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애하는 수령동지 241화
“……!?!?”
악을 쓰던 이번에야말로 리경수는 다시금 경악해서 입을 다물지 않을 수 없었다.
아까는 분노가 두려움을 이겼지만, 이번에는 경악이 분노를 이겨 버렸다.
처음에 리경수는 정환이 자신을 우롱한다고 생각했다.
“혹시라도 죽이기 전에 안심시키려는 거이면…….”
“어차피 이곳의 수감자들은 빠른 시일 내에 전부 풀어줄 계획이었네. 이미 전향이 완료됐으니 인민들 세금을 써가면서 비싼 밥을 더 먹여줄 필요가 없지. 그리고 총서기인 내가 뭐 득 볼 거 있다고 죽이기로 결정한 사람한테 그런 짓을 하나? 그냥 죽이면 되는데 말이야.”
제법 끔찍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총서기에게 평소의 리경수라면 소름이 끼칠 법도 했지만, 이내 총서기가 몸을 돌리며 이렇게 말하자 곧 그의 머리는 온통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찼다.
바로 밖에 두고 온 가족들 생각이었다.
“아직 양친이 모두 살아 있고 형제자매들도 있다고 들었네만, 그들이 보고 싶지 않나?”
“……!!! 정말…… 나를 풀어줄 생각이오?”
“물론 본인 의사를 존중해서 더 있고 싶다면 더 있어도 되네. 뭐 지금은 나가도 금방 다시 제 발로 돌아올 수도 있고. 자네를 위해서라도 그럴 일이 안 벌어지기만을 진심으로 기원하겠지만.”
“……그거이 대체 무슨 뜻이오?”
도무지 뜻 모를 소리에 리경수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정환은 손을 내저었다.
“모른다면 할 수 없고. 하여튼 나는 이만 가봐야겠군. 요즘 미국 실리콘 밸리 쪽 일이 바쁘게 돌아가서 여기 올 시간을 내는 것도 꽤 고역이었어. 미국 서부 시간대에 있는 인간들과 회의하려니 잠 시간이 줄어들어서 원…….”
이제 리경수에서는 관심이 떠났다는 듯 총서기는 하암 하고 하품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혼자 의자에 남겨져 방금 총서기와의 대화를 곱씹어보는 리경수를 남겨두고 정환이 쏜살같이 문으로 향하자 왠지 갑자기 다급해진 리경수는 방금 전 자신이 그를 폭군에 독재자라고 불렀던 것도 잊고 정환을 소리쳐 불렀다.
어느 쪽을 선택하던, 그리고 김정환이 어떤 사람이건 앞으로 자기 인생에서 이 사람하고 이렇게 길게 독대해 볼 기회가 또 몇 번이나 더 오겠느냐 말이다.
“저, 저기……!! 초, 총서기 동지!”
“뭔가?”
“음…… 그거이…… 음…… 어…….”
막상 정환이 멈춰 서서 자신을 돌아보자 리경수는 이 방에 처음 들어온 순간처럼 다시 머리가 새하얘졌다.
결국 땀까지 삐질삐질 흘리던 그의 입에서 나온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나 같은 반동에게 이렇게 줄곧 후의를 베풀어주는 이유가 뭐요? 애초에, 애초에 나 같은 일개 반동과 총서기가 독대를 할 이유도 없지 않소?”
“우선 첫 번째 이유는 아까도 말했듯이 자네 한 명 더 풀어주던 학총련이 아무리 발악하던 그 근본적인 한계가 명확하기 때문이고…… 두 번째 이유로 말할 것 같으면…… 흠…….”
잠시 이마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뭔가를 골똘히 생각해 보던 정환이 내놓은 답은, 의외로 정말로 우스운 것이었다.
“내 친구하고 이름이 같아서. 오래전에 헤어진 친구였는데 동무와 이름이 같았네. 그러고 보니 국립대 출신에 엘리트라는 것도 비슷하군. 뭐 북이나 남이나 흔한 이름이니 별로 신기한 건 아니지만 말이야. 하여간에 잘 생각해 보고 결정을 내리게. 그럼 이만.”
* * *
“잘 가시오, 리경수 동무. 호상 간에 또 볼일 없도록 합시다.”
