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애하는 수령동지 248화
89장. 바보와 헛똑똑이
이 경악할 선언은 곧 방송과 인터넷을 타고 한국 전역에 퍼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평양의 조선로동당 수뇌부와 정환의 귀에도 당연히 들어갔다.
하지만 정작 그 소식을 들은 정환의 첫 반응은 ‘이 헛똑똑이들은 공부도 많이 한 동무들이 왜 알아서 죽을 길로 걸어 들어가나’라고 피식 웃는 것이었다.
“동지들, 너무 당황할 거 없네. 일개 사고에 불과하니까. 이건.”
“사고…… 말씀입네까?”
“그렇네, 사고. 내지는 해프닝.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지.”
뭔가 이 중차대한 사태를 평가 절하하는 듯한 정환의 말에 (급하게 연길에서 돌아온) 외무상 김용건은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건 급하게 소집된 당 중앙위 정치국 회의의 다른 모든 일원들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하지만, 총서기 동지, 이건 대단히 긴급한 사태가 아닐 수 없지 않습네까? 그 학총련 잔당 아새끼들을 진작에 때려잡았다면…….”
“이번 일 이후로는 그렇게 할 것이고, 또 그렇게 될 걸세. 이제 당은 저 철없는 자들에게 외환유치(外患誘致)의 죄라는 누가 보나 명백한 중형 선고 사유를 가지고 있으니까. 이걸로 이 공화국에서 학총련은, 양지에서나 음지에서나 확실하게 재기가 불가능하게 되었네. 아니, 학총련 뿐만이 아니라 로동당의 일당 우월적 지위를 위협하는 모든 세력은 다 말일세.”
“하기야 벌써부터 인터네트나 어디에서나 인민들 여론이 대단히 안 좋아요. 저놈들 미친 거 아니냐고 성토하는 댓글이 유니온 뉴스 망 추천수 1위를 차지하고 있으니까요. 그나마 온건한 댓글이 남조선 정부는 북남관계를 고려해서라도 즉각 저 반역 패당들을 공화국으로 송환하라는 내용이에요. 딱히 저희 선전선동부에서 별 손을 안 댔는데도 그럴 지경이니…….”
“자기들 목을 자기가 조인 셈이지. 원래 이 조선 민족은 남이나 북이나 집안싸움에 외세를 끌어들이는 것 자체를 싫어하네. 역사적인 트라우마 때문이겠지만…….”
뭔가 씁쓸하게 중얼거리는 정환의 말과는 반대로, 현영숙의 입에 의해 나온 ‘여론’을 들은 중앙위원회 간부들은 냉정하게 찬찬히 생각해 보니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는 표정으로 조금씩 고개를 주억거렸다.
‘외국 군대를 끌어와서 자국 체제를 전복시켜 달라’는 요청은 해당 국가가 정말로 심각하게 답이 없는 상태, (그러니까 김일성-김정일 시대의 북조선)이면 몰라도 어느 나라 국민들에게나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촉발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민주주의니 조선로동당 일당 영도체제니 별 관심 없는 일반 북조선 인민들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아무리 현 김정환 체제에 어느 정도 반감을 가지고 있어도 현재 이 학총련 잔당들의 행위는 그냥 매국(賣國)이란 두 글자로 설명되는 행위 외의 그 어떤 것도 아니었다.
”현 부장 동지가 확인시켜 준 대로, 이번 일은 그냥 해프닝이 맞아. 적어도 우리 공화국에게는 그렇지. 남조선 동무들에게는 이야기가 다르지만.”
“그 말씀은……?”
“말해보게, 김용건 동무. 현재 남조선과 우리 공화국의 관계를 고려할 때, 현재 남조선 정부…… 그러니까 더 정확히는 이현창 대통령과 여당인 새나라당 측에서 이 철 없고 무지한 자들의 제안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은 얼마나 되나?”
“기거야 0에 수렴합네다. 이번 일 만큼은 장담 드릴 수 있습네다.”
