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애하는 수령동지-257화 (257/350)

경애하는 수령동지 257화

91장. 붕괴

‘말라카 등불 작전’의 성공은 곧바로 선전선동부에 의해서 로동신문과 조선중앙방송 등 관제 방송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작전에 참가한 해상저격여단, 그리고 구출된 선원들까지 모두 영웅이 되어 환호와 박수갈채, 그리고 특진이 기다리는 고국으로 무사히 귀환했다.

북조선 내에서의 반응도 반응이었지만, 국제적으로도 나름 반향이 컸는데, 이제까지 쌓아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군사적 역량을 보여줬다는 데 그 의미가 컸다.

특히나 단순히 신문기사만 보고 지나치는 사람들이 아닌, 군사 전문가들은 이번 작전에서 북조선이 시연하듯 보여준 각종 전술 장비와 훈련도, 무엇보다 직승기를 대표로 한 군사기술에 대해서 관심이 컸다.

그리고 이러한 북조선 군사기술에 대한 관심을 단순히 관심 선에서 그치지 않고, 놀라움 반 경계 반으로 바라봤던 건 당연히 남조선, 한국이었다.

-이제 우리 대한민국도 언제까지나 주한미군에 의존하면 안 된다는 게 여실히 드러났습니다. 지금이라도 자주국방, 자강(自强) 자립 노선으로 가지 않으면 큰일 나요.

노윤현 대통령 취임 직후 벌어진 이러한 일련의 사태에 놀란 한국은 즉시 국방개혁 작업에 착수했다.

이번 ‘국방개혁 2025’가 이제까지와 다른 점이라면,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북진(北進)의 그 날’이라는 핑계로 항상 군비 증강 사업이 있을 때마다 포병, 기갑 전력을 강화에 예산을 배당받았던 육군이 아닌 공군에 예산이 우선적으로 배당되었다는 점이었다.

-현실적으로 이제는 당장 북한이 우리를 먹으려 집어삼키려 들지는 않을 테니까 말입니다. 북으로 치고 올라갈 전력보다는 미국에서 첨단 전술기를 좀 더 사 오는 방향으로 개혁안을 짜봅시다.

하지만 정작 이런 말라카 등불 작전 성공으로 국내외가 들떠 있을 당시, 정작 이 작전의 숨은 주역이자 가장 큰 공로자라고 할 수 있는 정환은 걱정이 태산 같았다.

그 이유는 당연히 올해가 2008년, 예정된 경제적 대재앙이 전 세계적으로 닥치리라는 점 때문이었다.

“문제는 이건 아무리 나라도 도무지 시기와 여파, 규모까지 정확한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점인데 말이지…….”

쏴아아아아아아아…….

2008년 6월, 어느새 장맛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내리는 평양의 서기실에서 정환은 방 안을 빙빙 돌며 근심하고 있었다.

요새 그의 가장 큰 고민거리는 그것이었다.

국제금융시장은 (전혀 관계 없는 현상에도 자주 남용되는) 나비효과라는 말을 가장 실감하기 쉬울 정도로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복마전이다.

자신이 알던 역사에서는 미국 부동산 시장 붕괴로 인해 전 세계에 대침체가 찾아오고 미국의 국력과 중국의 부상이 이루어졌지만 이번에도 똑같은 전철을 밟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미 자신이라는 변수로 인해서 수많은 일들, 북한의 경제 규모,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정세, 미국의 지도자부터 중국 - 아프간 전쟁까지 원 역사와는 전혀 다른 일들이 너무나 많이 벌어져서 이제는 정환 그 자신조차 그 여파를 정확히 예측하기 힘든 수준 아닌가.

그러한 정치, 경제적 변수들이 실제로 얼마나 영향을 미쳤고 또 그 영향이 불러올 결과는 완전히 블랙박스인 상태였다.

예를 들어 금융 위기가 원 역사보다 달라지는 경우, 훨씬 그 파급력이 적게 일어나거나, 심지어는 아예 안 일어날 수도 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상당히 낙관적인 가정이고, 최악의 경우…….

‘……훨씬 더 심각해질 수도 있고 말이지. 그리고 그 여파는 당연히 정치에도 미칠 것이고.’