총서기와의 독대 후 며칠 동안 고민한 끝에, 리경수는 결국 관리소를 나가는 것을 선택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총서기의 말대로 관리소 측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데리고 올 때와 똑같은 방법으로 호송해서 평양역 근처에다 떨궈주었다.
안대가 벗겨지자 리경수는 잠시 현 상황이 믿기지 않아 꿈에서 깨어난 듯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평양 시내 사거리를 휘휘 둘러보았다.
그리고 이내 그는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허허…… 이거 참 허탈하구만 기래, 대체 그동안 나는 뭘 위해서…….”
자신이 공안에 잡혀갈 때와 바뀐 것이 단 한 가지도 없었다.
여전히 공민들은 바쁘게 하루의 생업에 종사하기 위하여 이제는 인민의 필수품이 되어버린 손전화를 들고 이곳저곳 어딘가로 급히 향하고 있었고, 근처에는 평양역사 복합 쇼핑몰 리모델링 후 재개장을 알리는 유인물 등 광고 전단지만 휘날리고 있었다.
어딜 봐도 나름 자신의 목숨을 걸었다고 생각한 희생이 정작 현실사회 일반에 있어 바꾼 게 전혀 없다는 생각에 잠시 씁쓸해졌지만, 그때 리경수의 눈에 들어오는 한 가지가 있었다.
“이거이…… 나구만.”
그것은 노란색 바탕에 피를 연상하게 하는 붉고 선명한 글씨로 ‘죽은 리경수 동지의 희생을 기리며 - 살인조직 공안부를 운영하고 비호하는 조선로동당은 자폭하라!’라는 과격한 문구에 피투성이가 된 채로 공안에게 끌려가는 남자의 사진이 박힌 조악한 만듦새의 전단지였다.
물론 그 남자는 자신, 리경수였고, 전단지는 자신의 동지, 학총련에서 만들어 뿌린 것인 듯했다.
그런데 자신 본인이 죽을 각오를 하고 연출한 희생의 현장을 인쇄한 전단지를 보는 사람치고 정작 리경수의 이 전단지에 대한 감상은 의외로 담백하기 그지없었다.
‘예전에 내 손으로 직접 만들 때는 잘 몰랐는데 이제 보니 내용은 별개로 너무 과격하게 만들었어. 손전화나 운동화도 가격 이전에 디자인을 중시하는 시대에 일반 공민들, 특히 어린 동무들이 보면 자세한 내용을 읽기도 전에 거부감부터 들 거 같구만, 기래…….’
왜인지는 몰라도 학총련에서 투쟁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더라면 보이지 않았을, 혹은 눈에는 보였지만 마음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한걸음 물러서서 보니 시야에 들어오는 듯했다.
아마 관리소에서 잠시 사상이니 투쟁이니 하는 것에서 잠시 동떨어진 시간을 보내다 보니 눈꺼풀에서 어떤 비늘이 떨어져 나간 느낌이었다.
동지들을 만나서 회포를 풀고 나면 일반 공민들의 시선을 의식해서라도 투쟁 노선을 조금은 유화적으로, 최소한 생활 밀착형으로 바꿔보자는 조언을 해봐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학총련이라는 조직이 조금이라도 오래 살아남을 것이라고 리경수는 생각하며, 근처의 택시를 잡아타고 가장 먼저 가족이 기다리고 있을 집으로 향했다.
“오마니, 접네다. 경수입네다! 그동안 건강하셨습네까?”
“……!!! 너……!!! 너……!!! 지금 내가 보는 거이 정말로……!!!”
“저 맞습네다, 오마니, 진짜 경수 맞아요.”
“아이고, 아이고오!!! 경수야! 아이고 경수야! 너 어떻게 살아 돌아온 거이니! 어디 한번, 얼굴이나 한번 만져보자! 어디 몸 다친 데 없니?”
죽은 게 분명하다고 알려진, 그리고 그들 자신도 내심 최소한 살아서는 못 볼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던 아들이 돌아오자 가족들의 첫 반응은 당연히 경악이었다.
눈물을 흘리며 정말 자신의 아들이 돌아온 게 맞는지 그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으려는 아버지와 어머니, 형제자매들을 리경수가 달래는 데에는 한참이 걸렸다.
