, 고 정문영 근대 그룹 회장을 떠올리며 내심 눈시울을 붉혔다.
한때 외환위기로 흔들거렸던 근대 전자가 지금 이렇게 완벽하게 부활하여 이 북녘에서도 더욱 북녘, 조선족 자치주 연길에 이렇게 거대한 복합 소비자 가전 공단을 세울 정도로 사세(社勢)가 성장한 것이다.
하지만 이 공단보다도 더욱 정양헌을 만족스럽게 하는 것은, 이 연길 제1공단만큼이나 거대한 반도체 파운드리 라인이 이 연길에서 고작 수십여 킬로미터 떨어진 북조선에 있다는 것이었는데, 사실은 그 반도체 라인이야말로 오늘날 근대 전자의 이러한 성공을 일구어낸 뿌리였다.
-남조선에서 전기를 쓰는 모든 가전은 성삼 전자가, 북조선에서 전기를 쓰는 가전이란 가전은 근대 전자가 도맡아서 만든다.
인터넷 우스갯소리지만, 2009년 한반도 남북 양 국가를 사이좋게 양분한 두 전자 기업의 현재 위상을 말해주는 말이었다.
몇 년 전, 스티브 잡스와 애플이 일으킨 아이폰 쇼크는 대(大) 스마트 폰 시대를 개막했고, 이에 맞춰 성삼 전자를 포함한 전 세계 휴대기기 메이커들은 아이폰이 열어젖힌 이 새로운 시장을 차지하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였다.
또한 폭발적으로 늘어난 모바일 기기 수요는 그 모바일 기기를 구성할 디스플레이와 반도체의 수요도 폭발시켰고 이러한 반도체 시장 호황은 외환위기 이후 다른 근대 그룹 사업체들과는 달리 사업 기반을 뿌리째 북으로 옮긴 근대 전자로 하여금 재기를 도모케 한 1등 공신이었다.
물론 이러한 부활과 최소 5년 동안의 손해를 가정한 투자의 배경에는 90년대 중순부터 반도체를 필두로 근대 전자의 주력 사업을 과감한 투자로 아낌없이 지원한 조선로동당의 전폭적인 배려가 있었음에는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특히나 반도체의 경우, 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펩리스, 파운드리 할 것 없이 반도체 부문에서 손해를 감수하고 지속적인 투자를 하던 근대 전자의 부활사는 북조선 국산 종합반도체 개발 및 양산의 역사와 맥을 같이할 정도였다.
실제로 지금 옆에서 공단을 소개하는 정양헌의 비서는 함흥에서 나고 자란 북조선 토박이였지만, 이 취업난 시대에 한국 젊은이들도 우수수 떨어진다는 근대 전자 입사 시험을 통과하여 현재 사장인 정양헌을 보좌 수행하는 위치까지 오른 친구였다.
그리고 마침내 2007년, 근대 전자는 연 매출액 80억 달러를 기록하며 파운드리 분야에서 선발주자인 대만의 TSMC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반도체 위탁생산 강자로 올라서고야 만 것이다.
“이제 공화국에서 만든 반도체를 가지고 와서 여기서 스마트폰과 다른 가전제품을 만들겠군. 그리고 여기서 만들어진 제품들은 중국 내륙이나 러시아, 공화국 내부로 열차를 통해 이송될 것이고…….”
“뿐만 아니라 이 주변에 공장 직원들의 복리 후생을 위해서 자녀들이 다닐 유치원, 초등학교, 공단 내 극장과 카페 같은 위락시설까지 들어설 겁네다. 그야말로 연길이 근대 전자의 근대 타운이 되는 것이지요. 참으로 축하드립니다. 사장님…….”
‘연길이 근대 타운이 된다라……. 그러고 보니…….’
거기까지 생각하던 정양헌의 뇌리에 어떤 사람이 스쳐 지나갔다.
바로 10여 년 전, 자신을 비롯해 근대 일가 형제들을 불러모아 놓고 호통을 치던 한 젊은 지도자의 모습이었다.
