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애하는 수령동지 240화
“…….”
리경수는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
30초 동안이나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자신이 혐오하고 두려워했던, 하지만 내심 한 번쯤 만나봤으면 하고 은밀하게 바랐던 사람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럼 이제 다른 동무들은 자리 좀 비켜주게.”
“총서기 동지. 기건…….”
“괜찮네. 뭘 걱정하는지는 알지만, 내가 여기서 저 동무 손에 죽기라도 하면 그건 저 동무가 가장 바라지 않는 일을 해주는 거나 다름없으니까. 저 동무도 그 정도로 골이 나빠 보이지는 않는군.”
“……기럼 문밖에서 바로 대기하고 있갔습네다. 필요하시면 언제든 불러주십시오.”
마지막까지 뭔가 걸리는 듯한 관리소장과 다른 간부들이 나가자 드디어 방 안에는 리경수와 정환 둘만이 남았다.
“……흠, 그렇게 말 안 하고 서 있기만 하니 진짜로 내 이마에 뿔이 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닐까 슬슬 의심이 드는데. 이제 좀 앉지 그러나.”
“……방금 그 말은 무슨 뜻입네까? 가장 바라지 않는 일이라니?”
이 말을 한 직후, 자기 입으로 뱉어놓고도 너무 불손하고 퉁명스럽게 들려서 내심 흠칫한 리경수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무리 그동안 자기 입이 부르트도록 타도와 실각을 외쳤던 독재자라고 하지만 지금 그의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은 지금의 공화국을 상징하는 최고 권력자 아닌가.
하지만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으로는 그렇게 분노해 왔던 독재자 김정환이 앞에 서자마자 자기도 모르게 주눅이 들었음을 깨닫고 스스로에 대한 분노가 솟구치는 것도 사실이었다.
정작 정환 본인은 리경수의 무례한 말투 따위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지만.
“동무들 본인이 쓴 전법인데 설명을 또 해줘야 하나? 자네가 여기서 갑자기 달려들어 내 목구멍에 가위라도 꽂아 넣으면 나는 순교자가 될 거라는 의미일세. 인민들은 거리에 나와 통곡하며 내 이름을 부르짖고 김일성 광장에는 내 초상화가 걸리고 말이야. 아니, 지금 민심으로 판단해 보면 이 기회에 아예 김일성 광장이 아니라 김정환 광장으로 이름이 바뀔지도 모르지!”
“…….”
“……물론 내 모든 과오들과 실수, 인권탄압이나 독재 행각은 전부 잊히거나 미화될 테고, 대약진운동이나 문혁 안 한 마오쩌둥이 되는 거랄까, 원래 사람은 죽으면 모두 미화되거든. 설마 그걸 바라지는 않겠지?”
“……그래도 본인이 인민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억압하는 독재자라는 건 인지하시는 모양이군요.”
솔직히 리경수에게는 의외가 아닐 수 없었다.
자신은 명백하게 투명한 (관권) 선거로 선출된 적법한 국가수반이라니 하는 궤변을 늘어놓을 줄 알았는데 깔끔하게 인정하다니 말이다.
하지만 그 후에 정환이 늘어놓은 말은 잠시 가라앉았던 그의 분노를 다시 자극했다.
“원래 민주주의의 나무는 피를 먹고 자라거든. 그러니 그 나무의 성장을 억압하는 방법은 간단하지. 피를 안 흘리면 되는 거야! 물을 안 주는데 식물이 어떻게 자라나나? 그런 의미에서 소감 한번 들어보고 싶은데. 여기서…… 이 23호 관리소에서 보고 들은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지?”
“……총서기 동지의 체제가 반드시 타도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더더욱 굳어졌소.”
“그래?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데?”
뻔뻔스럽기 그지없이 이렇게 말하는 정환에게 리경수가 반항심과 분노에 가득 차 그렇게 으르렁거리듯 대답하자 정환은 다시 뻔뻔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정작 리경수는 그 질문을 듣자마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동안 너무나 당연하게 알고 납득해 왔던 투쟁의 이유였는데, 막상 그 투쟁의 최종적 목표이자 대상이 눈앞에 나타나 묻자 잠깐 그의 머리가 하얘졌던 것이다.
‘내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리 투쟁하는 거지?’