웬만해서는 장담이라는 걸 잘 안 하는 신중한 성격의 김용건이 이렇게 딱 잘라 말하는 경우는 드물었기에, 곧 테이블의 모든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그 근거는?”
“일단 예전과는 달리 남조선 보수파, 특히 새나라 당은 몇 년간 지속적으로 저희와 공조 및 경제적 교류를 강조해 왔습네다. 게다가 지금 이현창 대통령의 임기가 올해 말까지인데…… 지금 현 상황에서 학총련 잔당들을 보듬어 저희 공화국과 심각한 마찰을 빚게 되면 본인의 최대 업적 중 하나인 KTX, 남북 철도 합작 사업 건이 바로 날아가지 않갔습네까?”
“그렇지. 사실 그걸 빼더라도 새나라당, 이현창 대통령 본인들 정치적 성향부터가 이런 짓을 별로 좋게 볼 거 같지도 않고.”
“그 말씀대로입네다. 하지만 제가 이 문제를 심각하게 본 이유는 현 남조선 야당, 민주당 쪽이디요.”
조금 전 이현창과 새나라당이 학총련 잔당의 호소에 진지하게 응답할 가능성은 0이라고 자신하던 때와는 달리, 김용건의 표정이 약간 심각해졌다.
솔직히 말하자면 김용건의 견지에서 봤을 때, 학총련의 성명 내용을 듣자마자 그가 처음 예상했던 한국 주류 정치권의 반응은 냉대 혹은 무관심이었다.
그리고 내심 그는 자신이 아니라 어떤 경력 있는 외교관에게 물어봐도 비슷한 대답을 할 거라고 확신에 가깝게 자신하고 있었다.
북조선 내에서 소수의 범법자일 뿐, 인민들의 심정적 지지나마 뚜렷하게 받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주체사상 추종자들과 손잡았다는 이야기까지 들리는 학총련 잔당인 만큼, 아무리 한국의 체제가 민주주의라고 해도 애써 도와줘야 할 이유는 전무했다.
게다가 북남이 어느 때보다도 경제적으로 밀접하게 연관되고 그 경제 교류의 성과 중 하나인 남북 철도 합작이 현 이현창 대통령의 최대 치적이다
그런데, 고작 망명자 몇 명 돕겠다고 북조선과의 관계를 위태롭게 하는 건 누가 봐도 현실 파악을 심하게 못 하는 짓 아닌가.
물론 그렇다고 외면을 해버리면 독재 정권에 맞서서 민주주의 투쟁하다가 탄압을 당한 사람들을 모른 척 한 꼴이니 국민들 일부에게 욕이야 좀 먹겠지만, 친애하는 동포, 남조선 인민들 이 경제적 이득보다 인류애와 민주주의를 우선하라고 현 정권을 압박할 것 같지는 않았다.
물론 한때 한국 국민들이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 피 흘리며 투쟁하기는 했지만, 그건 자기 나라 민주주의 이야기지 남의 나라 인민들, 그것도 반세기 동안 축적된 적대감이 아직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북한인들의 민주주의까지 걱정해 주지는 않을 것이다.
한국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 어디라도 이건 마찬가지인 게, 국제 사회는 기본적으로 힘에 의해 돌아가고 유지된다.
달라이 라마와 탄압받는 티베트인, 위구르인들을 위해 메이드 인 차이나(Made In China)를 일부러 기피하는 사람들은 찾아보기 힘들다.
사우디와 이란의 전제 군주정, 신정 통치에 항의하겠답시고 중동산 원유를 수입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 사람은 현실을 외면한 바보 소리를 들을 것이다.
이런 현실에서 약자에게 냉정하다 못해 야박한 국제 외교가의 전례를 생각해 본다면, 한국 정부에 도움을 호소한 학총련의 망명자들은 합리적으로 생각해 볼 때 한국 정부에게도 별다른 외교적 가치가 없었다.