그리고 마침내 그날 저녁이 되어서야 리경수는 가족들의 만류와 우려를 뿌리치고 다음으로 자신이 찾아가려 했던 사람들, 같은 학총련의 투쟁 동지들을 찾아가기 위해 몸을 빼낼 수 있었다.
“의장 동무! 동무들! 나요! 학총련 대의원 리경수가 돌아왔소! 23호 관리소에 갔던 너희들의 동무, 리경수가 안 죽고 여기 살아 돌아왔다!”
“……!!! 경수? 아, 아니, 경수라면…… 설마……!!”
“기래! 그 경수 맞아! 그간 다들 공안들 안 마주치고 잘 지냈디? 간만에 회포나 풀지 않갔어? 왜들 그렇게 딴 사람 보는 면들이야?”
“…….맞네! 기러고 보니 맞아! 경수야! 경수다! 어서 모두 모이지들 않고 뭐하고 있간? 우리의 동지, 리경수가 멀쩡히 살아 돌아왔다! 경수 동무! 정말 괜찮은 거 맞아? 혹시 옷 안쪽은 피가 흥건한 거 아이지?”
이내 작고 곳곳에 아무렇게나 널린 플래카드와 각목으로 너저분한 학총련 본부는 흥분과 눈물, 감격의 도가니가 되어 시끄럽게 달구어졌다.
곧 오늘도 밖에 나가서 시위에 열중하던 동지들이 전부 돌아오고, 이내 그들은 술잔과 함께 그동안 서로의 안부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기래, 나 잡혀 들어가고 나서 투쟁은 좀 어떻게 되어가고 있어? 내가 개죽음한 것은 아니디?”
“잘 풀려가고 있디! 네가 실려 간 사진이 외신에 뜬 이후로 요 몇 달 새 이전보다 외신들의 취재 요청이나 인터뷰가 몇 배로 늘었어! 이제 조금만 있으면 미국이나 해외의 비정부 기구 같은 곳에 인권 상황을 폭로해서 이 공화국의 살인 독재를 종식시키는 거이도 꿈이 아니야!”
“…….”
서로의 생사를 확인하고 무사 귀환을 축하하는 술이 한 순배 돌자, 의장을 비롯한 그의 동지들이 흥분에 가득 차서 전과를 자랑하듯 털어놓은 말이었다.
하지만 관리소에서 총서기와 나눈 대화 때문이었을까.
이전 같으면 ‘더욱 용력 분투하여 투쟁의 불꽃을 피워 나가자!’라고 맞장구쳤을 리경수는, 그런 동지들의 말에 이전처럼 순수하게 기뻐할 수 없었다.
“기래, 그거이…… 참 잘됐구만…….”
“모두 리경수 동지 자네 덕분이야! 하여간에 관리소 이야기 좀 해봐! 정말 그곳에서 반동들의 피를 짜내고 살을 쥐어뜯는 고문을 당했나? 대체 어떻게 했길래 그걸 모두 이겨내고 여기까지 이렇게 돌아올 수 있었던 거이야?”
누군가가 그렇게 질문하자 이내 왁자지껄하던 술자리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그것만 봐도 리경수는 이제까지 그들, 학총련 동지들이 전부 그 질문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느닷없이 자리의 모든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자 리경수는 잠시 갈등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안에서 있었던 일을 전부 이야기해야 하나? 아니, 이야기한다고 해도 이 동무들 중 몇이나 그 말을 믿을까?’
좌중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받으면서도 리경수는 이런 고민에 빠져 한동안 아무 말도 못 하고 입을 우물거리기만 했다.
23호 관리소가 자신이 생각하던 그런 곳이 아니었다는 것 이전에, 그곳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말하면 이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던 것이었다.
다른 모든 사실은 둘째치고, 자신이 그 관리소에서 총서기와 독대를 했다고 하면 ‘고문을 너무 받다 보니 돌아버려서 풀어준 거 아닌가?’ 하는 의심을 산다고 해도 결코 이상할 게 없었다.
사실 당사자인 자신만 해도 직접 보고도 아직까지 잘 믿기지 않는 일인데 말이다.
“얼른 말 안 하고 뭐 기렇게 꾸물거리나? 아차, 혹시 안에서 너무 혹독한 일을 당해서 털어놓기 힘든 거이면 기거는 우리가 잘못…….”
“아니, 그거이 아니야. 내 말은…… 후우…….”