잠시 그는 할 말을 잃고 망연자실하게 서 있었지만, 다행히 정환은 그가 답을 찾아낼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10초 정도 지난 후, 리경수의 입에서 나온 말은 다음과 같았다.
“총서기 동지가 이룩한 현 공화국의 체제는 인민의 자유를 억압하고 박탈하는 악(惡)한 체제기 때문이오.”
“잘못 알고 있군. 내 취임 이래 공화국 인민의 자유는 이전보다 비약적으로 늘어났네. 동무의 나이대를 고려해 볼 때 모를 수도 있지만, 이전 김정일 장군 시절에는 날이면 날마다 국가수반의 개인숭배 구절을 외우고, 해외여행은 고사하고 신의주에서 개성으로 이동할 때도 허가가 필요했던 거 알고 있나?”
“……외세 대자본과 영합하여 인민을 노예화하고…….”
“미안하지만 현시대에 자본의 노예가 되는 걸 완전히 피할 수 있는 국가의 인민은 대단히 극소수라네. 모든 문명의 이기를 포기하고 홀로 첩첩산중으로 들어가서 살면 모를까, 그래도 한 가지 나은 건 대자본 대기업은 소비자에게 편리를 제공해서 자신들에게 의지하도록 유도한다는 거지. 이전 공화국은 태어날 때부터 선택의 여지가 없이 전 인민이 노예였잖나. 게다가 동무 논리대로라면 자본주의가 공화국보다 고도화한 저 아래 남조선이나 미국의 인민들은 그냥 노예도 아니고 불가촉천민 수준이겠군?”
“……언론을 틀어쥐고 통제하지 않습네까! 표현의 자유뿐만이 아니라 집회시위의 자유도 없습네다!”
“그거라면 분명히 할 말이 없지만, 동무와 동무의 학총련이 언론 때문에 공화국 인민들에게 외면받은 건 아니지 않나? 그냥 내부 분규와 자체 모순 때문에 외면당한 거지. 물론 정부와 당의 입장만을 대변하는 사설이나 기사가 주를 이룬다는 건 맞지만, 최소한 동무의 학총련에 대해서만큼은 거짓말을 보도한 게 아니라는 건 동무 스스로가 잘 알지 않나? 주체계와 손잡아서 공화국 인민들의 반감을 산 게 설마 당의 언론통제 탓이라고 하지는 않겠지?”
“……크으으윽……!!!!”
이제 리경수의 마음속에 남아 있던 정환에 대한 근원 모를 두려움과 그가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자신을 다시 감옥에 처넣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완전히 사라졌다.
분노가 공포심을 이긴 것이다.
하지만 정환은 리경수가 그러거나 말거나 담담한 어조로 자기변호를 이어나갔다.
“그리고 집회시위의 자유에 대해서라면, 이제까지 공화국 내에서 최소한 학총련은 충분한, 아니, 사실 여타 민주주의 국가와 비교해도 평균 이상의 자유를 누렸네. 당장 동무가 여기 어떻게 들어오게 되었는지 한번 돌이켜 보도록. 자유민주주의의 총본산 미국에서도 공권력의 집행인에게 흉기로 상해 시도를 하는 건, 설령 미수에 그쳤다 하더라도 그 자리에서 총을 맞아 죽어도 할 말이 없는 행위야, 내 말이 틀렸나?”
“총서기 동지 당신 말은 순전히 궤변뿐이오!”
“그럴지도, 하지만 자네가 지적한 건 전부 핵심에서 비껴가 있네. 상기한 모든 악조건이 없다고 해도, 동무와 동무의 학총련이 이 투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은 자명하네. 왜 그런 줄 아나?”
“……??”
그때 처음으로 정환과 리경수의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서로 전혀 다른 길을 걸어온 독재자와 투사는 서로의 눈을 잠시 들여다봤지만, 이내 먼저 입을 연 것은 정환이었다.
“내 체제는, 나 총서기 김정환과 조선로동당이 20여 년간 정립하고 유지한 현 체제는 동무들 학총련이 생각하고 바라는 것처럼, 옳지 않은 절대악의 체제가 결코 아니기 때문이야.”
“그건 틀렸소, 왜냐하면…….”