그래서 처음 학총련 망명자들이 일부 민주당계 인사들의 지원을 받아 성명을 발표했다고 들었을 때, 김용건으로서는 매우 놀라우면서도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현실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이유로는, 민주당 측에서 올해 말에 있을 대통령 선거 전략용으로 이 망명 그루빠들을 리용하고 있다는 것입네다.
”이용이라? 구체적으로 어떻게 말인가?“
”현재 남조선 민주당의 주류는 운동권이라 불리는, 남조선 군부 대통령들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며 본인들의 정치 경력을 쌓아온 인사들입네다. 게다가 민주당은 총서기 동지께서 집권하고 공화국 경제개발을 위하여 남조선 대기업들과 협력하는 로선을 천명하신 후에 우리 공화국을 항상 고깝게 보아오지 않았습네까? 본인들과 동병상련도 느껴지겠다, 이 기회에 남조선 인민들에게 민주주의를 쟁취했다는 본인들의 업적을 부각시켜 지지층을 결집하고 …….”
“아니, 그것만은 아닐세. 김 총리의 그 의견도 1차적으로는 맞지만 내가 보기에 민주당은, 그리고 한국의 운동권 세력들은 저 가엽고 불쌍한 학총련 헛똑똑이 동무들보다는 훨씬 정치적 역량과 단수가 높은 자들이야. 하기야 그러니까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이겠지만.”
“……???”
정환의 부정에 김용건은, 그리고 다른 간부들은 이번에도 ‘?’ 하는 물음표를 얼굴에 띄우며 의아해하였다.
하기야 민주당 내 여러 계파 갈등, 무엇보다 현 민주당 총재가 얼마나 (자기 당 내부에서도) 적이 많은 사람인지 잘 모를 그들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다고 정환은 생각했다.
“생각해 보게. 저번 남조선 총선에서 북남 철도 연결 관련하여 민주당이 우리 공화국에 날을 세웠던 것은, 물론 사상의 차이점도 있었지만 근본적으로는 경제 문제였네. 그런데 거기까지 생각할 줄 아는 자들이 저 학총련 동무들을 편들어주면 별 실익도 없이 우리와 관계만 나빠질 거라는 걸 정말로 몰랐으리라 생각하나?”
“기거야 현 이 대통령하고 저들 민주당하고는 사이가 나쁘니 어떻게 해서든…….”
“북남 고속철 연결 제의가 나왔을 당시에도 민주당 의원들 기반 지역이 아닌 전체 남조선 여론을 보면 찬성이 더 많았다는 점을 잊지 말게. 대선은 남조선 인민 5천만을 데리고 하는 거지 특정 지역에서만 치르는 게 아니야. 그런데 그 국민 대다수가 찬성하는 고속철 사업을 바로 망쳐버릴 수도 있는 일을 굳이 이렇게 확대시키는 이유가 뭐겠나?”
“아, 알갔습네다. 안 그래도 민주당 내에서 현 총재와 그 주변 인물들, 그리고 그 그루빠에 속하지 않은 자들 사이에 내부 분규가 심각하다고 들기도 했디요. 원래 새나라당에 반대하는 자들이면 전부 이리저리 모아서 뭉친 잡탕 당 아닙네까.”
제일 먼저 눈치를 챈 것은 장성택이었다.
간부들 중 가장 오래 정치를 해봐서인지 정치의 생리에 가장 밝은 그는 지금 학총련 망명자들의 편을 든 민주당 몇몇 의원들의 노림수가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기러고 보니 오늘, 민주당 몇몇 의원들이 자기들 총재에게 이 학총련 아새끼들에 대한 지지성명을 공식적으로 당론(黨論)으로 채택해 달라고 인터뷰했다는 남조선 신문 기사를 읽었습네다. 겉으로는 민주당의 당론이지만 실질적으로 총재가 그 성명의 면이 됨을 생각해 본다면…….”
지난번 총선 당시 민주당 총재 노윤현은 민주당의 당수로서 북남 고속철 연결에 대해, 나아가 북조선의 1인 독재 체제에 대해 강경한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일단 본인이 한평생 신군부 독재에 반대해 온 민주화 인사이기도 했고, 당시에는 민주당 지역 기반인 호남의 일자리가 고속철 사업으로 인해 대량으로 유출될 게 뻔한 상황이라 이러한 발언과 행보들이 선거에서나 당내에서나 유리하게 작용했다.