정양헌은 플래카드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돌려 물었다.
“총서기께서는 뭐라고 하셨나?”
“축하드린다, 가동식에 직접 오지 못해 미안하다고 전해달라 하셨습네다.”
“흠, 공화국 산 스마트 폰 생산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계신 거 같아 직접 오실 줄 알았는데, 역시 총서기께서는 우리 근대 같은 하드웨어 쪽보다는 주성환이 유니온 같은 소프트웨어 쪽에 좀 더 관심이 크신 건가?”
본인이 직접 오지는 못하더라도 당 부장급 인사 정도는 나올 줄 알았는데.
정양헌이 뭔가 섭섭하다는 듯 그렇게 중얼거리자 옆에서 눈치를 보던 비서는 그제서야 알려주려고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한 마디를 잽싸게 덧붙였다.
“그게…… 사실은 정 사장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면 한 마디 더 전해달라고 하신 말씀이 있으셨습네다.”
“……한 마디 더? 내가 이런 말을 할 줄 알고?”
“네, 무슨 뜻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네다만…… 괜히 그분이나 당 인사가 직접 내왕해 봐야 좋을 게 없어서 그런 것뿐이니 상심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아, 그리고 또…… 과대해석할 여지를 주고 싶지 않으시다고…….”
“과대해석?”
그 뜻 모를 단어를 잠시 곱씹어보던 정양헌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최근 베이징 지사에서 정기적으로 전달받는 동향 보고서와 조합해서 정환이 남긴 말을 생각해 보니 떠오르는 게 있었던 것이다.
* * *
-요근래 20여 년간 이 연변의 모든 인민들은 나고 자라면서 반드시 둘 중 하나의 선택을 내려야만 하게 되었다. 중국에 붙어살 것이냐, 조선에 붙어살 것이냐,
최근 연길시뿐만이 아니라 연변 전체에서 떠도는 이 말은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 사는 모든 조선족들의 가슴에 들어앉은 하나의 담론을 대변하는 말이었다.
그 담론이란 애국심이나 국민 정체성 같은 모호한 물음 이전에, 당장 눈앞에 닥친 먹고사는 문제, 생계의 문제와도 직결되어 있었다.
이는 넓게 보면 근 20여 년간 중국과 북조선 양국의 고도 성장 혜택의 수혜자로서 형성된 연변 경제의 주도권 다툼이자, 좁게 보면 1년 전 중국 부동산 시장 붕괴로 인하여 바뀌게 된 그 주도권 다툼의 전향적 변화이기도 했다.
-소문 들었디? 쓰촨에서 일어난 지진 때문에 내륙 부동산 시장이 싹 망했다며?
-들었디. 흥, 저 뙤놈들 똥구멍 핥는 간나 새끼들이 울상 된 것을 보니 내 속이 다 시원하구만 기래! 이래서 사람은 자기 뿌리를 잊으면 안 되는 거이야. 그나저나 이제 사업 이야기 좀 하디. 피양(평양)에서 우리 연변에 얼마나 투자한다고?
중국 내에서도 특히 낙후하고 개발이 늦은 지역인 동북 3성, 그중에서도 특히 연변의 부, 돈 줄기는 크게 두 가지로 형성이 되어왔다.
하나는 중국 내륙과 해안 1선급 도시에서도 가장 많은 신흥 부자를 탄생시킨 업종인 부동산 개발업, 그리고 다른 하나는 수출입 무역으로 돈을 버는 물류업이었는데 연변의 경우 이 물류는 거의 전적으로 북조선 - 그리고 북조선을 통하는 한국과의 무역에 의존하고 있었다.
전자인 부동산 개발업의 경우는 토지가 모두 국가 소유인 사회주의 국가 중국의 특성상 중국 당국과 친할 수밖에 없었고, 실제로 연변에서도 친중(親中) 성향의 조선족들 다수가 부동산 개발업과 임대업에 주로 종사하며 부를 쌓아오고 지역 내 영향력을 높여왔다.