결국 리경수는 눈을 질끈 감고 정직하게 모든 것을 털어놓기로 마음먹었다.
동지들이 자신의 말 중 얼마나 믿을지는 의문이지만, 어차피 그곳에서 다른 수감자들도 곧 풀려날 예정이라니 시간이 지나면 자신이 진실을 말했음이 차차 밝혀질 것이다.
게다가, 사실 리경수가 진정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은 그들 학총련에 근본적인 오류가 있었음을, 이제라도 투쟁 로선을 바꾸지 않으면 더는 조직 자체가 생존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결국 그도 관리소 안에서 다른 사람들만큼은 아니어도 바뀌기는 바뀐 것이다.
“동지들, 들어보라우, 내가 그 23호 관리소에서 참으로 보고 듣고 느낀 게 많았지만 가장 먼저 이야기하고 싶은 거는…… 내가 그 안에서 총서기를 만났어. 알갔어?”
“……뭐?”
“기래, 정신 나간 소리처럼 들리는 건 알디. 기런데 내 말은 사실이야. 기것도 그냥 만난 거이 아니라 무려 독대, 일대일로 나랑 대화를 해서 우리 투쟁은 희망이 없다고 논박을 주고받았다 이 말이야. 사실 그 점에 대해서 나도 느낀 바가 컸는데…… 이제는 우리 학총련도 좀 변해야 할 것 같디.”
“총서기, 그러니까 김정환이랑 직접 대화를 했다고? 경수 동무 네가?”
“기렇다니까! 그거이 사실 만나보니까 의외로 말이 통하는 사람이야. 우리들, 그러니까 관리소 들어가기 전 나도 그랬지만 우리 생각하고는 달리 총서기는 그저 악랄 독재자만은 아니다 이 말이라우. 차분히 대화를…… 물론 끝까지 차분하지는 않았지만, 하여간 차분히 앉아서 대화를 해보면 이 공화국과 인민의 번영을 위하여 나름의 소신과 헌신이 있는 사람이다, 기건 분명하다는 거이 내 생각이야. ……내 말 믿갔어?”
“…….”
리경수의 이 말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테이블의 분위기가 조용히, 하지만 확연하게 바뀌었다.
방금 전 총서기와의 대화를 꺼내던 리경수가 잠시 망각한 사실이 있었다.
그건 바로 자신의 모습이 지금 학총련 동지들에게 어떻게 비칠지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고려해 보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학총련에서 투쟁의 깃발을 세운 이래 리경수와 그 동무들의 꼴은 대부분 말끔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루 종일 깃발을 들고 구호를 외치느라 목은 쉬고, 셔츠와 바지는 항상 밑단을 동여매고, 머리카락은 항상 땀과 먼지에 절어 있었으며 공안부와 애국전선과의 혈투로 인해 항상 불안해 보이는 눈에는 거의 대부분 날카롭게 핏발이 서 있었다.
그런데 몇 달간 23호 관리소에서 충분한 운동과 영양가 있는 식사, 규칙적인 수면 시간을 누리며 (최소한 육체적으로는) 호강한 리경수는 하나같이 꾀죄죄한 몰골을 한 동지들과는 달리 체중까지 좀 불어나 있었다.
사실 처음 리경수가 악명 높은 23호 관리소에 끌려갔을 때만 해도 그가 돌아오리라고는, 최소한 사지 멀쩡하게 두 발로 걸어 돌아오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학총련에서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런데 몇 달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었거나 최소 반신불수가 되어 있을 게 확실하다고 추측되던 전 동지가 말짱하게, 얼굴에는 혈색이 발그레하고 살까지 붙어서 돌아오자 겉으로 말은 안 해도 그들 대부분은 어딘지 모를 위화감, 그리고 의심을 느끼고 있던 와중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예상을 완전히 뒤집고 멀끔하게 돌아온 자신들의 동무가 자리에 앉아서 꺼낸 말이 ‘총서기는 생각보다 훌륭한 사람이고 공화국에 필요한 존재’, ‘우리 학총련은 이제 변해야 한다’ 따위였으니 그들 입장에서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이윽고 그 결론이 최상석에 앉은 의장의 입을 통하여 나온 음산한 목소리로 구체화되었다.
“경수 동무…… 너…… 변절한 거이지? 기렇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