사실 정환이 경제적인 부분보다 오히려 더욱 걱정되는 것은 미국 정치 쪽이었다.

원 역사에서의 금융위기가 그대로 재현되면, 혹은 더 심해지면 당연히 그 화살은 현 집권 세력인 존 맥케인과 미국 공화당에 쏟아진다.

그리고 미국의 국력이 이전보다 크게 저하되면서 동아시아 - 태평양 전선에 관심을 끊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고, 그 이야기는 현재 북조선이 대 중국 전선의 완충지대 내지는 유사시 보루로서 가지는 외교적 가치 역시 감소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입장에 선 정환은 당연히 미국에 금융위기가 닥치는 것을 최대한 예방, 최소한 그 피해를 경감시키려고 그동안 음으로 양으로 최선을 다해왔다.

하지만, 사실 솔직하게 그러한 노력들이 성공적이었으냐 묻는다면, 그 대답은 ‘아니다’에 가까운 게 현실이었다.

“어쩌면 이건 그냥 금융자본주의 그 자체, 아니, 인간의 탐욕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점일지도 모르겠군. 항상 넘으면 안 되는 선을 넘어버리거든.”

정환은 그렇게 씁쓸하게 중얼거리며 과거 앨 고어 정권 시절을 떠올렸다.

때는 1999년 IT 버블 붕괴 직후, 막 집권한 앨 고어 행정부는 급작스러운 경제위기에 놀라 새로운 경제 성장 동력을 고심했다.

이미 제조업은 중국과 북조선을 비롯한 아시아로 탈미국 중이었으니 남은 건 금융업이었고, 경제정책에 있어서 원 역사의 대통령이었던 빌 클린턴과 큰 차이가 없었던 앨 고어는 역시 비슷하게 금융업의 규제를 풀고 저금리 정책을 펼쳐 경기를 부양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이 틈새를 예리하게 파고들었던 것이 바로 월가의 로비스트들이었는데, 그들의 제1 목표는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을 분리하는 것이 골자인 ‘글래스 - 스티걸(Glass-Steagall) 법안’의 폐기였다.

이 법안의 폐기가 월가의 대형은행들이 소매은행업과 증권, 보험, 그리고 부동산 투자에 무제한적으로 진출하게 만들고, 나아가 금융위기의 큰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정환 입장에서는 동아시아균형안보재단을 통해 이 법안의 폐기를 막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동아시아균형안보재단은 기본적으로 경제면에서나 정치면에서나 자유시장주의 - 서구식 민주주의 지지가 대외적인 성향이었다.

그런 재단이 루즈벨트 대공황 시절금융 규제의 존속에 찬성한다는 것은 아무리 소장인 대처의 수완이 좋아도 무리수에 가까웠다.

아니, 그러한 이유 이전에 글래스 - 스티걸 법안의 폐기를 막을 수 없으리라고 정환이 직감했던 이유는, 그것이 월가의 모든 대형 은행들이 군침을 흘리는 숙원에 가까웠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새로운 금융 서비스 시장 개척은 프리메이슨 음모론 따위에서 미국과 전 세계를 움직이는 배후라고 단골로 지정되는 월가의 금융가들이 바라마지 않는 것이었고, 그들이 쥐고 흔드는 금융 자본들이 이전부터 워싱턴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

돈의 액수가 곧 정치에 행사할 수 있는 압력이 되는 미국에서 이 무소불위의 거대한 세력에 저항하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원 역사대로 1999년, 글래스 스티걸 법안은 폐지되었고 덕분에 2008년 현재도 리먼 브라더스를 비롯한 월가의 대형은행들은 독이 든 잔, 시한폭탄이나 마찬가지인 파생상품들을 미국 소비자들에게 마음껏 팔아제껴서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고 있었다.

그나마 이 법안이 공화당 대통령이 아닌 민주당 대통령 앨 고어 시절에 통과된 점은 불행 중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존 맥케인이 더 빨리 대통령이 됐다면 민주당 공화당 양당 모두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월가가 지원하는 이 법안에 공화당에 몸을 담고 있는 그는 더더욱 저항하기 힘들었을 것이고, 곧 다가올 금융위기에 대한 책임을 혼자서 독박 썼을 테니까 말이다.