반대로 무역은 연변에서 가장 가까운 항구인 라선항이 북조선 영토에 있기도 하고, 북조선이 거대 소비시장으로 거듭나고 북조선 기업인들도 연변을 드나들며 사업적 관계를 맺기도 하다 보니 무역업 종사자의 다수는 북조선인, 혹은 북조선인과 어떤 식으로든 연고가 있을 수밖에 없는 친조선(朝鮮)파였다.
말하자면 업종에 따라, 그리고 그 업종의 흥망성쇠에 따라 자신의 정체성을 한민족, 조선인으로 생각하며 살아온 친조선파와 자신은 중국인이라 생각하는 친중파가 분단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연변은 일단 엄연한 중국 영토인지라 이제까지는 친중파가 약우세를 점하며 두 세력 간 균형이 이루어져 왔는데, 이 균형이 작년 2008년 중국 부동산 시장 붕괴로 깨어지고 말았다.
이제까지 연변의 경제적 헤게모니를 주도해 왔던 친중파들의 기반인 부동산 개발업이 순식간에 된서리를 맞은 것이다.
-이게, 이게 무슨 소리야!!! 에잇, 이런 놈의 법이 어디 있나! 내가 거지라니! 이게 무슨 소리야, 내가 거지라니, 내가……!!! 이건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고……!! 어흑흑……!!!
-본토 중앙당에서 그놈의 일농일가, 부동산 가지고 장난치다가 내 사업이 싹 망했다! 에잇! 빌어먹을 뙤놈들! 이래서 장궤(長櫃)들은 안 되는 거이야! 이제 우리는 뭐해 먹고 살디?
물론 2008년 경제 위기는 북조선에도 큰 파장을 미쳤지만, 연변에 한정해서 이는 정반대의 결과를 불러왔는데, 그 원인은 바로 부동산 위기로 인해 시작된 공장 이전, 말하자면 하청 붐이었다.
템즈강 줄기들을 대표로 기업인들의 목소리가 조선로동당 내에서 커지면서, 다가온 경제위기에 맞서서 비용 절감을 위해 북조선 내에 있던 각종 제조업 공장들이 더 싼 임금을 찾아 북조선 밖으로 이전하기 시작하는, 말하자면 탈제조업 러쉬가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정환과 조선로동당은 이런 기업인들의 요구를 들어주면서 그 하청 생산기지 역할을 할 지역을 연변으로 하자고 협상안을 제의했고, 기업인들도 이러한 요구를 수긍하고 받아들였다.
어쨌거나 연변의 평균 최저임금은 베트남이나 동남아시아보다는 비싸도, 슬슬 고임금 사회로 접어들기 시작한 북조선보다는 확실하게 싸니까.
거기다 내년으로 개통이 다가온 KRX 고속철도가 운영을 시작하면 운송비용과 중국, 러시아, 한국 시장 접근성을 감안할 때 연변은 확실히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이러한 제조 거점 국외 이전의 바람이 북조선 기업에만 불었던 것은 아니지만, 중국 기업들의 경우, 주로 그 본사를 중국 동부 해안 도시들에 두고 있었고, 이 기업들의 국외 이전 대상지는 본토 내륙 아니면 아예 인도 등 국외였지 별 메리트도 없는 연변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이런 전후 사정으로 인하여 오늘날의 근대 전자 연변 제1공단 같은 토착 북조선 기업, 북조선 상주 한국 기업 할 거 없이 수많은 기업들의 공장이 연변에 둥지를 틀었고, 이는 곧 연변 경제권이 북조선에 종속되는 속도가 더욱 가속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중국 당국 역시도 바보가 아니었던지라 이러한 연변 자치주 내의 공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끼고 그제서야 아차 하며 무릎을 쳤지만, 이미 때가 늦은 후라 무역업계, 즉 친조선파들이 다수 포진한 진영의 목소리가 연변에서 압도적 우세를 차지하게 되는 결과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