“……그리고 두 번째 이유를 들자면, 로동당이 절대악이 아닌 것처럼 그에 맞서는 동무들 역시도 선(善)이 아니고 말이지! 동무들이 이제까지 목숨 걸며 해온 그 소위 투쟁이라는 것은…… 사실 지극히 자기만족적일세.”
“……뭐요?”
불신과 분노로 인해서 리경수의 말끝이 부르르 떨려 나왔다.
이제 눈앞의 사람이 마음만 먹으면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을 전부 아오지에 처넣고 죽을 때까지 못 나오게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은 아예 그의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방금 저 더러운 독재자가 자신의 근본을, 모든 것을, 피땀 흘려 쟁취해 온 투쟁의 나날을 부정하고 조롱하고 있는데 설령 이 관리소보다 백배 천배 지독한 곳에서 평생 썩는다고 해도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내가 틀린 말을 했나? 난 철학자가 아니라 성악설(性惡說)이니 성선설이니 그런 건 잘 모르지만, 이 세상에는 절대악도 절대선도 없다는 게 내 지론이거든. 선의 반대는 악이 아니라 또 다른 선일 수 있다면, 악에 반대해서 맞서 싸운다고 해서 그 존재가 무조건 선인 것은 아니지 않나? 당장 중국의 사례를 보게, 중국이라는 거대한 용에 맞서 싸우는 알 카에다가 과연 선의 세력인가?”
“지금 나와 내 동지들의 투쟁을 조롱하는 거이요! 이 더러운 폭군이! 당장 그 입 다물지 못하면…….”
“조용, 내가 내린 결론은 말이야, 학총련과 학총련이 얻어내고자 하는 체제는…… 인민을 보지 않는 체제라는 걸세, 정확히는 현실의 인민과 인민의 생활을 말이야. 동무들은 결국…… 그 모든 희생과 투쟁은 사실 궁극적으로 동무들 자신의 만족을 위한 것일세.”
“그거이 무슨 말도 안 되는……!!!”
하지만 리경수의 다음 문장은 끝맺어지지 못했다.
방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고함을 듣자마자 방문을 걷어차고 들어온 경호원과 간부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리경수를 바닥에 쓰러뜨리고 사지를 짓눌렀던 것이다.
정환은 옴짝달싹 못 한 채로 바닥에 고정되어 자신을 노려보는 리경수의 증오스러운 눈빛을 담담하게 내려다보며 하던 말을 이어나갔다.
“물론 솔직히 털어놓자면 나도 내 만족을 위해, 내가 이상으로 꿈꾸는 정치와 국가의 실현을 위해 총서기 노릇을 하고 있기는 하지. 하지만 동무들과 내 지향의 차이점은, 내 지향은 인민들 공공의 이익, 한마디로 잘 먹고 잘사는 공화국과 합치하는 반면, 동무들은 아니라는 걸세.”
“우리들이 어떤 위협을 무릅쓰고, 뭘 내던지고 투쟁을 해왔는지 알기는 하시오!!!”
“물론 동무들, 그중에서도 특히 리경수 동무 자네가 보기 드물게 의지가 굳은 별종이라는 점은 인정하지. 그리고 그러한 의지를 대단히 존중하기도 하고. 참고로 믿거나 말거나 이건 진심일세.”
정작 입으로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정환의 표정은 여전히 냉랭하기 그지없어서 전혀 존중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지만.
“하지만 모든 체제와 조직은 인간의 군집이며, 인간이 근본적으로 선도 악도 아닌 것처럼 인간이 만든 체제 역시도 다 나름의 장단점을 가지고 있어. 장점만 있는 체제가 없는 것처럼 단점만 있는 체제도 없네. 남조선에서 민주화가 성공했던 건, 유민중 같은 걸출한 인물이 단순히 민주화 투쟁뿐만 아니라 인민대중에게 군부 독재의 대안으로 선택받을 만한 필요 최소한의 역량을 갖췄기 때문일세. 그런데 지금 공화국에서 바로 민주주의를 도입하자고? 그것도 학총련이 주도해서?”
여기까지 말한 정환은 다시 무릎을 굽혀 고개를 숙이고는 바닥에서 버둥거리며 악을 쓰는 리경수와 눈을 맞췄다.