‘일단 내 입장에서 할 수 있는 건 모두 해뒀지만…… 불이 전혀 엉뚱한 곳에서 발화하지 않기만을 바라야지. ……가장 대표적으로 중국이라든가, 중국이나…… 아니면 중국 같은 곳!’

미국이야 어떻게 할 수 없었지만, 정환 자신이 경영에 직접 관여하는 피오니 홀딩스 등은 오래전부터 국가를 막론하고 부채담보부증권(CDO)등 고위험 고수익 파생상품에 투자하는 것을 엄격히 제한해 왔다.

그 이전부터 공격적인 투자성향을 지향해 왔던 피오니 홀딩스였던 만큼 이런 ‘이해할 수 없는 조치’는 내부에서도 말이 많았고 타국 금융기업들에 비해 지나치게 보수적이라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불만도 종종 나왔지만, 정환으로서는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중국의 경우는, 지난 후진타오와의 만남에서 중국이 점점 예측불허의 길로 접어든다는 것을 예측한 정환은 가급적 북조선 기업들이 중국에 대한 일정 수준 이상의 투자를 제한하는 등 경제적 의존관계를 형성하는 것을 피하려고 해왔다.

그러나 일단 시장경제체제를 도입한 이상, 결국 어느 정도는 기업과 민간의 자율을 존중해 줘야 하는데, 민간, 특히 기업인들 입장에서는 바로 옆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데다 한창 성장하는 중국 시장 진출을 당에서 막으려 한다는 걸 결코 달갑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현재에 이르러서는 북조선 대다수의 기업들이 중국 경제 사정에 영향을 안 받을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우르르르르릉……!!!

저 멀리서 천둥 벼락이 떨어지는 우렛소리가 서기실 안까지 뒤흔들었다.

아무래도 장맛비는 그냥 비에서 끝나지 않을 모양이었다.

‘나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어. 이제 남은 건 폭풍우가 온다면, 그게 최대한 피해를 덜 입히고 지나가기를 바라는 수밖에.’

전 세계가 자본을 매개로 서로 붙어사는 것이나 다름없는 이 21세기에서, 이런다고 피해를 완전히 비켜 갈 수 있을지는 정환으로서도 미지수였지만 말이다.

이건 정환의 능력 문제 이전에, 북조선의 경제개발과 지정학적 위치를 고려하면 거의 필연적인 일일 수밖에 없기는 했지만, 정환은 자신이 지금 무력함을 느끼는 중이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서기실 의자에 주저앉았다.

정환은 거의 처음으로, 이제껏 느껴보지 못했던 피로와 스스로에 대한 회의감을 짙게 느끼고 있었다.

자신이 어떻게 해도 벗어나기 힘든 숙명이 눈앞에서 입을 벌리고 기다리고 있는 느낌이었다.

실제로 진인사대천명이라는 말처럼, 아무리 대비를 하고 계획을 짠다고 해도 모든 위기에 예측하고 대응할 수는 없는 법이라, 이런 정환의 불안한 예감은 결국 현실화되고야 말았다.

단지 위기의 1차 진원지는 원 역사에서처럼 미국 부동산 시장이 아니라, 중국에서 터져 나왔다는 것이 다른 점이었지만 말이다.

* * *

재앙은 원 역사의 금융위기가 닥쳐왔던 2008년 9월보다 조금 일찍, 6월에 그 마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2008년 중국 부동산 시장은 성장세였다.

아니, 사실 2008년에 한정해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이후로 중국의 부동산은 항상 성장, 아니, 과열되었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호경기였다.

인민들의 소득은 조금씩 그 성장세가 둔화될지언정 절대로 줄어드는 법이 없었고, 드넓은 대륙은 동부 1선 도시들을 중심으로 항상 어디선가 새로운 오피스 빌딩과 주택과 아파트와 도로가 지어지고 또 분양되고 있었으니 호경기가 아닐 수 없었다.

심지어는 2001년 상하이에 비행기가 날아와 쑥대밭을 만들었을 때도 부동산 시장은 경직되기는커녕 성장하기만 했으니 중국 부동산에 끼어 있는 거품이 어느 정도인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았다.