그런데 지역의 이해를 대변하면 표를 받을 수 있는 총선이 아니라 국민들 과반수의 지지를 받아야 하는 대선은 이야기가 좀 다르다.
정환이 말했듯이 북남 고속철 사업, 나아가 북남의 경제적 교류는 한국 국민 과반수가 찬성하는 일인데, 이를 파투낸다는 것은 곧 표를 내다 버리는 짓이며, 해당 인사는 누구든 최소한 이번 대선에서 대통령이 될 꿈은 접어야 한다.
독재에 항거한 사람들이 뭉쳤다는 당의 정체성으로 보나, 주요 지지층의 성향으로 보나, 이 망명자들을 그냥 외면하면 말 그대로 자가당착인데, 총대를 메고 카메라 앞에 나서는 사람은 최대 정치 생명의 위기, 최소한 이번 대선은 그냥 포기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김정환 살인 독재에 강경하게 반대해 왔던 민주화 운동권 출신 당 총재가, 지금 와서 그 살인 독재에 쫓겨 도움을 애걸하는 망명자들을 지지해 달라는 요청에 모른 척한다면, 지지진영에서나 반대파에서나 엄청난 비난을 당할 게 분명했다.
지지진영에서는 대통령 되겠다고 민주주의의 가치관을 배반한 배신자가, 반대파에게는 안 그래도 미웠는데 이제는 자기가 한 말도 밥 먹듯이 뒤집는 가증스러운 위선자가 되어버린다.
이제까지 민주당이 취해온 정치적 스탠스, 반북, 반독재, 민주주의의 연속성을 고려해 본다면, 누군가 한 명이 나서서 ‘폭탄 제거반’,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희생양이 되어줘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민주당 내에서 그 총대를 멜 사람, 희생양으로 지목된 사람은 안 그래도 지난 몇 년간 명망이 소모돼서 정치적 유통기한이 지난, 게다가 안 그래도 정적이 많은 현 총재 노윤현이 분명했다.
“이 움직임의 최종 목표는 현 대통령 이현창이 아닐세. 민주당 총재 노윤현이지. 민주당 내에서 자기들 총재를 대선에 못 나오게 하려는 세력이 있음이 분명하네. 정치적으로 아무도 환영하지 않는 폭탄을 안겨주겠다 그 말일세.”
* * *
“대통령님, 민주당 노윤현 총재님이 오셨습니다.”
“들어오시라 하게.”
그 시각 평양에서 저 멀리 떨어진 서울, 주로 비공식 접견 장소로 많이 쓰이는 청와대 상춘재(常春齋)에서는 정환과 비슷한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사람들은 당연히, 현 민주당 총재 노윤현과 현 한국 대통령 이현창이었다.
청와대 직원들의 안내를 받아 전통 한옥 양식의 상춘재로 들어온 민주당의 노윤현 총재의 첫 질문은 의외로 좀 뜬금없는 것이었다.
“대통령‘님’이라, 거참 마음에 드는군요. 제가 알기로는 군부 마지막 대통령 시절에 ‘각하(閣下)’ 호칭을 없애버리고서도 박이삼 대통령님 시절까지만 해도 내부적으로는 각하 호칭을 썼다고 들었는데…….”
“마음에 안 드십니까? 노 총재님은 꽤 소탈한 성격으로 유명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
”그건 아니지만, 솔직히 말해서 이 대통령님이 임기 끝나기 전에 어떻게 해서든 각하 호칭을 부활시킬 거라고 씹어대는 호사가들 말을 들었을 때는 세간에 알려져 있는 이 대통령님 성정에 내심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는데, 좀 의외입니다.”
“아직 제 임기 몇 달 더 남았으니 너무 속단은 않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나저나, 이번에 어려운 지경에 처하셨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