“굳이 옐친 치하에서의 러시아의 혼란상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인민들 스스로가 그걸 거부할걸. 한번 말해보게. 동무는 여기 들어오기 전 가장 최근의 주가지수를 기억하나? 조선 원 - 달러 환율은? 그 혁명이란 것으로 나를 몰아내고 정권을 잡으면 외국 자본을 전부 쫓아내고 어떤 경제 정책을 펼쳐 인민들을 먹여 살릴 건지 구상이라도 한번 해본 적 있나? 바로 그런 점에서 동무들의 투쟁이 현실과 동떨어졌으며 지극히 자기만족적이라는 걸세.”
“아가리 닥쳐!! 제에기! 이거이 당장 못 놓나!!! 이 썩어빠진 독재의 하수인들아!”
“한마디로 동무들은 인민들에게 우리를 대신할 대안이 될 수 없네. 인민들은 결코 바보가 아니야. 설령 내가, 그리고 조선로동당이 지금 당장 권력을 포기한다고 해도 그 대안세력으로 선택받을 수 없다는 것, 그게 바로 언론통제 어쩌고 하기 전에 동무들 학총련의 근본적인 한계고 약점이야. 인민들 그 자신! 이 공화국의 진짜 사람들이 정말로 무얼 바라고 무얼 두려워하는지 관심도 연구해 본 적도 없는데 허구한 날 외신에게 호소한다고 그놈의 민주 혁명이 가능하겠나?”
여기까지 말한 정환은 몸을 일으켜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도 뭐라 반박은 하지 못하는 리경수를 일별했다
그러고는 그를 잡아 누르고 있는 간부들에게 이렇게 지시했다.
“풀어주게.”
“하지만……!!! 총서기 동지, 이 간나 새끼가 방금 죽으려고 환장을…….”
당연히 간부들은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냐는 듯 정환을 멍하니 바라봤지만 정환의 태도는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방금 말했듯이 이 동무는 자기 목숨 하나 안 아까운 동무일세. 애초에 자기 목숨 아껴가며 사는 동무였으면 이 관리소에 들어왔겠나? 아까도 말했듯이, 그렇게 골이 나쁜 동무는 아니니까 풀어주게.”
결국 그들은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간신히 바닥에서 몸을 일으킨 리경수는 분노에 가득 차서 씨근덕거리며 말을 더듬다가도, 이내 완성된 문장을 만들어 정환에게 이렇게 항변할 수 있었다.
“지금 총서기 동지는 나를 설득하시려고 하는 거 같은데, 뭐라 말하건 나는 절대 전향하지 않으니 그렇게 아시오. 이 관리소에서 더 무슨 이상한 심리전을 리용해서 사람 골을 헤집어놔도…….”
“이 관리소에서 수감자들에게 시행하는 기법은 예전 남조선 해방전쟁 당시 중공군에서 붙잡은 국제련합군(UN군) 포로들을 전향시킬 때 사용하던 수법일세. 그런데 결국은 이 방법도 그 포로들을 완전히 전향시키지는 못했어. 하지만 이 관리소의 수감자들한테는 큰 효과가 있었네. 개인적으로 왜 그런 걸까 자주 생각해 봤는데, 내 결론이 뭐인 줄 아나?”
“……?”
“그 동무들은 믿을 준비가, 언제고 나와 체제에 투항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게 내 결론일세. 그런데 지금 보니 그 동무들과는 달리 리경수 동무 그쪽은 그 준비가 아직 안 된 거 같군. 원래는 보기 드물게 힘든 부류인 동무를 마지막으로 설득하기 위해 내가 직접 이 관리소까지 방문했지만…….”
“기래서, 뭐요? 결국은 전향 시도를 포기하고 나를 죽이겠다 이 말이오? 좋소, 그렇게 해주기를 간절히 청하는 바이오! 총서기 같은 사람이, 그리고 보나 마나겠지만 총서기 아들이나 딸이 대를 이어서 이 공화국을 대대손손 통치하는 꼴을 보느니 차라리 지금 당장 멱이 따여서 죽는 편이 백배 낫갔소!”
이렇게 고래고래 악을 쓰는 리경수에게 정환이 돌려준 답은 그야말로 방안의 모든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자네를 이곳에서 풀어주는 편이 좋을 거 같다는 게 내 결론이야.”