또한 정계, 정확히는 중국 공산당도 이러한 부동산 광풍에 큰 몫을 했는데 날이 갈수록 조금씩 둔화되는 성장률을 어떻게든 유지해야 하니 성장이 느린 제조업이 아닌 부동산으로라도 경기부양을 시켜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몇 년 전부터 집권한 태자당의 정확히는 보시라이 주석의 ‘일농일가’ 정책은 이러한 시한폭탄의 도화선을 더욱 짧게 만들었다.

-지금 중국에는 날이면 날마다 빌딩 하나가, 달이면 달마다 도시 하나가 세워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정작 그 도시들은 전부 텅텅 비어 있고, 그 아파트와 도시에 들어가 살아야 할 인민들, 정확히는 농민공들은 차가운 길바닥에서 잠을 청한다. 왜 이런 문제가 생기는가?

-건설경기는 항상 초호황인데, 농민공들이 이렇게 건설된 부동산을 구매할 자금이 없기 때문 아닌가?

-그렇다면, 이들뿐만 아니라 중하위 소득을 기록하는 인민들에게 인민은행 같은 국영은행이 주도해서 자금을 빌려주고 그렇게 산 주택을 담보로 잡힌 다음, 10년이나 20년에 걸쳐서 상환하게 만들면 부동산 경기 거품과 농민공들의 주거 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빠른 시일 내에 전 인민이 중산층, 집 하나를 가지는 일농일가가 실현되는 것이다.

얼핏 보기에는 말이 안 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정치가 경제에 무리하게 개입하면 언제나 그렇듯이, 이 일농 일가 정책에는 중대하고도 근본적인 문제점이 있었다.

-앞으로도 쭈욱 중국의 경기성장이 지속된다면 나쁜 생각은 아니다. 그런데 경기성장이 둔화돼서 농민공들이 은행이 빌려준 돈을 못 갚게 되면 국영은행들은 순식간에 막대한 규모의 깡통 부동산, 부실채권을 잔뜩 짊어지게 되는데 그건 어떻게 책임질 생각인가?

……라는 비판을 별로 어렵지 않게 생각해 낼 수 있을 정도로 포퓰리즘성 짙은 위험한 정책이었지만, ‘중국의 차베스’를 표방한 보시라이 주석과 그 측근들에게는 들리지 않는 비판이었다.

예전부터 중국의 가장 고질적인 문제점 중 하나, 정경유착(政經癒着)을 넘어 ‘정경일체(一體)’라고 불러야 할 전문성이 결여된 정치 논리에 자본이 휘둘리는 문제가 최악의 형태로 발현한 것이다.

결국 보시라이는 이를 ‘차이나 컨센서스’라는 이름으로 붙이고 적극적으로 밀어붙였다.

처음에는 부작용의 위험성에 머뭇거리던 시진핑 계파도 경제성장에서 소외된 인민들이 보시라이의 개혁적 정책에 광적인 환호를 보내자 결국 보시라이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 나아가 내부 권력다툼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해서 이를 찬성할 수밖에 없었다.

태자당의 수족이나 다름없는 국영은행들이 이 일농일가 정책에 앞장섰다.

주택 대출을 위해 필수적으로 넘어야 하는 최소한의 기준과 규제였던 자산증명, 소득 증명이 크게 완화되거나 사라졌다.

이제는 시골에 사는 연봉 200만 원이 안 되는 농촌 총각이라도 대출을 받아 날이면 날마다 지어지는 신도시에 집을 살 수 있었다.

이제 막 사회에 진출한 공장 노동자라도 국영은행에서 20년 상환 담보 대출을 받아 넘쳐나는 집을 사게 되었다.

그렇게 모두가 행복해지는 듯했고, 14억 인민들은 보시라이 주석 덕에 이제 모든 중국인들이 부유해지게 되었다며 보시라이와 공산당의 만세가를 부르는 듯했다.

하지만 머지않아,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눈앞에 앞둔 시점에서 붕괴가 시작되었다.

결국, 마침내 폭풍우가 닥쳐오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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